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인도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알게 모르게, 인도는 우리와 무척이나 친숙한 나라다. 우선 경제계 쪽에서 인도는 황금이 나오는 무주공산이다. 현재 인도내 가전제품 점유율 1위는 LG이고 자동차 점유율 2위는 현대다. 포스코는 얼마 전에 사상 최대 규모의 제철소 건립 계약을 체결했다. 경제신문들은 미국에서 흘러나온 '21세기는 친디아의 세기'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도는 어느새 중국과 동급의 가능성을 인정 받고 있다. 문화계 쪽에서 보면, 인도는 일종의 성지순례지다. 그곳은 동경의 대상이며 성찰의 요람이며 그럭저럭 수익성 좋은 기행기 생산의 좋은 소스이기도 하다. 깨달음을 얻으러 인도에 간 사람들은 깨달음을 통해 돈을 벌 방법을 안고 돌아오곤 했으니,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예부터 인도는 주는 것이 많은 나라였다.

하지만 정작 인도에 대해, 인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되는가. 그저 달콤한 잠언이나 중얼거리고 있는 명상서적이나 금광을 캐듯 소비자의 습성을 쑤시고 다니는 산업전선의 안테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인도는 괴상한 나라다. 인도는 간디를 배출한지 50년도 안되는 시간에 비밀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나라다.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으며 IT산업의 최첨단을 달리지만 국민의 30%는 문맹이다. 엄청난 수의 빈곤층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국민의 생활이 자리한 영토를 침식해 들어오는 해외기업들과의 계약서를 착착 잘도 써준다. 이런 극단적인 풍경들을 칼리의 두 얼굴에 대한 오래된 힌두 신화와 같은 노선에서 이해해줘야 하는가? 적어도 아룬다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신]을 쓰고 돈방석에 앉게 된 아룬다티가 1년여의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바라본 인도사회는 커다란 부조리극의 무대였다. 기득권층의 이윤독점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부패한 시스템, 아무런 삶의 보장도 받지 못하는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 소수자들. 그들은 세심하게 고려되야 할 대상은 커녕 서류상에서 숫자로조차도 제대로 기록이 안되는 이들이다. 부패한 시스템이 소수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불합리한 사회를 구축하고, 이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그 시스템의 먹잇감으로 삼아 시스템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아룬바티의 우려는 정확하다. 없는 자들은 말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시스템에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결국 약자들의 골수로 이뤄지는 구조물이다. 악순환, 악순환의 연속. 그것은 배려 없는 세상의 추한 몰골이다. 과연 발전과 행복이란 이름을 가진 소수자들만의 잔치극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한은 누가 갖게 되는가?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댐건설에 이어서 정부가 얘기하는 행복의 평준화와 성스러운 발전이 가장 비대하게 모습을 드러낸 세계화라는 허울을 다음으로 주시하게 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 에세이집에 실린 에세이들 중 6편이 미국과 관련된 이야기다. 댐건설 반대진영의 최전선에 선 덕에 자국 내에서 반정부 사회운동가로 알려진 그녀는 이어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반미주의'라고 하는, 적대자들이 상대에게 씌우기 즐겨하는 표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생각하는 미국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시의 미국인가 촘스키의 미국인가 버팔로의 미국인가 맥도날드의 미국인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는 미국이란 상징 앞에서 그녀는 여유있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녀는 미국에 대한 가장 훌륭한 비판자들이 바로 미국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느 특정한 종류의 신성성을 미친듯이 따져대는 몇몇 양반들과는 상관 없이 그녀는 미국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과거와 현재에 걸쳐, 소설과 에세이에 걸쳐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은 그녀가 발을 딛고 사는 인도라는 땅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대립의 구조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반성과 회의에서부터 시작한 이 질문은 분명하게 대답을 내리기가 용이치 않다. 거기엔 인도(정부)와 미국(정부)과 다국적 기업들과 중산층과 (허울 좋은)공공선과 같은 수적인 차원의 압력들과 불협화음이 예상되는 그녀의 가정사, 그리고 그녀의 사회적 위치가 보여주는 이율배반적 모습 때문에 그녀 자신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분명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증거들이 있으며 동시에 끈질기고, 또한 부드러움과 여유까지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한 것엔 확신에 찬 당연함이 서려있다. 그리고 그녀는 더 많은 이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만들어나가길 바라고 있다. 바로 그 자체가 어떻게, 혹은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