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부제에서 비중 있게 '슈니츨러의 삶'이라는 타이틀이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성과 도덕에 관한 인간의, 정확히는 19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모순적 태도에 대한 현미경적인 분석을 이뤄낸 현상학적 보고서인 [꿈의 노벨레]의 저자인 슈니츨러의 일기에 적힌 사례들은 책의 각 주제를 여는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할 뿐이다. 실상 수십년간 매일 썼다는 슈니츨러 일기의 방대한 분량과 사적영역에의 집중에 대한 부담도 부담이겠거니와  저자인 피터 게이가 노리는 지점은 그 열쇠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내는 커다란 의식의 풍경화다.

19세기 유럽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스팀펑크 장르의 인지적 바탕이며 터무니 없을 정도로 문명의 희망이 넘치던 시기였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의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긍정적 시선이 넘치던 시기였다. 확실히 그 시간은 여러가지 문학작품과 영화들, 애니메이션들 속에서 다뤄지는 환상적 대체역사물의 소재로, 모험과 낭만이 동시에 어우러지던 세계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동화와도 같은 인상을 전해준다([앨리스]가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그러나 그 이면엔 빅토리아조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탐식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었으며, 전통으로 말미암아 양식화된 귀족주의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어내던 때였고 기록된 역사상 최초의 시리얼 킬러인 난도질 잭이 그 시대적 상징과도 같은 음험한 악명을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다시 한 번, [앨리스]가 이 시기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자).

이 모든 현상적인 지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으며 어떤 행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피터 게이가 주목한 부분은 바로 그 정서적인 부분들이다. 19세기라는 시대를 만들어낸 이들, 그중에서도 가장 표상적으로 양식화되었으며 그 덕에 가장 분명하게 시대를 표상하는 부르주아라는 인물계층이 일궈낸 것들의 바탕엔 무엇이 있었는가. 우아하게 장식된 드레스와 통모자 안엔 무엇을 감춰두고 있었는가. 피터 게이는 그 시대의 말미에 현상 이후의 후유증을 분석하는 것으로 몸집을 드러낸 프로이트의 방법론을 빌어 슈니츨러의 글을 텍스트의 열쇠로 삼아 당대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잡아내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아련한 노스탤지어와는 거리가 먼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미리 알고 있는 이라면, 피터 게이는 그 지식의 한 축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은 이미지에 가려 우리가 쉽사리 도식화하고 있었던 19세기 부르주아들에 대한 편견들을 하나하나씩 깨뜨려준다. 저자가 시대의 반영인 그 인물군에 대해 나름의 매혹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피터 게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리킨 유력한 시대의 적이었던 이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바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하는 작업은 오히려 신화를 깨어 그들을 보다 펄펄 살아있는 존재들로 만들려한다.

풍족한 미시사적 사료들의 제시를 통해서 벗겨지는 부르주아의 의식세계는 마치 [꿈의 노벨레]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모순의 정당화로 지탱되고 있다. 프로이트가 사건 이후에 남은 불가해한 찌꺼기들인 현실을 통찰하기 위해 모호한 꿈속으로 달려 들어갔던 것처럼, 여기서 보여지는 부르주아의 의식세계 이면은 단순정의만으론 채 설명하기가 힘든 복잡다단하면서도 총합적인 잡식성이 빚어낸 개개의 충돌이 하나의 태도적 반영으로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 '모호'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귀족도 아니고 서민도 아니며, 그 사이에 낀 계급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 산업화에 따른 계급변동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하는 현상유지에의 욕구를 가진 부르주아 계층이 가진 다양하면서도 상충되는 면모의 현현이기도 하다.

말러의 공허와 미학에는 공감하지만 쇤베르크는 사기꾼이라고 여기는 슈니츨러의 내밀한 모습들은 그래서 그의 작품들의 무의식적 측면들과 더불어 시대의 뱃속에 감춰진 미궁의 입구로 적절하다. 저자는 계속해서 슈니츨러의 감춰진 세계가 외부와 충돌을 빚은 순간으로 귀환한다. 그것은 분명하게도, 시대의 기억을 더듬고 자극하여 일깨우는 행위다. 슈니츨러의 트라우마가 바로 그 순간에 정립된 것처럼, 19세기라는 근대적 트라우마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형식으로든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로 귀환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두 번에 걸쳐 벌어졌던 대학살극과 이미 열려버린 이상, 여즉껏 그 힘을 놓지 않는 몰이성과 혼돈, 부유와 해체의 시대를 당긴 방아쇠가 어디쯤이었는지를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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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 1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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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어서 그런가. 유독 칼로리 높은 음식을 즐겨 먹는 정력적인 작가인 요시나가 후미가 [플라워 오브 라이프]와 함께 연재중인 [오오쿠]의 1권이 드디어 발매됐습니다.

오오쿠란 원래는 쇼군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금남의 장소로 실제했던 역사적 공간입니다. 쇼군의 권위를 보여주는 일종의 하렘이라고도 볼 수 있는 폐쇄적인 장소였던 오오쿠는 일본에서는 1983년에 [실록 오오쿠]가 제작된 이후로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인기 드라마 시리즈의 소재로 우리나라 케이블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는 그 여자들의 오오쿠가 아니라 남자들의 오오쿠입니다. 여자 쇼군를 받들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수백명의 남자들이 기거하는 곳. 한마디로 대체역사물적 역전상황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의 일본은 남자가 극단적으로 적어진 까닭에 대부분의 일은 여자들이 맡아서 하고, 심지어 결혼조차 제한되어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돈을 내고 씨를 받아야 하는, 아주 멋진 세상이지요. 이것이야말로 남자의 로망이 아니던가! 이 작가가 드디어 마초이즘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인가.

그러나 요시나가 후미가 일찍이 마초이즘의 매력을 정확하게 간파한 작가였단 걸 제하더라도, 그녀가 그 마초적 남성들의 열렬한 사랑을 아주 즐겨 그려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좀만 바꿔 생각하면 [오오쿠]가 보여주는 세계는 여자들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자들은 실질적인 가정의 가장이며, 자유로운 성적 유희를 누리는 게 가능하고 심지어 쇼군은 수백명의 꽃미남들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정치적으로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작가의 개인적 취향의 결과로 이해되는 이 작품은 과연, 도입부의 여러가지 환상적인 정경들(이 글은 순수하게 남성독자의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음을 밝힙니다)은 얼마 안 가 싹 사라지고, 농밀한 게이섹슈얼의 공간으로 독자들을 밀어넣습니다.

폐쇄된 장소, 결벽증이 생각나게 만드는 법도로 가득한 세계, 오직 남자들-꽃미남 및 적당한 시니어 취향도 만족시킬 수 있는 여러 옵션의 남자들로 싸인 공간. 이 모든 것이 대체역사극적 시대극으로 발현되는 것은 요시나가 후미가 전작들에서 틈만 나면 시대극을 언급했었던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기실 오시마 나기사의 [고하토]를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립된 신선조들의 세계가 얼마나 미혹에 약하며 금욕적 인상을 덧씌운 탁월한 미적 감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는지 아실 겁니다. [오오쿠] 1권의 상당부분은 바로 그 [고하토]의 세계를 판박이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론 직접적인 표현은 부단히 자제되어 보여지지 않는 이 작품이 그런 농밀함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시대극과 요시나가 후미의 캐릭터들의 삐죽입, 그리고 쾌락과 향유를 위해 준비된 폐쇄공간이란 상황설정 덕이겠죠.

하지만 [오오쿠]는 그 공간에 대한 매혹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이 질투란 감정에 지저분하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지 아는 독자들이라면, 이 작품에서 또한 그녀의 쿨한 캐릭터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름답되 썩어있으며 상처입은 부패의 매력이 넘쳐나는 남자들의 세계는 1권 말미에선 제법 상쇄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에 이어 갑작스럽게 대체역사물적인 미스테리가 등장하는 것이, 2권에 가선 작가가 혼합장르적 성과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라워 오브 라이프]가 소년-소녀의 시선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는 학원물을 향한 작가의 색다른 시도라고 한다면, [오오쿠]는 그녀의 관조적 단편들과 작가의 본류에 가까운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정신적인 적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오쿠의 남자들로 대변되는 남자의 삶과 여자 쇼군으로 대변되는 여자의 삶을 동시에 아우르려는 요시나가 후미의 시도는 그동안 작가가 보여줬던 야오이 지향적 작품군들과 [사랑해야 하는 딸들]로 보여줬던 여성들에 대한 시선이 동시에 맞물린 결과로 그녀 자신의 작가적 견지에서도 확실히 새로운 것이라 앞으로가 기대되는 바입니다.

 

 

...언제부터 이런 것까지 이해하게 되버렸는지 모르겠지만, 45페이지의 두번째 컷은 절제된 색기를 추구하는 야오이팬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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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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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 와서 아버지란 존재는 존경과 감동의 의미로서보다는 부숴진 신화의 파편 같은 이미지로 더 쉽게 다가온다. 그것은 인류가 시작되면서 그 근원부터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수천 년에 걸친 꾸준한 작업 끝에 우리는 신문 사회면을 통해 망가진 아버지, 죽는 아버지, 파괴되어 가거나 파괴하는 아버지의 형상들을 아침 식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가진 제목 '아버지'는 그 단순명료하고 치장이 없는 인상으로 하나의 단호한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 그 이야기는 더없이 담담하고 스무스하게, 지나쳐버린 아이콘에 대한 회고의 감정을 풀어놓는다.

주인공인 요이치는 어느 날 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은 이미 내려가본지 15년이 지난 곳. 아버지와의 서먹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요이치는 내키지 않지만 장주로서의 도리를 해야 하니 결국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외삼촌과 누나를 보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진실,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서 하나씩 알게 된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파인 골의 진실이 밝혀지는 때가 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이 설정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일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는 일일 것이다. 망가진 신화의 시대에 끊임없이 마모되어가는 아버지란 우상의 파편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은, 그가 사라졌을 때 느끼게 되는 법이다. 효의 덕목이라든지 있을 때 잘 하라든지 하는, 그런 오래된 이야기들을 꺼내려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가지고, 같은 집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지금 시대에 정작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완전하게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돌이 호수에 던져졌을 때 그 파장이 얼마나 될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 파장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생각외로 흔들리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런 현대에서의 가족이라는 관계를 바라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대한 관찰, 그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지점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아버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슨 엄한 경험의 소유자나 그런 정신상태를 가진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하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부자간의 많은 오해를 만들어낸 사건들이 자리한 소년시절의 요이치는 일탈로 인해 단단히 삐뚤어져 가는 소년하곤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다른 일을 찾아나서는 능숙하고 평범한 체제순응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그의 인생에선 요즘 쏟아져 나오는 사회비판물 만화들에 비춰보면 별 대단하다고 할 법 한 사건도 없다. 다만 한가지, 부모의 이혼 때문에 그의 마음 속을 침범해 들어왔던 것은 잔잔한 공허감이고 그것이 그와 아버지의 골을 슬금슬금 확장시키고 결국은 그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는 주인공이 잊으려 했던 고향 그 자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존재다. 그것은 고향을 잃거나 잃으려 했던 이들이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 했던 자신의 궁색한 치부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다만 주인공은, 현대 사회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고향을 치기어리게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점점 속도전으로 변해가는 각박한 세상에 대한 우화인지, 아버지란 존재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편협한 자식의 못난 사고에 대한 오래된 잠언의 증명인지는 각자 생각해 볼 일이겠지만.

아버지의 장례식,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일본적인 리얼리티를 진하게 갖춘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으로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다. 버블 붕괴후 불황의 한복판이었던 1994년에 빅 코믹 스피리츠에서 상업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오직 작품성 자체만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연재됐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IMF 시절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가 대박을 쳤던 것과 비슷한 사회적, 구조적 기능의 산물이란 것을 유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라면 소설 [아버지]가 그의 고통스러운 죽음에까지 이르는 상당한 신파의 도정이었던 반면 이 만화는 그런 신파조가 배제된 담담한 시선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아들은 그를 느지막히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가 그제껏 피해왔던 것을 직시하고, 거부하려던 것을 흡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얕은 후회와 부서뜨린 불안의 조각들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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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2disc) : 디지팩
박찬욱 감독, 이영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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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불편함의 미덕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술은 영화의 고전적인 미덕 중 하나였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을 겪게 만들기도 하고 영화의 상업적 충격요법으로도 쓰이며 가장 단순한 경우로는 영화 자체가 엉망이었을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도된 불편함이란 수단들을 통해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영상에서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줬고 데이빗 린치와 크로넨버그의 영화들, 그리고 퍽 유 시네마들은 관객의 일상과 도덕, 윤리에 대한 관념을 꾸준하게 뒤흔든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 시리즈는 우리 안에 내재된 타자에의 불안을 끄집어냄으로써 실용적으론 드라이브인 씨어터 데이트족들을 열광시켰고 작품 내적으로는 냉전시대의 불안이라는 정치적 테마로 평론가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우리는 수많은 공포영화들에서 비슷한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 보자면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불편스러운 문제를 영화적 카타르시스로 써먹었다. 이렇듯 영화에서의 불편함이란 상당히 친숙한 개념이다.
  불편함에 대한 관객의 직접적인 반응은 찬반논란으로 드러난다. 극단적이거나 분명한 방법론, 혹은 주제를 선택한 결과물에 대해서 관객이 보일 수 있는 입장은 대부분의 경우는 지지하거나, 거부하거나의 양자택일이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데이빗 린치와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대한 열성팬들과 야유팬들의 대립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들이 만든 공포영화의 전통은 영화 평론가 로빈 우드에 의해 복권되기 전까진 공포라는 수단을 자기 방어기제로 악용하는 보수 세력의 첨병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퍽 유 시네마는 아예 대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혐오스러운 감정이 들게 만드는 것을 스스로의 존재의지로 삼는다.
  <친절한 금자씨>가 개봉한 후 각 포털의 영화 게시판은 영화에 대한 찬반논란에 휩싸였다. 그 온갖 논쟁들에도 불구하고(혹은 그 덕에) <친절한 금자씨>는 가장 성공한 18세 등급 영화의 전당에 올랐다. 제작사인 CGV측에 따르면 <친절한 금자씨>는 2005년 8월 31일자로 353만 6000명의 관객동원으로 <친구>의 뒤를 이른 역대 2위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이런 수치적 결과들에 걸맞는 숫자의 비판과 그보다는 적은 수의 열광적인 찬사를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수의 관객들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모종의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비판자들의 리뷰 대부분에서 영화의 평이함과 긴장감 부재를 불만으로 얘기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정확한 지적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박찬욱 감독에 대한 이해에 의한 지지와 상업영화로서의 <친절한 금자씨>가 받을 비판이 갈리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불편한 영화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감독이 자기 길을 확실하게 잡고 나아간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독의 의지가 가진 확고함을 의식하면서 이 영화를 바라봐야 한다.


친절한 박찬욱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주 스스로의 상업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얘기한다는 걸 기억하자. 아직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감독들의 작가적 지향과 합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한국 영화계에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런 태도는 당연한 것이며 도덕적으론 훌륭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자세다. 그리고 그런 기준점은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박찬욱 영화에서 꾸준하게 영화의 연출준거점으로도 작용해왔음이 틀림없다. 그의 기존 복수극들이 보여주는 그리스 비극적 내러티브들에 대한 소수든 다수든 간에 대중이 보여줬던 열광적인 호응은 <오이디푸스 왕>이 고대 그리스의 인기 있는 연극대본이었으며 아직도 읽히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그가 가진 무기였다. 비극은 박찬욱 감독의 작가적 음울함과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영화광 특유의 잡식성이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의 방법론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상업적 가능성에 대한 강박을 해결하는 박찬욱 감독은 전작들에서 꾸준하게 작가적 역할과 대중영화로서의 상업적 책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복수극들은 이야기의 잔혹한 취향과 스테레오타입화된 인물들로 인해 컨셉적인 느낌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동시에 박찬욱이라는 인장이 박힐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복수는 나의 것>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줄 알았다는 감독의 고백을 듣고 <올드보이>에선 반전이라는 흥행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켄 러셀과 샘 페킨파를 동시에 아우르려 하는 박찬욱 감독은 모두에게 친절하려 한다.


<친절한 금자씨>, 배반의 미학


  막대한 마케팅과 칸느영화제 수상으로 인한 박찬욱 감독의 높아진 네임밸류, 그리고 톱스타들의 대거 출연과 같은 외적 배경들은 박찬욱의 어느 작품보다도 <친절한 금자씨>의 흥행가능성과 대중친화성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해줬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성공을 거둔 전작들,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올드보이>에 대한 배반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감독 자신이 전작들에서 여성의 존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에 반대급부적인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고 한 <친절한 금자씨>의 기획의도에서부터 예상되던 바였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 여성을 끌어들이고 영화의 전체적 이미지를 ‘예쁜 것’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가 반전이 없는 영화라는 걸 개봉 전 인터뷰에서 꾸준하게 강조했다. 이것은 영화의 흥행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입소문이 악화될 경우를 사전에 막는 당연한 역할이랄 수도 있겠지만, 반전의 없음이라고 하는 구조적 특징은 영화의 특질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감독의 전작이 <올드보이>였음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 센스>와 같은 일련의 ‘반전’영화들의 연이은 성공으로 인해 반전이라는 스토리적 기술이 전형적인 영화의 코드, 관객의 전반적 기호로 자리잡은 시점에서 <올드보이>로 그와 같은 경향에 탑승했었던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반전 구조에 대한 배신을 감행한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친절한 금자씨>는 자신의 복수극들이 가졌던 남성성에 대한 배신이다.
  젠더의 구분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잠시 옆으로 치워두자면, 음악평론가 신현준은 록은 남성성, 일렉트로니카는 여성성의 현현이라고 설명한다.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코러스 파트를 향해 모든 과정이 억제되고 준비되어 있는 록음악은 남성적 오르가슴의 인상을 준다. 그에 반해서 일렉트로니카는 처음부터 꾸준하게 반복되는 표제음과 그의 지속적인 변주를 통해 천천히 이어지는 상승과 하강으로 여성적 오르가슴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이런 록과 일렉트로니카에서 드러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친절한 금자씨>에 대입해 볼 수 있다.
  <친절한 금자씨>의 전개가 평형적이고 장식적으론 여성적이라는 건 이 영화의 구조를 설명할 때 뺄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는 금자씨의 동료들을 하나씩 만나게 되는 감옥생활과 백선생을 죽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들을 교차해가면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이야기의 집중이라기보다는 이야기들의 편린이다. 즉, 여기서 뒤엉켜있는 시간과 사건들은 영화의 이야기가 한곳으로 달려가게끔, 고조되게끔 만드는 역할을 지양한다. 우리는 지난 두 편의 복수극들에서 모든 것이 파국으로 향하게 조직된 그리스 비극적 구조와 카타르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프러덕션 디자인과 미술에서의 비현실적인 색감과 몽환적 이미지들, 감독 자신이 2050년 즈음의 미래시점이라고 밝힌 나레이션, 속죄의 교훈극 등등의 요소들을 통해서도 이미지적으로 이 이야기가 그리스비극이 아니라 우울하고 잔혹한 동화의 세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전작들이 보여줬던 마초적 클라이막스로의 전력질주식 시나리오를 포기한 이 마지막 복수의 이야기에는 점점 고조되어가는 폭발에의 기운이 없다. 그 대신 점점이 산발적으로 마련된 금자씨에 대한 파편적인 풍경들이 모자이크처럼 묘사되고 긴장감 없는(남성적 법칙으로 보자면 가장 긴박했어야 할) 백선생의 포획과정이 있은 다음, 후반부엔 복수의 의미에 대한 긴 심리극을 장치해놓는다. 이것은 감독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예 감독 인터뷰를 보지 않은 관객들이 끝까지 기대했을 영화의 장쾌한 카타르시스에 대한 열망을 배신하는 동시에 지난 복수극들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코를 얼얼하게 만드는 스트레이트 펀치가 아니라 금자씨가 가만가만히 정적의 위 속으로 스며들게 만들었던 락스처럼, 타이틀에서 보여줬던 붉은 물감의 침전처럼 그 독을 서서히 펼쳐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패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가차 없었던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동진이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이 붕괴의 순간으로 준비되어있던 <올드보이>와는 달리 <금자씨>는 긴 시간동안 마련된 극도의 죄의식과 고뇌 속에서도 제대로 된 구원에 이르는데 실패한다. 그에 맞춰 고도로 세밀하게 구조된 디자인과 색감과 같은 외적인 화려함들은 금자의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복수의 의미가 완성됐어야 할 긴 심리극의 시작에서부터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변해가며(디지털 상영 버전) 동시에 영화 내내 예쁜 것만 찾는 금자씨의 태도 또한 의미를 잃게 된다. 백선생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고 읊조리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복수에 미친 아이들의 가족이 아니라 인간말종 백선생이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표정과 태도는 역전되고 이후 오랫동안 백선생의 몸뚱이에 가해지는 폭력을 통해 관객은 혼란스럽게 된다. 관객이 가져야 할 쾌감을 박탈하는 이 시간은 말하자면 성찰의 시간이다. 이 시간동안 우리는 복수와 고통이 역전되어 제대로 새겨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어쩌면 진짜 독은, 금자씨가 백선생을 죽이는 복수의 과정이 아니라 복수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자씨의 고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관객에게 침투되는 것이리라.


‘너무’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이영애


  이 모든 분명한 특징들에 비추어, <친절한 금자씨>는 충실하게 영화적 완성을 성취해냈는가. 그 시도 자체에 대해선 달리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완성이란 측면에선 확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일단, 앞서 말했듯이 우린 다시 한 번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감독이라는 걸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에 맞춰 <친절한 금자씨>가 얼마나 친절한지 한 번 살펴보자. 지난 두 편의 복수극들이 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들을 담고 있었다면 금자씨에선 도전적 페미니즘에 대한 도식적 장치들을 수능 언어영역 시험문제를 풀 때처럼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금자는 여성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복수를 실행하며 마초적 캐릭터의 표상이자 손짓만으로 섹스를 벌이는 백선생은 기록상 대다수인 '남자' 연쇄살인마다. 더군다나 그는 모성의 목적인 아이만을 골라 죽이는 인간이며 금자는 오로지 사생아로 낳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13년을 감옥에서 썩게 될 누명을 뒤집어쓴다. 어쩌면 페미니즘 진영에서조차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식성을 도마에 올릴지 모를 일이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케 하는 일련의 메타포들과 뻔한 스노비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이런 노골적 구도가 가지는 정당성의 문제는 이영애가 금자씨를 맡고 있는 덕에 후자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진다. 그녀는 지금껏 어머니를 맡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일 뻔한 적에도 그녀는 어머니였던 적이 없었다. <봄날은 간다>에선 자신보다 열 살 연하인 남자를 요동치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매혹적이고 자유로운 이혼녀였고 <선물>에선 예정된 죽음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잠긴 소녀적 아내였으며 <대장금>에서 왕은 그녀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궁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살짝 언급되는 레즈비어니즘과 예쁜 것만 찾는 그녀의 태도에는 쉬이 공감하지만 딸에 대한 그녀의 집착에는 의아해 한다. 어쩌면 <친절한 금자씨>는 그녀가 문소리와 같은 영역에 들 수도 있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사생아로 낳게 된 딸 때문에 스스로 누명을 쓴 그녀를 보여주면서도 정작 딸에 대한 얘기는 털끝만치도 보여주지 않는 감옥에서의 세월과 아이만 골라서 죽이지만 유아에겐 관심이 없었는지 입양까지 되도록 놔둔 백선생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딸, 그런데다 말까지 안 통하는 딸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인 긴장감을 증발시키고 그런 요소들이 종종 유머의 도구로 쓰이게끔 만들었다. 이것이 금자라는 '여성'이 어쩌다보니 끌고 다니게 된 딸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도적인 연출이었다면 그 흐름의 당위성은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능하다. 그러나 금자씨를 다루는 이런 영화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딸을 그렇게 만든 금자의 사정, 그리고 딸이 금자에게 가지는 상징적 역할들과 충돌하며 영화를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백선생이 보낸 두 해결사에 의해 딸이 협박당하는 와중에도 그것은 딸이 아니라 그저 물건처럼 느껴질 정도다. 예를 들면, 구원을 뚝딱 해결해주는 드래곤볼.


퇴행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왜 그렇게 변했냐’ 면서 금자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그녀의 감옥 안 동료들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복수의 이유가 명확히 제시되고 그에 따른 행동이 공식처럼 맞아 들어갔던 전작의 남성들에 비해 금자라는 여성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영화 본편을 통해서도 금자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쁜 것에 집착하고 화장에 대해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허영심이 속죄를 위한다는 공명심, 딸에 대한 자기희생적 애착과 겹쳐지는 금자의 행동은 그녀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곤란하게 만든다. 금자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패턴은 그녀를 미성숙한 어른으로 설정했다는 감독의 설명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믈론 박찬욱 감독의 복수극들에서 나왔던 여성들, 죽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류의 누나, 극단적 무정부주의자였던 영미,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영원히 묻어두어야 하는 딸 미도처럼 그녀들이 일관되게 보여줬던 미성숙함과 그런 미성숙한 여성이 <친절한 금자씨>에선 주체가 되서 사건을 끌어간다는 상황은 이 시리즈가 보여줬던 마초적 요소의 거세와 대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납득하기가 어렵진 않다. 이것은 동시에 복수극의 결론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복수극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보다 설득력 있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올드보이>에서부터 해당되는 얘기다. 분명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15년 동안 퇴행한 어른이었고 그를 따르는 미도는 고착된 어린아이의 표상이었다. 그래서 오대수의 어설픈 복수는 모든 것을 통제하던 이우진 앞에서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장난질 정도로 격하되어버린다. 그러나 복수의 좌절이 인물들의 미성숙에서부터 내재된 것이라면, 확신범이었던 <복수는 나의 것>의 박동진과 류는 어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복수는 나의 것>은 개인적 원한이 사회적 구조로 치환되어 극한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은유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동진과 류는 그 구조 속에 끼어 멈추지 못하고 기어이 죽이고 또 죽어간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의 과정과 실패에 있어서 그만한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금자씨는 나름대로 행복해질 수도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감옥에서 제빵기술을 배웠고 딸아이는 멀쩡하게 살아있으며 완성된 공동체의 욕망만 보여주는 바깥세상에 비하면 감독이 의도했다고 밝힌 것처럼 감옥생활이 차라리 더 나은 시간이었다. 물론 복수 3부작이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 중에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기획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복수 3부작은 <반지의 제왕>이나 <매트릭스 트릴로지>처럼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개개의 결론과 주제를 가지며 그자체로 하나하나가 완결된 영화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 3부작 전체의 결론이 아닌 <올드보이>의 반대급부일 뿐이라는 점이 더욱 강조되고 여기서 박찬욱의 복수극은 되려 퇴행해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능케 만든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을 근심하다


  우리는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한 진행을 보이는 영화들을 알고 있다. 개인적 복수가 뒤틀린 공명심으로 이어지고 결국 무너져 내리는 금자씨의 모습은 가장 가깝게는 뤽 베쏭의 <잔다르크>를 떠올리게 만든다. 칼 드레이어와 로베르 브레송이 잔다르크를 다뤘던 것과 마찬가지로 뤽 베쏭의 <잔다르크>에서도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은 죄의식과 구원의 문제제기이다. 보다 영화적 전통에 입각한 오래 전 성과들을 들춰보자면,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고민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실존주의적 문제들과 일맥상통한다. 즉, <친절한 금자씨>가 우리에게 던져준 화두는 영화사적으로 고전적인 차원의 영역을 향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그 익숙한 이야기에 특유의 영화적 테크닉과 외적인 화려함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여성성이라는 영화적 구분점과 독자성을 확보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걱정대로 이 과도한 치장은 박찬욱 감독이 가진 연출자로서의 위기가 우회해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이미지에 의해 함몰되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MTV 출신 감독들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는 그들이 시도해 보이는 온갖 다양한 종류의 카메라 테크닉만큼을 따라가지 못하는 연출력의 부재이고 오시마 나기사,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 감독 같은 거장들조차도 자신들의 필모그래피의 막바지에서 과잉스러운 이미지에의 매혹에 빠져 영화적 탁월함을 놓쳐버리곤 했다. 그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터닝 포인트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HD영화라는, 이미지의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포맷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근심을 놓아버리긴 힘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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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7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12-2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썼던 걸 고치고 불린 결과물입니다... 근데 좀 길긴 긴가...-_-
 
카트린 M의 전설
자크 앙릭 지음, 김병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카트린M의 전설]을 읽음에 있어서 이 작가의 아내가 쓴 [카트린M의 성생활]을 떠올리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보다 분명하게 밝히자면 이 두 권의 책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쌍둥이 거울과 같은 관계다. 비록 [카트린M의 성생활]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이 순전히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 결혼했다는 것도 먼저 기억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 사실은 이 두 권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책을 열면 목차 바로 다음장에는 베란다에 서 있는 젊은 날의, 20대 때의 카트린 밀레의 전신 누드 사진이 찍혀져 있다. 바짝 마르고 성깔 고약할 것 같은 전위예술 잡지의 편집장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충분한 배신감을 안겨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답다. 그 외모는 취향에 따라서라도 제법 많은 이들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적어도 보편적인-혹은 흔한-성적 충동의 제물이 될 가능성은, 그 한 장이 마지막이다. 나머지, 뒤에 실려있는 30여 장의 사진들은 그녀가 이제 불혹의 나이로 들어가는 시점에 찍은 사진들부터 보여지기 시작한다. 보편적인 현대 인류 사회에선 움베르토 움베르토 같은 불운한 청년들의 인구수 퍼센티지가 현저하게 낮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다. 그가 판단하기에 그녀는 읽혀져야 할 전설이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찍는 행위는 그리스 조각상을 새기는 행위와도 같다. 그녀에게 나이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으로 볼 때 그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는 바뀌지 않은 오직 그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사진으로 영원을 증명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성적 모험을 치뤘는지를 안다. 어떻게 자신을 드러냈는지도 안다. 그래서 헤어누드로 당당하게 찍혀 있는 이 모든 사진들에서 그녀는 한 순간도 주춤거리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묘지에서, 능욕 당하는 죄인 꼴로 사진을 찍힐 때조차. 그녀는 모멸을 모조리 쾌락으로 치환시킨 여자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감당하지 못했겠는가.

책은 우선 카트린 밀레의 사진이 놓여지고 그 뒤로 자크 앙릭의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의 글은 그녀를 찍은 사진기의 기종과 작동방식에서부터 자신의 저작들, 그리고 사드와 바타유(일종의 전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에서부터 조이스, 바르트, 프루스트, 쿠르베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한다. 그러나 언제나 되돌아오게 되는 건 카트린 밀레의 몸이다.

여기서 [카트린M의 성생활]을 기대하진 말지어다. 자크 앙릭의 현학적인 공상의 유희는 이 책에 대한 독법을 순전히 제목 때문에 책을 구한 이들의 독후감에서 실망감을 토로하게 만들었던 바타유의 [에로티즘]과 같은 영역으로 위치시켜 놓고 있다. 카트린 밀레는 [카트린M의 성생활]을 마치 자신의 몸을 쓰듯이 풀어놨다. 그래서 그 자극적인 책의 문장은 쉽고 말초적이었으며 분명한 센세이셔널리즘적 사례-흥미로운 사례들-가 제시되고 동시에 '더럽게' 해부적이었다. [카트린M의 전설]은 그 반대편이다. 이미 카트린 밀레의 육체가 완전히 벗겨져서, 가끔씩 벌려지기도 하면서 박혀있는 이 책이 다시금 그녀의 모험에 대해서 재탕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리라. 이 사진 에세이들은 그녀가 치룬 전설적인 센세이셔널리즘적 이벤트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감탄과 그로 자극 받아 이루어지는 사유에 모든 것을 바친다. 그래서 이것은 남자가 쓴 책이며 그녀와 몸을 섞은 이가 쓴 책이라는 걸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일종의 겉멋 든 난 체인지, 아니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쓸 때의 괴테와 같은 심성의 발로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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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12-02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