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 - 부름 퇴마록
이우혁 지음 / 들녘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우혁의 퇴마록 말세편이 나오길 기다린지 벌써 2년. 작년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읽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말세편을 손에 잡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면서도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은 탓에 종교에 관련된 많은 책들을 보고 싶어했다. 우리나라 고대의 신앙으로부터 신비의 땅 인도의 여러 오래된 종교들. 십자군 전쟁과 더불어 현지 종교와 토착화된 기독신앙들.

종교가 문화의 현상들중에 차지하는 위치는 사뭇 중대하다. 문명화(?)되지 않은 사회일수록 종교와 일상생활, 관습은 일치되는 것이며, 가장 원시적이고 오래된 종교는 사람의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발달론자일수도 있을 것이다.

<퇴마록>의 말세편을 읽으며 여러 지역에 편만한 말세에 관한 신앙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이야기들 가운데 각색되고 꾸며진, 전혀 허구의 이야기들도 섞여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픽션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이단과 정통의 역사로 종교가 판가름날 수 없듯이 <퇴마록>의 이야기들은 허구와 사실로 구분할 수 없는 노릇이다.

<퇴마록 말세편>을 읽으며 다시 이우혁씨의 방대한 연구와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다시 느끼게 된다. 어쩌면 긴 시간동안 그의 소설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내는 시간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꽃피우기 위한 멈춤없는 채찍질의 시간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우혁씨는 탁월한 휴머니스트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기독교에 힐난한다할지라도 그의 말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 것은 그가 보는 종교와 정의에 대한 판단이 전적으로 사람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속박하는 종교가 더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퇴마사들이 펼치는 이야기들은 또다른 의미에서 우리가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휴먼스토리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한과 더불어 - 일곱번째 산책 이재철 목사의 요한복음 설교집 7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저자가 요한복음을 강해설교했던 것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요한복음만 10권의 책으로 묶는다니 요한복음의 한구절 한구절을 강해하고 풀이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게 한 것이다.

성경을 읽을때 흔히 우리는 어떤 말씀 하나에 강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나는 나에게 필요한 구절만을 찾게 되고 내 맘에 드는 구절들만을 좋아하게 된다. 음식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 편식하게 되면 결국 영양의 불균형으로 영양결핍이나 영양과잉이 되는 것처럼 성경 역시 그런 위험을 언제나 가지고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이미 2000년전의 기록이지만 그 말씀들이 지금 여전히 우리에게 힘이 되고 감동이 되는 것은 그 말씀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설교자들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같은 본문을 가지고 여러번에 걸쳐 다른 각도에서 성경 읽는 법을 전해주고 있다. 그 구절들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없음을 깊이 각인시켜준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지금 내가 가지지 못한 이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앙이란 이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거꾸로된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말씀 하나 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적절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의 구절들 중에 내가 모른척 회피할 수 있는 자유가 없음을 일깨워준다. 저자의 요한복음 강해 설교 시리즈 <요한과 더불어>는 그래서 걸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재덕 지음 / 작은행복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여전히 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이 논문이 아닌 이상,
과학자들의 실험결과 보고서가 아닌 이상
선이해가 있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그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관습 속에서
살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경시대..>는 이러한 이해를 돕는데 필수적인 책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외우는 주기도문의 한 대목,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많은 주석가들이 설명해 놓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해설에는
2000년전 이스라엘 문화에 대한 진득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 복음전파를 할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도
이 당시의 배타기가 가져다주는 어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풍랑이 몰아치는 배 속에서 제자들의 탄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느끼는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성경의 말씀이 원래 무슨 뜻으로 말해졌는지를 보다 분명히 알아야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길잡이의 역할을 분명히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회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오덕호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오덕호 교수의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국 기독교가 선교사업을 가장 잘 하는 방법은
사고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 사회에서 큰 사건이 있을때마다,
사람들이 경악을 내뿜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어있고 대개는 주모자의 역할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패와 비리의 사슬에서 기독교인은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셈이었다.
평범한 개인의 영향력과 사회 지도층 인사의 영향력은 다르다.
기독교인인 사회지도층 인사의 비리가 가져다주는 부정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오덕호 교수는 이 책에서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또박또박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순서가 되바뀌어 버린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복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그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신다고 답변한다.
무조건 교회에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게 아니라
중요한 가정일, 사회일이 사소한 교회일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다시 면죄부를 팔던 중세의 어두운 신앙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정치인의 40%가 기독교인이고, 국민의 25%가 기독교인이라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어찌 그리 부패와 비리의 공화국이 되었는지,
기독교인이 반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책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는 미진한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복주의 신앙을 교묘하게 부추기는 논리들과
대형화, 물질주의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예의 날카로운 비수를 살짝 거두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시작이 될 것이다.
고름이 안으로 썩어 온 몸을 썩게 하기전에
밖으로 고름을 조금씩 조금씩 흐르게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켈란젤로의 복수 - 시스티나 천장화의 비밀 반덴베르크 역사스페셜 4
필리프 반덴베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교황청은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제공한다.
천주교인 사이에서도 그 평가는 전혀 다르다.
베드로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은 지상 가톨릭의 황제.
그는 정녕 천상의 사신인가, 아니면 지상의 권력자인가?
교황 바오르 2세가 지난 날의 교황청과 가톨릭의 잘못을 고백했을때
가톨릭은 다시금 태어나는 신고를 겪었을 것이다.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교황들,
신의 뜻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교황들이
저지른 종교 재판과 이 세상에 대한 메시지들이 잘못되었다니.

한긴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읽다보면 교황과 교황청은
훌륭한 소설거리일뿐, 감동을 줄만한 곳은 되지 못한다.
[미켈란제로의 복수]가 그리는 교황과 시스티나 천정화의 관계는 사뭇 그 뻔한 교황청의 비밀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비밀은 쉽게 탄로날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종교적인 비밀들은 신의 이름으로 철저히 묻혀 있어야 한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제거되든지 침묵해야 한다.
비밀이 발설되는 순간 어둠은 다가오며 그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복수>는 정말 전형적이다.
거기에 너무나 많은 복선과 이야기들을 깔아놨다.
반덴베르크는 너무 많은 욕심을 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작자는 어느 이야기 하나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다.
줄거리가 진행될수록 반덴베르크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침묵으로 묻어버리고 만다.

정작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런 것이었다면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려져서는 안될 비밀이 너무 많기때문에 침묵해야 한다면.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꺼낼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이야기를 그는 조금더 설명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다.
침묵해야할 이유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