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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영한대역
미치 앨봄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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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도 그 같은 스승이 있다면.

삶의 수많은 시간 동안을 비록 떨어져 있었고,

사랑을 나눌만한 기회는 없었지만,

그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형편이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먼저 다가갔기 때문에

그는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죽음의 시간들을 함께 나누는 제자 앞에서

모리는 죽음의 전편인 삶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 가운데 중요한 것 말고 덜 중요한 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모리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덜 중요한 것에서 돌아서서 더 중요한 것에 마음을 갖기를

간절히 원할 뿐.

그래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받아들이길 바랄 뿐.

이 책을 읽으며 지금 유언을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유언은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구이든지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최후의 죽음 앞에서도 악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악 그 자체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기에.

누구든지 죽어가는 사람이 남긴 말이라면,

단 한마디라도 소중하다. 무겁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남길 수 없으므로.

모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죽음은 멀리 있지만은 않다.

느끼지 못할 뿐.

삶과 죽음은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

둘은 하나이고, 나는 그 연속선에 있다.

살듯이 우리는 죽는다.

죽는 것은 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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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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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융은 인간이 온전하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 음과 양의 통합을 제시한다.

그는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내가 가진 성(性)과는 다른 성을 지닌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 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이나 여성, 그 어떤 것도 한 쪽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가톨릭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가톨릭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융합시켜 왔다. 하나님이 남성을 상징한다면, 마리아는 여성을 상징한다.  남성을 상징하는 하나님이 남성성을 대표한다면, 마리아는 여성성을 대표한다. 진취적이고 성취지향적이지만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여성성은 온화한 것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이고, 남성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들이 득세해 왔다.

아마도 '다빈치 코드'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감추어진 여성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기호학이 뒤섞이고, 그림 속에 담겨진 전설들을 좇아 가면서 지은이의 돋보이는 상상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을 뒷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의 공통점대로 무엇인가 있는 듯 하지만, 별로 남는 것 없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빈치 코드' 역시 교황청에는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한 음모들이 엇갈리고 있으며, 교황청은 진리를 나타내는 곳이 아니라 비밀을 제거하고 감추어두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그간의 기독교의 진리를 뒤엎는 것이며 교황청은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그려 놓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다빈치 코드가 말하려고 하는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인 예수는 아버지였다는 부분.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있고, 후손들의 가계도가 있으며, 그것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제거하려는 세력이 있어 왔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자주 이야기되었던 전설같은 이야기인가? 예수가 인도에 가서 몇 년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끊임없이 떠돌던 낭설에 불과한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예수가 아버지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성배를 찾았는데, 그것이 사람이었다는 것이 과연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를 처음 읽을 때에는 지은이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찾기 위해 바른 길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여성성을 찾기보다는 변죽올리기에 바빴던 것 같다. 도무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그래서 성배를 찾았는데, 그 다음엔 뭐야,  라는 질문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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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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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균형 잡힌 삶을 난폭하게 허물고 도도한 감정의 물줄기에 격량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나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모조리 팽개쳐버리기를. … 당신에게 속할 수 있다면 당신의 환부라도 되고 싶습니다. 종양 같은 것이 되어서 당신을 오래오래 아프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고통을 달래느라 나에게 쩔쩔매고 배려하고 보살피겠지요. ” '연미와 유미'

당신은 타인이었는지요. 사람은 누구나 홀로 선 나무라고 했지요.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타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되뇌어 보아도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 버리는 먼지 조각일 뿐입니다. 당신으로 향한 그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설령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하더라도 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 말에는 성처도 안 받습니다. 당신은 대꾸가 없습니다. 결코 존재 증명 따위는 할 수도 없습니다.
비어버린 위장 안에서 울컥, 소리가 올라온다 싶더니 이윽고 눈물이 솟아 올라옵니다 '먼지속의 나비'. 아무리 당신이 타인이라지만 이토록 당신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차마 몰랐습니다. 하긴 우리가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겠지요. 그저 당신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며 추측이나 했겠지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각자의 즐거움뿐이겠지요. 입을 맞춘다 하더라도 그건 입술만의 만남일 뿐이지 우리 마음의 합일은 아니겠지요.

설령 당신이 결혼한 후에 내게서 연애감정과 섹스를 인출해 간다 하더라도, 마치 돈이 떨어졌을 때 잔고의 일부를 인출하듯이 당연하게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한 게 아니라 단지 습관을 바꾸지 못한 것이겠지요.'그녀의 세 번째 남자' 그래요. 우린 늘 따로였어요. 합한다는 건 환상일 뿐이에요. 고작 육체를 합할 수는 있겠지요. 진심인 것 마냥,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마냥 스스로를 속인다 하더라도 우린 서로를 다 알 수 없겠지요.

당신이 낯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건넬 말도 없기 때문인지는 아닌지요.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습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갖게 된다는 것일 뿐이니까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타인에게 말 걸기'.

그러나 나는, 당신이라는 타인 앞에서 아무 것도 건네주지 못한 채 무의미해지는 나를, 나는 참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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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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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짊어진다고요? 글쎄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운명이 있지요. 운명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하고 혹은 선택 당하고 그리고선 선택된 길을 따라 가게 되지요. 분명히 내가 선택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운명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진정한 운명은 종종 우리의 손을 넘어선다지요.

<종소리>에서 처마밑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튼 새들은 스스로 선택한 축에 든다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계속 고통당해야 하는 ‘당신’은 선택당한 쪽에 들겠지요. 스스로의 뜻이든 아니든 그들은 고통을 치러야 했고, 끝내는 그 진한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떠나보내어야 했지요. ‘당신’은 직장을 옮기고 삶의 터전이 바뀌어 갔음에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운명은 혼자만의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같이 나누어 주었더라면 ‘당신’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요. 둘이서 서로를 마주하고 식탁에 앉더라도 그것은 서로 다른 운명들의 만남이었나 봅니다. 나에게는 혼자서 고통당하는 당신을 지켜봐야 할 고통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그 고통 전부를 감당해야 했듯이. 그리고 티벳의 천장처럼 독수리들에게 온 몸의 살점을 다 떼어주고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짓는 경지에 올라서야 비로소 운명은 제 몫을 다하게 된 것일까요?

어느 날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허공을 떠돌던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녀 역시 이 세상에서 운명과 다투다 우물에 들어앉게 되었지요. 그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의 위로가 늘상 필요하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은 그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독경을 가만 가만 읊어 주면 그녀는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누군들 그녀를 만나거들랑 모른 척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운명은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 역시 자리를 못 잡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지하 다방에 악어를 기르던 여자를 아시는지요? 아무도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지 못한답니다. 수족관에 악어가 어떻게 기어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구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답니다. 어느 누구도 아는 것이 없답니다. 더구나 밤마다 불을 지르고 다녔던 또 다른 그녀를 아는 사람이 누군들 있었을까요? 그냥 운명이 그들을 거기에 묶어 놓았고, 그렇게 있도록 했다고만 하기로 합시다. 이런 저런 설명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있었다고만 생각하자구요. 호기심이 해결된다 해도 바뀔 것은 없으니까요. 어차피 모든 것이 '물 속의 사원'이 되어 이승에서는 탑돌이도 못할 테니까요.

자는 모양도 똑같이 오른발을 왼발에 꼬고 이마에 팔을 얹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그 손자의 고모와 할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한사코 할아버지의 음주를 막으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보다 한 수 위입니다. 고모는 객지에 나와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손자의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지요. 부모님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저 동생에게 털어 놓다가 자존심만 상해했지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지 않으신가요? 술을 먹으면 병이 재발할 거라는 진단이나 또는 누군들 하고 싶어서 이혼을 했을까요? 직장에서도 잘리고 뭐 어디 얼굴이라도 내밀고 다닐 수 있겠는지요. 그냥 짊어지고 가기만 하면 된다면 운명이라도 쉽게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에 무릎은 꺾기고 허리는 지탱을 해 주지 못하는군요.

저 먼 낯선 땅에서 뇌종양의 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 앞에서, 오히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위로할 때 뭐라고 대꾸해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앓는 병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찢어지지는 않을 텐데요. 운명에 포위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 역시 삶은 불안한 적막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혼자 간 사람'이겠지요. 저 운명 내가 대신 못 지고, 내 운명 다른 사람에게 대신 넘겨주지 못하고 혼자서 지고 가야겠지요. 그것이 아픔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끝내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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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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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제, 그것은 모두가 연루되는 치사한 문제이다<역사의 한 페이지 中>. 이 세상 하늘 아래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연루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이 관계에는 한 두명의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연루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치사한 문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기형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적당한 말이 없는<본능의 기쁨 中>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풀어가는 인간이란 참 딱한 존재이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의 도움을 통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늘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만이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존재라고 여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 속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로맹 가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엮어가고 있다. 열 여섯 편의 단편들은 제각각 다르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파괴적이고 몰인정하고 극단적 이기주의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로맹 가리는 집을 나선 한 여인의 수모와 몰락을 다루고 있다. 그 여인은 모욕을 감당할 길이 없어 바다로 달려가다가 목숨은 부지하지만, 자신이 당한 모욕으로 끊임없이 몸서리를 치며 괴로워한다.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 끝끝내 죽음을 향해 가면서 생명을 조금씩 연장해 가긴 하지만 실상은 날마다 자신이 받았던 모욕을 되새기거나, 새로운 모욕을 만들어낸다.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이러한 모욕의 메커니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가짜>에서 등장하는 인간은 또 어떤가? 고귀한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을 둘러싸고 진위 논쟁이 벌어지다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살아있는 작품(?)이 사실은 위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이라는 별로 깨끗하지 못한 존재에게 예술 작품의 진위가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가짜는 다 불살라버린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살갗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거짓으로 도배되어 있는 가짜인 것을. 이 세상, 인간과 연루된 이 세상에서 참된 가치를 찾으려거든 <가짜>의 주인공처럼 홀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은둔하며 살아갈 것.

<본능의 기쁨>에서는 난쟁이와 거인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간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들이라면 구역질이 나요, 선생님.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요. 그들은 속속들이 흉악해요. …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요, 선생님, 하하!' 로맹 가리가 느꼈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인간들은 난쟁이와 거인이 어떻게 섹스를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거나 그들을 구경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지, 난쟁이와 거인도 당연히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럴 땐 정말 내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다니까.'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은 인간 운명의 어리석음과 운명 자체의 반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벽을 통해 흘러나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음 소리가 실상은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 때문'에 비소에 중독 되어 죽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것도 절망적인 고독이라는 이유로 벽 하나를 두고 하나는 목을 매달고, 하나는 비소를 먹고 죽어 가는 것이 인간 운명의 어리석음이라는 말 말고 다른 어떤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로맹 가리가 일생을 신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더러운 모습들을 관찰할 수 없다는 용기 어린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에 매여 사는 인간들. 우리는 노예, 운명은 가혹했다. 언제쯤 인간의 치사한 연루는 막을 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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