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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 Haeunda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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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거창한 타이틀과 유명 작품들을 작업했던 CG팀의 합류. 

겉보기에는 해운대를 강타한 쓰나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속은 그간 우리가 많이 보아온 한국형(!) 생활사(!)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많은 영화들 속에는 수 많은 운명과 삶의 짝들이 등장하고,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미워하고 싶은 놈과 좋아해야 할 '분'들이 전형화된다.

전형화는 때때로 영화나 내러티브에 힘을 부어넣지만, 

그것이 과도하거나 이른바 인위적인 쥐어짜기로 바뀌게 되면  

관객으로 하여금 한없는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에 죽일 놈과 살릴 놈이 딱 갈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이런 전형화와는 관계없이 무작위적으로 쓰나미를 통해 심판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주인공들을 살려둠으로써 현실의 리얼리티는 빗겨가고 있는 듯 싶다.  

ㅎㅎㅎ 

관객들로 하여금 미워하게 만들거나 동일시하게 유도하다가 세상 사는 게 꼭 그렇지 않다고 

마치 가르치려는 듯한 이 영화의 태도가 맘에 안 든다.  

그 큰 쓰나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난 것도 이해가 안 된다.  

100m짜리 쓰나미는 대충 견뎌낼만한 삶의 고통이 아닐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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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달린다 - Running turtl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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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달려~ 한번만이라도 성공적이어야지~ "아버지" 달린다~ 거북이 같은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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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 좌충우돌 주님 음성 듣기
문희곤 지음 / 예수전도단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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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야만 했을 때, 

무엇보다 관건은 라틴어로 묶여 있던 성경을 번역해 내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누구든지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sola scripture(오직 성경)이 종개혁의 3대 구호 중에 하나가 된 것은,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교권주의자들에게 매여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들어 보수적 한국교회에 새롭게 형성된 신교권주의자들이 이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의 종에게 말씀하시지 않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는 말씀을 악용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전유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자기만이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신교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해석도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통해서만 교인들에 대한 계시가 있을 것이라고 억측을 부리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라는 이 책은, 

어쩌면 하나님을 갈급해 하는 모든  자들의 명쾌한 해설서이다.  

도무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앞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에게 

이 책은 과감히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심지어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격려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며, 신앙의 마무리임을 설파한다.  

물론 이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어떤 구체적인 메뉴얼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연합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신앙에 진전이 없고,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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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성서지도
토마스 V. 브리스코 지음, 강사문 외 옮김, 민영진 감수 / 두란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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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다르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천년 동안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읽힌 성경이지만, 

성경의 텍스트들이 전하는 뜻만으로는 성경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광야에서 뜨거운 태양 빛을 경험해 본 사람이 구름 기둥의 절실함을 알고, 

해가 지고 기온이 급강하한 광야의 밤을 지새워본 사람이 불 기둥의 절박함을 알 수 있다. 

성서지도는 두리뭉실한 성경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살려 준다. 

텍스트로 존재하는 지명과 지도 위에 기록된 지명은 다르다. 

지도 위에서 텍스트는 살을 얻게 되고 피를 얻게 된다. 

두란노 성서지도는 성경의 의미를 살려내는 재주가 있다.  

특별히 1부에서는 성서의 지리를 소개하고, 2-3부에서는 창세기부터 주후 4세기경까지  

역사적 지리를 소개한다. 틈틈히 사진들을 통해 이해를 돕고 있고,  

인물들과 주변 국가/문화를 소개해 주고 있다.  

생각만큼 지도의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지도를 알맞게 넣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내용도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큰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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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기독교영성 시리즈 5
케네스 리치 / 은성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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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은성출판사-


1. 기도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자기 존재의 근저에 있는 참된 자아를 아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눈이 뜨이고 우리 자신의 참된 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보기 시작하는 철저한 인간 경험이다.

진실로 기도는 자아 희생의 과정이며, 고립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무엇을 구하고, 지구의 궁핍함과 위기들을 놓고 간청하는 정도로만 생각한다(16). 기도는 신성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인간을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다.”(St Gregory of Sinai) 기도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기도이다(17).

기독교적 기도의 하나님은 관여하시는 분이시며, 사회적 하나님-교제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사회 생활, 공동체, 나눔이 있다(18,19).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20).

우리는 기도할 때 이기적인 개인주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하는 것이다(42).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intercessio)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이 기도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고 계시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중요한 점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관계에 놓이게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곧 행위이며, 기도와 행위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43).

모든 기도가 그렇듯이 중보기도도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정화(purification)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중보기도를 진지하게 드리는 것은 고난을 의미한다(45).


2. 기도와 거룩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며, 거룩과 하나님은 일치한다(56). 거룩이란 근본적으로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엄위로움’과 ‘밝게 빛남’이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거룩은 구원과 파멸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시다(56).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의 백성들이 거룩해질 것을 요구한다(57).

기도하는 것은 성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여는 것이고, 성령의 불에 붙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불에 맡기는 것이다(61).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이다(63).

기도생활과 거룩으로서의 성장,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오는 강하게 타오르는 사랑으로의 성장은 분리될 수 없다. 성경은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 있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장은 영적 고통과 갈등을 포함하며, 자아를 깨닫고 훈련시키는 길은 손해와 내적 고통을 참으려는 의지를 요구한다(64). apatheia(영혼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유), parrhesia(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같이 의지함).

참된 자아의 음성을 듣는 것, 이 음성이 기도의 인간적 근원이 된다(71). 내면으로의 여행이 단순한 자기 발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발견까지 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내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 내게 더 가까이 계신다. 영혼이 그 보금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돌연히 그 영혼에 임한다(72, 73).

묵상기도 방법-William Johnston, 예수회, [정점-The still point]-

1) 긴장완화-좌정하고 휴식을 취하라.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2) 하나님의 실존 인식-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심을 인식하라.

3) 하나님께 항복하라.

4) 받아들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

5) 회개와 용서-죄를 고백하라.

6) 묵상-하나님을 바라보라.

7) 영접-성령을 영접하라.

8) 중보-남을 위해 기도하라.

9) 찬양-하나님을 찬양하라.

기도는 은사이고 은혜이며, 나무에 점화된 불꽃이다. 기도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인간의 응답은 사랑과 경배로 나타나며, 바로 이 경배의 마음이 예배의 중심이 되는 마음이 된다(93).

성령은 능력(dunamis)의 경험이다. 성령은 바람과 불, 격렬한 활동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술취함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성령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기도하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은 윤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성령은 말을 초월하는 것이다.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다(98,99).

방언은 은밀한 기도를 위한 은사이다(104).


3. 기도와 정치

‘나라이 임하옵시며’


영적 삶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유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의 자유, 사회적 무기력으로부터의 해방도 취급한다. 사실 신학적 결정주의(Theological determinism)라는 이름 하에 포기의 종교로 전환되도록 유혹을 당해오지 않았는가?(108)

예수님이 단순히 영적 나라만을 전파하신 순전히 영적인 인물로만 보는 견해는 분명히 잘못된 견해이다. 천국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주장하는 증거는 1) 악의 세력이 정복되었다, 2) 예수님의 기적이 천국의 임재를 증거한다, 3) 복음이 전파된다, 4) 천국은 구원의 은사를 통하여 임재한다, 5) 바로 메시야이시며 인자이신 예수님 자신이 천국의 증거이다(113).

기독교의 영성은 자신을 낮춰 종의 신분을 취하신 나사렛의 가난한 자의 영성이다. 눌린자를 자유케 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예수님은 완수하셨다(115).

사회정의가 결여된 예배는 헛된 예배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의 결여로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124,125)


4. 기도와 교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성찬은 초대 교회의 기도와 삶의 중심이었다(155).

예수께서 하신 대로 우리도 네 가지 절차를 취한다(157). 1) 우리는 취하는 행위를 봉헌(Offertory)이라 부른다. 떡과 포도주를 취하여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 자신을 함께 드린다. 2) 축복하고 3) 떡을 떼는 과정은 ‘그의 거룩한 삶이 쪼개지는 순간에 우리는 그의 희생을 생각한다. 독생자의 희생의 순간에 육신의 모든 지체가 두려워 떨게 하자.’는 과정이다.  4) 나눔이다. 우리는 이 네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교제, 성찬의 절정에 이른다. 거룩한 교통은 성찬식의 절정일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적 기도의 절정이다. 이 교통을 통하여 우리는 신령한 삶에 참예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된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파괴적인 거부 행위가 된다. 그것은 불공평한 세상에서의 평등한 성례이다(167).


5. 기도와 참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믿음이 없이는 죄에 대한 개념은 의미가 없다(173).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사랑의 하나님과는 상반되는, 무섭고 복수심이 불타는 하나님에 관한 시대에 뒤떨어진 견해의 잔재가 아닌가? 현대 예배에서는 이 진노의 개념이 끊임없이 무시되어 왔다(175).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품의 다른 면일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본질적으로 불의와 억압을 태워버리는 빛남과 같으며, 진노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라 중립이다(176).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요 깨어진 관계의 치유이다. 이 기도는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기도의 위대한 속죄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도와 십자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80). 1)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에 참예한다. 2)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한다. 3)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한다(181).

참회란 근본적으로 죄책감이나 자기 학대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 동기와 의도를 가능한 한 의식을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내적 자세와 결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는 값없이 주신 선물이지만 회개는 값비싼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죄는 매우 파괴적인 것이기에 뿌리채 뽑혀야 하고,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83).

회개는 자기 인정과 자기 부인 모두를 의미하며, 이 둘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보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거짓된 외양과 거짓된 목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된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186). 자아를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신학은 영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187).


6. 기도와 내적 갈등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하기를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기도하셨다(요 17:15). 따라서 우리도 충돌이나 마찰이 없기 위해서보다는 그것들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한 마찰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삶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단의 원래 의미는 심판의 때에 송사하고 대적하는 자, 즉 대적을 의미한다(203,204)

십자가는 시험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생명과 기도가 흘러나온다. 존 크리소스톰은 교회는 예수님의 상처받은 옆구리에서 생겨났다고 하며, 오리겐 역시 신약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상처받은 옆구리에서 시작된다고 역설했다(20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실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고 그리스도 안에, 고난 가운데 계셨다(209). 그리스도의 상처는 곧 기도이다.


7. 기도와 성장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기도의 길은 곧 성장의 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의 성장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성장이며, 거룩함 안에서의 성장이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성장이요, 교제와 참회 속에서의 성장이요, 갈등을 통한 성장이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기도에도 항상 움직임이 있다. 기도의 사역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이며 철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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