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퍼블릭 에너미 - Public Enem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나 역시 지금이라도 총을 들고 싶다! 그리고 '공공의 적'을 향해 갈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블릭 에너미 - Public Enem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퍼블릭 에너미. 굳이 번역하자면 '공공의 적'. 

이미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여러 영화들에 비슷한 의미의 영화제목들이 붙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고민해야 할 주제인 셈이다.   

사실 까놓고 보자면, 정치 권력 혹은 경제 권력이 공공의 적일 때가 대부분이고, 

하찮은 백성들은 늘 그들의 밥이었을 뿐이다.  

역사는 늘 권력을 중심으로 쓰여지고, 올바름 역시 그 중심축은 힘을 가진 사람이 결정해 왔다. 

그 안에서 정치와 윤리는 서로 갈지자를 그으며 출렁거리고,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사장되고, 매장되고, 쓰러져 사라져간다. 

1930년 미국 대공황은 이런 불행한 역사의 향연장이었다.  

누군가는 돈을 긁어모으고 있고, 대부분의 누군가들은 풍성한 만찬장 옆에서 쓰러져갔다. 

어느 누군들 숨겨진 '공공의 적'  을 공격하는 '공공의 적' 갱스터 존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서민의 돈은 털지 않고, '은행'의 돈만 터는 착한 갱스터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존은 그 불행한 시대를 불운함으로 일관했고, 공공의 적으로 짧은 일생을 마무리했다. 

한 없이 아프기만 했던 그의 과거는 그를 불행한 역사의 틈새로 이끌었고, 

사악하기 이를데 없는 금융자본권력에 총구를 들이댔다. 

지금이나 예나 변함없는 금융자본. 

참으로 소리소문없이 사람들을 죽게하고 사라지게 하는 놀라운 권력. 

거기에 총을 들이댄다는 것은 시대를 거부하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존은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죽었다.  

조니 뎁은 직관과 직감에 의지하며 살았던 존의 모습을 나름대로 잘 그려냈고, 

존을 체포하려던 멜빈 퍼비스를 맡았던 크리스찬 베일 역시 캐릭터가 살아있는 연기를 펼쳤다. 

물론 다양한 등장인물과 늘어지는 편집이 좀 눈이 걸리기는 하지만, 

실화를 영화화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겠는가? 

있었던 그대로를 옮기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할뿐더러,  

그렇게 했다한들 실제의 리얼리티와 애환을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운대 - Haeunda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통통 튀는 주연배우 세사람 100m쓰나미에도 살아남은 아주 많은 사람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Up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터지는 풍선처럼, 우리 안에 자리잡은 추억들과 안락과 이기들을 터트려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Up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알면서도 꿈꾸는 것들이 종종 있다. 

애니메이션의 장점과 덕목은 그 꿈들을 기꺼이 이미지화해 준다는 데 있다.  

날으는 탐험선이 되는 오래된 집,  

난생 처음 보는, 꿈에서 봄직한 자연 풍경 속에 폭포며, 동물들이며, 말하는 개, 거기에 새까지. 

무엇보다 꿈꾸었던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은 우리 모두를 대리만족으로 이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녹록하지 않은 삶의 자국들이 남겨있다.  

칼은 한 평생 행복했지만, 지금은 아내도 먼저 가 버렸고,  

집은 대형 건축물 사이에 알박이처럼 박혀 있을 뿐이다.  

집 구석구석 추억하고, 회생할 것들 천지이다.  

다른 곳으로 갈래야 갈 수 없고, 갈 데도 없다. 

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추억 속에서만 빛을 발할 뿐이다.  

거기에 난데없이 등장한 꼬마 러셀. 

러셀의 등장은 애매모호하다.  

그가 '업'에 끼어들게 된 이유는 단지 경로봉사 배지가 필요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오랫동안 자식을 바래왔지만 불가능하게 된 칼에게,   

대안가족이 될 러셀의 등장은 그래서 좀 억지스럽다.  

또 한 사람의 러셀은 탐험에 정신이 팔려 가족을 등한시하고,  

가족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남미의 어떤 곳에  '개'들과 살아간다.  

탐험이라는 키워드가 두 러셀에게 적용될 듯 싶지만,  

두 러셀 모두 가족에게서 버림 받았다는 아픔이 있다.  

쓸쓸하게 인생을 마무리해가는 칼,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두 러셀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하여, 그들의 탐험은 어떤 이미지로 포장되었다 해도, 결국은 다시 가족을 만들어 가는 것에 

최종적인 목표가 있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상상의 이미지화말고, 

깨진 관계를 회복해가는 그 과정에 대리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공상들은 현실의 도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돌아갈 추억이나 상처를 깨버리고(칼이 집의 모든 추억들을 버렸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업'의 꿈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