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너무 많다. 

월요일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오를 죽였을까봐 미쳤나봐,라고 했는데, 현오는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종화 내내 '차라리, 죽이지' 할 만큼 꼴 보기 싫었다. 

이제 나는 조직에 너무 오래 몸 담고 있는 사람이라서, 현오나 은호가 상사들의 요청이지만 명령을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이가 없다. 

여기는 방송국이고, 누군가 죽어나가도 방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 웃겼다. 방송국 아닌 어떤 조직도, 그런 이유로 조직을 만들어서 키우고 운영하는 거다. 내가 아니어도 굴러가게. 완벽은 아니어도 이러구러 굴러가게. 

현오가 은호때문에 아홉시 뉴스를 거부한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고, 은호가 오후뉴스는 싫다고 뻗댈 때도 어이가 없었다. 조직 내에서 부탁의 형식을 취하지만 명령인 것들, 내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것들, 그래서 부탁의 형식을 취하지만 다음 카드가 언제나 있는 것들을 나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게 싫었다. 

뭐 싫은 걸로 치자면, 자기는 결혼 안 한다고 애저녁에 뻥 찬 여친 주위를 뱅뱅 돌았던 현오와 그렇게 자신을 뻥 찬 남자 때문에 해리성인격장애를 앓으면서도 또 그 주위를 뱅뱅 도는 은호인 거겠지. 현오가 주연이 질투하는 거 보면, 은호가 현오랑 헤어지자 마자 다른 남자랑 결혼이라도 할 거처럼 굴었다면 냉큼 달려와서 결혼하자고 했겠구먼, 그눔의 새끼, 이러면서 봤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난 아직 부족해,라면서 돈 벌 궁리하는 남자들. 

결혼은 이 남자랑 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야,라면서 커리어를 쌓으려는 여자들. 

결혼이란 게 혼자만의 마음으로 혼자만의 시간표에 딱 맞춰 가능한 게 아닌데 말이지. 

온 우주에서 함께 늙고 싶은 혹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는 기적에 더하여, 그 사람과 마침맞게 사귀고 마침맞게 결혼할 결심을 했다는 것도 기적인데. 

현오가 좀 더 싫었던 건 8년이나 사귀면서 자신의 어떤 처지를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결국 선택은 은호가 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은호에게 통보했다는 거지. 그래, 그걸 내가 못 받아들이니까, 이 메인커플 대신 환상 속의 커플, 혜리씨와 주연씨가 더 좋은 거지. 

현오와 은호는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 말은 저렇게 너무 많이 하는 커플이었다!!! 

난 너무 T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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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2024-11-04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를 먹은탓인지 모르겠지만 F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ㅋㅋ
 

카스피님 글에 쓰는 먼댓글인데, 먼댓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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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서점의 붐업에 옌롄커,를 읽어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강보다는 옌롄커를 생각한 거였고요. 

그리고 수상발표가 뉴스 아래쪽에 깔렸을 때 놀라서 남편에게 말하면서 '음, 나는 한강 싫어하는데, 약해빠져서'라고 덧붙였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시적 문장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서, 한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트라우마,에 대해 계속 말하는 누구라도 나는 그걸 들어줄만큼 인내심이 없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책장에는 2003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이 있네요. 


그러다가, 논란이 된다는 다른 소설가의 품평도 읽고 - 역사왜곡이다, 옌렌커를 줬어야 한다,는 식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01202457 -,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싫어할까, 나는 왜 옌렌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다가, 예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826912 )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식민지 인도의 어떤 소설이 제국 영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우리나라 소설이 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달까요. 



 

노벨상은 권위가 있는 상이지만, 기본적으로 먼저 산업화를 이룬 서구가 시상하는 상이고, 자신의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이야기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떤 상이라고 해도 시상자의 의도라는 건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이 서구의 문화를 대할 때와 다른 문화권을 대할 때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옌롄커의 책으로 골라 받은 건 '딩씨마을의 꿈'-국가가 매혈을 장려하는 가운데, 마을 하나에서 에이즈가 창궐하는 이야기입니다-이었으니, 한강이나 옌롄커 둘 중 누가 받았더라도 자국 내에서 누군가에게 환영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으니까요. 서구문명의 아나키즘적 지향-정치는 뒤로 종교는 앞으로-은 문학상에서 선호하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역시, 한글 처럼 사용자가 작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아이들은 결핍이 없을 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노벨상 시상자의 의도 어쩌구 하는 제 말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으로 보이겠지만, 이제 제 다음 세대는 그 뜻 그대로 들리겠지요. 


강인한 한국 여자인 저는 한강의 여주인공들보다 토지의 서희가 더 좋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스웨덴 한림원이 상상하는 한국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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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0-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먼댓글이 안되어 있어용^^

별족 2024-10-14 06:17   좋아요 0 | URL
왜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_-;;; 그래도 카스피님이 보셨으니 되었습니다. ㅋ
 

나의 엄마에 대해 쓰면서 우리 문화의 여자들, 특히 어머니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강한 존재'라고 썼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2575630 )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지 나의 클릭질에서 다 드러나니까, 유튜브는 쇼츠로 저 한국엄마 콘텐츠를 보여주는 거다. 

유튜브 쇼츠로 '한국엄마'라는 게 떳다. 한국인 엄마와 흑인 물리학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 스탠딩 코미디언 마이클 요의 콘텐츠다. 


흑인,을 흑인이라고 부르는 게 인종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아한 나의 태도가 저 엄마에게 모두 드러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XyL3hqefI



https://www.youtube.com/watch?v=1CiUaP8r7Xw


"그래? 거짓말 하랴?"-"뭐? 내가 없는 말 했어?"라고 번역되어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게 나는 무례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라는 도구가 갈등을 다루기 위해 개발되어 있는데, 그 말을 왜 자꾸 이런 저런 이유로 하지 말라고 하는지 의심한다. 그래도 개중 가장 평화로운 도구, 말로 갈등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자신의 느낌 그대로, 듣는 나는 그 사람의 말의 의도를 넘겨짚지 말고, 들은 데서 출발해서 다시 또 말해야 한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면 나쁜 대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보고 하던 말이, 글이 되고, 더 넓게 확장되면서 둘 사이 문제 없던 대화가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문제가 되는 말들 가운데, 우리는 대화하기 보다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으레 상대를 어떤 틀에 넣어 넘겨짚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서 오해를 마음 속에 쌓아두는 건 아닌가.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데, 그래서 조율하기 위해 말이 있는 건데, 숨기고 감추고 조심하느라, 아예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다니 너무 답답한 세상이다. 

그래, 세상 모두가 이런 나를 무식하고 무례하다고 해도 나는 저 한국엄마처럼 굴어야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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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를 볼 때, 모든 갈등이 끝났는데, 16화는 뭘 하려나, 싶었다. 

결혼을 하려나. 주인공 커플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양가부모의 허락도 받았고, 서브커플도 맺어졌다. 프로포즈를 벌써 두 번쯤은 한 것도 같고, 도대체 16화는 뭘로 채우려나, 싶었는데 내심 결혼하려나 기대도 했는데, 역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애지상주의자들이 연예계에 가득한가. 두 번이나 청혼받은 석류는 받기만 한 게 미안하다면서 청혼도 했으면서 당장 결혼하기보다 결혼을 미루고, 아직 젊은 자신의 부모들에게 드레스를 입힌다. 이건 뭘까. 

티비라는 올드매체의 시청자가 젊은 커플보다 커플의 부모세대이기 때문에, 결혼이 평화롭고 다시 한 번 드레스를 입기를 원했던 걸까. 정말 지금 젋은 세대들은 결혼이 그렇게까지 두려운 걸까. 석류와 승효가 결혼을 미룬 이유는 못 해본 연애를 원없이 하고 싶다, 이고, 모음이랑 단호가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음이가 남극기지로 파견갔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결혼을 왜 하는 걸까. 젊은 여성들은 왜 결혼이 두려운 건가. 연애와 결혼의 차이는 뭔가. 정말이지 내가 궁금해서 누구라도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데, 이런 질문은 너무 무례해서 할 수가 없다. 

나는 연애가 정말 너무 귀찮은 사람이라서, 젊은 커플들의 결혼거부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좋아서 죽겠다면서, 정말 네가 너무 좋다는 로맨스의 결말들이 이러니까 내가 또 이해가 안 되는 거지. 영원히 너만 사랑하면서 늙고 싶다면서 왜 결혼을 두려워하는가 싶은 판타지 속의 젊은 연인들- 사내맞선 하태커플도, 선재업고 튀어의 솔선커플도, 일타스캔들의 열선커플도 그랬다-을 모르겠다. 아니면, 나같은 올드한 시청자들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게 '결혼하자'에 '좋아'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드라마를 끊지 않는 지금의 세태를 모르겠다. 그게 더 멋있나? 역시 모르겠구나. 사랑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로맨스 창작자들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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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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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실패하지만 늘 시도하는 책장정리 가운데, 포스트잇이 붙은 이 책을 꺼냈다. 포스트 잇을 떼어내고 싶다. 우선 그 내용을 적자 싶어서 언제 읽었는지 찾았다. 2020년 8월에 마쳤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탐구하는 것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써놓았더라. 불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 책 한 권을 펼쳐놓았다. 그때도, 제목보다는 부제 때문에 꺼려지는 마음이 있어서 아무 것도 못 남긴 거 같다. 


거친 것을 알려고 오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거친 말, 즉 거짓말로 공손하게 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도가 아니면 그를 피한다"는 뜻이다. 

순자가 위에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조급하다"고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소용이 없다거나 화가 나는 일, 금지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어도 언젠가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잠재적 교류 대상이다. 또한 그들 역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며,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그들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진지한 물음을 표할 때 진지한 태도로 응하면 된다. "피한다"는 표힌이 단어 그대로 대답하지 않고, 질문을 무시하고, 자리를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도"에 대해서, 즉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지금 당장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p183


일본의 인문학자 오구마 에지는 일본의 전후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기여한 윤리주의를 "나는 지식인이다, 학생이다, 특권계급이다, 그러므로 특권과 사생활을 버리고 노동자에게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윤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흑과 백, 전부와 전무로 나뉘며, 강경하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과 힘을 얻는다. 윤리주의는 운동의 전망을 가망 없게 만들고 참여에 높은 장벽을 쌓는다. 따라서 참가자는 적어진다. 참가자가 적어지므로 비난과 죄책감으로 참가자를 끌어내려는 시도가 강해진다.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너는 데모하러 오지 않았잖아?", "바리케이드에서 빠져나가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그런 데에 정나미가 떨어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자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윤리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스스로도 괴롭고 확신을 지닐 수 없으므로" 타협에 혐오감을 보이고 "타인을 세차게 몰아붙이기 쉽다." 그 결과 "내부 대립과 배신자 취급이 마구 벌어"진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며 자신과 타인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활동이 "윤리를 내세워 견뎌내야 하는 일종의 인내심 경연대회 비슷하게 되어" 버린다. 윤리주의는 새로운 속물들을 창출한다. 이 속물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나 조직에서 윤리의 위계를 세우고, 그 위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인간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 p246


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화는 한 명의 독지가를 설득하고 승낙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의 성격은 세네카의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배의 이음매들이 사방으로 느슨해지고 틈이 벌어져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올 때(...) 퍼내도 퍼내도 물이 줄지 않고 자꾸만 더 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을 것이다. 없어지지 않고 자꾸 생겨나는 악에 맞서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p255


"가령 말이야.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는 쇠로 된 방이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세. 다들 곧 질식해 죽겠지.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곧바로 죽음의 상태로 이어질 테니까 절대로 죽기 전의 슬픔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그런데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맑은 사람 몇몇을 깨운다면 말이야. 이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은 만회할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겪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서도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하지만 몇 사람만이라도 깨어난다면, 쇠로 된 방을 부수고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절대로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루쉰은 "희망이란 미래에 속한 것이라, 과거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글을 쓰기로 약속했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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