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선,은 학원가 동네에서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고 2인 남해이는 언니의 딸이지만, 어린 나이에 맡겨진 조카는 이모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했고 지금까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다. 남동생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심장이 약하다. 고시식당을 했던 엄마는 어린 딸을 내던지듯 맡기고 가 버린 큰 딸을 쫓아나갔다가 차에 치어죽었다. 

규칙적이고, 집착적이고, 사회성 떨어지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남동생 재우는, 병원에서 일타강사 최치열 옷에 멋지게 새겨진 호랑이 자수를 촬영했다가 오해를 산다. 

재우는 또, 정해진 시간, 맛있는 와플을 먹기 위해 산책을 나간다. 와플을 더 맛있게 굽는 알바의 이름을 외우고, 그 알바의 근무시간에 맞춰서 와플을 사 먹는다. 그러다가 스토커라는 오해를 산다. 

그 알바는 자신이 일할 때, 찾아오는 그 남자가 이상해서, 근무 시간을 바꾸고 그러고도 무서워서 남자친구와 함께 일을 했다. 근무시간을 바꿨는데도 그 이상한 남자는 바뀐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자신의 남자친구를 옆에 세우고, 겁을 잔뜩 집어먹고 와플을 건네는 알바는 뭔가 긴장한 채여서 손이 닿았고 재우는 남자친구에게 맞는다. 재우가 한 일이라고는 와플을 사서 먹고 돌아간 것 뿐인데도 겁을 냈다. 경찰서에서 행선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했을 때, 그 여자는 카페에 다시 오지 않는 조건으로 사과를 받아들인다. 행선은 재우에게 와플기계를 사주기로 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재우는 와플을 먹고 갔을 뿐인데, 왜 그 여자는 무서웠을까. 

그럴 수 있다. 무서운 이야기가 많고, 이상한 사람도 많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수도 당연히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 '뭘 봐?'로 시작하는 시비가 그렇게 많은 게 아니겠는가. 

뭘 봐?로 시작하는 그 많은 시비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뭘 볼 수는 있지만, 눈빛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하니, 뭘 봐?라고 묻고 싸움을 시작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싸우자,는 눈빛이라고 단정하고 뭘 봐?라고 묻는 대신, 저 제게 무슨 문제라도?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말이지. 

저 사람이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쁜 것은 나의 기분이니까, 여기가 안전하고 열린 공간이라면 좀 더 겁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저 물어봐도 좋았을 텐데. 투명한 재우라면, 제일 와플을 맛있게 굽는다고 듣기에 기분좋을 진실을 말해줬을 텐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Book]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 - 환경을 생각하는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기후과학 이야기
스티븐 E. 쿠닌 지음, 박설영 옮김, 박석순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래도, 미래를 알지 못하면 마음은 불안하다. 그래서 고래부터 거북이 등껍질로도 영매를 통해서도 신탁을 얻기를 원한다. 현대에 와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권위는 과학자에게 있다. 

학교에서 배울 때와 현장에서 일할 때 나의 불안한 마음이 커지는 것은 오차들 때문이었다. 숫자는 수학공식처럼 하나가 아니다. 단계마다 층층이 쌓이는 오차들 덕분에 내가 아는 것이 정확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https://blog.aladin.co.kr/hahayo/12746420)을 읽었었다.

이 책이랑 제목이 너무나 비슷해서, 계속 헷갈렸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도 원서 제목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은 'Apocalypse never'였고, 이 책의 원서 제목은 'Unsettled'이다. 원서의 제목 정도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란 의미에서 그렇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 종말론적인 전망으로 불안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의 언설에 저항하기 위한 말들이었다면,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은 그런 종말론적인 전망이 가능하게 하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말들이다. 


기후위기, 기후정의, 마지막 기회,같은 넘쳐나는 말들 가운데 피로했다. '나는 그럼 뭘 해야 해?'라는 질문에 '정치인이 기업이 변해야 한다'고 자신의 잘못은 없는 양 빠져나가는 말들이 싫었다. 그저 인지도나 호응을 얻기 위해 과격한 말들과 행동을 일삼는 것처럼 보였다. 기업이나 정치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 소비자나 유권자인 나의 민원이 작동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5%의 물가인상조차 감당하기 어렵고, 당장 전쟁이 터지면 탄소중립이 뭔지 싶은 선택을 하게 된다.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5827587)라는 책 제목이 어쩌면 내 맘이다. 


책은 한참동안 통계와 방법에 대해 말한다. 기후를 예측하는 과학자의 방법이 무엇인가. 그 방법은 얼마나 많은 오차와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부분을 읽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조건을 다르게 여러가지 모델을 설계하고, 다른 결과를 얻는다. 결과의 오차범위가 있고, 결과의 한계가 있다. 두꺼운 연필로 그린 그림을 가는 연필로 다시 그릴 때, 그저 우상향 추세선처럼 보이던 것은 요동치는 선으로 변하고, 인간의 삶은 우상향 추세선에 달린 게 아니라 요동치는 가는 선 위에 있다. 100년도 못 살면서 천년 후를 걱정하는 것처럼 당장 내일 벌어질 일에도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정책들을 가지고, 무언가 개선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에 찬 말들을 하는 게 참기 어렵다. 

인간이 없을 때도 공룡은 멸종했고, 지구는 뜨겁기도 차갑기도 했는데, 인간인 우리 때문에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으니 불편을 감수하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삐딱해지는 거다. 불편을 감수하라,가 이미 누릴 만큼 누리는 선진국에서 선진국에 진입하려는 나라들에 하는 말이라면 더욱 삐딱해지는 거다. 

과학적 방법론과 불확실성에 대해 말할 때 느릿느릿 나아가던 것은 공론장에서 왜 이런 말들로 흐르는지 설명하는 대목, 그러니까 정치와 의사결정에 대한 부분에서 빠르게 나아갔다. 책으로 읽을 때조차 불안을 감당하기 싫어한다. 


읽으면서 그래서 어떡할까요?라는 물음에 하는 저자의 대답 때문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6139) 생각이 났다.  어린날 읽을 때는, 어른들 혹은 기득권자가 새로운 세대의 순응을 바라면서 만든 우화라고 삐딱했던 것도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은 세상의 변화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 같다. 젊은 어떤 날 내가 파도라고 생각했던 어떤 자만심은 지금 나는 그저 파도 위의 나뭇잎이라는 자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탄소배출을 제로로 만든다는 대의명분에 동의한다 해도, 당장 난방조차 끄지 못하는데, 그저 우리는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상황에 옮겨진 치즈를 따라 삶을 바꾸는 생쥐같이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그렇게 작고도 크고도 한심하다. 



과학자가 자신이 윤리적이라 믿는 것을 위해 정책 토론장에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지 말지를 고심하는 것조차 자만심의 극치다. - 7%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은 연설 도중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를 대량 살상 무기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과학은 명쾌합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저는 '평평한 지구 학회'같은 모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확정적이지 않다. 공개 토론은 과학적 절차의 핵심이다. 과학자가 토론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반과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을까 봐 두려워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10%


과학이 어떻게 정보 전달이 아닌 설득을 위해 사용되는지, 그리고 비전문가들이 그 설득에 어떻게 현혹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불쾌한 사례다. -25%


미래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평가보고서는 허리케인 데이터에 대한 설명을 누락시켜 대중을 속이고 있다. 이는 워싱턴 DC의 국립아카데미 건물 앞에 우뚝 서 있는 아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격언에 반하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할 권리에는 의무가 함께 수반된다. 사실이라고 인식한 것은 티끌만큼도 숨겨서는 안 된다." -41%


매우 불확실한 미래 예측으로 공포를 조장하는 헤드라인을 뽑는 것과 기존 데이터를 왜곡해 기후 관련 죽음의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55%


확실한 것은 언론, 정치인, 때론 평가보고서들마저 과학이 기후와 재앙에 대해 말하는 사실을 뻔뻔스럽게 잘못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은 해당 보고서를 작성하고 생각 없이 검토하는 과학자들, 보고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따라읊는 기자들,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한 편집자들, 그러한 재앙의 호들갑을 부채질하는 활동가와 단체들, 그리고 대중의 침묵 하에 기만을 일삼는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기후에 대한 수많은 인식 오류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그것들을 합의된 '진실'로 바꿔 버린 것이다. - 59%


안타깝게도 뉴스의 보도 주기는 미친 듯이 빨라지고 기자와 편집자는 그 어느 때보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 현대 미디어의 다양성과 보편성은 신선한 '콘테츠'에 대한 수요뿐 아니라 기사를 제일 먼저 게재하려는 경쟁도 증가시켰다.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자도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직업적 규범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견이 깨끗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 60%


물론 이는 기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정치적으로 회색 지대를 혐오하는 유권자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불확실성으로는 지지 기반을 다지기 힘들다. - 60%


언론은 NGO에 권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들만의 기후 에너지 의제를 가진 이익 집단이다. 지지자를 결집하고 돈을 모으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정치적 힘을 휘두르는 강력한 정치행위자다. 많은 NGO에서 '기후위기'는 존재의 이유 그 자체다. 또한 더 공격적인 단체들에게 의제를 빼앗기는 것도 걱정해야 한다. - 62%


그리고 내 경험상 사람들은 자기 전문이 아닌 영역에 대해서는 자신이 선택한 미디어를 믿고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 62%


"누가 개발도상국에게 탄소를 배출하지 않도록 돈을 지불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 간단한 질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15년이 넘도록 했지만 아직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 - 71%


절약을 장려하는 확실한 방법은 규제를 강화하거나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정부가 추진하기에는 어려운 조치다. - 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새 영화를 좀 본다. 

큰 딸아이랑 둘이서 영웅,을 봤고-돌아오는 차 안에서,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한참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큰 딸은 빼고 넷이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엄마, 아빠가 추억에 사로잡혀서 막내딸이 경기는 쫄깃했는데, 계속 끼어드는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고 짧게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교섭을 봤다. 

나는, 외교관 정재호(황정민 분)가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 분)에게 외교의 마지노선에 대해 말하는 게 좋았다. 외교관 정재호는 '사람을 살려야 하지 않겠냐, 면서 직접협상만이 그 방법'이라는 박대식에게, '외교관과 테러리스트는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 한 화면에 잡히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걸 아는 정재호가 갑자기 박대식처럼 변하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호감이 없는 사건을 왜 영화화하려고 했을까. 아직도 그 때 그 사건과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던 말들이 떠오르는데. 사기 당하는 박대식은 바보같았고-그게 오토바이 추격전으로 만회가 되겠냐고, 실상은 그렇게 알 수 없는 게 많아도, 영화적 세계는 좀 더 판타지니까-, 무신경한 언론은 밉살스러웠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지만, 보호하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 때도 언론의 무조건 살려오라,는 시끄러운 말들이 어이없었고, 그렇다고 가지말라면 가지말지 뭐하는 거야,라는 말들도 썩 듣기 좋지는 않았었다. 국가의 책무는 국민의 보호이니 수단방법 따지지 말고 살리라는 언론의 말은 정파적 반대파의 말 같았고,-기억하기에 이라크에서의 사건이랑 다른 정부여서 언론이 정파적으로 반대하는 집권세력을 깎아내리려고 더 심하게 공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둘 다 같은 정부였다. 두 사건은 3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고, 둘 다 언론은 같았었을까.- 가지 말라면 좀 가지 말지,라는 말은 또 정파적 반대파의 말이라서 너무 정부편을 든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에게 그 때도 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그렇게 말 잘 듣는 국민이면, 아직도 독재정부야' 라고 말했던가. 


아이들과 보기에는 피칠갑도 없고, 욕도 없고, 풍광도 괜찮았다. 

이야기는 구멍이 뻥뻥 뚫리고, 호감이 하나도 없지만 말이다. 

국가가 나를 보호할 거라는 믿음은 부모가 나를 보호할 거라는 믿음처럼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거겠지, 싶기는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환혼을 넷플릭스로 1화부터 다시 보고 있다. 3화까지 보다가, 설연휴가 시작되는 바람에 연결이 끊어졌다. 

다시 보려니, 이야기 초반 내게 장애물이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극 초반 장욱의 출생의 비밀에 계속 질문하고 있었다. 과연 저런 상황에서 장욱에게 선왕의 DNA가 나오려나. 몸이 장강의 몸인데, 그 아들은 장강의 아들이 아닐까, 같은 질문. 


극 말미에 진요원의 원장 진부연은 딸의 몸을 살려서는 몸이 자신의 딸 몸이기 때문에 그 몸을 이용해서 진씨가문의 후계를 얻으려고 한다. 오직 몸만을 도구로 삼아, 그 몸을 통해 나온 아이는 진씨가문의 후계가 된다고 생각한다. 시리즈의 끝에 딸의 몸에 들어온 낙수(조영)을 결국 받아들이면서, 이미 죽었을 아이의 몸이 그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남자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자각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의 자각 뿐이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렇게도 추상적이다. 

여자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길고도 긴 몸의 이야기다. 

그 순간은 어쩌면 긴 이야기 중 너무나도 짧은 순간일 뿐이고, 몸 속에서 기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여자의 아이가 된다. 


인간이 쌓았다는 문명이나 문화의 어떤 비유나 은유,의 많은 부분이 이런 동물적인 것들에서 비롯되었나 싶다. 오랫동안 여성의 몸이나 생식력을 터부시한 서양의 철학들이나, 남성을 하늘, 여성을 땅에 비유하는 동양의 사고나 은유는, 남성에게 영혼을 여성에게 육체를 부여하고 남자는 아이에게 영혼을 주고, 여자는 아이에게 육체를 부여한다는 사고를 진전시키는 식이다. 

신기하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말 안 하기 게임 일공일삼 65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이원경 옮김 / 비룡소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 원서에 붙은 서평을 보고 궁금해서 내 맘대로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6학년인 아들 주려고 골랐다. 어차피 책은 환영받지 못하는 선물이니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겠다며 사서 비밀리에 포장도 하고, 리본도 매서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읽었다. 

재미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남자 대 여자로 말 안하기 대결을 벌인다. 서로의 또래집단을 끔찍히 싫어하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주인공 남자애는 어느 날 침묵하기로 하고 혼자만의 실험을 하다가, 여자애들의 하릴 없는 잡담에 발끈해서 도발한다. 서로의 집단이 쓸모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말 안하기 게임을 하고, 시끄럽기로는 학교 내 최고였던 학년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선생님들은 당황한다. 또래집단의 성 대결은 어른들과의 대결로 결국 무화된다. 


나는 동성을 좋아한다,보다 이성을 좋아하기가 어렵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구의 동성애 혐오가 무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생각한다. 

말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건 뭘까, 라고도. 

동성을 좋아하는 자연스러움,은 이성을 혐오하게도 한다고도 생각한다. 

비슷한 존재를 좋아하고 다른 존재를 싫어하는 태도가 있지 않나,라고도 생각한다. 

이민족 혐오처럼, 이성혐오가 존재하다가, 살아가면서 다듬어지고 깎여서 그러구러 살아가는 게 아닌가,하고. 

자라지 않는 사람들, 자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포장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이성혐오를 길게 늘이는 세태를 보고 있으니, 필요한 건 기성세대의 억압인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든다. 또래집단 안에서 성 대결은 어떻게 완화될 수 있을까. 소설처럼, 세대대결 양상으로 넘어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삼십대 남녀가 싸우는데, 사오십대 기득권자들이 특정 성을 지지한다. 지금의 페미니즘 이슈가 그렇게 보인다. 

입맛이 쓰고, 답답한 마음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