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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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감성으로 들어오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이건 이성으로 얘기하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류의 막연한 마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고민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상사회에 가족은 어떠할까, 부족한 이상사회는 풍요한 계급사회를 동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격리되지 않고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사회를 선택할까,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내게 했던 질문들, 내가 품었던 의문들이 르귄에 의해서 다른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너무 먼곳으로 밀어놓았던 것이었는데, 참으로 꼼꼼하게 재현했구나, 실제로는 무서워서 보려고 하지 않았었는데, 참으로 세심하게 묘사했구나, 하는 류의 경탄이다.

소설 속의 비유가 너무 뚜렷해서- 이오니안이 아나키스트를 연상시킨다던가, 에이오와 츄국의 대립이란 것이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을 인상시킨다던가, 류의- 이건 판타지에 하는 경탄도 아니고, 신기한 뉴스에 보내는 경탄도 아니고, 놀랍기는 하지만 감동받게 되지는 않았다.

대개의 문학작품에서 나는 그 감수성에 경탄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이성에 인류학적 관찰력에 존경심을 품는 것이다. 재미있다,고 말하기에는 이상하고, 그렇다고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고, 읽어볼 만하고 놀랍다,고만 덧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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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제주4.3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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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가 없다. 페이지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건 증언집이고, 여기 증언하고 있는 열 명은 아주 작은 수이다. 죽어서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아직도 두려워하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딱 열 명이다. 지금은 늙은 얼굴이지만, 젊고 어렸던 어떤 날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살해당한 이야기, 뭍의 형무소에서 살던 이야기, 전쟁과 다시 귀향의 이야기, 귀향과 감시당하는 일상의 이야기, 여전히 두려운 삶에 대한 이야기, 그래도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읽는 내내 목이 메었지만, 무얼 내가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이 사건들을 알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또 무엇이 가능하게 할 지 알지 못한다. 그런 아픈 삶을 아예 모른다는 것, 혹은 모른 체 했던 것이 미안해서 당신이 알길 바라는 거다.

다 늙어 친구들과 가는 해외여행의 비자를 거절당하던 심정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데, 4.3을 이미 반 세기 전에 지나간 일이라고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라고 생각해버릴까봐.

하얀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혹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안쓰러워서 당신도 알기를 바라는 거다. 할 수 있으면, 당신은 아무 것도 잘못하신 게 없으세요, 하고 손을 잡고 못 알아듣는 사투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으면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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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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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묘사하는 작은 소년의 입을 보면서, 이야기를 기다린다.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랑이 미움으로 오해받는 꽉 막힌 가족안에서 여동생이 태어나 갑자기 죽을 때까지, 오빠이면서 아들이면서 손주인 동구가 이 소설의 화자이다. 사랑받지 못했는 데도 사랑하고 있는 마음깊고 따뜻한, 게다가 아직도 '어린' 소년이 거기 있다.

작가의 마음에 들어와서 이 소년을 만나게 했던 난치병 소년의 동생처럼, 절대적으로 부족한 관심 속에서 알 수 없이 깊어진 마음을 가진 그래서 지나치게 안쓰러운 소년이 거기 있다.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상처만 내고 있는, 답답하고 답답한 그런 현실이 거기 있다. 꿈결같은 사람은 또 그렇게 꿈결같이 사라지고, 앞도 뒤도 없어보이는 상황에 길을 내야 하는 것은 자신말고는 없는.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 궁금하다. 그 꽃을 안다면, 그 꽃을 사랑하는 동구의 마음도 더 가까이 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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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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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다.

소설을 덮으면서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옛말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사기를 쳤으면 크게 쳤을 능청스런 거짓말쟁이를 보고 있으려니 떠오른 생각이다. 작가가 옛날에 살았으면 허술한 차림으로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팔고 있을 비루한 행색이지 않을까. 눈을 빛내고 이야기의 강약에 따라 손도 휘젓고, 이상한 노래도 부르면서, 둘레의 남녀노소를 울고 웃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히 거짓이 분명한 '향수'같은 걸 읽으면서는 들지 않던 생각이 '천하제일 남가이'를 읽으면서는 든다. 어, 이 사람 능청이 고단수인걸. 그게 '향수'와 달리 '능청'인 이유는 내가 그 정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국의 정서가 아닌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정서, 굳이 해석을 달지 않아도 웃게 되는 그런 거다.

내가 소설 속에서 본 작가는 어릴 적 '전래동화집'에 한겨울 양반의 집에 들어가 '가마니만한 푸른 대추를 보았다'고 사기를 치는 모습이다. 주의를 딴 데 돌리고는 재빨리 이것 저것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익살꾼, 말이다. 크기에 집착하고, 이것저것 반박하는 사이 지금이 겨울인 걸 잊게 만드는 사람.

황만근은 그래서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농부가 되어 내 머릿속에 남고, 남가이는 그래서 또 천하제일 미색으로 기억되고. 이렇게 말하면서 또 웃음이 나고. 이미 난 속았으니, 당신이 속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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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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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그렇죠. 그냥 제 성품에는 고를만한 책이 아니예요. 추천으로 읽었는데, 너무 울어서 부끄러웠어요. 어떤 사람이 추천한 거냐면, 조금은 필요에 의해서 친해야겠다, 생각한 사람이 음, 내 취향은 아니네,라는 당신의 취향으로 골라주신 책이지요.

그래요, 제가 좀 쿨한 척 하느라고 혹시 너무 유치하지는 않을까, 혹시 너무 진부하지는 않을까, 너무 교훈을 주려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그래도 내가 이분과 친해지려면 읽는 것도 좋아, 그게 어디야, 하면서 읽은 거지요. 그래요. 그랬어요. 그런데, 가슴이 먹먹해져서 바보같이 울었어요.

메마른 정복의 역사가 드러나지요. 눈물 흘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백인들과 빈 마차를 뒤에 두고 시체를 안고 걷는 인디언들의 묘사는 가슴이 아파요. 정직하고, 가난하고, 사랑이란 걸 할 줄 아는, 필요한 것 이상 자연에서 취하지 않고, 다섯살짜리에게도 '비밀의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언 노부부를 사랑하게 되지요. 작별의 말 대신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라고 말하는 '이번 생은 좋았어, 다음은 어떨지 모르지만'이라고 말하는, 이 노부부를 알게 된 게 기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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