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같이 보고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있으니, 아이들이 재밌다고 했다. 


나는 심심하고, 별 재미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반응이 신기했다. 

요즘 좀 진지한 문화비평을 읽고 있나 싶은 중딩 아들은 '어려운 질문을 쉽게 보여주는 영화'라는 감상을 남기고, 초딩 딸은 '재밌었다'는 짧은 감상이었지만 재밌었던 거 같다. 

폭력이 난무하는 오락영화들을 주로 같이 봐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 못한 나의 감상은 역시 범죄도시인가, 싶었는데 말이지. 이야기가 여러 갈래고,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단순한 이야기가 좋은데,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의 감상은 나중에 남편이랑 둘이서만 차에서 했다. 나는 개의 설계사,를 읽은 데다가, 지금 어떤 관계들은 물성이 없어서-전화통화로만 이루어진 관계들이 있다, ㅋ- 저런 이별을 상상하는 것, AI로 죽은 사람의 가상 시뮬을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AI가 스스로를 엄마로 상상하면서 폭주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려주지 않은 정보를 알은 채 하는 게 가능한가, 같은 생각을 했다. 플래너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남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했지. 나는 그 서비스가 보여주는 어떤 형태가 진실이 아니라, 내가 제공한 정보로 만든 허상이라고 생각하니까, 영화가 아닌 채 해도 그런 거니까 말이지. 남편은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에 불만이 있는 거 같았다. 원더랜드라는 가상공간에 자신의 삶이 있는 AI라는 설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거 같다. 

찾아 본 어떤 감상은 죽음을 슬퍼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거였다. 

그렇지, 죽음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지, 라고 새삼 자각했다. 

어려운 질문을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는 영화였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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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이다. 

초5 딸래미가 물었다.

"딸만 셋이면 제사를 못 지내?" 

"왜? 지낼 수 있지. 먼 소리냐?"

"썰에서 봤는데, 어떤 여자가 딸만 셋인 집에서 아들만 셋인 집에 시집가서 시어머니랑 이야기한 게 나왔는데, 시어머니가 딸만 셋인 엄마 불쌍하다고 했다고."

"뭐라고 해야 하나. 제사야 지내도 되는데, 규칙은 남자들보고 지내라고 하기는 하지. 제사를 지내겠다고 싸우기도 하고 안 지내겠다고 싸우기도 하니까, 규칙을 만든 거지. 봐, 성씨를 아빠 성씨 따르게 규칙을 만든 것처럼 제사는 아들이 지내게 하자, 이렇게 규칙을 만든 거야. 규칙이야 그렇지만 딸도 지내도 되. 딸이 지내면 절대 안 된다, 그런 규칙은 아니니까."

"그럼 아들 없으면 제사 못 받아서 불쌍한 건가?"

"뭐, 엄마도 안 죽어봐서 모른다. 죽은 다음에 제삿밥 먹을 수 있는지, 없으면 불쌍할지 안 불쌍할지."

...

"근데, 제사는 산 사람들이 기억하느라고 하는 거라고 생각해. 사람이 죽고 나면 점점 잊히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고맙고 그립고 그런 사람들이 일년에 한 번 그 사람 생각을 하려고 모이는 거지. 그런 게 제사라고 생각해. 그리고, 조상을 기억한다는 거, 나를 있게 해 준 분들에게 감사하는 건 좋은 일이니까. 예전에 부자나 높은 사람들이 더 윗대까지 제사지내고 그랬던 거지. 다른 사람들은 멋지고 높은 사람들이 하는 걸 따라하고 싶어하니까. 살만해지면 제사를 더 지내고 싶어하고. 그런 거지. 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가끔 이야기가 의미를 가리고, 부여한 의미가 본질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실상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나에게 그럴 듯한 의미들을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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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개의 설계사
단요 지음 / 아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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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운다. 

AI, 대형언어모델, 퍼지이론이니 소설과 소설 말미에 붙어있는 네 개의 에세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소설의 이야기가 뒤에 붙어있는 실제 과학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들과 겹쳐서 불안이나 걱정은 조금 더 커진다. 

전기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나는, 챗지피티에 질문 하나를 던질 때마다 500미리 물 한병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한 번도 질문한 적이 없다. 대신 이렇게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소설을 쓴 소설가의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아는 척, 기술이란 참으로 무섭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통해 배우는 AI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도덕적 감각도 없이, 잘 꾸며진 맥락 가운데, 사람처럼 섞인다. 사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그럴 듯하게 맥락을 파악하지만, 무언가 비어버린 대화란 사람 사이에도 벌어지는 일이니, 많은 만남이 채팅과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어떤 세상에서 상대가 사람인지 아닌지 알 게 뭔가 싶기도 하다. 

점점 더 많이 요구되는 건 가치관에 대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압도적인 힘이 무언가를 대신 결정해주는 상황은... 아주 매력적이거든요.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결괏값은 무작위일지라도 경로 비용은 0으로 고정된 선택지라고 할 수 있겠죠." - 17%


다들 불합리한 균형 맞추기 게임에 중독된 상태로 태어난다. 밀어내는 사람에게 이끌리고, 너무 쉽게 풀리는 관계는 시시하고, 상대를 어떻게 해보려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즐겁게 내 갈비뼈를 빼내어 바치는 중이고.... - 25% 


게다가 설정값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피차일반이다. 가치관이 합의된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모두의 꿈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갖가지 허상 중 하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30%


그래도 어쨌든, 면허가 박탈당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떠드는 값으로는 충분하다고 봐요. - 37%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슬픔이건 죄의식이건 다가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느끼지 않았다. 애당초 내가 그 뉴스를 본 건 가을에 접어들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정리된 의혹을 찾아 읽기는 편해도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늦은 시점이었다. - 56%


자신 바깥의 것들에 바쳐지는 맹목성이란 고결한 만큼 자기 본위다. 스스로의 몫이 아닌 것을 감히 자신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에, 그 오만한 착각 때문에 몰락마저 기쁘게 봉헌하는 것이다. - 58%


"현존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우선합니다."

박사는 그렇게만 답했다.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주입하는 대원칙이었다. -64%


기호들의 관계로만 환원되는 이해도 여전히 이해입니다. - 76%


더 많이 학습했는데도 더 모르는 역설적인 상황을 빚어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여전히 가설이라는 점을 다시 언급해둡니다). -82%


유연성을 발휘하는 친구와 악질적인 선동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 87% 


결국 인식을 약간만 왜곡시킨 다음 자기 본위로 끌어 오기만 하면 윤리학의 도구들을 사용해 묘한 일들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됩니다. - 90%


그런 이유들은 곧잘 타인의 이유와 경합하므로, 인간이 맺는 상호관계란 '상대에게 자신의 이유들을 정당화하거나 상대의 정당화를 받아들이는 절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수용과 거부가 행위의 도덕적 성격을 결정하고요. - 91% 


헌신과 애정과 자아도취를 혼동하고 그것을 믿어버리는 태도는 몹시도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 94%


참, 소설의 이야기는 이북으로 67%에서 마친다. 뒤에 붙은 건 소설에 덧붙이는 말, 아마도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여러가지 생각했을 기술적 발달의 현재 상황인데, 읽어볼 만 하다. 


뇌, 인공 뇌, 뇌에 생긴 병, 같은 것에 나는 저항하는 마음이 있다. 이야기가 그럴 듯함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이야기에 끌려들어가지 못한 건, 설계사의 성정이나 상황이었다. 아마도 사이코패쓰일 수 있는 약으로 다스리는 중인 설계사의 어떤 상황이 설계사를 가장 비중있는 화자, 내가 이입해야 하는 책의 화자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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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성부, 달 밝은 밤에 케이팩션
김이삭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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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어떻게 만들까, 상상하면서 읽었다. 

추리소설이나 SF의 효용은 대중에게 과학이나 합리의 태도를 고양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들이 감정에 대한 거라면, 추리소설은 그런 게 아니라고,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고, 모두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고양시킨다고.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이제 나는 그런 시기를 지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그런 걸 믿나, 합리라는 게 결국에는 가장 마지막 결정의 근거여야 한다고 믿는지 내 자신에게 물었다. 

추리소설이고 사건의 범인들을 추적하는 탐정의 시점으로 법과 제도 안에서 벌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지면서도, 다시 드러나지 않는 범죄들을 어떻게 벌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은 불가피했던 게 아닌가 또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바꿀 수 있는 게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바꿀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은 제대로 해야지요. 저는 검험 산파이니 검시는 제 의무이자 권리입니다."-7%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윗사람의 업무까지 할 줄 아는 건 곤란한 일이다.- 13%


선택지가 많은 것은 괴로움이라, 뭐든 할 수 있는 시대에 제약많은 시대의 씩씩한 여성들 이야기에 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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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업고튀어, 재밌습니다!

변우석은 멋지고, 김혜윤은 정말, 정말 정말 예쁩니다!

저는 이걸 초5 딸이랑 같이 봅니다. 


인생1회차 솔이는 사고로 다리를 잃고 병실에서 갓 데뷔한 보이밴드 멤버 선재의 전화를 받습니다. 퉁명스럽고 쌀쌀맞게 받았지만, 그래도 건네는 선재의 따뜻한 말에 다시 살 마음을 먹고 선재의 팬이 됩니다. 솔이에게 선재는 하늘에 뜬 별과 같은 존재라서, 콘서트가 끝난 한강 다리 위 고장난 휠체어를 탄 채 만난 선재에게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선재의 죽음을 뉴스로 듣고는 첫번째 타임슬립을 합니다. 

솔이의 타임슬립으로 운명은 조금씩 달라지고, 각각의 선재와 솔이는 조금씩 다른 경로로 다시 만납니다. 

저는 내내, 인생 1회차 선재의 죽음이나 2회차 선재의 죽음이 자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좋아한 솔이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깊은 절망일 거라고도 생각했구요. 그런데, 딸래미는 저 사람이 범인이잖아, 그럴 리 없어,라고 말해줍니다. 1회차 선재의 죽음이나 2회차 선재의 죽음의 경위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드라마는 그걸 알려줄 리 없지만, 3회차 선재의 죽음?이 드러난 것처럼 범인의 보복살해방식이 달랐던 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망한 사람을 죽이기는 좀 더 쉬워서, 1회차 선재나 2회차 선재는 상처없이 스스로 죽인 거라 오해받을 상황에 죽음을 맞은 걸 수도 있으니까요. 알려줄 리 없는 사실이지만, 그 죽음들을 솔이가 알면 알 수록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재는 어떠한가요. 사랑에 대한 판타지의 응축이라는 면에서, 선재의 지고지순함은 너 대신 죽은 거라면, 나는 괜찮다고 어제는 세번째 타임슬립한 솔이한테 이야기합니다. 

1회차 선재는 고백도 못하고 짝사랑한 이웃집 여자애가 위험에 처해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 그 아이를 구하고도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렸냐'는 원망을 듣습니다. 그러고도 '살아달라'고 '꼭 살아있어달라'고 모르는 사람인 채로 당부하는 아이돌이 됩니다. 이제 그 이웃집 여자애는 휠체어를 타고, 꼭 살아있어달라던 그 아이돌의 팬이 되어, 아무 것도 아니던 선재의 마음은 끝끝내 모르는 채로, 팬으로의 사랑을 말할 뿐입니다. 

2회차 선재는 타임슬립한 솔이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짧은 순간 받고, 어리둥절한 채로 내쳐져서는 역시나 아마도 솔이의 사고를 목격하고 역시 또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다가, 자신을 모르는 오랜 사랑 앞에서 절망감을 품은 채로 영문 모르게 죽습니다. 

3회차 선재는 살았고, 솔이에게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솔이는 선재의 팬이 아니고, 선재는 경쾌하게 살아가다가 솔이를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범인의 칼을 맞고는 위중한 상태에 빠집니다. 

다시 솔이는 세번째 타임슬립을 합니다. 이제 조금은 다른 시기, 대학생 시절로 갔습니다. 이게 10회차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지고지순한 첫사랑을 품은 남자애의 환상은 얼마나 강력한지, 사랑하지만 사랑받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애의 사랑은 얼마나 달콤한지, 시간이 어긋난 사랑 속에서 그 둘이 마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짜릿한지 이걸 보는 내가 너무 단 사탕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됩니다. 

열아홉 남자애의 마음과 서른 넷 여자애의 마음이 만나는 게 지금 시대가 그런 것 같았습니다. 뭐 그렇지만 정말 그런가, 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아홉의 잔인한 마음은 나 좋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1회차 솔이가 선재의 마음을 모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기는 합니다. 선재는 솔이의 오해를 내버려뒀고, 한 번도 마음을 알려준 적 없으니까요. 그런 솔이가 잔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걸을 수 없다는 절망감을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쏟아냈다는 것도, 그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는 것도 솔이의 잘못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그런 때가 있는 거니까요. 타인의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는 심정 같은 건 살아가면서 익히는 어떤 게 아닌가. 사랑이라는 감정의 잔인함은 자신의 마음에 생기기 전에는 타인의 감정 따위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말입니다. 

타임슬립처럼 불가능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고 보는 이유는, 어긋나는 시간에 대한 한탄일 겁니다. 어긋나는 시간들 속에서 용케도 살면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의 시간과 네 마음의 시간이 어긋나도 어긋난 채로 감당하는 마음들도 대단하구요. 

다시 또 월요일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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