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 가족 가운데, 유일한 청인 인 하은결은 모범생으로 가족들의 통역사로 살아가는 중에, 기타를 배운다. 자기만의 비밀로 기타를 배우고, 거리공연을 하다가 정식으로 밴드멤버가 된다. 하은결의 아버지는 아직 고등학생인, 공부를 잘 해서 자랑스러운 자신의 아들이 다른 직업을 갖기를 바라면서 반대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폭발-폭발이라 하기에는 소리가 없지-하는 와중에 타임슬립해서 하은결은 지금 자신과 같은 나이의 아버지가 사는 시대로 이동한다. 2023년의 하은결인 채로, 1995년의 아버지 하이찬을 만나서 같이 밴드를 한다. 사고로 청력을 잃은 후천적 농인인 아버지의 청춘이 어땠는지, 선천적 농인이었던 어머니는 어땠는지 만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계모에게 말하기를 강요받는 어머니의 애달픈 삶을 개선하고, 아버지의 사고를 막겠다는 아무도 주지 않은 미션을 스스로 부여해서는 1995년의 모험을 한다. 돈 번다고 자신의 딸은 학대하는 계모 아래 두고 밖으로만 도는 어머니의 부자 아버지, 그러니까 있었던 미래에는 존재를 몰랐던 연락도 없던 외할아버지를 1995년 아직 들을 수 있는 하이찬(아버지)이 미래의 어머니 윤청아와 함께 만나서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세상 풍파를 막는 방패라고,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지만, 청아(미래의 부인이고, 하은결의 어머니)에게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 말은 아니고 헤밍웨이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헤밍웨이, 아니고 스탕달. 아버지 아니고 어머니.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어"


타임슬립물에서 미래를 해피하게 바꾸는 설정,에 거부감을 갖는다. 기존의 미래?라는 것과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 이 타임 슬립 자체가 유효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거지. 같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같은 존재의 사람이 과연 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거다. 바꿀 수도 없는데 여행을 왜 하겠어?라고 뭔가 목적론자 같은 태도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여행 후에 달라진 게 나 뿐이어도, 삶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즐겁게 따라온 청량한 드라마의 엔딩에는 실망한다. 


그대로 옮겨놓고 싶었던 저 대화는 즐거웠고, 미래에서 온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동년배 소년에게 아버지에게 받을 만한 느낌을 받았다는 외로운 소년은 좋았다. 

부유하고 화려한 미래,라는 나의 불편한 엔딩은 이 이야기를 보는 사람이 사십대 자아가 없다는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직 청량한 젊은이들이길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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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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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다음에 책을 구해 읽었다.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외삼촌이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건네는 노트와 같은 구성이다. 소년이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있고, 그 사건들 다음에 외삼촌이 소년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사랑의 학교'가 생각났다. 

영화를 볼 때는, 잘못을 저지른 자국에 대한 변명이다,라는 식의 평가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설로 읽으니까, 뭔가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게 신기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지만, 부유하고, 그 부유함의 배경은 없다. 1930년대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부유한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 사이에서 식민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아이에게 어른이 해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나는 이미 어른인데다가 식민지 조선인이었을 거라서 걸리는 감정들이 생긴다.

아이에게, 얼마나 정직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닥치고, 어른이 가지는 모순된 감정들이 닥친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야기 가운데 아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 소설의 단순하고 밝은 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다가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어른들이, 아이들은 보호한답시고, 아이들에게 다른 미래를 주겠다고,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밖에 나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어. 이 정도 이야기조차 금서라고 막았다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어른이 되었을 때, 나쁘지 않은 세상은 가능한가 생각하는 거다. 잔인함을 적당히 막아서야 하지만, 지나치게 톤 다운시킨 이야기 가운데, 삶의 잔인함을 직시할 수도 없는 아이들을 키웠던가 회의하기도 하는 거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아이들도 느낄 지 궁금한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으면서, 부모인 내가 어때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네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는 세상이 인정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자립한 사람이 될 수 없단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렇게만 해도 돼. 하지만 지금 네 나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단다. 중요한 건 세상의 눈이 아니라 네 눈이야. 네 눈이 무엇에서 사람의 훌륭함을 찾고 있는지, 그것을 네 영혼이 알고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진심으로 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야 해.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네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때도 그 감정은 언제나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단다. 기타미를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누가 뭐래도"하는 오기가 필요하단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와 네 엄마가 바라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면서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단지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이 될 뿐 네 자신에게 떳떳한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한단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들은 남들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신경 쓰다가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인지 잊어버리고는 하지.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코페르,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 마음이 감동받을 때와 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렴. 그 기분을 잊지 말고 언제나 그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해 -p52~53, 용감한 친구


어머니는 코페르를 보지 않고 뜨개질을 계속하면서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엄마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엄마가 겪었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라. 그리고 엄마보다 더 많이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인생에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단순히 그 일만 놓고 본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잘못했다 싶겠지. 하지만 그렇게 후회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경험은 절대로 나쁜 게 아니야.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거란다. 너도 그만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거고.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 자신에게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실수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선다면 누군가는 그 노력과 마음을 알아 줄 거야.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하느님은 분명히 보고 계실 거야."-p215~216, 돌층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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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stavrogin/15030330 , 이 백자평을 봤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렸을 때, 티비로 전국노래자랑,을 보는데, 초청무용수로 공옥진여사가 나왔다. (https://namu.wiki/w/%EA%B3%B5%EC%98%A5%EC%A7%84)

어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어떤 모습을 지금 저기 티비에서 흉내내는 춤을 추는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들 보고 있다. 그 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 모습을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면서, 웃었을까, 따라 춤을 췄을까. 내가 받은 충격은 춤 때문이었을까?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내 기억이 정확한지도 자신하지 못한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손가락이 없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말을 못하는 사람, 살면서 쉽게 만나지지는 않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볼 지 어떻게 대할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지나치게 무심한 것도. 


그런데도, 이런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장애人' 대신 '장애友',

'귀머거리' 대신 '농인',

'벙어리' 장갑 대신 '손모아'장갑,

'장님' 대신 '시각장애인',


약점이 드러난다고 해서, 내 전부가 약하지는 않고, 친구라는 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처럼 직관적인 우리말 표현 대신 알아차리기 힘든 한자 표현을 쓰는 것은, 무언가 거리를 만드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혐오표현,에서 '혐오'라는 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도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사진을 보고 설명해 주세요'에 말을 찾느라 옴싹달싹 못 하는 사람 이야기를 만난다. 


'긴 의자가 양쪽으로 있는 곳에, 흑인인 엄마와 아이가 울고 있어요'라고 설명할 수 있을 사진 한 장인데, '흑인'이 혐오표현이라고 수정하려고 '아프로아메리칸'을 선택하려 든다.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사진을 보고, '흑인'이란 표현대신 '아프로아메리칸'을 택할 수 없다. 

'아메리칸'이란 표현은 부정확해진다. 관찰하는 행위, 표현하는 행위, 에 판단하고 검열하는 개입이 일어나고, 관찰은 부정확하게 표현되면서 부적절한 의사소통을 일으킨다. 




무언가를 혐오표현이라고 하지 말라고 내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공옥진 여사의 춤이 혐오스럽다고 무대에 서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곱사,의 움직임을 살면서 평생 못 보았을 수도 있다. 

벙어리장갑이라는 비유 가운데, 나는 말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간접 체험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방법은 의미를 바꾸는 것 뿐이라고, 자부심의 표현으로 '딴따라'를 쓰는 박진영을 보면서 생각한다. 

검열이나 억압으로 혐오표현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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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04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그물에 완전히 포획된 사람들이지요. 도착증에 가깝습니다.
 

토요일, 아이들 모두와 영화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봤다. 

보고 나온 차 안 에서, 

"어떻게 제 머리를 그렇게 피가 철철 나게 칠 수 있다니?"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왜 그랬다니?"

"학교가기 싫으니까."


"센과 치히로,도 생각나고, 하울도 생각나고 좋던데."


"어려웠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나는 이 영화에서 노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하려는 말과 같다고 생각했다. 

가상의 공간으로 달아나지 마, 살아. 현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거다. 


악의가 없이 선의로만 가득 찬 세상은 불가능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삶보다 선의만큼 악의도 있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들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노골적이라 싫었고, 별로였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고 싶은 말은 그거지만, 나도 어떻게 말할 지 알 수 없다는 혼돈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어서 좋았다. 

살아가는 가운데 마주치는 모순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로 한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환상적인 모험 다음 순간, 언제나 돌아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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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에서는 아는 형님이 재방송 중인데,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에서 데뷔해서 한국어에 어눌한 연예인들이 퀴즈쇼, 형태로 진행하고 있었다. 욕이거나 욕처럼 들리는 말들로 당황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저녁을 먹다말고 

"욕은 왜 하면 안 되?" 

"그거야, 들으면 기분 나쁘니까."

"기분 좋을 때, 하는 건 어때? 혼자 하는 건?"

"뭐 할 수야 있지만, 다른 사람 기분 나쁜 건 네가 어떻게 못 하잖아?"

"옳고 그른 건 누가 정하는데!"

이 무슨 뜬금포인가!!! 중2병인가. 아직 중2는 아닌데. 

"참, 나. 옳거나 그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사는데, 너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는 거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누가 널 찌를 수도 있는 거고."


오직, 내 마음만 내 마음대로다. 가끔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다들 기분 나쁘다는 이유를 내가 동의하지 못 한다고 해서, 그런 말을 칭찬으로 쓴다 한들 상대가 칭찬으로 듣겠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를 '돼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어린 딸에게,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어. 

다들 칭찬으로 하는 말을 내가 동의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말에 화를 낸다 한 들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겠냐고. 아유, 내가 본 아기 중에 제일 예쁘네,라고 말하는 언니에게, 그 말이 가지는 어떤 차별성과 비교의 태도, 이미 주어져 개선 불가능한 특성에 대한 칭찬이 아이를 얼마나 한심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서 뭐하냐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적당히 내 의견을 감추는 거지. 

살아남기 위해 조심하는 거지. 

가끔 너무 크게 웃는 것도, 어떤 이상한 사람의 심사를 건드릴지 알 수 없는데. 

해서는 안 되는 행동, 그래, 한 번쯤 해보고 댓가를 치를 수도 있겠지. 

운이 좋다면 살아남겠지만, 그런 데 자신의 운을 쓰고 싶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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