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찬와이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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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을 모른다는 젊은 직원에게 '패왕별희 안 봤어요?'라고 질문을 했었다. 

내가 문화대혁명을 아는 이유는 '패왕별희'를 봤기 때문이었다. 

내가 칠레에서 군부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죽은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이유는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 본 영화와 소설 가운데,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알고 무언가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첨밀밀,을 기획했다는 작가의 이 책을 읽었다. 첨밀밀,을 좋은 영화로 기억하는 나는, 주성치를 좋아하고, 홍콩의 영화들을 기억하는 나는, 홍콩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는다. 

홍콩은 청나라가 망하는 와중에 영국에 할양되었다가 97년 다시 중국에 귀속되었다. 시사지로 우산혁명에 대해 본 나는, 저 투쟁의 명분을 동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에 할양되었다가 중국에 귀속되었다, 에서 국가 정체성이 강한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제 홍콩은 중국과 같은 나라라고, 도대체 저들의 주장은 뭐야?라고도 했던 거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궁금했어서, 이 책을 읽었다. 

85년에 태어난 누나가, 97년에 태어난 동생과 함께 홍콩에 산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흩어졌다가 모이는 가족들 가운데, 누나는 동생을 특히 사랑하고, 홍콩을 사랑한다. 

정치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역사의 격류 가운데 있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인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산업에 깊이 들어가 있는 작가의 책은 첨밀밀을 떠오르게 한다. 대만의 청춘영화같기도 하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틋함, 화려한 한 시기를 보내버린 도시를 살아내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본다. 변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굳건함과 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함을 본다. 살아간다. 


아빠의 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빠는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쪽이 본인이 아니라 우리이며 우리가 사고를 첬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점은 아빠가 이 도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나보다 작지 않다고 여긴다는 데 있었다. 그게 바로 문제였다. 나는 화가 났다기보다 충격을 받았다. 가치관이라는 게 이렇게 완전히 바뀔 수도 있었다. 우리의 기준이 더는 같지 않았다. 나는 침묵에 빠졌다. -p184


커러, 너는 혈기 왕성한 나이라 다른 사람의 말투나 억양이 너랑 조금만 달라도 견디기 힘들 거야. 사실 그건 내용이나 표제와 무관해. 너의 청춘은 어디서든 무적이고, 네 임무는 다른 사람이 틀렸음을 최선을 다해 증명하는 거니까. 때로는 주성치가 어떤 영화에서 특정 대사를 했는지를 두고도 상대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할 것 같겠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옳은 일을 계속하기만 하면 되지, 다른 사람의 잘못에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을 거야. 증명하기 위해 네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래, 그건 시간이 한참 지나 네 청춘이 시들 때겠지. 그게 인생의 여정이고 상식인데 왜 다들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어. 젊음이란 전력을 다해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인데.-p224~p225


알고 보니 나는 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사랑했던 모습으로 아빠를 되돌릴 능력이 없었을 뿐이었다. - p238


엄마가 말했다. 커러의 슬픔은 나도 다 알아. 하지만 스스로 감당해야 해. 그런 외로움은 누가 구제해 줄 수 없어. 어쩌면 신앙이 구원해 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르겠어. 이건 운명이 열어 준 문이고 커러 혼자만 통과할 수 있는 문이야. 다른 사람은 아무리 기고 숨어도 들어갈 수 없어. 나는 커러를 잃지 않을 거야. 영원히 내 가슴속에 있으니까. 네 아빠가 "누구도 나만의 봄빛을 빼앗을 수 없고 누구도 내 가슴속 태양을 꺼뜨릴 수 없네."라고 알려 주었어. 내가 내 고통을 해결하려 어떤 방법을 쓰든, 그게 떠남이든 소멸이든 네 아빠가 너와 커러를 잘 보살피는 게 나를 사랑하는 네 아빠의 방식임을 알고 있었어. 어느 날 커러가 사라졌다고 네가 말하면, 상상만 해도 벌써 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쏟아질 거 같지만, 나는 그게 커러의 진심이 아님을 이해해야 해. 커러가 마지막 일 분까지 온 힘을 다해 저항했음을 믿어야 한다고. 그래야만 이미 사라졌어도 가장 좋은 부분을 내 안에 남겨 내 일부로 만들 수 있어. -p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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