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얼까
각자의 화면을 따로 보다가도 차트를 달리는 남자를 티비에서 찾으면 5학년 아들 놈이 본다면서 폰을 내려놓는다. 오빠를 따라서인지 2학년 딸도 같이 본다. 그렇게 같이 보는 게 좋아서, 폰을 내려놓는 게 좋아서 나도 같이 본다. 그렇게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 세기의 사기꾼 편을 보았다.
그 차트에서 흑인인 체 한 유대계 백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여성은, 스스로를 흑인으로 꾸며서는 흑인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고 흑인민권운동 관련 연구를 하고, 관련 상도 받았다.
나는, 지금의 어떤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들 안에 이 상황은 어떻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가, 생각하느라 혼란스러웠다. 성별을 지칭하는 말들이 어느 나라에서는 스무 개 가까이로 늘고 있다고 한다. 양성평등,이라는 말은 두 개의 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표현이라고도 한다. 남성, 여성 외에도 트랜스, 외에도, 얼마나 많은 성별 분류가 있는지 이제 나는 따라잡는 걸 포기했다. 그걸 다 알고 유식한 체 해야 하나 회의한다.
그 사람은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흑인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흑인으로 살았다.
그 사람은 남성(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여성(또는 남성)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여성(또는 남성)으로 살았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왜 전자는 세기의 사기꾼이 되어 티비에 등장하고 후자는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존중은 무엇인가.
나는 눈에 보이는 검은 피부를 흑인이라고 하고, 눈에 보이는 하얀 피부를 백인이라고 하고, 흑인,이라는 말이 혐오표현이라는 데에도 판단을 유보한다.
내가 나눈 분류들이 크고 엉성해서 어디선가 예외들이 조금씩 비어져 나오는 것도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수긍한다. 나누고 또 나누어 각각에 이름붙이는 서양의 방식보다 눈곱만한 공통점으로도 묶고 또 묶는 동양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지금은 그 모든 말들을 따라잡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다른 저마다의 고통으로 힘겹다.
예전에 쓴 글(https://blog.aladin.co.kr/hahayo/10355147)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