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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도대체 이 느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처음 카페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서 주제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가 떠올랐고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예상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 하루만에 다 읽어버리고 난 지금의 느낌은 <눈먼자들의 도시>를 읽고나서의 충격과는 격이 다른 또다른 의미에서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가를, 이런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것인가 하는 기쁨도 있다. <멀티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들어 읽었던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손꼽을 수 있는 대단한 작품이다.
소설은 '...을 조심하게, 젊은이'라는 노인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다. 무엇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고민하는 남자앞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 구(球). 살아있는 사람은 무조건 집어삼키는 구를 피해서 그는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한다. 세상은 금세 혼돈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패닉상태에 빠져 허둥대기 시작한다. 검은 구가 주는 공포를 피해 스스로 죽는 사람도 생기고 동시에 도망치는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폭력과 무질서가 생겨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세상에서 남자는 부모님을 찾는 여정을 떠나고 검은 구의 추적을 피하며 끝나지 않을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데... 결국 '...을 조심하게, 젊은이'라는 말로 끝나는 긴 이야기의 결론은 결코 희망적이지도 않고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갑갑한 결말이지만 읽은 후의 느낌은 뭔가 내 속의 답답한 무언가가 사라져 버렸다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사람들이 '절망의 구'라 이름지은 구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왜 나타났는지, 왜 사람들을 모두 삼켰는지, 왜 남자는 삼키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어느것 하나 설명하지 않은 채 소설은 끝나버린다. 명확히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독자 스스로 설명해 나가길 원하는 결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하나씩 생각해 보았으나 명확히 설명이 되지는 않았다. 단 하나 '절망의 구'의 정체는 아마도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무언지 모르고 쫓기고 있는 초조함과 불안과 공포 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구의 크기가 거대하지 않는 직경 2미터 정도로 설정된 것은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가는 불안과 공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그리 크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의 속도가 사람의 걷는 속도와 비슷하게 설정된 것도 우리가 쫓기고 있는 그 무언가가 우리가 평소의 걸음걸이 대로 걸어가면, 우리가 평소처럼 살아간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단 팔십이일 동안 벌어진 세상의 종말에서 보여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너무도 실망스러운 모습이지만 세상의 모든 사회의 모습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차라리 <눈먼자들의 도시>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배경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주제사라마구가 갑작스런 재앙에 대해 인간이 보이는 도덕성의 파괴와 인간의 본성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이 소설은 도덕성을 파괴해 나갈 인간마저 사라지는 재앙속에서 인간의 공포와 절망, 그 끔찍한 심리적 공황속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다양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 공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공포는 혼란은 낳고, 공포는 믿음을 낳고, 공포는 이기심을 낳고, 공포는 폭력을 낳고, 결국 공포는 지독한 고독을 남긴다. 공포가 사람들을 잠식해 나가는 모습들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절대 영웅적이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나약한 주인공이 그 종말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말 그대로 철저한 절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그 모든 구들을 사라지게 하고 삼켰던 사람들을 뱉어내게 하면서도 그들의 추후의 모습 또한 철저히 절망적이다. 그러나 절망에 굴하지 않고 또 다시 달아나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또 다시 찾아올 희망을 이야기한다. 결국 노인이 말한 '...을 조심하게, 젊은이'라는 말은 '절망'을 조심하라는 경고일 것이다. 가장 절망적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결국 희망을 이야기 하는 소설이다.
소설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위한 컨텐츠를 구하기 위한 문학상에 걸맞게 정말로 제대로 된 소설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이 순식간에 읽힐 정도의 몰입감은 어떤 영화보다 강했고 어떤 드라마 보다 인상적이다. 영화가 되었든 드라마가 되었든 성공은 장담할 수 있는 소설이다. 정말 제대로 뽑은 소설이다. 아... 이 느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