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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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사회 풍속의 흔적이다. 


           -  미하일  바흐친 (Mikhail Bakhtin)

 




  



    대만 출신 문화비평가 탕누어唐諾는 이 책에서 (한자의 뿌리가 된) 갑골문에 담긴 인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통시적으로 탐찰한다. 갑골문 이전 존재했던 소수의 문자나 부호부터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자어까지 이른바 한자의 변천 과정을 인문학적 사유와 곁들여 풀어낸다. 한눈에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부터 상상과 추론이 필요한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갑골문을 섬세하게 재현해 내면서 구체적인 문자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데, 한자에 생무지인 사람도 어렵지 않게 그 아름답고 기이한 갑골문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다. 



   상형자는 문자이기 때문에 미세한 것까지 완벽하게 그릴 필요는 없다.그것이 어떤 흔적이든 발자국이든 새끼줄이든 암호든 간에,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사물 또는 개념의 독특하고 구별되는 특징을 포착할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 특징은 보통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구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사물(최대의 공동 기억)이 가장 좋다. 위로는 해와 달과 별을 올려다보고 아래로는 들짐승과 날짐승, 벌레와 물고기들을 굽어보게 된다. 문자는 편리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중첩되며, 보고도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내일 해가 뜨고 날이 밝을 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일 수 있는 그런 것들로부터 시작됐다. (본문 중에서)



    탕누어는 익숙하거나 낯선 한자어의 갑골문 조형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면서, 그 이면에 깔린 놀랍고 참신한 이야기를 길어올린다. 태아가 어머니의 둔부 아래쪽으로 빠져나오는 출산 과정을 소박하게 묘사하고 있는 '육 ' 자(출산 과정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이 글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어미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 보 ' 자, 손에 밧줄을 잡고 갓난아기를 교살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 기 ' 자, 작대기로 노인을 살해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교' 자 등 하나의 문자 안에 이토록 광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익숙한 한자어도 오래 들여다 보게 된다. 한 획 한 획, 흘리듯 찍힌 점 하나에도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망' 자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진행 중인 '봄'의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완성인 이유는 우리가 아직 선명하게 보지 못했거나, 선명하게 보았다 해도 아직 분명하게 생각하고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본 어떤 대상이 사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거나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눈앞의 사물이 우리의 망막 위에 선명하게 맺히는 자연현상 외에 '바라본다'는 행위는 '바람'과 응시', '기다림'을 나타낼 수 있고 '상실'이나 '고독' 같은 의미의 층차를 담을 수도 있다. (본문 중에서)



   "영원한 미완성의 체계"라 할 수 있는 문자의 가변성은 끝없는 변화 속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자의 조자造字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당대인의 사유 방식과 생활 풍속이 흡수될 수밖에 없다. 인간 삶의 형태나 사고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고 발전한다. 삶의 기본 도구인 문자의 변화 역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문자의 불완전성은 곧 인간의 불완전성이기도 한 것인데. "잘못 이해하기"와 "잘못 읽기", "잘못 쓰기"도 문자의 생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미1' 자처럼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통찰에서 탄생한 문자도 있다. 하지만 무작위적이고 임의적인, 거친 황무지 태생의 문자들도 수두룩하다. 



     '시' 자 부호의 진정한 불운은 한 구의 시체가 됐다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살듯이 더러운 곳으로 추락하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인체의 부호가 있는 글자는 갑골문 중 수가 가장 많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서篆書'에서 '예서隸書'를 거쳐 '해서楷書'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른 부호들은 대체로 순조롭게 '인' 또는 인' 의 형태로 변화했고, 상당수는 다른 선 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다. 오직 몇 개의 글자만이 고독하게 이 길을 걸어 '시' 자가 됐다. 재수 없게 '시'로 변한 글자는 그 의미가 우아하지 못하기가 상당히 쉽다. 그중 '미'자는 이미 상당히 문명화된 글자이고, 그보다 못한 것으로는 '고'(궁둥이)자와 '초'(남성의 음부)자, '비'(여성의 음부)자 등이 있으며, 배설을 나타내는 '비' 자와 '시' 자, '요' 자 등도 있다. 이런 좋지 않은 의미들을 모두 종합해 분석해 보아도, '시' 자 부호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음모를 꾸미는 것은 문자의 발전에서 끝없이 나타나는 인간의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사유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무려 3,000~4,000년여의 세월을 가로질러 지금 여기 이런 형태로 우리 앞에 놓인 (태연자약한) 한자어들이 숨기고 있는 아름답거나 잔혹한 생의 궤적을 살피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의 언어와 언어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삼아도 될 것 같다. 굳이 의미를 캐지 않더라도 좋다. 이 책을 구성하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번뜩이는 통찰, 해학만으로도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尾' 자의 갑골문 조형

 

 

 

 

 

 






1

   이 갑골문은 부엔디아 가족의 근친혼으로 태어난 왕도마뱀 같은 기형아일까? 아니면 가을날 오후에 참억새나 사리풀을 꺾어 몸에 꽂고 가는 딸아이의 지난날일까? 

이치로 보자면 답은 후자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글자의 엉덩이에 자라난 괴상한 꼬리를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무無' 자에 나오는 사람의 손에도 나타났었다. (...) 이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춤을 추는 사람을 묘사한 글자다. 두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 딸아이가 허리춤에 꽂았던 참억새나 사리풀이다. '미尾' 자의 주인공인 괴상한 사람의 꼬리와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진짜 꼬리로 조상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억을 남기거나 일찍이 발생했던 인류의 참극을 기록하여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인공으로 제작한 물건으로 일종의 장식품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럴 경우 이 물건은 축제나 제사 때 사용한 일종의 분장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꼬리는 도처에 얼마든지 있는데, 왜 굳이 인공 조형물을 이용하여 진실을 가장하고 혼란스럽게 한단 말인가? 나중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글자를 만든 사람의 고심과 섬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물 형상의 갑골문 중 가장 아름답고 길게 말린 꼬리를 가진 것으로는 호랑이와 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동물들의 꼬리는 당연하게도 '맞는 동물'의 '맞는 위치'에 자라나 있다. 꼬리의 위치가 너무 정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동물들의 꼬리를 구별하여 글자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동물 전체가 아닌 꼬리로 옮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지사 부호의 직선 커서 또는 곡선 커서를 빌려 표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글자를 만든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1차적 감각의 실존 세계에서 벗어난, 기이하고 경악스러운 나머지 그 괴이한 꼬리를 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정보를 고착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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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반양장) 데일 카네기 시리즈 (코너스톤) 1
데일 카네기 지음, 바른번역 옮김 / 코너스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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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계발서의 고전으로 꼽히는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다. 데일 카네기의 저서들은 국내에서 이미 수차례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번역서의 완성도는 옮긴이의 자질에 달려 있다. 원문에 충실한 건 기본이고, 무엇보다 시대에 부합하는 매끄러운 문장이 요구된다. 올해 초 '코너스톤'이 펴낸 데일 카네기 시리즈 완역본은 출판 번역 전문 기업 '바른 번역'에서 맡았다. '바른 번역' 대표는 역자 서문에서 기존 번역서의 오역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가독성을 높이고자 했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판에 박힌 역자 서문이지만 본문을 읽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비교적 문장이 매끄럽고 오탈자도 거의 없다(서너 개의 대수롭지 않은 오자를 발견했을 뿐이다). 앉은 자리에서 술술 읽어내려갔다. 내용이 쏙쏙 들어온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 마라. 비난하지 마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라. 진심을 담아 칭찬하라. 웃어라. 익숙하고 빤한 충언들을 일반적인 사례 중심으로 풀어내면서 카네기는 읽는 이의 공감을 끌어낸다. 링컨과 루스벨트, 나폴레옹, 알 카포네 같은 유명인사부터 일반인의 사례까지 적절하게 녹여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일화들을 나열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지만, 내용이 분산되지 않고 통일성을 이룬다. 카네기가 책 전반에서 강조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대처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통해 카네기는 인간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우리가 방울뱀이 아닌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부모가 방울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소에게 입 맞추거나 뱀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인도의 브라마푸트라 강가에 사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화내고, 말도 안 통하고, 고집불통인 사람도 그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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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과 짐 에디션 D(desire) 6
앙리 피에르 로셰 지음, 장소미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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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피에르 로셰가 일흔넷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파격적 관계를 그리는 이 작품은 1961년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동명 영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원작에 깊은 감명을 받은 트뤼포는 영화 대사나 내레이션에 로셰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원작에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물 구조를 줄과 짐, 카트린, 알베르로 압축한 정도가 각색 내용의 전부였다. 이십대의 젊은 감독 트뤼포는 영화잡지 '아르(Arts)'에서줄과 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현대소설 중 하나인 앙리 피에르 로셰의 <줄과 짐>은 끊임없이 재고되는 새롭고 미학적인 도덕 덕분에 평생토록 거의 충돌 없이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는 두 친구와 그들의 공통된 여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루시가 날 원하지 않네. 이대로 그녀를 잃을까 봐, 그녀가 내 인생에서 완전히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 , 그녀를 사랑하게, 그녀와 결혼해, 내가 그녀를 계속 볼 수 있도록 해주게. (본문 중에서)

 

    영화에서는 줄과 짐이 공유한 연인을 '카트린' 하나로 압축하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루시를 포함해 여러 명의 연인들이 등장한다. 줄과 짐은 연인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규칙을 창조한다. 기존의 법칙이 우세하는 세계에서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는 이들의 사랑은 매순간이 모험이고 일탈이 된다.

 

   카트린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순간 동안만 사랑하는 것 같아." 이 순간은 늘 다시 찾아들었다. "사랑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형벌이야." 줄이 말했다. (본문 중에서)

 

    이성과 본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젊은 연인들을 통해 줄과 짐은 삶의 이중성과 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작고 통통한 독일인 줄" "크고 호리호리한 프랑스인 짐", 성녀 같은 루시와 마녀 같은 카트린 등 인물들의 대조적인 면모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카트린'은 여성의 이중성을 가감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카트린에게는 연인들 각각이 별개의 세계였다. 이 사람과 벌어지는 일은 나머지 사람들과 무관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그들의 여자를 질투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이 세계의 규칙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자기 안의 이중성을 수용하는 행위이다. 로셰는 이 소설에서 모순적 인간성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한복판에 내던져진 인물들의 투쟁과 좌절을 시적인 문장으로 담아낸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사랑 방식은 보통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정색(正色) 아래 감춰진 욕망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삶의 근원에 도전한 거야. 그걸 전투의 무기로 삼았고. 그래서 삶이 우리를 불임으로 만들고 자기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한 거야. (본문 중에서)


 

    놀랍게도 이 소설은 로셰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줄과 연인을 공유한 소설 속 인물 짐이 로셰의 분신이다. 일흔이 넘은 로셰가 젊은 시절의 연애사 소설에 담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결코 한데 묶일 수 없는 것들이 하나의 세계에 붙들려 있다는 삶의 모순, 거기서 빚어지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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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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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 작은 상실로 이루어진 이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남겨진 자들'이다. 익숙한 사람과 삶의 공간에서 내쳐진 '남겨진 자들'은 아스라한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확인한다. 지금 여기 없는 것들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유령적 삶. 네 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 이 작품집에서 미야모토 테루는 바로 이 삶의 환상성(喚想性)을 미려한 문장으로 선보인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뒤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멀어져갔습니다. ㅡ <환상의 빛> 중에서 


     표제작 <환상의 빛>은 어느 날 불쑥 떠나버린 전남편을 향한 여인의 독백으로 채워진다. 서른 두 살의 유미코는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남편을 마음에서 완전히 놓아버릴 수가 없다. 첫 아이를 낳은 지 채 세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부부 간의 불화나 빚 같은 것도 없었다. 퇴근 후 단골 가게에서 커피 한 잔을 외상으로 마신 유미코의 전남편은 한밤의 철로 위에서 마주 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은 없는 그를 향해 "열심히 말을 걸"면서 유미코는 불가해한 시간의 골을 들여다본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져버리는 활짝 핀 벚꽃을, 아야코는 툇마루에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ㅡ <밤 벚꽃> 중에서 


     한때 우리가 묻어두었던 감정들, 눈여겨보지 못했던 사소한 진실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도착하기도 한다. <밤 벚꽃>의 주인공 아야코에게 그것은 가난한 신혼부부의 형태로 찾아온다. 벚꽃 지는 봄밤, 수줍은 신혼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아야코는 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감정과 맞닥뜨린다. 죽은 아들의 일주기를 앞두고 재회한 전남편 유조에 대한 미련과 회한이다. 유조는 "타인이 된 지 벌써 이십 년이나 된 먼 사람". 가뭇없이 스러져버린 좋은 시절을, 소리없이 흩날리는 저 벚꽃잎들을 아야코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 보세요. 이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이 있지요. 커다란 물고기 떼가 바다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파도 사이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답니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 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ㅡ <환상의 빛> 중에서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 <양철지붕에 대하여>에서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이라고 했다. 네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삶과 죽음, 현실과 기억의 경계에서 생의 이면, 거기 숨어 있는 실밥 같은 진실들을 발견하고 담담히 응시한다.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술래이고 남겨진 자이다. 삶이 숨겨놓은 메시지는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삶의 뒷모습만을 쫓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뒷모습에 대고 끝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삶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심오한 이유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 미야모토 테루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이토록 불가해한 생의 허무에 접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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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폭격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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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은 이 소설에서 "전시와 평시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현대인의 기계적인 일상,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무력감을 '적국', '폭격' 따위의 상징적인 장치들로 풀어낸다. 매일 무작위로 미사일이 떨어지는 서울 시내가 이야기의 주요무대이자 서사의 발화점이 된다. 폭격 장소나 그 수법에서 적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전쟁 수위를 조절하자는 목적에서 조직된 에스컬레이터 위원회 직원 이민소는 작업 현장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폭격된 장소들이 하나 같이 자신의 추억이 얽힌 맛집이었던 것이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있는 인물 민아리는 의문의 사고로 실종된 상태이다. 과연 이 전쟁의 실체는 무얼까. 민아리에 대한 그리움이 낳은 이민소의 망상일까. 아니면 어딘가 생존해 있는 민아리의 특별한 메시지일까.

 

    그는 그 식당에서 맨 처음 짬뽕을 먹은 날을 떠올렸다. 갑자기 튀어오른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물론 기억이란 그런 식으로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왠지 더 절절해지는 것. 그게 기억이었다. 사람이나 음식이나 다 그랬다. (본문 중에서)

 

     소설의 무대가 되는 서울, 매일 미사일이 떨어지는 위태로운 가상의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인의 지금, 여기를 가리키는 기호이다. 폭격 맞은 것처럼, 익숙한 장소나 사람들이 한순간 훼손되거나 사라지는 일이 예사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기억'은 잃어버린 세계에서 날아오는 특별한 메시지가 아니라 '망상'처럼 덧없고 불온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육백 개가 넘는 미사일이 쏟아진 지금, 사라진 장소나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직 파손되지 않은 공간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 . . . ) 사라진 것들은 서서히 존재감이 무뎌져가기 마련이었다. 어떤 장소를 떠올릴 때마다 그곳이 아직 남아 있는지 남아 있지 않은지 확신할 수가 없는 난감함. 그렇게 세상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존재 여부가 확인될 때마다 그냥 흐릿한 기억으로 남겨두는 일이 많아졌다. (본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난 사월의 끔찍한 참사를 떠올릴 것 같다. 국가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와 관계자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국민들의 분노, 무력감이 이야기 곳곳 스며 있다. 배명훈은 후기에서 그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이 소설은 세월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며, 실제로 사건이 있기 직전에 씌어졌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겠지만, 글쎄, 어쩌면 기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사건은 벌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려지고 있을 테니까. 수많은 참사 중에 하나 정도로 기억될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야기'는 세월을 몰라서, 다행이다. 실체를 잃은 기억의 대상을 붙들어주는 것. 이야기의 힘이다. 이야기를 읽는 이의 힘이기도 하고.

 

    그가 잠이 들지 못하는 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그도 아니면 어떤 한순간을. (본문 중에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를 한데 섞어 요리한 이 소설은 읽는 이의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여러가지 맛과 식감을 제공하는 음식처럼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은 전쟁이다. 끝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와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없이 긴장 상태를 지속하는 미스터리다. 뜨거운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허물어져 내린다. 사랑의 기억을 증명해 줄 실체를 찾아 차가운 잿더미를 뒤적거린다. 불분명한 기억만을 안고 지난 삶의 폐허 위에 남겨지는 것. 한순간 유령적 존재로 떠돌게 된 우리가 실존을 증명할 방법은 무엇일까. 나 여기 있다고, 거기 당신, 나 좀 봐달라고, 무심한 당신 발끝에 미사일을 날려보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또 하나의 전쟁이 발발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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