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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평점 :
크고 작은 상실로 이루어진 이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남겨진 자들'이다. 익숙한 사람과 삶의 공간에서 내쳐진 '남겨진 자들'은 아스라한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생존을 확인한다. 지금 여기 없는 것들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유령적 삶. 네 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 이 작품집에서 미야모토 테루는 바로 이 삶의 환상성(喚想性)을 미려한 문장으로 선보인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뒤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멀어져갔습니다. ㅡ <환상의 빛> 중에서
표제작 <환상의 빛>은 어느 날 불쑥 떠나버린 전남편을 향한 여인의 독백으로 채워진다. 서른 두 살의 유미코는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남편을 마음에서 완전히 놓아버릴 수가 없다. 첫 아이를 낳은 지 채 세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부부 간의 불화나 빚 같은 것도 없었다. 퇴근 후 단골 가게에서 커피 한 잔을 외상으로 마신 유미코의 전남편은 한밤의 철로 위에서 마주 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은 없는 그를 향해 "열심히 말을 걸"면서 유미코는 불가해한 시간의 골을 들여다본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져버리는 활짝 핀 벚꽃을, 아야코는 툇마루에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ㅡ <밤 벚꽃> 중에서
한때 우리가 묻어두었던 감정들, 눈여겨보지 못했던 사소한 진실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도착하기도 한다. <밤 벚꽃>의 주인공 아야코에게 그것은 가난한 신혼부부의 형태로 찾아온다. 벚꽃 지는 봄밤, 수줍은 신혼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아야코는 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감정과 맞닥뜨린다. 죽은 아들의 일주기를 앞두고 재회한 전남편 유조에 대한 미련과 회한이다. 유조는 "타인이 된 지 벌써 이십 년이나 된 먼 사람". 가뭇없이 스러져버린 좋은 시절을, 소리없이 흩날리는 저 벚꽃잎들을 아야코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 보세요. 이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이 있지요. 커다란 물고기 떼가 바다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파도 사이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답니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 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ㅡ <환상의 빛> 중에서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 <양철지붕에 대하여>에서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이라고 했다. 네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삶과 죽음, 현실과 기억의 경계에서 생의 이면, 거기 숨어 있는 실밥 같은 진실들을 발견하고 담담히 응시한다.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술래이고 남겨진 자이다. 삶이 숨겨놓은 메시지는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삶의 뒷모습만을 쫓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뒷모습에 대고 끝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삶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심오한 이유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 미야모토 테루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이토록 불가해한 생의 허무에 접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