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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폭격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배명훈은 이 소설에서 "전시와 평시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현대인의 기계적인 일상,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무력감을 '적국', '폭격' 따위의 상징적인 장치들로 풀어낸다. 매일 무작위로 미사일이 떨어지는 서울 시내가 이야기의 주요무대이자 서사의 발화점이 된다. 폭격 장소나 그 수법에서 적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전쟁 수위를 조절하자는 목적에서 조직된 에스컬레이터 위원회 직원 이민소는 작업 현장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폭격된 장소들이 하나 같이 자신의 추억이 얽힌 맛집이었던 것이다. 그 기억의 중심에 있는 인물 민아리는 의문의 사고로 실종된 상태이다. 과연 이 전쟁의 실체는 무얼까. 민아리에 대한 그리움이 낳은 이민소의 망상일까. 아니면 어딘가 생존해 있는 민아리의 특별한 메시지일까.
그는 그 식당에서 맨 처음 짬뽕을 먹은 날을 떠올렸다. 갑자기 튀어오른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물론 기억이란 그런 식으로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왠지 더 절절해지는 것. 그게 기억이었다. 사람이나 음식이나 다 그랬다. (본문 중에서)
소설의 무대가 되는 서울, 매일 미사일이 떨어지는 위태로운 가상의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인의 지금, 여기를 가리키는 기호이다. 폭격 맞은 것처럼, 익숙한 장소나 사람들이 한순간 훼손되거나 사라지는 일이 예사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기억'은 잃어버린 세계에서 날아오는 특별한 메시지가 아니라 '망상'처럼 덧없고 불온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육백 개가 넘는 미사일이 쏟아진 지금, 사라진 장소나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이나 아직 파손되지 않은 공간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날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 . . . ) 사라진 것들은 서서히 존재감이 무뎌져가기 마련이었다. 어떤 장소를 떠올릴 때마다 그곳이 아직 남아 있는지 남아 있지 않은지 확신할 수가 없는 난감함. 그렇게 세상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존재 여부가 확인될 때마다 그냥 흐릿한 기억으로 남겨두는 일이 많아졌다. (본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난 사월의 끔찍한 참사를 떠올릴 것 같다. 국가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와 관계자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국민들의 분노, 무력감이 이야기 곳곳 스며 있다. 배명훈은 후기에서 그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이 소설은 세월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며, 실제로 사건이 있기 직전에 씌어졌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겠지만, 글쎄, 어쩌면 기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사건은 벌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려지고 있을 테니까. 수많은 참사 중에 하나 정도로 기억될 테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야기'는 세월을 몰라서, 다행이다. 실체를 잃은 기억의 대상을 붙들어주는 것. 이야기의 힘이다. 이야기를 읽는 이의 힘이기도 하고.
그가 잠이 들지 못하는 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그도 아니면 어떤 한순간을. (본문 중에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를 한데 섞어 요리한 이 소설은 읽는 이의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여러가지 맛과 식감을 제공하는 음식처럼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은 전쟁이다. 끝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와 알 수 없는 이유로 끝없이 긴장 상태를 지속하는 미스터리다. 뜨거운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허물어져 내린다. 사랑의 기억을 증명해 줄 실체를 찾아 차가운 잿더미를 뒤적거린다. 불분명한 기억만을 안고 지난 삶의 폐허 위에 남겨지는 것. 한순간 유령적 존재로 떠돌게 된 우리가 실존을 증명할 방법은 무엇일까. 나 여기 있다고, 거기 당신, 나 좀 봐달라고, 무심한 당신 발끝에 미사일을 날려보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또 하나의 전쟁이 발발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