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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공포영화에 나오는 혼령들은 저마다 한을 품고 있다.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은 그들 존재의 뿌리는 기억'이다. 마음에 박힌 응어리가 그들을 지탱한다. 그 응어리가 그들의 몸이다. 끝없이 죽음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그들이 곧 기억이다.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는, 끝없이 재생되는 죽음의 세계. 몸이 없어도, 아니, 몸이 없어서 기억은 그렇게나 독하고 힘이 세다.
각진 각목이 어깻죽기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121쪽)
광주항쟁을 다루는 이 소설은 그런 기억의 힘을 잘 보여준다. 1980년 5월 광주. 한강 특유의 느리고 고요한 어조가 그때 그 사람들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한강이 불러낸 그 넋들은 육체적이다. 참혹하리만치 그렇다. 방아쇠를 당기는 따뜻한 손가락, 곤봉과 총검을 휘두르는 팔과,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52쪽)
계엄군의 뜨거운 총알이 뚫고 나간 구멍난 옆구리, 총검에 찢긴 뺨과 목덜미, 곤봉에 맞아 터진 머리통 같은 것들이 하나의 생물처럼, 크게 열린 눈구멍처럼, 숨을 뿜는 콧구멍처럼, 거대한 혀처럼, 보고 숨쉬고 말하거나 침묵한다. 가쁜 숨과 비명, 피와 고름이 진물처럼 문장마다 스며 있다.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190쪽)
그 몸뚱이들을 자꾸만 살려내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들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총과 칼, 살과 피만이 난무했던 그날의 기억을 입고 그들이 되살아난다.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꺼풀을 열"고, 그들이 온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는 것이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다. 누가 죽이고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아남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 죽인 사람도 죽은 사람도 미친 권력과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이 소설에 주인공은 없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없는, 영원히 늙을 수 없는 '소년들'이 있을 뿐이다. 무섭도록 고요한 초혼 의식을 지켜보면서 당신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가장 잔인한 인간성은 망각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기억만이 그날의 희생자들을 벌하거나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169쪽)
소설에는 계엄군에 맞서다 죽은 소년 '정대'와, 죽어가는 정대를 두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소년 '동호'가 등장한다. 분명 소년이 등장하는 것은 맞지만, 표제가 암시하는 '소년'은 특정한 한 소년을 가리키는 구체명사가 아니다. 여기는 말하는 '소년'은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고,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조용한 투쟁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 속에서 열여섯 소년 동호는 그늘 쪽에서 걷는 엄마를 향해 말한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찢기고 구멍나고 피흘리는 '소년들'의 넋을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