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대화하기 - 애견 언어 교과서
미동물행동심리학회(ACVB) 지음, 장정인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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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때 나는 세상 모든 개들이 사람을 물어뜯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길 모퉁이마다 지뢰처럼 숨어 있던 크고 작은 개들. 내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친 숨을 흘리며 날뛰던 개들. 달음질하는 내 뒤를 힘차게 추격하던 개들. 개들. 개들! 그 시절, 모든 개들은 거대한 '이빨!'이었다. 더러운 털로 뒤덮인 네 발 달린 이빨들을 피해 달아나는 일이 나에겐 중요한 숙제였다. 세상을 향해 뾰족한 이를 드러내고 온몸으로 발광하던 개들. 그때 그 개들을 사나운 짐승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무지였음을 이제는 안다. 소 돼지 닭처럼 개는 그냥 개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한 자리에 묶여 사람 음식 찌끼를 해결하는 가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십년대 후반부터 애견 인구가 무섭게 늘기 시작해서 지금은 천만 명을 넘겼다. 최근 몇 년 사이 동물학대법이 강화되고 반려견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인간의 소유물이던 개들이 삽시에' 친구가 된 것이다.

​   (...) 늑대가 조상이라 할지라도 개는 늑대가 아니며 늑대와 매우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돌보는 사람 없이 개를 홀로 내버려 두었을 때 개가 하는 행동은 이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 것과는 관련이 없으며, 우리가 '개떼의 우두머리'가 될 필요도 없다. (머리말 중에서)

    개의 신분상승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개와 인간이 친구가 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급증하는 유기동물들이 이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에 무지한 상태에서 개를 기르기 시작한다. 귀엽고 앙증맞던 강아지는 크고 시끄러운 사고뭉치 개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개가 멍청하거나 복종심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 고함을 지르거나 무력을 사용하면서 개와 기싸움을 한다. 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사람들은 끔찍한 짐승'을 거리에 내버린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를 기르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천한 가축이었을 때나 '반려'견이 된 지금이나 개들의 사정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개들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외부인이 접근하면 짖어서 알리고 주인이 밥 주면 꼬리 몇 번 흔들어주면 되었던 가축의 일상이 더 평온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을 봐도 짖거나 따라가선 안 되고, 똥 오줌은 지정된 장소에, 사람 물건은 물고 뜯어선 안 되고, 더러운 곳에 앉거나 뒹굴어서도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는 것투성이다. 인간의 '친구', 반려견으로 사는 개들의 피곤한 심정을 생각해 보았나. 우리의 반려견들은 이렇게 외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개지 사람이 아니라고요! 왈왈.

    개가 뭔가 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개는 무보수로 봉사할 생각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개가 일단 단어와 행동을 결부시킬 줄 알면, 개한테 행동을 시킬 때마다 이에 대해 매번 보상할 필요가 없다. 사실, 그래서는 안 된다. 개의 입장에서는 언제 보상해 줄지 전혀 알 길이 없으므로 언젠가는 여러분이 크게 한턱 쏘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도박'하는 마음 자세로 시키는 것을 계속 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2009년 가을, 하루를 처음 만났다. 하루는 네 달 된 강아지였다. 동그란 배, 고불거리는 갈색 털, 살랑거리는 꼬리. 새카만 눈동자를 굴리면서 되똥거리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그때까지도 개 공포증이 있던 나는 하루를 만지는 것부터 시작했다. 손끝부터 단계적으로(?) 털의 감촉과 체온에 익숙해져야 했다. 용기내어 안아보려다 낯선 촉감에 놀라 하루를 손에서 놓친 적도 있다. 하루 역시 사람 손길에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 머뭇거리는 손과 바동거리는 털뭉치의 시간들. 샴푸 거품을 뒤집어쓴 채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던 하루, 칫솔을 문 채 달아다던 하루, 중성화 수술을 마치고 잠든 것처럼 누워 있던 하루, 하루야 하루야 흔들어 깨우던 기억. 아기 사자처럼 호랑이(장난감)를 물고 다니던 하루. . . 이가 돋아나도 하루는 나를 물어뜯지 않았고, 세상 모든 개는 거대한 이빨'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친구를 얻게 되어 행복했고, 내 친구도 행복하기를 바랐다. 친구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궁금한 점이 생기면 펫샵이나 수의사 선생님을 찾았다. 인터넷에서도 많은 정보를 구했다. 도움이 되는 정보도 있었지만 사실과 어긋나는 정보도 많았다. 몇 년 사이 반려동물 관련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눈에 띌 때마다 찾아 읽었다. 대부분의 책들이 개의 본성과 훈련법 같은 것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몇 권 읽어보면 개들의 생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그 알 수 없는 허기를 채운다는 기분으로 읽었다.

   긍정적인 어떤 것을 개한테 건네주기 전에 먼저 앉는 법을 가르치면, 개는 우리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도록 허락해 줄 것이다. 다만 이를 충분히, 일관적으로 반복해서 가르쳐야 듣는다. (...)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아이한테 '제발(please)'이라고 말하도록 가르치는 것처럼, 개한테도 무얼 받기 전에 똑같이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    미 수의 행동심리학회(ACVB)에서 내놓은 이 책은 전문적이고 상당히 분석적이다. 그간 내가 읽어온 책들이 단순히 개의 본능이나 생태 등을 보고하는 형식이었다면, 이 책은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개의 모든 것을 해부한다. 개의 몸짓 언어와 긍정적인 훈련법, 훈련 도구, 나이든 개 돌보기 같은 기본적인 문제부터 공격성, 분리불안, 소리 공포증, 강박증 등 문제가 되는 행동들을 다룬다. 전문용어들이 등장하는데, 읽기에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고, 장마다 용어 정리가 되어 있다.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개 주인이 개의 행동 문제에 대해 올바른 과학 정보를 얻고 개의 행동에 관해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겠다는" 바람에서 이 책을 썼다고. 책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믿는 잘못된 정보를 제시하고 바로잡아준다.

​    개는 얼굴 표정과 몸의 자세로 내적 동기와 의향을 전달한다. 개가 전달하는 신호를 알아들으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가 탐지하기에 개의 신호는 너무 빠르고 미묘하다. 예를 들어, 숨쉬는 패턴이 변한다면 개가 불편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또 특정 품종의 개는 얼굴이 납작하다든지 귀가 헐렁헐렁하다든지 고유의 특성 탓으로 자신의 기분이나 행동의 의향을 신체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어린 시절 내 뒤를 쫓아오던 사나운 '이빨들!'은 어쩌면 불안하고 겁에 질린 상태였는지 모른다. 본능을 억압하는 환경에 처해 있던, 도움이 필요한 개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 몸짓이 그들의 사냥 본능을 자극했던 건지도 모른다. 달아나는 것이 내 본능이었다면 쫓는 것은 개들의 본능이니까. 타고난 본능과 언어가 다른 개와 인간이 오해하고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개의 문제는 곧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명백한 사실을 간과하는 것 같다. 개가 인간의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개에게 인간의 습성을 강제하는 것은 무지보다도 더 나쁜 것 같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개들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 책은 그 사실을 일깨워 준다. 개들을 향한 우리의 애정이 너무 일방적이었던 건 아니었나. 온몸으로 쏟아내는 개의 말을 무시하면서 사람의 규칙만 강요하고 있던 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된다. 물고 뜯고 짖고 아무데나 싸는 개들과 오늘도 씨름중인가. 잘못된 정보와 인간적 오해로 점점 개와 멀어지는 당신을 위한 조언이 이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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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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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영화에 나오는 혼령들은 ​저마다 한을 품고 있다.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은 그들 존재의 뿌리는 기억'이다. 마음에 박힌 응어리가 그들을 지탱한다. 그 응어리가 그들의 몸이다. 끝없이 죽음을 재현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그들이 곧 기억이다. 죽어도 죽어도 죽지 않는, 끝없이 재생되는 죽음의 세계. 몸이 없어도, 아니, 몸이 없어서 기억은 그렇게나 독하고 힘이 세다.

​    각진 각목이 어깻죽기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121쪽)

    광주항쟁을 다루는 이 소설은 그런 기억의 힘을 잘 보여준다. 1980년 5월 광주. 한강 특유의 느리고 고요한 어조가 그때 그 사람들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한강이 불러낸 그 넋들은 육체적이다. 참혹하리만치 그렇다. 방아쇠를 당기는 따뜻한 손가락, 곤봉과 총검을 휘두르는 팔과,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52쪽)

   계엄군의 뜨거운 총알이 뚫고 나간 구멍난 옆구리, 총검에 찢긴 뺨과 목덜미, 곤봉에 맞아 터진 머리통 같은 것들이 하나의 생물처럼, 크게 열린 눈구멍처럼, 숨을 뿜는 콧구멍처럼, 거대한 혀처럼, 보고 숨쉬고 말하거나 침묵한다. 가쁜 숨과 비명, 피와 고름이 진물처럼 문장마다 스며 있다.    ​

   ​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190쪽)

   그 몸뚱이들을 자꾸만 살려내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그들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총과 칼, 살과 피만이 난무했던 그날의 기억을 입고 그들이 되살아난다.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꺼풀을 열"고, 그들이 온다. 

​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는 것이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다. 누가 죽이고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아남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 죽인 사람도 죽은 사람도 미친 권력과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이 소설에 주인공은 없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없는, 영원히 늙을 수 없는 '소년들'이 있을 뿐이다. 무섭도록 고요한 초혼 의식을 지켜보면서 당신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가장 잔인한 인간성은 망각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기억만이 그날의 희생자들을 벌하거나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

​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169쪽)

​     소설에는 계엄군에 맞서다 죽은 소년 '정대'와, 죽어가는 정대를 두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소년 '동호'가 등장한다. 분명 소년이 등장하는 것은 맞지만, 표제가 암시하는 '소년'은 특정한 한 소년을 가리키는 구체명사가 아니다. 여기는 말하는 '소년'은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고,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조용한 투쟁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 속에서 열여섯 소년 동호는 그늘 쪽에서 걷는 엄마를 향해 말한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찢기고 구멍나고 피흘리는 '소년들'의 넋을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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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야기 - 무신론자를 위한
조반니 파피니 지음, 음경훈 옮김, 윤종국 감수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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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의 설교는 길고 지루했다. 나른하게 내리감기는 눈을 치켜뜨면 두툼하게 살 오른 목사의 눈두덩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얇은 방석을 뚫고 올라오는 마룻바닥의 찬 기운에 오소소 몸이 떨렸다. 불편함과 냉기가 나를 무릎 꿇렸다. 하반신에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목사의 설교는 이어졌고, 벌 받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나는 몸을 한껏 옴츠렸다. 이따금씩 목사는 죄인들을 벌하려는 하느님처럼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성경 구절을 외쳤다. 우렁우렁 울리는 목사의 음성이 하느님의 것이라도 되는 양 노인들은 고개를 떨구고 작은 어깨를 떨었다. 그런 광경은 어린 나를 주눅들게 했고 내심 반항심을 품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크고 우악스러운 힘이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하느님도 하느님 흉내를 내는 목사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자라서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독교인들만큼 끈질긴 종족은 없을 것이다. 어찌나 끈질기게 전도를 하는지, 나는 오기가 생겨서 성경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뭘 좀 알아야 반박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성경을 해석해 놓은 비디오를 보고 성경책을 읽는 동안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를 구원하려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속시원한 대답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헛짓이다 싶어서 그만 뒀다.

 

    맹렬하게 기독교를 씹어대던 중학생 동창 세현이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사촌 경희가 와서 어머니하느님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갔다. 말수 적고 부끄럼 많던 경희가 노회한 연설자가 되다니. 어머니하느님이란 이상한 명칭보다도 그게 더 놀라웠다. 저런 게 신, 아니, 기독교의 위력인가. 기독교에 대한 나쁜 인상 때문에 기독교를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독교인들이여, 내 말도 좀 들어달라. 나는 구원을 믿지 않는다. 

 

    주변인들이 하나 둘 기독교인이 되어갈 때마다 이상한 위기의식을 느낀다. 무엇이 저들을 끌어들이는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면 또 죄인처럼 성경을 펼쳐놓고 이상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읽어보기도 한다. 경희는 구원을, 천국을, 영원한 생을 이야기했다. 영생이란 것, 불멸이란 것은 내게 끔찍하고 무서운 벌 같은데, 너는 구원이라고 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믿음 없고 반항적인 나를 늙어 죽게 하기를. 천국도 지옥도 빛도 어둠도 없는 영원한 죽음을 내려주기를. 그것만 기도하고 싶다.

 

    파피니는 드디어 오랫동안 헤매며 찾아왔던 목적지에 도달했다. 신이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사람은 절대로 신에 이를 수 없다는 진실을 발견한 것이다. 인간이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신이 땅에 내려올 때가 아니다. 신이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한한 것이 유한한 세상에 들어와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신처럼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은 오직 육체로 된 신, 즉 예수를 믿는 길밖에는 없다. (프롤로그 중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을 연대순으로 조명하고 있는 이 책을 택한 건 예수보다도 저자인 조반니 파피니 때무이었다. 좌파 지식인이었던 파피니는 무신론자였다. 그런 그가 가톨릭에 입문하고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1921년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여러 차례 재판되었고 널리 번역되면서 "가톨릭 문학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한때 무신론자였던,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전기 작가가 조명하는 예수의 얼굴이 궁금했다. "가톨릭 문학의 고전"이라고 하니 신화나 소설처럼 읽어도 될 것 같았다.

 

     예수는 영혼의 노동자이기에 앞서 물질 노동자였다. 그의 나라이기도 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았지만, 그 역시 가난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부유한 부모나 커다란 저택은커녕, 푹신한 양털이불조차 꿈꾸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하늘의 왕이자 하느님의 아들이 이처럼 비천하고 가난한 목수의 작업실 한 켠에서 살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성경 내용을 바탕에 두고 문학적인 서사와 파피니 개인의 독창적인 해석이 버무려졌다.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성경에 비하면 잘 읽히는 편이다. 신성으로 포장된, 가려진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도 잘 살려냈다. 파피니 자신의 목소리가 많이 실려 있어서 주관적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나 같은 무신론자, 예수 무식론자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파피니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이 이 책을 읽는 참맛이라고 말하고 싶다. 쉽게 읽히지 않는 꽤 두꺼운 책을 끝까지 붙들고 있게 한 것이 파피니의 입심이었으니까.

 

    사람은 천사가 되어야 하는 짐승이고, 영이 되어가는 물질이다. 만일 사람 안에 야수성이 득세하면 인간의 지성은 약화되고 사멸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본문 중에서)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 이야기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성경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는 무신론자(무식론자)가 이 책을 얼마나 소화해낼지, 끝까지 읽어내기는 할지 의문스럽다. 종교와 신화, 역사 등 실로 방대한 내용이 먼저 읽는 이의 어깨를 짓누른다.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무식론자가 성경을 처음 읽을 때처럼 정신없이 헤맬 수도 있겠다. 길 잃은 양처럼 어둠 속을 두리번거릴 때, 회개한 가톨릭 신자의 열띤 음성이 구원처럼 우렁우렁 울려올 것이다. 매혹적이고 믿음이 가는 음성이어서 어린 양은 천천히 발길을 돌려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두려움과 호기심을 품고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렇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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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생각의 흐름 - 정신의학 전문의 하지현 교수가 제안하는 지식과 감성의 튜닝
하지현 지음 / 해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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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 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 피천득, 《인연 「우정」 》중에서

 

     빼놓지 않고 보는 티븨 프로그램이 몇 있다.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KBS2)도 그중에 하나다. 일반인들의 소소한(?)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다. 고민 주인공들이 호소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긋난 관점에서 불거진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나와 대립하는 크고 작은 대상들과 부대끼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 '공감'이다. 함께 울어주는 것. "그래 그래" 하고 끄덕여주는 것.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앞의 산문)는 것. <안녕하세요>의 고민 주인공들이 굳이 방송에까지 나와서 부끄러운 사연을 늘어놓는 것도 다 '공감' 때문이다. SNS와 스마트폰 보급화로 쉽고 즉각적인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가벼운 손놀림만으로 보이지 않는 타인과 만날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 길 위에서, 화장실 변기 위에서도 사람들은 작고 네모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손끝으로 터치하는 '공감'과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즉각적인 '댓글'에 집착하고 기대했던 반응이 없으면 상처받기도 한다. <안녕하세요>에 소개되는 고민들 중에도 그런 세태를 반영하는 것들이 많다. 카톡에 빠진 엄마의 무관심을 토로하는 고등학생 아들의 사연이나, 페이스북 '좋아요'에 집착하는 여대생의 사연... 이 소심한 여대생은 자신이 올리는 사진이나 글에 친구들이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것에 상처받는다. 그 사실을 눈치챈 친구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면' 그건 '진심'이 섞이지 않은 공감이라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여대생의 심정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은 즉각적이고 간편한 접촉(대화)은 어느 순간부터 기계적인 공감에 중독된 사람들과 그에 상처받는 사람들, 그러면서 쉽게 떠날 수도 없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먹고 유지되는 것만 같다.

 

​   성숙이란 의존적인 사람이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의존성을 적절히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영화 《캐스트 어웨이》(미국,2001년)에서 무인도에 떨어진 남자 '척'은 낡은 배구공에 얼굴을 그리고 말벗을 삼는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로널드 페어베언(Ronald Faibairn)은 자아가 "대상을 찾으려는 목적(object-seeking principle)"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본능적인 소통 욕구를 지닌 우리 모두는 척의 배구공 친구 '윌슨'이 억지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유일한 말벗이던 '윌슨'이 물결에 떠내려가는 장면에서는 윌슨! 하고 목놓아 부르는 척의 상실감을 똑같이 느낀다. 당신도 나도 척의 절실함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통 욕구가 크면 클수록 관계가 자꾸 어긋나는 것은 왜일까.

​   자기 대상이란 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람이 자기 밖의 타인을 자신, 즉 자아의 연장(延長)으로만 인식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사람'을 원하듯이, 내 안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타인을 통해 해결되기를 집요하게 바란다. 타인은 나의 또 다른 분신인 '자기 대상'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정신의학 교수 하지현은 이 책에서 소통에 목말라 하면서도 타인의 언저리를 서성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외로움을 진단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폭발적인 관계망들 속에서 왜 우리의 소외감은 짙어지기만 하는 것인지, 진정한 공감은 어떻게 싹트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에 따르면, 엄마 배 속에서 탯줄로 연결돼 있던 가장 안전하고 완벽한 교감의 기억이 우리 무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소통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이 원초적 관계를 이상적인 기준으로 삼게 된다고.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엄마의 안전한 자궁 속이 아니고 말 안해도 알아서 영양소를 공급해주는 탯줄 같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우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The Missing Piece)』에서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빠진 조각을 채우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절박감을 이해할 수 있다.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나서게 한 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갈구였고, 그 길에서 마주친 조각들과 빠진 부분을 맞춰보는 과정은 소통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빠진 조각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완전한 공 모양이 되고 싶어한 동그라미는 꼭 맞는 짝만을 찾았기 때문이다. 완벽에 대한 기대감으로 손쉬운 만족감을 거부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당신과 나, 우리는 이 빠진 동그라미와 닮았다. 완벽한 동그라미만을 꿈꾸면서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린 어리석은 쉘 실버스타인의 '이 빠진 동그라미' 말이다. 타인을 독립적인 하나의 조각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연장선에서만 바라본 것은 아니었나. <안녕하세요>의 소심하고 외로운 여대생처럼, 타인을 내가 원하는 반응만을 되돌려주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도구로만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상적이고 완벽한 소통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고 이 책은 충고한다. 조금만 기대치를 낮추면 생각보다 큰 만족감을 얻게 될 수 있다고.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은 아무리 잘 전달해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상대가 문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벽만 치게 되거나 문 안으로 들어가도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거나, 아니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소통을 다루는 책들에서 흔히 다루는 것이 화법이다. 같은 뜻을 담은 말이라도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나 억양, 사소한 말버릇 같은 것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른다. 이 책에서도 같은 내용을 다루는데, 말을 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잘 들어주는 것. 그리고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상대를 건강하게 자극하고 전혀 몰랐던 자기 모습을 들여다 보게 해주는 좋은 질문이야말로 대화의 윤활유가 되어주는 한편 비판이나 충고 없이 상대의 변화를 이끌어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약간은 손해 보아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소통이라는 거래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관계에서 말로 퍼줘봤자 실질적인 손해는 없다. 내가 남을 좀 더 칭찬하고 조금 더 도와주고 배려해 준다고 해서 직접적인 손해는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해준 만큼 똑같이 돌려받지 못해도, 내가 한 행동을 스스로 칭찬하고 만족하면 된다. (본문 중에서) 

   

​    인간관계는 '주고 받는 것'이다. 책에서는 탁구에 비유하고 있다. 탁구를 칠 때 이기려고 어려운 공을 넘겨 주면 경기는 쉽게 끝나고 만다. "어떤 공을 쳐도 받아주고, 다시 치기 쉬운 곳으로 정확하고 평이하게 넘겨"주면 안정적인 공을 오래 주고 받을 수 있다. 내가 먼저 만족하려고 할수록 만족감에서 멀어지는 것이 인간 관계인 것 같다. 상대에게 상처 주면 나도 상처 받는다. 오래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가려면 내 쪽에서 먼저 받아치기 쉬운 공을 넘겨 줘야 하는 것이다. 적당히 강약을 조절하고 리듬을 맞추면서 최적의 거리를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 방법을 명쾌하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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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버 스카이
호머 히컴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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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10월 4일, 러시아에서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대기권을 뚫고 날아올랐다. 두 차례나 위성 발사에 실패했던 미국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모든 면에서 강대국이라는 착각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던 미국 정부가 크게 한방 먹은 것이다.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 사태는 미국 과학 기술 교육과 우주개발에 큰 힘을 실어준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저기야, 저기! 스푸트니크호다!" 오델은 하늘을 가리키며 껑충껑충 뛰었다. (...) 산등성이 위로 반짝이는 작은 물체 하나가 장엄하게 별들 사이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님이 황금마차를 타고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고 해도 그 순간만큼 황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그 물체는 어떤 절대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늘을 나는 것 같았고 이 넓은 우주에 그것을 가로막을 힘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본문 중에서)

 

 

   1957년 10월 5일,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의 탄광 마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캄캄한 땅, 콜우드'에서는 남자아이가 자라면 당연히 광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러했듯 광부는 자연스러운 운명이었다. 그 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 지구 궤도를 천천히 지나는 순간, 광부의 미래를 짊어진 소년들의 운명도 궤도를 이탈해 저 먼 우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달은 이미 변해 있었다. 우리의 마음이 이미 그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은 우주선을 타고 뾰족한 봉우리들 위를 날아 원초의 시간에 소행성들이 남긴 충돌의 흔적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든 크레이터와 봉우리들 그리고 고요의 바다가 우리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우리가 언젠가는 달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본문 중에서)

 

 

     미국의 가난하고 보수적인 탄광 마을에서 로켓 제작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실제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씌여진 회고록이다. 하지만 사실적인 기억을 나열하는 평면적인 회고록을 떠올리면 안 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문학의 범주에 넣어도 손색 없을 정도로 빼어난 소설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아들이 탄광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아들만은 절대 죽음의 구덩이(갱도) 속으로 처넣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팽팽한 갈등 구조, 로켓 제작을 방해하는 크고 작은 장애물들, 아끼는 이들의 죽음, 형과의 대립, 첫사랑, 첫경험...  가족 ·성장소설의 극적인 구성과 굳세고 아름다운 문장을 연료 삼아 평범한 회고록의 궤도를 멋지게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호머 히컴은 짧은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사건의 정확한 순서나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작가로서 약간의 자유를 행사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엄격한 논픽션과 약간의 거리를 둔 진짜 이유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더욱 분명하게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드리마라는 우리 반의 여학생이 수업 중에 불려나갔다. 나는 그 아이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작업 중이던 갱도가 무너지면서 날카로운 석편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 그날 이후 그 사고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는 목숨을 잃은 광부의 가족에게 2주 이내로 임대주택에서 퇴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회사의 의도는 탄광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을 콜우드에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끔찍한 사고의 기억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되살려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미국 정부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고 우왕좌왕하던 1950년대 후반은 탄광촌 광부들에게도 좋은 시절이 못 되었다. 탄광산업이 쇠락하고 광부들은 졸지에 직장과 집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야 했다. 책에는 당시의 열악한 탄광촌 풍경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작업 환경과 불합리한 대우 속에서도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 콜우드 사람들의 모습은 가히 기적적이다. 캄캄한 세월을 살던 소박한 사람들의 꿈이 실린 로켓이 탄가루 날리는 콜우드 상공을 솟구쳐 올랐을 때 그들이 느꼈을 해방감​을 상상하면 뭉클해진다. 밤처럼 어둡고 비좁은 땅 속에서 뜨거운 생을 캐내는 광부들과, 광막한 어둠을 찢고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는 로켓 보이들의 꿈을 지켜보면서, 이런 세월이지만, 나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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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1 0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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