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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과 짐 ㅣ 에디션 D(desire) 6
앙리 피에르 로셰 지음, 장소미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평점 :
앙리 피에르 로셰가 일흔넷에 발표한 첫 소설이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파격적 관계를 그리는 이 작품은 1961년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동명 영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원작에 깊은 감명을 받은 트뤼포는 영화 대사나 내레이션에 로셰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했다. 원작에서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물 구조를 줄과 짐, 카트린, 알베르로 압축한 정도가 각색 내용의 전부였다. 이십대의 젊은 감독 트뤼포는 영화잡지 '아르(Arts)'에서《줄과 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현대소설 중 하나인 앙리 피에르 로셰의 <줄과 짐>은 끊임없이 재고되는 새롭고 미학적인 도덕 덕분에 평생토록 거의 충돌 없이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는 두 친구와 그들의 공통된 여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짐, 루시가 날 원하지 않네. 이대로 그녀를 잃을까 봐, 그녀가 내 인생에서 완전히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 짐, 그녀를 사랑하게, 그녀와 결혼해, 내가 그녀를 계속 볼 수 있도록 해주게. (본문 중에서)
영화에서는 줄과 짐이 공유한 연인을 '카트린' 하나로 압축하고 있지만 원작에서는 루시를 포함해 여러 명의 연인들이 등장한다. 줄과 짐은 연인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규칙을 창조한다. 기존의 법칙이 우세하는 세계에서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는 이들의 사랑은 매순간이 모험이고 일탈이 된다.
카트린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순간 동안만 사랑하는 것 같아." 이 순간은 늘 다시 찾아들었다. "사랑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받아들이는 형벌이야." 줄이 말했다. (본문 중에서)
이성과 본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젊은 연인들을 통해 《줄과 짐》은 삶의 이중성과 그 한계를 잘 보여준다. "작고 통통한 독일인 줄"과 "크고 호리호리한 프랑스인 짐", 성녀 같은 루시와 마녀 같은 카트린 등 인물들의 대조적인 면모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는 '카트린'은 여성의 이중성을 가감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카트린에게는 연인들 각각이 별개의 세계였다. 이 사람과 벌어지는 일은 나머지 사람들과 무관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그들의 여자를 질투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이 세계의 규칙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자기 안의 이중성을 수용하는 행위이다. 로셰는 이 소설에서 모순적 인간성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한복판에 내던져진 인물들의 투쟁과 좌절을 시적인 문장으로 담아낸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사랑 방식은 보통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정색(正色) 아래 감춰진 욕망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삶의 근원에 도전한 거야. 그걸 전투의 무기로 삼았고. 그래서 삶이 우리를 불임으로 만들고 자기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한 거야. (본문 중에서)
놀랍게도 이 소설은 로셰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줄과 연인을 공유한 소설 속 인물 짐이 로셰의 분신이다. 일흔이 넘은 로셰가 젊은 시절의 연애사 소설에 담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결코 한데 묶일 수 없는 것들이 하나의 세계에 붙들려 있다는 삶의 모순, 거기서 빚어지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