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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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Il barone rampante』by Italo Calvino

-수단에 잠식당한 현대인의 자화상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에서 두번째 작품에 해당하는『나무 위의 남작』은 18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18세기, 계몽주의가 도래하고 혁명의 불씨들이 꿈틀거리던 바로 그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 사소한 반항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 평생을 나무 위에서 보낸 남작의 기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디론도 백작의 저택에서 아침부터 소동이 일어난다. 장남 코지모가 누나가 요리한 달팽이 요리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까이거 뭐라고 먹네, 안 먹네 하느냐면 전날 밤, 코지모는 동생과 함께 이 달팽이들을 지하 광에서 탈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달팽이는 달팽이일 뿐, 느려터진 달팽이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스프와 기묘한 요리들로 재탄생되어 식탁에 오른 것이다. 코지모는 자신이 새 삶을 열어주려고 했던 달팽이들을 차마 먹을 순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다가 끝내 정원의 나무 위에 올라가고 만다. 그러고는 선언한다. 다시는 땅을 밟지 않겠노라고.

   가족들은 잠깐 이러다가 말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코지모는 나무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있었다. 도르래를 만들어 필요한 물품을 나무 위로 끌어 올리고 양가죽을 덧댄 커다란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잔다. 물론 이 주머니를 튼튼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사냥을 해서 짐승의 가죽과 고기를 얻었고 그 가죽과 고기로 스스로 구할 수 없는 것들과 교환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냄새가 났다. 시작의 달팽이 사건만 해도 그렇다(사회 참여를 위해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던 칼비노를 되돌아 보니 더욱 확고해졌다). 느려터져서 결국 생포되는 달팽이들은 마치 민중에 비유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코지모는 민중을 선동하는 혁명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많은 혁명들이 그러했듯이 코지모의 노력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고는 스스로 나무 위에 유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코지모는 유배지에서의 삶을 즐긴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나무 위에서의 삶이 결코 황량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코지모는 농부들에게 자신이 고안한 관개시설을 만들어주고, 끊임없이 여인들을 만나기도 한다. 나무 위에 산다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무 위로만 여행하기도 해서 그곳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나무 위의 삶을 포기할 수 없어 그들과 이별한다. 그쯤 되자 코지모에게 나무 위의 삶은 더 이상 유배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수단을 포기하지 못해 계속 유배지에서 살아가는 코지모.

   수단이 기능을 넘어서서 주체자가 수단에게 잠식당한 형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장소에서 만연하고 있는 일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보통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돈을 번단 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후에도 일을 멈추지는 않는다. 축적한 부를 불리기 위해 재테크를 시작하고 이를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자본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그 자본을 위해 돈을 더 벌 수밖에 없는 조금은 우스운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렇듯 종종 수단에 잠식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한 후에도 벗어날 수는 없다. 잠식당한 채 살아온 시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 익숙함이 편안해, 혹은 익숙함을 깨부쉈을 때의 낯섦이 무서워 현대인들은 수단에 잠식된 자신을 못 본체 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이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서도 현대인의 자화상을 우회적인 형식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작품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긍정을 통해 현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 했듯이 이 작품을 통해서는 수단에 잠식당해 자아를 잃고 마는 현대인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다. 코지모가 여가를 보내기 위해 책을 읽다가 나중엔 산적을 위해 책을 구하고 읽어야만 했던 에피소드에서도 이러한 점은 잘 나타난다. 역시 칼비노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그러나 코지모는 삶을 충분히 즐긴다. 유명세를 떨치기도 하고, 사랑도 나누며(반쪽짜리 사랑도 포함된다) 최대한 자신의 삶에 충실했다. 현대인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작가는 코지모라는 인물을 통해 ’당신들 그렇게만 사는 것 피곤하지 않수?’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단에 잠식당한채 사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모델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라고 쓰고 나니 비약이 좀 심한 것같다;;)

   어쨌든 이 소설은 칼비노의 다른 작품들처럼 상당히 재미있다. 문제의식이고 나발이고 따위에 신경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이다. 사랑해요, 이탈로 칼비노(나는 역시나 칼비노 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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