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Review /『Le  souligneur』by  Caroline  Bongrand

25살 아가씨와 함께하는 지적이고 유쾌한 책 여행


몇 해 전에 개봉되었다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리뷰를 읽다가 그 영화가 카롤린 봉그랑의『밑줄 긋는 남자』라는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소재는 신선하고 재미있어 보여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소설『밑줄 긋는 남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설『밑줄 긋는 남자』는《르 몽드》지에서 평한 것처럼 ‘익살스럽고 산뜻하며 매력이 넘치고 빠르게 전개되는 하나의 게임’이다. 여주인공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다가 두근두근한 연애소설의 양상을 보이더니 급기야 추리소설의 흉내까지 내는 이 소설은 짓궂지만 사랑스럽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여주인공 콩스탕스가 벌이는 이 유쾌한 지적 여행을 함께 하는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즐겁다.

작가 로맹 가리를 숭배하는 주인공 콩스탕스는 시립도서관에서『오렌지빛』이라는 제목에 책의 세 단면을 노란빛으로 물들인 이상한 책을 대여한다.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책이라 호기심이 생겨 읽기 시작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책을 대충대충 넘기던 참에 도서관 규정을 어기고 연필로 적어 놓은 문구를 발견한다.「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그리고 그 책의 마지막 장에는「도스또예프스끼의『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아, 러시아는 로맹 가리와 관계가 있는 나라가 아닌가. 콩스탕스는 도스또예프스끼의『노름꾼』을 찾아 도서관을 종횡무진 한다. 마침내 손에 넣은 후 책을 열심히 탐독하다가 난데없이 그어진 밑줄들에 멈칫한다. 자신에게 누군가 게임을 걸어오고 있다! 게다가「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이런 밑줄까지 등장한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겠다느니, 당신은 약속을 했다는 둥 이어지는 밑줄들에 콩스탕스는 동요하기 시작한다. 결국 콩스탕스는 이 게임을 시작하기로 하고 책 속에 숨어서 자신에게 게임을 걸어 온 이 남자(물론 콩스탕스만의 생각이지만)가 안내하는 책 여행을 시작한다.

아, 문학소년소녀들의 로망이다. 순전히 책만으로 소통을 하는 로맨스라니~ 고등학교 때 대여점에서 빌린 소설의 밑줄과 메모를 경험했던 나로서는 이 아가씨의 지적 여행이 너무나 유쾌하고 부러웠다. 물론 내가 빌렸던 책은 나에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말이다. 푸훗.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많은 작품을 다 읽고 머리에 새겨놓았으니 이런 작품이 나왔겠지, 라는 생각이 든 순간 책 표지에서 보았던 젊고 아름다운 작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싱그러운 미소를 담고 있던 그 해맑은 얼굴 뒤에 감추어진 지적 열망과 무한했을 노력, 그리고 작품에 대한 집념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밝고 경쾌하며 기분 좋아지는 작품이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재밌지만 천박하지 않다. 읽지 않은 명작들의 명구들도 훔쳐볼 수 있어 즐거운 작품이다. 카롤린 봉그랑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지지만 우리나라의 척박한 출판풍토 때문에 다른 번역본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한 권 있는데 절판이다). 출판인들, 좋은 책은 꾸준히 찾는 사람 있거든요. 당장 보이는 이익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들. 근데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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