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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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끈질긴 운명에 쫓기던 비지따시옹은 이 비참한 질병이 자기를 어디까지라도 쫓아다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대로 눌러 있기로 했다. 세상의 끝까지 도망을 온 지금이니, 다른 곳으로 더 달아날 수도 없었다. 비지따시옹이 왜 그렇게 놀라고 겁에 질렸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잠이 적어지면 더 좋지 뭘 그래.」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가 유쾌하게 말했다.「깨어있는 시간이 많으면 인생이 그만큼 더 길어질 테니까.」그러나 비지따시옹은 불면의 고통이 잠을 못 이루거나 육체적으로 피로가 오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력을 자꾸 상실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을 못 자고 깨어서 여러 가지 공상에 잠기다 보면 어릴적 추억을 뒤적일 시간이 줄어서, 과거가 자꾸만 사라진다는 얘기였다. 그러면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잊게 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잊게 되어서 결국은 과거를 망각한 백치상태가 된다고 했다. 숨이 넘어갈 듯이 마구 웃어젖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그것을 원주민들이 상상해낸 여러 가지 미신적인 병의 하나라고 넘겨버렸다.-56쪽

몇 주일이 지나서, 비지따시옹의 공포가 많이 가신 어느날 밤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나는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우르슬라도 잠이 깨어서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푸르덴치오 아귈라 생각을 또 하고 있었어.」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잠을 자기 못했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그 일을 곧 잊고 말았다. 이튿날 점심때 그 얘기를 듣고 아우렐리아노는 좀 놀란 표정으로, 자기도 우르슬라에게 생일선물로 줄 브로치를 만드느라고 실험실에서 꼬박 밤을 새웠지만,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셋째날 그들은 더욱 놀라고 말았으니, 밤이 되어도 아무도 졸리운 사람이 없었으며, 벌써 50시간째 아무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도 모두 깨어 있어요.」원주민 여자는 숙명적인 사태가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했다.「이 질병은 한번 집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아무도 내쫓을 수가 없어요.」
-56~57쪽

그들은 정말로 불면증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약초의 영원한 효과에 대해 어려서부터 배워 알고 있던 우르슬리는 투구꽃으로 술을 담가서 돌아가며 먹었지만, 그래도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꿈을 꾸었다. 그렇게 흔미한 환각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들은 선 채로 꿈을 꾸었을 뿐 아니라, 남들이 꾸는 꿈도 잘 볼 수가 있었다. 자기의 꿈에 보이는 사람들도 실물처럼 나타나고 남의 꿈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기 때문에 집안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구석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레베카는 흰 셔츠에 황금단추를 달고 자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꽃다발을 가져다주는 꿈을 꾸었다. 그 남자와 함께 손이 가냘픈 여자가 따라와서는 장미를 한 송이 뽑아 레베카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우르슬라는 레베카의 꿈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레베카의 부모라고 믿었는데, 그들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전에 어디서 본 기억이 전혀 없어 생소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집에서 만든 동물과자는 시내에서 잘 팔려나갔다. 아이들이나 어른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달콤하고 푸른 불면증 수탉과, 앙증맞은 핑크빛 불면증 붕어와 보드랍고 노란 불면증 망아지를 마구 먹어댔고, 그러다 보니 월요일 새벽에는 온 동네사람들이 모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57쪽

처음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고민하던 마콘도 사람들은 오히려 잠이 안 와서 잘된 일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들은 잠을 안 자고 어찌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새벽 세시가 되면 할 일이 없어서 팔짱을 끼고 시계의 왈츠소리만 듣고 앉아 있게 되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꿈을 꾸고 싶어 잠을 자려는 사람들이 피곤해지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그들은 함께 모여앉아서 끝이 없는 지루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똑 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자꾸만 계속했다. 얘기가 끝나면 얘기하던 사람이 그 얘기를 또 듣겠느냐고 묻고, 그러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하고, 그러면 같은 얘기를 또 하고…… 혹시 누가 그 얘기를 듣기 싫다 하더라 그는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얘기를 또 해주랴고 물었을 때 아무 대꾸가 없어도 또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그 얘기가 자꾸만 계속되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똑 같은 얘기는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57~58쪽

불면증이라는 병이 마을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마을의 가장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불면증이 어떤 병인지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 병이 늪지대의 다른 마을로 전염이 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려고 오랫동안 의논을 했다. 그들은 아랍사람들에게 야자열매를 주고 얻은 염소의 목에 매달았던 종들을 모두 떼어내어서 마을 어귀에 갖다두고, 불면증에 걸리지 않은 타향 사람이 억지로 마을로 들어오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종을 울리면서 다니게 했다. 그래서 마콘도 거리에서 종을 울리며 타향 사람이 지나가면 병든 마을 사람들은 병에 아직 안 걸린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 종을 울리며 다니는 사람들은 마을에서 아무것도 먹거나 마실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불면증이라는 병이 음식을 통해서 입으로 전염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콘도의 모든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불면증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병이 마콘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병에 대한 그들의 모든 대책은 효과적으로 시행이 되어서 얼마 안 있다가 사람들은 다시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잠을 자야 한다는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잊게 되었다.-58쪽

몇 달 동안 잠을 못 자서 상실하게 된 기억력을 되찾고, 기억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알아낸 사람은 아우렐리아노였다. 그는 그 비결을 아주 우연히 알아냈다. 맨 처음에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던 그는 곧 불면증 전문가가 되었으며, 그의 은세공 기술도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발전했다. 어느 날 그는 쇠붙이를 두드려 광택을 내는 작은 모탕을 찾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자기가 찾던 물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그건 모탕이야.」아버지가 일러주었다. 아우렐리아노는 그 말을 종이쪽지에 써서 모탕 위에다 달아놓았다. 그렇게 적어놓으면 앞으로 그 말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모탕이라는 말이 워낙 어려운 단어였기 때문에 잘 잊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이 사건이 그의 기억상실증의 시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그는 실험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그가 계속해서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도움이 되라고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종이쪽지에 써서 사방에 붙여놓았다. -58~59쪽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어릴 적에 가장 감명깊었던 어떤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걱정스런 어조로 얘기했을 때, 아우렐리아노는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를 얘기해 주었고, 그 얘기를 들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곧 그 방법을 실천에 옮겨 집안 여기저기에 쪽지를 붙이며 돌아다녔고, 심지어는 밖으로 나가 마을에 온통 종이쪽지를 달아 두었다. 그는 먹을 듬뿍 찍은 붓으로 온갖 이름을 다 표시해 두었다.「책상•의자•시계•문•침대•냄비……」그는 동물 우리로 가서 식물과 짐승의 이름도 표시했다.「소•염소•돼지•암탉•바나나•카사아•바칼라듐……」이렇게 조금씩조금씩 기억을 상실해가면 어느날엔가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이름을 위에 써붙인 글자를 읽고서 알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 물건들의 쓰임새는 몽땅 잊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마콘도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기억상실증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소의 목에 걸어놓은 다음과 같은 간판이었다.「이것은 암소입니다. 암소는 아침마다 짜주면 젖을 냅니다. 그리고 소의 젖을 끓인 다음에 커피와 섞어서 먹습니다.」그렇게 사람들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서 도망치려는 현실을 바둥거리면서 붙잡으려 했고, 그들의 기억을 지탱시켜야 할 단어들이 하나씩 둘씩 그들의 머리에서 사라져, 결국 그들은 글의 가치를 잊게 되었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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