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기사 - 칼비노 선집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Review /『Il cavaliere inesistente』by Italo Calvino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긍정, 혹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판타지에 근접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38페이지에서 카를로 대제가 내뱉는「오, 재미있는 일이야! 여기 있는 이 백성은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저기 있는 나의 용장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존재하지 않는군. 좋은 짝이 되겠어, 내가 자네들에게 장담하지!」라는 이 말은 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판타지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명확하지 않은 중세에 이교도들과 전쟁을 벌이는 전장터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아질울포는 금속 갑옷과 오직 존재하겠다는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기사이다. 아질울포는 전쟁에 참가해 쉬지않고 자신의 일들을 완벽하게 처리하며 전쟁터에서 존재(살고 있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이기 때문에, 한낱 갑옷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하고 있다. 늙고 무력한 대제와 동료 기사들의 조롱, 브라다만테의 끝없는 구애, 람발도의 존경과 시기, 구르둘르의 어지러운 충성 등이 그를 존재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아차, 하나가 빠졌다. 이 소설 속에서 전장과 아질울포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조용한 수녀야 말로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질울포를 존재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나약함과 변덕 그리고 우매함에 지친 브라다만테는 존재하지 않지만 강하고 올곧고 언제나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아질울포에게서 그녀의 완벽한 사내를 본다. 그래서 아질울포에게 구애하지만 아질울포는 브라다만테의 구애에 응할 만큼 뻔뻔하지 않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대 여성의 허영심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이 소설이 중세의 전장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브라다만테의 구애는 현대 여성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여성들은 테레비에서 보았던 왕자님 아니 재벌의 아들을 꿈꾸지만 그런 일들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 재벌가들은 자기네들끼리의 교류와 혼인 등으로 중세의 귀족이나 왕족들처럼 핏줄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알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여성의 허영심은 자신의 범위 안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들을 꿈꾸는 것까지는 허용한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고 존재하지 않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봐라, 브라다만테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아질울포에게 무모한 구애를 해대는 것과 묘하게 닮아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 솜털이 보송보송한 청년, 람발도는 아질울포에게서 기이한 매력을 느낀다. 아무것도 모르고 전장에 들어왔지만 아버지의 복수가 결국 적의 병사 한두 명쯤 죽이는 것으로 계산이 끝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탈로 칼비노의 정치활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는 공산당을 위해 군대에 자원했다가 15년 뒤에는 공산당을 탈당하고 좌익 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람발도처럼 확고한 신념으로 공산당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 그것이 수만으로만 계산되는 덧없는 일인 것을 깨닫고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신이 불나방처럼 군대에 지원하던 시절을 람발도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카를로 대제가 아질울포에게 내리는 하인 구르둘르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신을 착각하며 살아간다. 오리를 쫓아 연못에 들어 갔다가 오리가 되어 나와서는 다시 배나무가 되기도 하고 죽을 먹다가 죽통에 빠져서는 결국 자신이 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인간, 순수한 의미의 백치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통틀어 구르둘르만큼 상념이 없고 고민하지 않는 인물은 없다. 그래서 구르둘르는 행복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갓난 아기들처럼. 그래서 아기들은 잘 웃고 기분이 좋고 즉흥적이다. 구르둘르와 같은 상태인 것이다. 작가는 혹시, 우리 인간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구르둘르와 같은 인간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는 인물들 중심으로만 이 작품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작품의 절정은 아질울포라는 기사의 존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한 청년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청년 토리스몬도는 아질울포에게 기사라는 작위를 받게 해준 처녀가 사실 처녀가 아니었고 자신의 어머니였다고 고백한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질울포에게 내려진 기사 작위는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변해버리고 아질울포는 존재할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 ‘처녀’를 찾아 나서게 되고 토리스몬도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토리스몬도가 찾아 나선 자신의 아버지는 ‘성배기사단’의 기사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성불가침에 의해 혼인을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토리스몬도는 자신의 진짜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성배기사단을 찾아내고 그들 가까이에서 생활하게 된다. 신의 부름과 말씀에 따라 행동한다는 성배기사단은 사실 아무 명분없이 마을을 습격해 짓밟고 강탈하는 도둑들에 불과하다. 마을이 쓸모없어지면 완전히 불태워버려서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어버리는 악질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토리스몬도는 약자편에 서서 결국 성배기사단에 대항하고 그들에게서 승리를 이뤄낸다. 그러나 토리스몬도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어머니와의 좋은 시절을 앗아갔다고 생각해서 아질울포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의 뿌리까지 뒤흔들며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성배기사단을 찾았지만 그들이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것이 부끄럽다. 차라리 모든 것을 밝히지 말 것을 그랬다. 우리가 덧없고 후회와 실수로 점철된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처럼. 

    끝자락에 가서 토리스몬도는 한 ‘처녀’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처녀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소프로니아였다. 이것을 알게 된 아질울포는 존재할 이유와 가치를 잃음으로 해서 자신을 공기중에 산화시키고 람발도에게 자신이 ‘존재’했던 유일한 증거인 깨끗하고 하얀 갑옷을 람발도에게 남긴다. 하지만 토리스몬도는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계보를 잘 정리해 소프로니아와 자신이 혈연에 얽혀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행복한 결혼에 이른다. 아질울포가 자신 때문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아무 상관없다. 그는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기사였으므로.

    자신에게 꼭 맞는 갑옷을 얻게 된 람발도는 브라다만테를 찾아 떠나는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를 존재했던 기사로 만들고 있는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수녀가 바로 브라다만테라는 것이다. 브라다만테는 이제,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하얀 갑옷의 기사는 안중에 없다.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브라다만테가 람발도를 맞이하러 뛰어나가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정상을 회복하지만 정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기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이 결말이 씁쓸하지 만은 않다. 어쨌든 해피엔딩이 아닌가.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더불어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이라는 이탈로 칼비노의 이 소설은 동화를 닮았다. 아니 동화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로빈후드>나 <사자왕 리처드>같은 중세의 갑옷 입은 기사들이 나오는 동화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느끼게 하는 설정들이나 어디에서건 볼 수 있는 인간 유형, 그리고 재치있는 유머와 풍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탈로 칼비노의 이 작품은 재미있다. 약간 낯선 문체에 적응만 하면 책장 넘기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다. 사랑해요, 이탈로 칼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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