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워낙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인의 관심을 덜 받는 화가에 속할 것이다. 나 역시 김홍도의 만년 작품들을 보기 전까지는 풍속화 정도만 보았던 문외한이었다. 더구나 전공이 서양인문학이었던 데다가 관심마저 서양의 문화에 경도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옛 미술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서양의 학문과 문화와 정신에 한계를 느꼈고 그 전환기의 시점에 우리나라 곳곳의 문화유적지를 찾아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장 동양문화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제는 급기야 서양의 문화, 정신, 미술에 대하여 시큰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이 모르는 분야로 접어들 때에는 처음 한동안은 헤매기 마련인데 복되게도 미술도록을 대거 소장한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고미술 분야의 중요 도록들을 대략이나마 훑어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김홍도의 만년 작품들도 결혼 이후에 비로소 접했던 것이니, 처음 보았을 때 과연 이게 김홍도의 그림이란 말인가 하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그림들에 크게 감동한 나는 만년 작품들 중의 하나인 소림명월도를 오려 내 블로그의 이미지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김홍도 특유의 나무들을 보고서 나는 그것들이 우리나라 산야에서 전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하고 다닐 때도 그런 나무들은 쉽사리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때 시골에서 비산비야의 풍경과 함께 11월, 그리고 2월을 보내면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삼한사온의 날씨에서 사온의 날에, 따스한 햇빛과 맑은 바람이 있는 가을/겨울, 겨울/봄 어느 날에, 산야의 곳곳에 김홍도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평상시에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따스한 초겨울 날씨의 비산비야, 어느 호젓한 곳에서 문득 우수수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그 처처의 풍경을 목도한 이후로 11월과 2월의 비산비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절과 장소가 되고 말았다. 확실히 김홍도는 겨울로 접어들거나 겨울에서 빠져나오는 시절의 허름한 산야를 좋아했던 듯하다. 그것은 냉엄한 정신적 풍경도 아니고 춘설의 끼긋한 꽃도 아니다. 꽃이 있어도 그 허름한 잎사귀와 나뭇가지에 숨어 있을 뿐이다. 봄날의 무르익은 감정이나 여름날의 무성한 풍요, 가을날의 화려함, 겨울날의 차가움 등등의 직설적인 언어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홍도가 만년에 그린 <병진년화첩>에 실려 있는 “소림명월도” 역시 틀림없이 11월이나 2월 어느 날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쓸쓸하거나 처연하지 않다. 나무의 메마른 잎들은 까칠하지 않고 부드럽다. 나목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를 때면 보통은 겨울 찬바람에 스산하기 마련인데, 이 그림은 그런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조선시대에 적적함의 대표적 정서였던 <추성부>도 김홍도가 그림으로 옮겨놓으면 어쩐지 쓸쓸하지 않다. 이게 다 그 나무들 탓이런가?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수묵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병진년화첩>은 김홍도가 52세 원숙기에 그린 화첩이다. 그는 육십을 갓 넘어서 타계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만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첩은 전체 20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여지없이 11월과 2월의 나무들이 등장하는데, 그 나무들은 이제 보편적 조형을 획득한 듯 시절을 불문하고 여러 그림에서 그 허름한 골간을 은연히 드러내고 있다. 늙어서 되돌아보는 생의 풍요로움은 결국은 다 스러지는 것들이 아닌던가? 결국은 스러지고 남는 것이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 아니던가? 이제, 살아 있는 두두물물마다 그 나무들이 아스라히 서 있음을 들여다 볼진저!
 

<병진년화첩>보다는 <단원절세보첩>(檀園折世寶帖)이라는 명칭이 정당하다고 구체적으로 논했던 이는 오주석이다. ‘병진년’이라는 말이 제작시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지칭하는 바가 없으므로, ‘절세(絶世)의 보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 ‘단원절세보’라는 명칭이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칭은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한지가 쓴 것이므로 본래의 화첩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원절세보’가 단원 스스로가 부여한 명칭이 아니고 유한지의 해석이 들어간 명칭이라면 두루 통용되는 ‘병진년화첩’을 굳이 버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의미를 던져주는 명칭, 해석을 가하는 명칭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절세(絶世)라는 말은 그 의미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비교적 덜 해석적인, 그러니까 각자의 해석권으로 덜 끌려들어간 ‘병진년화첩’이라는 명칭이 좋다. 물론 이 명칭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주석은 이 명칭을 작품 제목으로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건조하다고 평했으나, ‘병진년’이 원숙기의 김홍도를 가리키는 만큼 나로서는 명칭의 정당성과는 별도로 그 어떤 해석보다는 깊은 울림을 준다. 생이라는 것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는 한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 모름지기 누군가의 만년은 귀하게 여길 일이다. 하물며 김홍도의 만년임에랴.

‘折世’라는 말이 오주석의 조심스러운 추정대로 ‘絶世’를 뜻하는지도 의문이다. 혹시 ‘折世’가 ‘급작스레 세상을 뜨다’는 의미는 아닐까? 그러니까 ‘夭折’과 ‘逝世’를 합한 의미가 아닐까? 유한지는 단원의 죽음을 황망하고도 애석하게 받아들였고 그의 죽음 이후 이 화첩을 완상하게 된 까닭에 ‘折世寶’라는 이름을 붙히지는 않았을까? 이를테면 유묵첩(遺墨帖)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려 부른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김홍도 평전은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열화당, 1998)가 가장 자세하다. 이 평전은 오주석이 호암미술관 객원연구원 소속으로 1995년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에 관여하면서 도록과 더불어 논고집 형식으로 간행되었던 것을 저본으로 하여 1998년 열화당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리고 오주석의 타계 이후 2006년 솔출판사에서 판형을 키워서 재출간했다. 열화당판의 몇 가지 오류를 수정했다고 한다.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가 아직 글솜씨가 무르익지 않은 소장 시절의 글이라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솔출판사 1999, 2005(2)),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솔출판사 2006)는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작성한 글들이다. 그는 김홍도의 그림을 사랑하고 경모했던 만큼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는 김홍도 그림을 소개하는 글이 여러 편 있다. 그의 글들은 감동적이고 완미하다. 아울러,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돌베개 1998)에는 오주석이 쓴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단원절세보첩>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만큼 독자들은 이 글에서 화첩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책들이 김홍도에 관한 글을 싣고 있거나 김홍도를 전면적으로 다룬 책이므로 반복되는 내용이 없잖아 있으나, 오주석의 짧은 생애를 추모하며 대하노라면 반복적인 내용조차도 아끼면서 읽게 된다.

도록으로는 앞서 말한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삼성문화재단)이 271 개의 도판과 작품해제를 싣고 있어 으뜸이다. 그 다음으로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펴낸 <단원 김홍도>(통천문화사)를 꼽을 수 있는데 판형이 앞의 책보다 크고 화질이 좋아 자세히 살피기엔 최적이지만 도판이 많지 않은 것이 흠이다.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이 함께 협력하여 연 것이기에 앞으로 이때보다 더 나은 도록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애석하게도 두 도록 모두 현재로서는 구입할 수가 없다. 하나는 비매품이고 하나는 품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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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단원 김홍도>는 열화당판(1998)과 솔출판사판(2006) 두 종이 있다. 그리고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의 1999년 초판은, 주제로 삼고 있는 그림들을 책 말미에 도판으로 싣고 있다. 제본상태가 좋지 않아 도판들이 책에서 떨어지는 흠은 있어도 화질만큼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고 격조가 있다. 도판 그대로 표구를 해도 좋을 정도이다.

솔출판사는 2005년에 재판을 찍으면서 제목을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로 고치고 도판을 다시 인쇄했다고 하는데, 화질이 초판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이다. 판형이 같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로 유추해서 판단하건대,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은 그림의 도판을 별도로 첨부하지 않고 내용 가운데 삽입한 듯하다. 그런데 종이질 때문인지 뭔지 하여튼 도판의 운치와 격이 훨씬 떨어지는 느낌이다. 책 편집도 난삽한 편이다. 다음에 새로운 판을 찍는다면 부디 도판인쇄와 편집, 판형 등 모든 면에서 1999년판으로 되돌렸으면 한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는 그의 유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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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71203 나목 裸木
    from 木筆 2007-12-04 14:04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수묵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땀을 내주지 않으니 몸이 답답해한다. 찬바람이 불긴 하였지만, 퇴그 ㄴ 뒤, 챙겨 오밀조밀 달음질로 한바퀴 천천히 음미하며 내달렸다. 이내 몸은 더워져 봄같은 마음이다. 한결 후련하다. 10K 몸을 좀 가볍게 할 요량이다. 마음을 조금 되바라지게 먹을 생각이기도 하지만, 무거워지고 둔해지니 맘도 몸도 불편하다. 
 
 
2007-11-24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4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입] 모차르트 오페라 모음집(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돈 죠반니 & 마술피리 전곡)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 외 노래, 모차르트 / Documents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모차르트 음악을 본격적으로 좋아한 지 15년 가량 되었으니까, 나로서는 하필 가난한 학생 시절에 음반을 구입해야 했던 셈이다. 그 시절 수입의 지출비로는 음반 구입비가 단연 수위였고, 책값이 그 다음이었다. 책이야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도 있는데 음반은 애초에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페라 음반 같은 경우는 가격이 비싸 오페라는 가장 더디게 접근한 장르이기도 했다.

모차르트 오페라를 녹음한 음반은 보통 시디 2~3장 짜리로 가격이 최소한 35,000원 가량 된다. 물론 마음에 드는 연주 해석이라면 그 가격이 결코 비싸게 여겨지지 않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석인 경우에는 그 35,000원 짜리가 체감상 5,000원 짜리로 격하된다. 그때의 실망이란… 책처럼 미리 내용을 훑어볼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평을 취합하여 베팅 하는 기분으로 사는 것이 음반인 바, 음반을 플레이어에 올려놓는 순간은 참 걱정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어느 음악가나 사정은 마찬가지이겠지만, 모차르트 음악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고 어느 한 음반에 대한 호오도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이것은 예로부터 “취향은 논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서양인들의 명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의 호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고, 나 또한 이런 경험이 비일비재하다. 단적인 예로 아르농쿠르의 교향곡 녹음을 처음 들었을 때 눈에 불을 켜고 반대를 표했으나(수년 간 그의 음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대단한 관심을 갖고 듣고 있다. 그리고 과거 오륙년 전에 썼던 모차르트 관련 글들을 읽어보자니 여간 낭만적인 게 아니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쓰지 않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렇게 여성적인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데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쩌랴, 그러 했던 자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인 것을!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는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모차르트 해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모차르트의 오페라 음반을 추천하기 위한 것이다. Documents 라는 처음 보는 음반사가 발매한 음반이다. 이 음반사는 주로 저작인접권이 만료된 음반만을 대상으로 박스 세트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듯하다.

즉, 모차르트 음악의 저작권은 이미 만료되었고 모차르트를 녹음한 음원의 저작인접권은 일반적인 경우 녹음 이후 50년이면 만료되므로, 현재 2007년을 기준으로 1956년 이전에 녹음된 모차르트 음악은 공유(Public Domain)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음원은 누구든 아무런 제한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결국 이 음원을 물리적인 형태로 고정시켜(즉 음반으로 만들어) 판매해도 되고 무료로 웹상에 공개해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클래식 음반으로는 처음 접해 보는) Documents라는 음반사가 총대를 메고(아마도 기존 음반사들은 그들간의 상도의라든가 암묵적인 관할권이 있을텐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저작인접권이 만료된 음반만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염가에 판매하기 시작한 듯하다.

가령, 이 글에서 소개하는 “모차르트 오페라 모음집” 음반만 해도 모차르트의 불후의 오페라들인 <여자는 다 그래(코시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마술피리>를 시디 10장에 담아 2만 원의 가격에 제공하고 있다. <여자는 다 그래>는 칼 뵘, <피가로의 결혼>은 에리히 클라이버, <돈 지오반니>는 요제프 크립스, <마술피리>는 페렌츠 프리초이(혹은 흔히 통용되는 바로는 페렌크 프리차이)가 각각 지휘한 음원인데, 알다시피 이 지휘자들은 모차르트 해석에 있어 다들 한 가닥 했던 양반들이다. 특히 에리히 클라이버의 <피가로의 결혼>은 거의 모든 모차르트 음악 애호가들이 예외없이 최고로 꼽고 있는 <피가로의 결혼>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들의 그 복잡 다양한 심성상 어느 한 음반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어렵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알다시피 칼 뵘, 브루노 발터, 아르농쿠르 등이 일세를 풍미한 지휘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차르트 음반에 대해서는 호오가 대단히 엇갈린다. 그런데도 에리히 클라이버의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 일치를 보고 있으니 가히 독보적인 녹음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 음반 가격만 해도 3~4만 원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음반을 포함하여 무려 네 작품을 모두 합하여 단돈 2만 원에 판매한다고 하니 과거 학생 시절 이 음반들을 거금을 들여 구입했던 기억이 유독 쓰리게 느껴진다. 그러나 세월은 세월인 만큼, 모차르트는 모두의 모차르트인 만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더구나 나는 칼 뵘의 <여자는 다 그래>는 ‘다행히도’ 소장하고 있지 않아 이 음반을 구입하는 것이 억울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칼 뵘의 그 긴장감이 싫어 그의 해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의 해석도 흥미롭다.)

<여자는 다 그래>,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는 1955년 녹음이고 <마술피리>는 1954년 녹음이다. 모차르트 해석에 있어 어떤 견해를 가졌든 이 네 음반 중에서 적어도 하나나 둘은 마음에 드는 해석을 만날 것으로 기대해도 될 것이다. 거꾸로 말해, 적어도 하나나 둘은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석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젊은날의 단선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나이라면 오히려 이런 다양한 해석들, 나의 견해와는 다른 해석들로 인하여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제프 크립스가 지휘한 <돈 조반니>는 내가 꼽고 싶은 “이 한 장의 음반”이다.
 

이 “모차르트 오페라 모음집”의 약점은 음반내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 오페라의 대사는커녕 기본적인 안내도 없다. 오직 있는 것은 음악을 듣는 데 필요한 최소 정보인 트랙정보와 지휘자·가수들의 이름 뿐이다. 헌데 내게는 이 점도 마음에 든다. 요즘 충실한 정보는 웹상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으므로.

이 음반의 구성과 해석자들의 구체적인 면모는 이렇다:

CD 1-2
Così fan tutte

Fiordiligi: Lisa della Casa (Sopran / soprano) - Dorabella: Christa Ludwig (Sopran / soprano) - Guglielmo: Erich Kunz (Bariton / baritone) - Ferrando: Anton Dermota (Tenor / tenor) - Despina: Emmy Loose (Sopran / soprano) - Don Alfonso: Paul Schoeffler (Bass-Bariton / bass-baritone) - Wiener Staatsopernchor - Wiener Philharmoniker - Karl Böhm, Dirigent / conductor – aufg. / recorded in: 1955

CD 3-5
Le nozze di Figaro - commedia per musica - in vier Akten / in Four Acts

Figaro: Cesare Siepi (Bariton / baritone) - Susanna: Hilde Gueden (Sopran / soprano) - Il Conte Almaviva: Alfred Poell (Bass-Bariton / bass-baritone) - La Contessa: Lisa della Casa (Sopran / soprano) - Cherubino: Suzanne Danco (Sopran / soprano) - Bartolo: Fernando Corena (Bass-Bariton / bass-baritone), Marcellina: Hilde Rössl-Majdan (Alt / contralto) - Basilio: Murray Dickie (Tenor / tenor) - Barbarina: Anny Felbermayer (Sopran / soprano) - Antonio: Harald Pröglhof (Bass / bass) - Don Curzio: Hugo Meyer-Welfing (Tenor / tenor) - Chor der Wiener Staatsoper - Wiener Philharmoniker - Erich Kleiber, Dirigent / conductor - aufg. / recorded in: 1955

CD 6-8
Don Giovanni - Il dissoluto punito ossa il Don Giovanni (Der bestrafte Wüstling oder Don Juan / The Reprobate Punished or Don Juan) KV 527

Don Giovanni: Cesare Siepi - Donna Anna: Suzanne Danco - Donna Elvira: Lisa della Casa - Leporello: Fernando Corena - Don Ottavio: Anton Dermota - Zerlina: Hilde Gueden - Masetto: Walter Berry - Il Commendatore: Kurt Böhme - Wiener Staatsopernchor - Wiener Philharmoniker - Josef Krips, Dirigent / conductor - aufg. / recorded in: 1955

CD 9-10
Die Zauberflöte - Eine deutsche Oper in 2 Akten

Königin der Nacht / Queen Of The Night: Rita Streich - Sarastro: Josef Greindl - Tamino: Ernst Haefliger - Pamina: Maria Stader - Papageno: Dietrich Fischer-Dieskau - Papagena: Lisa Otto - Monostatos: Martin Vantin/Wolfgang Spier – Sprecher / Speaker: Kim Borg - Erste Dame / First Lady-In-Waiting: Marianne Schech/Margot Leonard - Zweite Dame / Second Lady-In-Waiting: Liselotte Losch/Marion Degler - Dritte Dame / Third Lady-In-Waiting: Margarete Klose/Alice Decarli - Erster Geharnischter / First Man-In-Armour: Howard Vandenburg - Zweiter Geharnischter / Second Man-In-Armour: Kim Borg - Erster Priester / First Priest: Wilhelm Borchert - Zweiter Priester / Second Priest: Howard Vandenburg - Dritter Priester / Third Priest: Siegmar Schneider - Erster Knabe / First Youth: Margot Guilleaume - Zweiter Knabe / Second Youth: Maria Reith - Dritter Knabe / Third Youth: Diana Eustrati - RIAS-Kammerchor - Berliner Motettenchor - RIAS-Symphonie-Orchester Berlin - Ferenc Fricsay, Dirigent / conductor - aufg. / recorded in: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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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1-2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요즘 책을 살 때 도큐멘트시리즈 하나씩 넣고 있어요.그뤼미오-하스킬의 베토벤 소나타집을 지난번에 샀고 다음번에 이 음반을 구매하려고 넣어놓았지요.이 음원들중 클라이버판은 줄리니판과 함께 전통의 명연이지않습니까..개인적으로 오페라 최고미녀라고 생각하는 리자 델라 카사가 있어서 좋아요.^^

반조 2007-11-23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알라딘엔 음반이 별로 없기에 당연히 없을 줄 알고 다른 곳에서 구입했는데, 검색해 보니 알라딘에도 있더군요. 저도 드팀전님처럼 책을 살 때 하나씩 구입하려고 이 시리즈를 보관함에 담아 두었답니다. 음반구입 경험상 이거 금방 품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긴 한데, 어쩐지 이 시리즈는 계속 수입될 것이라는 나름 확신이 있어 천천히 구입하려고 합니다. '최고미녀' 리자 델라 카사...

푸하 2007-11-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절이네요...리뷰 읽고 바로 살걸..ㅠㅠ

반조 2007-11-25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벌써 품절이군요. 클래식 음반은 대부분 수입음반이어서 매번 금세 품절되더군요. 아쉽지만 앞으로 몇 달은 기다리셔야 하겠는걸요.
 
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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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니체 저작의 번역본들을 읽으면서 가장 실망했던 점은, 번역자의 성실성이었다. <비극의 탄생>을 예로 들자면, 역자는 적어도 희랍비극, 바그너 음악극 등에 관한 기본지식은 갖추어야 한다. 아울러, 니체가 인용하고 있는 인용문의 출처 정도는 최소한 확인을 하고서 번역해야 한다. 니체는 인용부호만 달 뿐 인용문의 출처를 거의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니체는 호기심 있는 학자들을 위하여 일부러 출처를 안밝히기도 했던, 학자들이 보기에는 고약한 취미의 소유자였다) <고증판 니체전집>의 보급판(KSA) 제14권에서 인용문들의 출처를 밝혀놓고 있거니와, 다른 독일어판(가령 골트만 출판사)이나 일본어역본에서는 인용문 출처뿐만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자가 성의만 있다면 이런 책들을 참고하여 충분한 기본지식을 갖추고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아침놀>까지의 니체 저서들은 이런 정도의 성실성만 있다면 현저히 오역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즐거운 학문> 이후의 저서들은 이런 성실성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실성도 부족했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번역본들을 접해본 소감이었다. 사실 역자의 불성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토록 많은 번역본들이 신뢰를 얻기 힘든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오역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다 독일어 구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하나둘 확인하게 되면, 번역본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말해, 최소한 학자적인 엄밀한 자세와 성실성만 갖추고 있다면 오역이 나오더라도 모든 역자가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정도로 간주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엄밀한 자세와 그 성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간의 <비극의 탄생> 번역본들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제 박찬국 교수의 번역본이 출간됨과 함께 그 실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면밀한 자료조사와 성실성이 확보된 번역본이라고 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말 그대로 번역자의 “기본”의무이기에 그 의무를 다했다고하여 칭찬하기는 좀 그렇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예를 들어보자. 7절에는 니체가 셰익스피어의 햄릿론을 펼치는 와중에 “몽상가 한스”가 나오는데, 이는 셰익스피어 번역자였던 슐레겔이 “John-a-dreams”를 “Hans der Träumer”로 옮긴 것이다. 역자는 이를 주석에서 밝혀놓고 있다. 이런 주석은 햄릿을 읽고 슐레겔의 번역본을 확인해야 나올 수 있는 주석이다. 물론 나는 역자가 그런 과정을 거쳐 이 주석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독일의 골트만 출판사 판도 이것을 <뉘른베르크의 노래의 명인들>에 나오는 Hans Sachs라고 잘못 주석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 결코 쉬운 구절은 아닌 셈인데, 아마도 역자는 일본어역본의 주석을 참고했을 것이다. 일본의 역자들이야말로 이런 주석에서는 가장 탁월하고 성실할 것인데, 나는 성실한 번역을 위해서는 당연히 일본어역본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나 역시 예전에 <비극의 탄생>을 독해할 때 “몽상가 한스”의 의미를 일본어역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런 주석을 달았다는 것 자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전거들을 일일이 확인함으로써 그만큼 오역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칭찬하는 것이다. 이 전거를 알고 번역하는 것과 모르고 번역하는 것은 문맥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찬국의 이런 성실함 때문에, 독자들은 주석이 필요한 대목에서 어김없이 관련 주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Phänomen”(괴테식 의미에서의 현상)과 “Erscheinung”(관념론적 의미에서의 현상)을 구별하여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소박문학”과 “감상문학”의 구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6절의 “올림포스”가 산이름이 아니라 인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바그너의 “불협화음”이 어떤 음악사적 의의를 갖는지 감잡을 수 있을 것이고, 니체가 밝히지 않은 인용문들의 거의 모든 출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만큼 오역의 가능성이 줄어들었음도 당연하다. 한 마디로 <비극의 탄생>의 면밀한 독해와 이해를 위한 예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은 니체가 “서투르고, 둔중하며, 힘겨우며, 비유가 난무하고 꼬여 있고, … 템포가 일정하지 않다”고 자평할 정도로 문체가 (니체가 그토록 비난했던 의미에서) ‘독일적’이이서 이 문체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둔중하다고 자평했던 문체를 둔중하지 않게, 아름답게 번역하는 것도 웬지 께림직하다.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 이 지점은 모든 역자들이 고심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찬국 번역본은 문체를 가지런히 정리해서 번역하는 방향을 택했다. 즉 문장을 딱딱 끊어서 번역함으로써 미묘한 의미 전달의 손실을 감수한 대신에 독자들이 <비극의 탄생>에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이 번역본은 지난해에 벌어졌던 번역본 논쟁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수신문에서는 2006년 1월 2일, 연재기획 “고전번역비평 - 최고번역본을 찾아서”의 한 꼭지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고문을 통하여 김대경 역본을 추천했다. 박찬국이 이 글을 기고했는데, 책세상 니체전집의 번역자로 참여했던 그가 그 전집의 편집위원이었던 이진우의 번역본을 비평한 것이어서 파장이 좀 컸던 것같다. 그런데, 이후 «잔혹한 책읽기»의 번역서평으로 잘 알려진 강대진이 전혀 잔혹하지 않게 이진우의 또 다른 니체 번역본을 비평했다. 그의 기고문은 니체 전집 완간에 대한 기쁨과 몇가지 아쉬움이다. 제목과는 달리 니체번역 전반을 비평한 것이 아니라 이진우가 유고번역본에서 고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한 번역오류 몇 군데를 지적하고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두 비평에 대하여 2006년 2월 7일에 이진우가 교수신문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기고문을 통하여 응대했다. 그는 특히 박찬국의 비평을 강하게 비판했다. (좁은 동네에서 이런 정도의 비평이 오가면 아마도 학회모임에서는 서로 얼굴 보기가 민망할 것이다.)

그 이후 더 이상의 논쟁은 없었는데, 이번에 박찬국이 <비극의 탄생> 번역본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이 번역본은 그 논쟁의 연장선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과연, 역자 서문에서 박찬국은 그간의 번역본들에 대하여 총평하고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김대경 씨의 번역은 1982년에 출간된 이래 가장 많이 읽힌 번역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지면서도 여러 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으며, 원문의 몇 줄을 번역하지 않은 곳들도 있다. 이진우 씨의 번역본은 김대경 씨의 번역이 범하고 있는 오역을 상당 부분 바로 잡고 있으며 번역을 빠뜨린 부분도 없지만, 그럼에도 여러 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고 부자연스런 표현으로 인해 읽어 나가기가 쉽지 않다.

<비극의 탄생>이 8종의 번역본이 나왔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우리나라 독자들의 관심이 지극히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동안 나온 번역본들이 독자들의 이러한 관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번역에 착수했다. 본인이 과연 기존의 <비극의 탄생> 번역들보다 더 나은 번역을 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독자들의 아낌없는 꾸짖음을 기대한다.

[중략] 앞에서 박준택 씨와 김대경 씨 그리고 이진우 씨의 번역본을 비판했지만 이분들의 번역을 많이 참고했다. 이분들의 번역이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런 선행 작업이 없었더라면 본인의 번역은 훨씬 힘든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겸허한 고백이다. 내가 보기에 박찬국 번역본은 이런 고백을 할 정도로 앞선 번역본들에 빚을 졌다고는 보지 않는데(앞선 번역본들은 정말 독자들의 관심에 부응하지 못했다), 아마도 교수신문에서 오간 논쟁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책세상 니체전집 번역에 서로 얽혀 있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고백이 나왔을까 싶다. 아무튼 이 번역본은 이러한 비평 과정의 산물로도 자리잡고 있어, 책세상 니체전집의 면목에 흠이 좀 생기게 되었다. 기묘한 상황이기는 한데, 더 나은 번역본을 위해서라면 이런 기묘한 상황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이제 “독자들의 아낌없는 꾸짖음” 순서이다. 박찬국 번역본이 역자로서의 기본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는 했지만, 오역이 없을 수 없다.

17면: “당시 내가 나의 청춘의 용기와 악의를 분출시켰던 그 책”(das Buch, in dem mein jugendlicher Muth und Argwohn sich damals ausliess)
- “악의”는 지나친 번역이다. Argwohn은 다른 사람의 행위나 태도 뒤에 나쁜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나 추정하는 것으로, “혐의, 의혹”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까 당대 고전문헌학, 더 나아가 학문 일반의 행태에 대해 의혹을 가졌다는 말이다. 20면에서는 적절하게 “불신”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유독 “악의”로 번역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국내 번역자들이 이런 뉘앙스 차이를 사소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철학자는 몰라도 니체의 경우에는 아주 중요하다. 그 유명한 “나는 하나의 뉘앙스이어니…” 하는 구절도 있잖은가.

24면: “논리와 세계의 논리화에 더욱 열광하게 되고”(nach Logik und Logisirung der Welt brünstiger)
- brünstig는 “발정하다”가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뜻이다. 이것을 “열광”으로 번역하여 의미를 순화시키고 있는데, 니체가 드물게 사용되는 그런 고아한 뜻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다고 보긴 어렵다. 학자들이야 “논리에 더욱 발정을 한다”는 표현이 불쾌하겠지만, 본시 니체가 그걸 의도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오역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다.

29면: “도덕적 주제에 대한 가장 빗나간 도식화로서의 기독교, 이것에 인류는 지금까지 귀를 기울여 왔던 것이다.”(das Christenthum als die ausschweifendste Durchfigurirung des moralischen Thema’s, welche die Menschheit bisher anzuhören bekommen hat)
- “Figurierung”에 “도식화”라는 뜻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음악용어로서 보통은 “음형”이나 “음형법”으로 번역된다. “귀를 기울여 왔다”는 술어는 Figurierung이 음악용어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도덕적 주제가 한껏 빗나가 전개된 음형으로서의 기독교” 정도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 니체는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35면: “대위법적인 발성술과 귀의 현혹술 아래에는 분노와 파괴욕의 기저음이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는가?”(Brummt nicht ein Grundbass von Zorn und Vernichtungslust unter aller Ihrer contrapunktischen Stimmen-Kunst und Ohren-Verführerei hinweg)
- “contrapunktische Stimmen-Kunst”는 대위법적인 발성술이 아니라 대위법의 성부기법을 뜻한다. 그리고 Grundbass는 “기저음”이라 하지 않고 보통 “통주저음”이라고 번역한다. 바로크시대에 유행했던 건반악기 반주기법인데, 주어진 단음의 저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저음부 파트와 관련이 깊다. 그래서 오르간 저음 건반의 “우웅-” 하는 웅장한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이 소리는 동물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53면: “인간의 참된 생각은/ 꿈 속에서 나타난다”(des Menschen wahrster Wahn/ wird ihm im Traume aufgethan)
- Wahn에 “생각”이라는 뜻은 없다. 말 그대로 “광기”나 “망상”이다. 아마도 “가장 참된 망상”이라는 것이 형용모순이니까 “생각”으로 번역했을 텐데, 형용모순이라는 것 자체가 협소한 논리학의 산물 아닐까? 그 논리를 부수고 등장하는 빛나는 싯구인데 역자의 사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사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으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대목은 원문을 존중해서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 가령, “더없이 진정한 망상”으로. 그리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뉘른베르크의 노래의 명인들>의 서사구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59면: “성 화이트”(Sanct-Veit)
-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4세기 순교자 성 비투스이다. 독일어로는 성 바이트(Sankt Veit)로 음역된다. “성 화이트”는 일본어 발음에서 건너온 기괴한 이름이다. 아마도 기존의 번역본들이 한결같이 “화이트”로 번역하니까 무작정 따랐을 것이다.

60면: “이제 곤궁과 자의, ‘뻔뻔스런 작태’가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하고 적대적인 모든 제한이 파괴된다.”(jetzt zerbrechen alle die starren, feindseligen Abgrenzungen, die Noth, Willkür oder “freche Mode” zwischen den Menschen festgesetzt haben.)
- 문장을 잘못 이해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오역이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인데, “이제 인간들 사이에 필요냐, 자의냐 아니면 “버릇없는 풍조”냐를 확정하던, 요지부동 적대적이던 온갖 한정이 무너진다”가 바른 이해라고 본다.

66면: “이 기괴하게 생긴 무적의 디오니소스적인 힘 이상으로 위험한 힘은 없었으므로 아폴론은 메두사의 머리를 방패로 삼아 그것에 대항할 수 있었다.”(Apollo, der das Medusenhaupt keiner gefährlicheren Macht entgegenhalten konnte als dieser fratzenhaft ungeschlachten dionysischen)
- 좀 난해한 대목이긴 하다. 이 문장은 디오니소스의 힘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는 힘, 그러니까 디오니소스의 힘보다 덜 위험한 힘에 대항하여 아폴론이 메두사 머리를 들이대어 방어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 본토는 처음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을 직접 접하지 않고 풍문을 통해서 접했기에 그것은 진짜배기 디오니소스의 힘보다 덜 위험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메두사 머리가 박혀진 방패로 대항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그러나 그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 마침내 직접적으로 분출되자 아폴론은 더 이상 그 방패로 가로막지 못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는 게 니체의 서술 내용이다.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힘보다 덜 위험한 힘에 대항하여 메두사 머리를 들이댈 수 있었던 아폴론" 정도로 고쳐야 할 것이다.

67면: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광란에서 비로소 자연은 예술적 환희에 도달하며, 그것에서 비로소 개별화의 원리의 파기가 예술적 현상이 된다.”(Erst bei ihnen erreicht die Natur ihren künstlerischen Jubel, erst bei ihnen wird die Zerreissung des principii individuationis ein künstlerisches Phänomen.)
- “예술적 환희”, “예술적 현상”이 아니라 “예술가적 환희”, “예술가적 현상”이다. 이것은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후의 “künstlerisch”가 등장하는 모든 대목에서 “예술가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예술적”으로 잘못 번역했다. 이와 함께 “Genius”도 아티스트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인데, “천재”라고 번역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을 “천재”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현대의 천재 개념과 영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념은 역사적이고 끊임없이 변천한다. 이 시대의 개념, 정확히 말하자면 역자가 생각하고 있는 “천재”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Genius”를 “영혼”(69면, 96면), “예술가”(79), “정신”(89)으로 옮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68면: “디오니소스적인 음악과 음악 일반의 성격을 이루고 있는 바로 그 요소 …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조화의 세계는”
- 이 구절의 “Harmonie”는 “조화”가 아니라 “선법”이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니체가 언급한 문헌학적 독해가 필요한 곳이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음악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고서 이 문맥을 독해하게 되면, “화음”이나 “조화”가 아니라 반드시 “선법”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요구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박종현의 플라톤 번역만 해도 모두 이런 철저한 문헌학적 독해를 거친 것이다. <국가>를 보면, 고대 그리스 음악에 대한 세세한 주석이 있다. 나는 이런 작업이 니체 번역에서도 당연히 요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87면: “도리스 예술의 단계를 저 예술충동들의 정점이자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생성과 활동의 최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이 구절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예술충동이 예술의 발전을 이끄는 과정을 전투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 문맥에 위치해 있다. 가령 도리스 예술을 전방에 배치된 아폴론적인 것의 “전투진영”이라고 정의한다던가, “지배”, “침투”, “투쟁”이라는 어휘들을 동원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전투과정의 최후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인데, “이러한 [아폴론/디오니소스 전투의] 생성과 활동의 최후의 계획”은 어쩐지 좀 이상하다. 역자가 Plan이라는 낱말이 두 낱말이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즉, “(전투)평원”을 의미하는 Plan과 “계획”을 의미하는 Plan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러한 생성과 추세의 최후의 전투평원” 정도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 최후의 전투평원은 다름아닌 아티카 비극이다.

108면: “우리는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예술원리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Alle die bisher erörterten Kunstprincipien müssen wir jetzt zu Hülfe nehmen.)
7절을 시작하는 문장인데 착오이며 오역이다. “이제까지 논의되었던 모든 예술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로 고쳐야 한다. 이 문장 이후,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합창단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던 바를 살펴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니체는 이 7절에서 합창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치적 견해, 슐레겔의 정의, 실러의 정의를 하나하나 검토하기 때문이다.

113면: “실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무대 위에서는 대낮 자체라 하더라도 인공적인 대낮일 뿐이며, 건축물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다. 운율적 언어도 현실 언어를 이상화시킨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착각[슐레겔식의 착각]이 만연되어 있다.”(Während der Tag selbst auf dem Theater nur ein künstlicher, die Architektur nur eine symbolische sei und die metrische Sprache einen idealen Charakter trage, herrsche immer noch der Irrthum im Ganzen)
- 역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착각이 만연되어 있다”의 구절에서 “슐레겔식의 착각”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는데 이는 오해이다. 이 오해에 바탕해서 “오류”Irrthum라고 옮겨야 할 것을 억지로 “착각”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실러의 정의(’합창단은 이상적 토대와 시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비극 주위를 두루고 있는 인의 장벽이다’)는 자연주의, 즉 (현대의 의미와 좀 다르겠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대항이다. 그러니까 실러는 이상주의자로서 자연주의를 염두에 두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주의(리얼리즘)는 “극에서의 대낮은 예술적인 대낮이 아니라 현실의 대낮이어야 하며 건축물 역시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건축물이어야 하며, 운문 역시 실제 언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대목은 “(실러는) 극에서의 대낮 자체는 다름아닌 예술적인 것이며, 건축은 다름아닌 상징적인 것이며, 운율을 따르는 언어는 다름아닌 이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인데도, 여전히 계속해서 전반적으로 오류가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정도로 옮겨야 한다. 슐레겔의 정의(’합창단은 이상적인 관객이다’)는 실러가 비판하는 바와 무관하다.


이상 <비극의 탄생> 25절 중 '자기비판의 시도'와 7절까지 간략히 검토해본 내용이다. 사실 박찬국 번역본은 기존의 번역본들이 저지르고 있는 오역들을 대폭 개선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장도 굉장히 잘 읽히고 꼼꼼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대목에서는 여전히 오역이 살아있다는 점은 유감이다. 이것은 니체 번역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 개선해야 할 일이다.

역자가 “독자의 꾸짖음”을 당부하고 있기에 몇 군데를 지적해 보았으나, 이 번역본에 쏟은 역자의 성실성에 비하면 이런 정도의 오역은 사소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이 번역본은 신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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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1-1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안녕하세요.가끔 들어와서 글을 읽다가 갔는데..물론 번역과 관련된 글을 제가 다 따라 읽지는 않았습니다.그 차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어차피 원서를 읽고 비교할 능력은 안되기때문에-읽기에도 급급할 따름입니다.그래도 비교적 좋은 평가를 얻는 역서를 읽는다는 것은 소비자로서는 합리적 선택이기때문에 정보를 찾아보긴 합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사실 이걸 보관함에 넣어놓고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이 페이퍼가 도움이 되었습니다.언젠가 님의 페이퍼에서 오역사례를 들면서-어느 책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음악에 대해 무지한 역자가 '통주저음'을 이해하자 못했다는 말을 했을때 그 원서 내용은 모르지만 씨익하고 웃었습니다.니체가 워낙 예술에 해박하다보니 역자들로서-자기가 르네상스인간이 아닌 이상-따라가기 버거울 수 있겠구나 하는 웃음이었습니다.

거리의 나뭇잎들이 도로를 이불처럼 덮어주고 있네요.길들이 모처럼 따뜻하겠습니다.^^

반조 2007-11-15 14:42   좋아요 0 | URL
다행히도 시기가 잘 맞았군요. 책 편집도 마음에 들더군요. 앞으로, 언급한 오역들을 수정하고 1만원 정도의 페이퍼백 번역본이 나오면 <비극의 탄생> 번역에 마침표를 찍어도 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yoonta 2007-11-15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가 하나..

"앞으로는 누군가가 나에게 <번역의 탄생> 번역본을 추천해 달라 하면, 주저없이 박찬국 역본을 추천할 생각이다."
<번역의 탄생>-------> <비극의 탄생>의 오타같네요. 좋은 번역본의 탄생이라는 의미의 비유는 아니시죠? ^^

그렇지 않아도 이 책 서점에서 보고 구입을 망설였는데(집에 이미 3종의 번역본이 있어서) 더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겠군요. "신뢰할 만한" 반조님의 서평 잘 봤습니다.^^

반조 2007-11-15 14:4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군요^^ 수정했습니다. 근데 "번역의 탄생"이라는 말이 근사하네요.

푸하 2007-11-15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어요. 글을 이리 잘 쓰시다니!

반조 2007-11-15 20:27   좋아요 0 | URL
잘 쓰긴요... 그냥 메모식으로 쓴 것 뿐인데요. (어, 이거 설마 자화자찬이 되는 건 아니겠죠?)

로쟈 2007-11-16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만원 정도의 페이퍼백 번역본이 나오면 <비극의 탄생> 번역에 마침표를 찍어도 되지 않을까"에서 더 나아가 이런 번역자료들을 아예 오픈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전의 출판/번역저작권을 공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거둔요. 페이퍼 잘 봤습니다.^^

반조 2007-11-16 15:05   좋아요 1 | URL
기막힌 제안이네요. 적어도 공적인 돈을 받은 번역본들만큼은 책은 책대로 출판하고 온라인으로도 공개하면 좋겠어요. 저는 몇년 뒤 니체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온라인으로 공개할까 생각중입니다. 듣자니 번역료가 권당 이삼백 만원이라는데 그 돈 받고 번역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느니 무료 온라인판을 공개하는 것이 우리나라 니체 독해에 훨씬 많은 기여를 하지 않을까 예상해보면서요^^ 저의 꿈입니다.

로쟈 2007-11-16 15:14   좋아요 0 | URL
무료로 하진 마시구요.^^ 사실 국가(학진)에서 지원하는 명저 번역 지원사업 같은 경우 고가의 양장본으로 출간되어 일반 독자들에겐 별 의미가 없거든요. 그런 경우에 번역지원을 받기 때문에 역자가 따로 인세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저작권도 만료된 책들을 굳이 그렇게 비싸게 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러니까 온라인으도 서비스하는 게 '공익'에 더 부합하지 않나 싶어요(저작권과 무관하니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이고)...

반조 2007-11-16 21:02   좋아요 0 | URL
이 조용한 곳의 오늘 하루 방문자가 무려 100명이 넘었네요. 그동안 최대 40명을 넘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찌 이런 일이... 아마도 니체 번역에 대한 관심들이 지대하기 때문이겠죠. 그 관심들에 부응하는 것이 곧 '공익'일 텐데... 아무튼 신뢰할 만한 번역을 얻게 되어서 기쁩니다.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푸하 2007-11-1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위, '알라딘 서재'에 들어가시면 '화제의 서재글'이 중간에 나와요. 거기에 나오셨네요. 화제의 서재글은 추천이 5이상이거나 댓글수가 10이상이면 선정되요. 추천을 금방 받으셨으니 반조님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증거겠네요.

반조 2007-11-17 14:49   좋아요 0 | URL
호오, 그런 동네가 있었군요. 근데 저 숫자가 니체와 무관한 숫자라니 어쩐지 섭섭하네요.
 
10월, 당신의 추천 음악은?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와서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홀가분해지고 있다. 거의 매일 저녁 북한산 숲속의 어둠 속으로 잦아든다. 계곡물 소리, 바람 소리 들린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들은 전체적이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하염없이 자적하며 샘물과 돌 사이에 뜻을 풀어버린다. 이곳에는 샘이 있고 물이 있고 달빛이 있고 안개비가 있고 어둠이 있다. 나무와 산, 새들이 있고 역사와 유물, 돌과 절집이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리는 아득한 범종소리. 종소리는 멀면 멀수록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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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가는 길- 테마여행 그곳에 가면 2
박창규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6년 9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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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북한산 등산 안내서. 각 코스별로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부록으로 아주 좋은 북한산 지도를 제공한다. 이 책이 있으면 따로 북한산 지도를 구입할 필요가 없다.
생명긷는 샘물여행- 최성민의 자연주의여행 4
최성민 지음 / 김영사 / 2002년 7월
16,900원 → 15,210원(10%할인) / 마일리지 840원(5% 적립)
2007년 10월 30일에 저장
절판

북한산엔 샘물도 많다. 매일같이 샘물을 길어 마시고 있다. 샘물로 차를 마시니 비로소 차맛이 나고, 커피맛은 이상해진다. 커피는 약간 지저분한 물로 마셔야 하는 듯^^ 최성민 기자의 글은 시원한 바람 같은 풍취가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은 북한산 샘물이 아니라 전국의 샘물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새소리 백가지
다니구치 다카시 그림, 이우신 글, 유회상 녹음 / 현암사 / 2004년 1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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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새소리를 녹음한 음반을 제공한다. 몇번에 걸쳐 들어보니 어느 정도 소리가 구분된다. 특정 새소리를 녹음하고 있는데 꼭 옆에 끼어드는 놈이 있다. 뻐꾸기다. 그래서 그 마취적인 울음소리, 뻐꾸기는 여러 장면에 걸쳐 등장한다.
서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7년 10월 30일에 저장
품절

이 답사시리즈는 모두 소장하고 있다. 한 오륙 년간은 줄기차게 답사를 다녔더랬다. 서울 편이 가장 나중에 나왔는데 “북한산”이 자랑스럽게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유적이 많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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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선을 말하다 - 중국 천재시인 소동파가 천년을 뛰어넘어 전하는 웃음과 감동의 선 이야기
스야후이 지음, 장연 옮김 / 김영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이름값에 비해 저작이 별로 번역이 안 되어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동파이다. 소동파의 50대 시절부터의 시들이 관심이 있어서 책을 구하려 하는 데도 마땅한 책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니, 의아하기까지 하다.

소동파의 오도송은 <벽암록>인가 어딘가 선어록에 실려 전할 정도로 그는 선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선이라는 것이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만큼 사실 '오도' 이전과 이후는 겉으로는 별 변화가 없어도 내면에서는 달라도 한참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소동파의 50대 이후의 시들을 좋아하는 것이고, 어느 전기작가의 '소동파의 50대 이후의 시는 감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는 논조의 평을 읽은 바도 있다. (물론 임어당은 이런 부류의 평을 할 만한 전기작가가 아니다. 그는 서구인과 다름없어 소동파를 매우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소동파의 일면밖에 보지 않으려는 편벽된 경향이 있다.)

그래서 때마침 발견한 <소동파, 선을 말하다>는 제목의 이 책은 50대 이후의 시들을 모아놓았겠거니 하고 반갑게 맞이했는데, 웬걸, 저자는 소동파의 어린 시절로부터 해서 만년까지 선과 연관이 된다고 생각하는 시들을 모아놓고 있다. 허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소동파의 시들을 일부분 견강부회하여 선에 끌어다 맞출 수밖에 없음은 불문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야속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소동파 시집의 번역본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울러 50대 이후의 시들도 싣고 있어 만년의 면모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

이 책은 시를 한 편 놓고 번역하고 해설하고, 해설 속에서 관련 일화를 (소동파 일화뿐만 아니라 선가의 일화도) 들려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동파의 선시들과 선가의 일화들을 번역하자면 적어도 선어록들의 활발발한 문체 정도는 어느 정도나마 익히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책에 실려 있는 소동파 시 한 대목을 소개한다: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
온통 거울처럼 맑아서
푸른 산봉우리가 거꾸로 잠겨 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있어나서
백발의 노인이 타고 있는
일엽편주를 춤추게 하네.
우습구나, 난대의 공자公子는
장자의 천뢰를 이해하지 못하고
바람에도 암수가 있다고 우겼었지.
한 점의 호연지기는
천 리까지 상쾌한 바람이로다.

- <수조가두> 중에서(2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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