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는 지혜 나 없는 자비 - 한글 금강경
이포 옮김 / 호미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수보리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깊은 뜻은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이 가르침의 큰 열매 또한 헤아림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37) — 그 가르침 그대로, 금강경은 금강경을 읽는 이들의 생각과 헤아림을 금강처럼 자른다. 경전이란 독자의 생각과 헤아림을 바수어 흩고, 그의 안을 환히 비추고, 그의 밖을 환히 비추고, 그의 안팎을 환히 비추어, 그 가르침 하나하나가 안팎에 사무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경전을 읽는 자와 경전의 문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문자 너머의 금강 같은 지혜만 오롯이 천지간에 빛나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따라서 경전을 읽으려 들어갈 때에는 일개 독자로 들어갈지라도, 읽고 나올 때에는 반드시 수행자, 아니 깨달은 자, 부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경전을 경전답게 하는 길이며, 그것이 금강경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된다. 일반적인 독서행위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경전은 ‘독서’나 ‘읽기’라는 말보다 ‘독송’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독송’이라는 말에는 몸으로 받들고 입술 위로 삼가 올리고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수순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몸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입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마음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내 모습을 보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내 목소리 듣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58)

역자 이포는 금강경 번역문 뒤에 금강경 해설을 실은 것이 아니라,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을 마무리하는 찬을 올린다. 금강경 번역문 앞에서도 찬과 진언을 올린다: “입으로 지은 허물 맑아지이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10). 역자의 이름만 있고 아무런 소개문도 없는 까닭에 역자가 스님인지 재가불자인지 모르겠으나, “금강 같은 지혜를 이루는 길”(28)의 가르침, 금강경을 공경히 대하는 그 정결한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도 사라지고 금강경의 문자도 사라지고 오직 금강 같은 지혜만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금강경 해설서와 번역서가 숱하게 있다. 어지간한 책들은 대부분 접해 보았지만, 이제까지 이포의 한글 금강경만큼 감동을 주는 책은 만난 바 없다. 번역 의도와 방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책 앞의 「일러두기」를 보면, 역자의 공경하는 마음과 비원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키는 역량 또한 놀랍다:

구마라집 삼장스님은 전란이 중국 천하를 휩쓸던 때에 장안에 들어와 곧바로 「금강경」을 번역했습니다. 스님이 「금강경」을 먼저 번역한 배경에는 이 경의 가르침을 통해 천하가 평화로워지고 온 백성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절박한 염원과 확고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한글 금강경」도 스님의 염원과 믿음이 날로 절실해지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생각하며 옮긴 것입니다.(2)

그리고, 책 뒷편에는 (한문본으로 따지면, 앞쪽이 되겠다) 유공권 글씨의 「金剛般若波羅密經」 서첩이 실려 있는데, 이포는 이 서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하여 최대한 공경히 예를 갖춘다.

공경히 들으니 오조홍인 스님께서는 “「금강경」을 보아라. 그러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거사의 글씨가 한 자가 백금에 값하는 글씨라면 그 글씨로 「금강경」을 읽고, 쓰고, 받아 지니고, 소리쳐 노래하는 공덕의 값은 또 얼마이겠습니까? 굳세고 ‘나 없는’ 획 사이로 금강의 빛을 만나고, 맑고 서늘한 글자 너머로 반야의 달을 보리니, 아, 쓰고 외우는 그 공덕이여, 어찌 셈이나 비유로 다 일러 말할 수 있으리오.(60)

짧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공경히 역자의 글을 읽으니, 문득 등하스님의 법구경 번역이 생각난다.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품고 있으나 빙산의 일각만 드러내는 솜씨가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 드러난 일각은 금강과 연꽃을 동시에 든 자처럼, 서슬이 푸르되 자비롭다. 이 때문일까. 이포의 금강경 한글 번역문은 과연 빼어나다. “가르침에 대한 감흥을 살리고자 운율을 중시하며 옮겼습니다. 하여, 토씨를 없애거나 구절을 되풀이하거나 숨은 뜻을 드러내 덧붙이기도 했습니다.”(2) 구마라집 스님이 천재적인 안목으로 원문을 통찰하여 위없이 아름다운 운율의 한문으로 옮겼듯이, 이포의 한글 금강경 또한 능히 독송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때, 성스러운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장로가 일어났네. 망고 숲에 달이 뜨듯 자리에서 일어났네. 오른쪽 어깨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 땅에 꿇고 장로는 두 손 모으고 부처님께 여쭈었네.

“둘도 없는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자비로 감싸 주시고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지혜로 밀어 주십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은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합니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13)

금강경을 실제로 독송해 보면, 조계종 표준번역본은 도저히 독송이 불가능할 정도로 운율이 좋지 않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조계종 표준번역본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구마라집 한문본의 번역을 적당히 뒤섞은 듯한 느낌이며, 유감스럽게도, 산스크리트 문헌을 연구한 학자들치고 서구언어의 개념과 문장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자를 만난 바 없다. 요컨대, 영어나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에 능숙할지는 몰라도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영한사전 수준을 벗어나는 역량을 만나지 못했다. 서구언어의 개념과 문장구조에 깊이 오염되어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가 지리멸렬한 것이다. 조계종 표준번역본을 보면 그 오염원이 감지된다. 그래서 나는 그 번역본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구마라집의 천재적인 솜씨와는 별개로 구마라집 한문본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같은 개념은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지 않는 이상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천년 이상을 독송해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만큼 구마라집 한문본은 아름답다.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번역을 통한 재해석의 역량도 감탄할 만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아 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은 일러두기에서 밝힌 바대로 운율을 중시하였으며, 몇 가지 개념은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희유하십니다, 세존께서는 . . .”으로 번역되는 문장을 이포는 “둘도 없는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 . .”로 옮겼다.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죽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숨 쉬는 나’가 있다는 생각”(14)으로 옮겼다. 앞의 번역은, “불법을 처음 공부하는 분들이나 청소년 불자들이 가르침을 더 가까이 느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경전의 전문 용어를 되도록이면 삶 속에서 날마다 쓰는 생활 용어로 풀어 옮기고자 했습니다”(2)는 역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뒤의 번역은, “경전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네 가지의 나라는 생각’(四相)에 대해서도 새로운 풀이를 시도”(2)한 결과이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덧붙혀 펴낼 「금강경 용어풀이」에서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상에 대한 역자의 번역문에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참고한 노력이 엿보인다. 구마라집의 번역어로는 도무지 산스크리트 원문을 역추적할 수 없거니와 그 번역어가 새로 창조된 추상적 개념어인 까닭에, 후세인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 탁월한 감산 스님의 주석도 사상의 원뜻을 놓치고 있으며, 그 폭넓은 역량의 남회근 선생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이다. (물론 문헌학적 해석에서 잘못을 범한들 그분들의 관련 해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헌학적 입장에서는 비판받을지언정 반야의 입장에서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기 때문이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은 현 시대에 접할 수 있는 문헌은 모두 참조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번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운율 감각도 뛰어난 만큼 이 번역본으로 독송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인다:

수보리여, 보살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습에 걸림 없이, 소리에 걸림 없이, 냄새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맛에 걸림 없이, 느낌에 걸림 없이, 생각의 대상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되,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15)

역자는 스스로 본 금강경의 빛나는 지혜, 빛나는 자비를 이웃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번역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의 변함없는 운명처럼, 소리소문 없이, 빗돌에 새겨진 글씨처럼 말없이, 보살처럼,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이, 이 책을 펴냈을 것이다.

역자는 한글 금강경의 부제로 “나 없는 지혜, 나 없는 자비”를 택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금강과 연꽃이다. 금강 같은 지혜가 있어야만이 연꽃 같은 자비가 있을 수 있으며, 연꽃 같은 자비가 있어야만이 금강 같은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자가 침묵 속에 보여준 그 지혜와 자비, 잊지 않으리라.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 이포의 한글 금강경에 실린 글씨는 이와는 약간 다른 판본으로부터 손질된 것으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으며 크기가 좀더 작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실린 글씨가 약간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말라 보이며, 결과적으로 풍부한 느낌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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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은 “군더더기가 없는 가운데 힘찬 기운이 생동하는, 고매하고 맑은 품격을 이룬 글체”(59)로서, 미불은 유공권의 글씨를 두고, “선생은 푸른 산 속에 노니는 스님과 같아 몸과 마음에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 정신은 해맑고 기운은 굳세니 한 점 속된 잡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평했으며, 소동파는 “’한자 한자가 백금百金에 값하는 글씨다’라는 세상 사람들의 찬탄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60)고 평했다고 한다.

경전에 한없는 공경을 바치는 역자가 서첩에 대한 안목까지 갖추고 있어 고맙기 짝이 없다. 덕분에 백금에 값하는 글씨를 뵈는 행운을 누렸다. 역자는 유공권의 서첩을 부록으로 실은 것이 아니라, 서첩에다 “외람되게도 제가 어둔 눈을 빌어 옮긴 한글 금강경을 덧붙여 엮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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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15-01-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고 있습니다. 방법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