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니체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 이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 힘든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부단히 자신을 세상에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의 글 형식이 계속 바뀐 것도, 1886년에 저작들을 재간행하면서 서문들을 추가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을 보라»는 그런 노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심오한 정신은 가면이 필요하다”(KSA 5, 57)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에 대하여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니체라는 사람(homo)을 보라(ecce)고 가리키는 지시어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을 보라»는 “나에 대하여 약간의 빛과 충격을 퍼트리려는 시도”이다.(KSB 8, 471)

니체를 비추는 “약간의 빛”, «이 사람을 보라»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인용문들로 점철되어 있다. 거의 모든 장마다 빠짐없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그만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글이 아니다. 마침내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들을 쓰는가>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직접 말한다. “나는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겠다”로 시작되는 이 장은 마치 난만하게 피어나던 오케스트라가 무너지고 주제선율만 외로이 흐르기 시작하는 인상을 준다. 니체가 진정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으로 꼽을 만하다.

이 대목, 즉 “이 사람을 보라 >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들을 쓰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정독하는 김에 기존 번역본들을 검토해 보았다. 국내에서 니체가 어느 정도나 이해되고 있는가, 아니 어느 정도나 오해되고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국내번역본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1. 곽복록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976, 20072, 동서문화사)
  2.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1982, 청하)
  3. 백승영 역,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 . . .»(2002, 책세상)

곽복록 역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단일 제목과는 달리 «비극의 탄생», «아침놀»,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으로, 1976년에 처음 출간되었다가 최근 2007년에 새로 출간되었다.
 

먼저, 1절에서 문제시 할 수 있는 번역 대목을 살펴보자. 니체는 1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의 시작과 마무리를 이야기한다.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역사의 출발점인 1881년 8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을 전후한 시기를 의미한다. 그중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전제 조건이 되는 “듣는 법에서의 재생”과 관련한 경험 대목:

sicherlich war eine Wiedergeburt in der Kunst zu hören, eine Vorausbedingung dazu. In einem kleinen Gebirgsbade unweit Vicenza, Recoaro, wo ich den Frühling des Jahrs 1881 verbrachte, entdeckte ich, zusammen mit meinem maëstro und Freunde Peter Gast, einem gleichfalls “Wiedergebornen“, daß der Phönix Musik mit leichterem und leuchtenderem Gefieder, als er je gezeigt, an uns vorüberflog.(1절)

확실히 듣는 법에서 재생이 있었다. 이것이 예비조건이었다. 비첸차에서 멀지 않은 어느 조그만 산중 온천 레코아로에서, 내가 1881년 봄을 지냈던 곳에서, 나의 벗, 음악가 페터 가스트, 나와 마찬가지로 “재생한 자”와 함께, 나는 음악이라는 불사조가 이제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욱 가볍고 더욱 빛나는 깃털로 우리 곁을 스쳐 비상하는 것을 발견했다.

곽복록 확실히 듣는 기술의 부활이 그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멀지 않은 레코아로라는 조그만 산간 온천장에서 (…) 여기서 나는 내 음악 교사이며 친구인, 나처럼 ‘다시 태어난 자‘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

김태현 확실히 듣는 예술이 나에게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이 사상에 대한 전제조건이었다. 베네치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레코아르라는 작은 산 온천에서 (…) 거기서 나는 나의 음악가이며 친구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이 사람도 또한 “<다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백승영 확실히 예술 안에서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었다 (…) 베네치아에서 멀지 않은 레코아로라는 작은 산간 온천에서 나는 내 스승이자 벗이며 그 역시 ‘다시 태어난 자‘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

위 인용문은 실스 마리아의 경험이 있기 두 달 전에 음악적 취향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것을 서술하는 대목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대목인데 불가사의하게도 모두 이상하게 번역했다. 먼저, “eine Wiedergeburt in der Kunst zu hören”은 “듣는 법에서의 재생”, 또는 “듣는 기술에서 다시 태어남” 정도로 번역해야 하는데, 백승영은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예술 안에서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었다”로 오역하는 동시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다. 또한 “Wiedergeburt”는 “재생, 거듭남”의 의미로서 “부활”(Auferstehung)과는 명백히 다른 낱말이다. 이들 낱말이 모두 루터번역성서에서 중요한 의미로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면, “Wiedergeburt”는 “재생, 다시 태어남, 거듭남”으로 옮겨야 한다. 특별히 뒷 문장에서 “Wiedergeborner”(재생한 자, 다시 태어난 자)와 호응을 이루고 있는만큼 같은 낱말로 번역해야 하는데도, “부활/다시 태어남”(곽복록, 백승영)으로 다르게 옮긴 것은 의아하다. 그리고 “maëstro”는 그냥 “음악가”로 옮기면 되는데 “음악 교사”(곽복록), “스승”(백승영)으로 옮긴 것도 눈을 의심케 한다. 페터 가스트는 니체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도 그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Vicenza”는 “비첸차”인데 한결같이 “베네치아”로 옮긴 것은 또 무엇인지.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 직후 «즐거운 학문»을 출간하고 이후 곧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내놓았던 만큼,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리는 “백 가지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즐거운 학문» 제4부 마지막 절인 342절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서설의 시작이 될 대목을 먼저 싣고 있으며, 바로 그 전절인 341절은 그 유명한 “최대의 무게”라는 제목으로 영원회귀 사상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즐거운 학문» 제4부 342절이 곧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시작 대목이기에 니체는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시작마저 내놓고 있다”고 했으며, 바로 그 앞절은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을 내놓고 있다고 했다.

In die Zwischenzeit gehört die “gaya scienza”, die hundert Anzeichen der Nähe von etwas Unvergleichlichem hat; zuletzt giebt sie den Anfang des Zarathustra selbst noch, sie giebt im vorletzten Stück des vierten Buchs den Grundgedanken des Zarathustra.(1절)

“즐거운 학문”은 그 중간기에 속하거니와 그것은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는 그 뭔가가 접근하는 백 가지 조짐이다; 급기야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시작마저 내놓고 있으며, 제4부 마지막 바로 전 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을 내놓고 있다.

곽복록 결국 그것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머리를 그대로 싣고 있고 제4권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부분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현 결국 그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부분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책 제4권 2절에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백승영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이고, 그 4부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형성사를 면밀히 검토했다면,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백승영)라는 번역을 할 수 없다. 백승영 번역본이 그나마 나은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부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실망이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니체가 원문에서 별도의 괄호나 기호 없이 “차라투스트라”로 지칭하고 있을 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책과 인물을 동시적으로 가리키고 있어 자못 풍요로운 의미를 띤다. 번역할 때에도 그 의도를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2절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로 “위대한 건강”을 꼽고 있으며, 이에 관한 상세한 안내문으로 «즐거운 학문» 제5부 382절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전집번역이라면 두 번역자의 번역내용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흥미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책세상 번역본은 백승영 역의 «이 사람을 보라»와 안성찬·홍사현 역의 «즐거운 학문» 번역문이 동일하다. 나중에 간행된 안성찬·홍사현 역이 백승영 역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오역도 그대로 따랐다.

für den das Höchste, woran das Volk billigerweise sein Werthmaß hat, bereits so viel wie Gefahr, Verfall, Erniedrigung oder, mindestens, wie Erholung, Blindheit, zeitweiliges Selbstvergessen bedeuten würde; das Ideal eines menschlich-übermenschlichen Wohlseins und Wohlwollens, welches oft genug unmenschlich erscheinen wird, zum Beispiel, wenn es sich neben den ganzen bisherigen Erdenernst, neben alle bisherige Feierlichkeit in Gebärde, Wort, Klang, Blick, Moral und Aufgabe wie deren leibhafteste unfreiwillige Parodie hinstellt - und mit dem, trotzalledem, vielleicht der große Ernst erst anhebt, das eigentliche Fragezeichen erst gesetzt wird, das Schicksal der Seele sich wendet, der Zeiger rückt, die Tragödie beginnt . . .

그 정신에 비하자면, 군중이 당연하게도 그들 자신의 가치척도로 삼고 있는 최고의 것이 숫제 위험, 타락, 비천함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며, 그게 아니라면 고작 회복, 맹목, 일시적인 자기망각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다; 인간적인-초인적인 복된 존재와 복된 의욕의 이상은 빈번하게 진정 비인간적으로 비칠 때가 있는 바, 예컨대 그것이 ‘몸짓·말·소리·시선·도덕·과제’를 빌어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도 비자의적인 패러디’를 빌어서 기존 지상의 진지함 전체와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기존의 온갖 엄숙한 것들과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그렇다 —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위대한 진지함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본연의 물음표가 처음으로 제기되리니, 영혼의 운명이 회전하고,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비극이 시작된다 . . .

곽복록 당연히 가치 척도로서 갖고 있는 최고의 것이 이러한 이상의 정신은 민중에게는 위험, 타락, 굴욕 같은 것 아니면, 최소한 휴양이나 맹목성, 일시적인 자기망각 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컨대 이제까지 지상에서 진지하던 몸짓, 말, 음향, 시선, 도덕 과업을 이루기 위한 온갖 의식 옆에 이상이 그것들과 가장 닮은 풍자시처럼 놓인다면, 그 인간적이면서도 초인간적 안녕과 호의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진지함으로 시작되고 본연의 의문 기호가 찍힐 것이다. 그러면 영혼의 운명이 방향을 바꾸고 시계 바늘이 움직이며, 그곳으로부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김태현 이러한 이상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기준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최고의 것이란 단순히 위험, 쇠퇴, 저하, 기껏해야 휴양, 맹목, 일시적인 자기망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예를 들면 이러한 이상이 지상의 모든 진지함, 몸짓, 말, 소리, 눈, 도덕, 사명에 있어서의 모든 장엄함과 대면케 되면 인간적 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 그 이상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구체화된 조롱 시가 되는–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 이상으로써 위대한 진지함이 진정으로 시작되리라. 영혼의 운명은 바뀌고, 바늘은 앞으로 움직여 비극은 시작되리라.

백승영 이 이상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자기들의 가치 기준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최고의 것은 위험이나 쇠퇴나 저하를 의미하게 되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기껏해야 휴양이나 맹목이나 일시적인 자기 망각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적-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이지만, 종종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지상의 진지함 곁에서, 몸짓이나 말이나 소리나 시선이나 도덕이나 과제에 있어서의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이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되는 경우에서 그렇다–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과 더불어 위대한 진지함이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진정한 의문부호가 비로소 찍힐 것이다. 영혼의 운명이 바뀌고,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난해한 대목이다. 위 인용문의 앞 문장에서는 “이제까지 ‘성스럽다’, ‘선하다’, ‘불가침이다’, ‘신성하다’고 칭한 모든 것과 더불어 유희하는 정신의 이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정신 혹은 그 정신의 이상에 비하자면 사람들이 최고의 것으로 받들고 있는 것들(가령 ‘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들)은 ‘위험’, ‘타락’, ‘비천’에 불과하며 잘 봐줘도 사람들이 생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회복’, ‘맹목’, ‘자기망각’을 뜻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니체의 강조점이다. 그런데 그 정신의 이상이라는 것이 제시될 때에는 기존의 언어, 예술, 입장, 도덕, 과제 등을 빌어서 (혹은 그것들의 패러디를 빌어서) 제시될 수밖에 없는 바, 필연적으로 인간적이면서도 초인적인 양면을 띠게 되며, 더 나아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비치게 된다. 가령, 니체가 애용하는 말인 ‘악’, ‘악의’ 등이 그렇다. 이것은 도덕의 용어를 빌어서 제시되는 것이자, 기존의 엄숙함을 대표하는 최고가치인 ‘선’, ‘신성’과 함께 나란히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언어를 빌어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며, 그러면서도 기존 언어의 의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초인적이며, 그리하여 기존 지상의 가치들을 파괴하면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요컨대, ‘악’이 ‘신성함’과 더불어 유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인 것이다.

이 구절에서 곽복록과 김태현의 번역은 별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안 좋다. 백승영의 번역이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한데, 헤매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첫 문장의 우리말 표현이 매우 어색하거니와 “이 이상에 대해서는”이 아니라 “이 정신에 대해서는”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몸짓이나 말이나 소리나 시선이나 도덕이나 과제에 있어서의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이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되는 경우”라는 번역문 역시 원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몽롱한 문장이다. “가장 생생한 (패러디)”를 누락한 것도 의외다.
 

위와 같은 니체의 심오한 문장처럼 철학적 논증을 거쳐 의미를 확정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잘못 번역해도 (심지어는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해도) 이를 지적하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나마 구문을 잘못 파악하여 결정적으로 오역이 발생했다면 이를 지적하는 일은 수월한 편인데, 이런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는 문장의 의미나 낱말의 뉘앙스를 면밀히 파악하지 못해 오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3절의 경우에도 그렇다.

Es scheint wirklich, um an ein Wort Zarathustra’s zu erinnern, als ob die Dinge selber herankämen und sich zum Gleichnisse anböten (- “hier kommen alle Dinge liebkosend zu deiner Rede und schmeicheln dir: denn sie wollen auf deinem Rücken reiten. Auf jedem Gleichnis reitest du hier zu jeder Wahrheit. Hier springen dir alles Seins Worte und Wort-Schreine auf; alles Sein will hier Wort werden, alles Werden will von dir reden lernen -”).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회상하건대,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주기라도 한 듯하다 (— “여기에서 모든 사물들이 쓰다듬으며 너의 설법을 향해 다가오고 너에게 살랑댄다: 그것들은 너의 등에 올라타고 싶은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 여기에서 너를 위하여 모든 존재의 말이 문득 열리고 말의 상자가 문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에서 말이 되고자 한다, 모든 생성은 너로부터 설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

곽복록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떠올려 보면 거기에선 마치 사물들이 다가와서 자기를 비유적으로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물은 애무하면서 그대의 역설에 다가와서 아첨한다. 그것은 그대의 등을 타고 가려하기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비유를 타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의 말과 말의 상자가 튕겨 열린다. 모든 존재가 말이 되려 한다. 모든 생성이 그대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김태현 실제로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것을 보면 암시를 얻을 수 있는데 모든 사물은 스스로 접근해 와서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모든 것은 너의 말이 있는 곳에 달래는 듯이 다가와 아첨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의 등에 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는 비유를 타고 어떠한 진리에도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말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생성은 너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백승영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억해보자면 어떤 것이 제 스스로 다가오고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여기서는 모든 것이 어리광을 부리며 네가 하는 말로 다가와 네게 아첨하리라: 모든 것이 네 등에 업혀 달리려 하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에서 온갖 비유의 등에 올라타고 진리를 향해 달린다. 여기서 모든 존재의 말과 말의 상자가 너를 향해 활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서 말이 되고자 하며, 모든 생성은 네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3절에서 니체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결정적인 경험을 두고 “영감”의 사례로 소개한다. 심심미묘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역자들은 표현 하나하나에 예민해야 한다. 가령,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인 경험의 순간에 사물들이 니체에게 다가온 장면을 두고, 모든 사물들이 아첨한다느니 어리광을 부린다느니 표현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역자들이 니체의 경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그저 독한사전만 보고 하나같이 “아첨하다”로 옮겼나본데, 안타까운 일이다. 동일한 견지에서, “Auf jedem Gleichnis reitest du hier zu jeder Wahrheit”의 “jede-” 역시 정확하게 “저마다의 비유/저마다의 진리” 내지 “각각의 비유/각각의 진리”로 번역해 주어야 마땅하다.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는 문장은 “진리를 위하여 비유를 탄다”나 “진리를 위하여 온갖 비유를 탄다”는 문장과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번역하지 않는가?
 

다음 4절은 소위 ‘팩트’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4절에는 니체가 독일식 지명으로 표기한 “Nizza”와 “Eza”가 등장한다. 이곳들은 현재 프랑스 영토의 “니스”와 “에즈”이다. 그런데, 번역자들이 “니스”는 제대로 표기하고선 “에즈”를 “에쯔아”나 “에차”로 잘못 표기한 것은 그들의 불성실에 대한 증거이다. 이러한 불성실은 2절의 “ein Göttlich-Abseitiger alten Stils”(옛 풍습처럼 신성하게 제정신을 벗어난 자)를 “옛 방식으로 신이 들려 괴상한 자”(백승영)으로 옮긴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 개념이 적어도 플라톤의 이온이나 파이드로스에서 유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면 “괴상한 자”라고 옮길 수 없다. 그러니 “옛날 방식으로 신이 들린 자”(곽복록), “구식으로 신들린 자”(김태현)로 옮기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문체적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반복되는 동사의 빈번한 생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략은 일반적인 독일어에서는 허용되기 힘들 정도이지만, 니체가 그렇게 한 것은 우선은 문장의 리듬 때문일 것이며, 특히 생략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생략하는 희랍어·라틴어의 구문에서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로마시인들로부터 문체를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in Andres ist die schauerliche Stille, die man um sich hört. Die Einsamkeit hat sieben Häute; es geht Nichts mehr hindurch. Man kommt zu Menschen, man begrüsst Freunde: neue Öde, kein Blick grüsst mehr.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서 듣는 으스스한 정적이다. 그 고독은 일곱 겹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벗들에게 인사하지만, 새로운 적막이 인사할 뿐, 더 이상 그 어떤 시선도 인사하지 않는다.

곽복록 사람들에게로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도 말이다. 새로운 적막이 감돌고 더 이상 인사하는 눈초리라곤 없다.

김태현 사람들, 친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본다. 그러나 더 많은 고립감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따뜻한 눈으로 반겨주지 않는다.

백승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하지만: 새로운 황무지는 어떤 인사의 눈길도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밑줄 그은 문장은 “neue Öde grüsst, kein Blick grüsst mehr” 내지 “kein Blick grüsst mehr, sondern nur neue Öde [grüsst]“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니체는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생략하여 “neue Öde, kein Blick grüsst mehr”로 썼다. 그런데 이러한 니체의 문체에 익숙하지 못한 역자들은 잘못 옮기고 말았다. 다만 곽복록은 “새로운 적막이 감돌고 더 이상 인사하는 눈초리라곤 없다”고 의역하여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그동안 니체 번역서들을 살펴본 결과, 역자들이 니체의 생략구문을 놓쳐서 의미를 잘못 파악하여 저지른 오역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체 오역의 사례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례는 다름아닌 정반대로 번역한 경우이다. 설마 그런 경우가 있으랴 의문을 품을 만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런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5절의 마지막 구절이 그렇다:

Ich wage noch anzudeuten, daß man schlechter verdaut, ungern sich bewegt, den Frostgefühlen, auch dem Mißtrauen allzu offen steht, - dem Mißtrauen, das in vielen Fällen bloß ein ätiologischer Fehlgriff ist. In einem solchen Zustande empfand ich einmal die Nähe einer Kuhheerde, durch Wiederkehr milderer, menschenfreundlicherer Gedanken, noch bevor ich sie sah: das hat Wärme in sich …

내가 과감하게 암시까지 해주겠거니와, [그런]사람들은 소화력이 좋지 않으며, 움직이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한기寒氣와 불신에 대하여 너무나 활짝 열려 있다, — 불신은, 대개 병인病因을 잘못 짚어 [질병이라고] 진단한 것일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암소떼의 접근을 감지한 바 있다, 암소떼를 채 보기도 전에,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이 회귀하는 것을 단서로 하여: 그것은 온기를 품고 있느니 . . .

곽복록 그런 사람은 소화를 잘 못 시키고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고 한기나 불신감에 내맡겨져 있다고 나는 감히 암시한다—대개 단지 병원학적인 실책에 불과한 불신감에 말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어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나는 소떼가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을 보기도 전에 말이다. 온화하고 어진 생각 자체는 온기를 지니고 있다.

김태현 그여기서 감히 부언해 둘 것은 그렇게 되면 우리의 소화능력은 감퇴하고 게으르게 되고 한기에 너무 민감하게 되고 불신감에 걸리고 만다. 그 불신감이란 대개 단순한 병원학적인 착오에 불과한 것이지만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었을 때 더욱 온화하고 더욱 인자한 사상이 나에게 다시 떠올랐고 그때 나는 한 우리의 소떼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들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백승영 그런 사람들은 소화도 잘 못 시키고, 움직이기를 싫어하며, 얼어붙어버리고 지나치게 불신감에 개방되어 있다고 나는 감히 암시한다—여러 경우에서 단지 병인학적 착오에 불과한 불신감에. 그런 상태에서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인간 친화적인 사유가 내게 돌아오면서 나는 소떼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것을 미처 보기도 전에: 그것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니체는 제5절에서 불멸의 성과를 이룬 자가 치를 수밖에 없는 값비싼 댓가/보상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 중 마지막 세번째가 위에 인용한 대목으로, 창조력을 모두 소비하고 나면 모든 방어력이 소진되면서 사소한 상처에도 민감한 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화력도 좋지 않고 움직이기를 힘들어한다. 그리고 “한기와 불신”에 대하여 무방비로 열려 있게 된다. 즉 그들은 한기와 불신 자체가 된다. “불신”은 대개의 경우에 병인을 잘못 짚어 질병이라고 진단한 것에 불과할 뿐이요, 불멸을 이룬 이들에게는 존재 자체가 불신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한기와는 정반대인) 온화한 사상들이 접근하는 조짐만 보여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상태에서 나는 암소떼의 접근을 감지한 바 있다, 암소떼를 채 보기도 전에,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이 회귀하는 것을 단서로 하여 . . .”라고 말한다.

이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제3절을 함께 음미할 필요가 있다:

보라! 나는 너희에게 최후의 인간을 선보이겠노라.

“사랑이 무엇이냐? 창조가 무엇이냐? 그리움이 무엇이냐? 별이 무엇이냐?” — 이렇게, 최후의 인간은 묻고는 눈꺼풀을 떤다.

그후 대지는 왜소해졌으며, 만물을 왜소하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은 대지 위를 날뛰고 있다. 그의 생식은 잎벌레처럼 근절될 수 없다; 최후의 인간이 가장 장수한다.

“우리는 행복을 창안했다”라고 —, 최후의 인간들은 말하고는 눈꺼풀을 떤다.

그들은 살기에 혹독했던 지역을 떠났다: 사람들은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마찰한다: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듦과 불신을, 그들은 죄악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걸어온다. 아직도 돌부리나 인간에게 채여 비틀거리는 멍청이.

다름아닌 “사랑”, “행복”, “온기”는 최후의 인간의 언어이다. 최후의 인간은 “병”과 “불신”을 죄악으로까지 여긴다. 그렇게 그는 “좀더 온화한 사상들”과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을 설파한다. 그가 “창조”라는 말을 꺼내면 그 “창조”라는 말도 온화한 사상이 되어 타락하게 된다. 이 최후의 인간과 그를 따르는 인간들을 두고 차라투스트라는 통탄한다: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만 있음이여! 저마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저마다 동일하다.”

이제 우리는 앞선 인용문에서 “암소떼”가 무엇이며 “온기”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어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곽복록), “더욱 온화하고 더욱 인자한 사상이 나에게 다시 떠올랐고”(김태현),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인간 친화적인 사유가 내게 돌아오면서”(백승영) 등의 번역이 니체의 의도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정반대로 번역했다! 무엇이 차라투스트라이고 무엇이 최후의 인간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한 번역!

바로 이런 대목이 니체 독해의 어려움이며, 바로 이런 대목이 국내 니체 번역의 한계인 것이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나는 다른 니체 텍스트에서도 이와 동일한 사례를 빈번하게 마주쳤다. 그리고 이런 대목은 어느 한 번역본만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번역본이 동일하게 오역한다는 사실이 무척 뼈아프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니체 번역이 나오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외에 사소한 오역들도 언급하자면 끝이 없겠으므로 이만 줄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해 보자면, «이 사람을 보라»의 번역본들을 일부분 비교하면서 검토해본 결과, 김태현 역본은 과연 동일한 텍스트를 토대로 번역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오역이 비일비재하여 이 번역본으로 읽고서 과연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읽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곽복록 역본은 아마도 일역본도 함께 참고했는지 어휘가 풍부하며 가장 매끄럽게 읽히지만 대책없는 오역을 한 경우가 많다.

이들에 비하자면 백승영 역본이 오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긴 한데 문체나 어휘의 유려함에서는 곽복록 역본에 미치지 못한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백승영은 니체전집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의 번역본을 검토해 보건대 그 말은 과장이 아니겠나 한다. (하긴 백 번을 읽는다한들 니체가 이해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면밀한 독해는 하지 못한 것같다. 내 판단으로는, 그의 번역은 일곱 번의 독해에 값하는 번역이 아니며, 시간에 쫓겨 서둘러 번역한 인상이 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중에 수많은 번역본들이 나와 있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그나마 나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청하출판사에서 펴낸 최승자 번역본인데, 유감스럽게도 목차가 실려 있지 않아 가끔씩 참조해야 할 때 불편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목차를 정리하고 인쇄해 책에 붙여두었더니 무척 편하다. 최승자 번역본을 읽는 독자분들은 아래의 목차를 유용하게 이용하시기를 . . .


1부  
세 가지 변용에 관하여 65
덕의 강좌에 관하여 67
배후세계론자에 관하여 70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관하여 73
희열과 열정에 관하여 75
창백한 범인에 관하여 77
독서와 저술에 관하여 79
산상의 나무에 관하여 81
죽음의 설교자들에 관하여 84
전쟁과 전사에 관하여 86
새로운 우상에 관하여 88
시장의 파리 떼에 관하여 91
순결에 관하여 94
친구에 관하여 95
천 하고도 한 개의 목표에 관하여 97
이웃 사랑에 관하여 100
창조하는 자의 길에 관하여 102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에 대하여 105
독사에게 물린 상처에 대하여 107
자식과 결혼에 대하여 109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111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115
   
2부  
거울을 가진 아이 121
지복의 섬에서 125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127
성직자들에 대하여 130
유덕한 자들에 대하여 132
천민에 대하여 136
타란툴라에 대하여 139
저명한 현자들에 대하여 142
밤 노래 145
춤 노래 147
만가 150
자기 초극에 관하여 153
고고한 사람들에 대하여 157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160
결백한 인식에 대하여 163
학자들에 대하여 166
시인들에 대하여 168
대사건들에 대하여 171
예언자 175
구제에 대하여 179
처세에 대하여 184
가장 고요한 시간 187
   
3부  
나그네 193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196
원치 않은 지복에 관하여 201
해뜨기 전 205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208
감람산에서 214
스쳐감에 대하여 217
배교자들에 대하여 220
귀향 224
세 가지 악에 대하여 228
중력의 영에 대하여 233
낡은 표들과 새로운 표들에 관하여 238
회복기의 환자에 대하여 258
커다란 동경에 대하여 264
두번째 춤 노래 267
일곱 개의 봉인 271
   
4부  
꿀의 공양 277
비명 281
왕들과의 대화 284
거머리 288
마술사 292
퇴직자 299
가장 추악한 인간 304
자원한 거지 309
그림자 314
정오에 317
인사 320
만찬 326
보다 높은 인간에 대하여 328
우울의 노래 338
과학의 노래 343
사막의 딸들 사이에서 346
각성 352
나귀제 356
취가 360
신호 3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와 플라타너스
 

니체는 자신의 “영감” 혹은 “경험”과 관련하여 “1881년 8월 초 실스 마리아에서, 해발 6천 피트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KSA , 494)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8월 14일 페터 가스트에게 “나의 지평에서 사상이 떠올랐다”는 관련내용의 편지를 썼다. 이후 육칠 년 뒤 «이 사람을 보라»(1888년)에서 1881년 여름날과 결부시켜 차라투스트라의 형성사를 소개한다. 이 자료들을 종합하여 관련일지와 발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81년 오뉴월
 
1881년 8월 초
 
 
 
 
1881년 8월 14일
“취향의 급격한 변화 . . . 특히 음악에서의 결정적 변화”
 
“1881년 8월 초 실스 마리아에서,
해발 6천 피트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
“나의 지평에서 사상이 떠올랐다”
“영원회귀 사상은 . . . 1881년 8월에 속한다 . . . 그때 그 사상이 내게로 왔다”
 
페터 가스트에게 편지

 
니체는 1881년 8월 초의 경험이 있기 두 달 전에 “취향의 급격한 변화, 가장 깊은 곳에서의, 다른 무엇보다도 음악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의 말을 따라가면, 이 변화는 영원회귀 사상의 징조이자 예비조건이었다. 이를 두고 니체 특유의 과장성 발언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고 만다면, 니체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혹시 니체는 정말 여타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했고, 그저 그 경험에 관하여 최선을 다하여 이야기할 따름이 아닐까? 때마침 그는 언어적 천재성이 있어 그의 빛나는 경험에 적절한 옷을 입힐 수 있었던 것 뿐이고. 1881년 오뉴월에 경험한 음악적 변화와 관련하여, “음악이라는 불사조가 . . . 더욱 가볍고 더욱 빛나는 깃털로 우리 곁을 스쳐 비상하였다”고 했던 발언은 그의 진정한 경험에다 언어적 천재성이 결합한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처럼 무성한 플라타너스, 향기로운 꽃, 차가운 샘물, 매미 소리, 선선한 바람결 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도시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자라면, 니체의 빛나는 표현들을 한낱 수사로 여길 만하다. 이는 다름아닌 학자들의 전형적인 습성이자 체질과도 같다. “나는 배움을 좋아한다네. 풍경(chorion)이나 나무는 나를 가르치려는 바가 없지만,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가르치려는 바가 있어.”(<파이드로스> 230d) —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말이자 대다수 학자들의 말일 게다. 과연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학자들의 비조”라고 칭한 바 있다.

사실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여타 대화편에서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선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아테네 교외로 빠져나가 냇물에 발을 적시며 일리소스 천 상류로 거슬러 간다거나,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서 있는 장소를 두고 연방 아름답다고 경탄한다거나, 상당히 고취된 채 첫번째 연설을 하면서 “신성한 파토스가 나를 엄습한 듯하지 않나? . . . 이 장소는 신성한가 보다. 그러니 내가 연설하다가 자꾸 님프들에게 홀려도 놀라지 말게”(238cd)라고 말한다거나, 신화적 요소를 빌어 이데아를 보았던 휘황한 광경을 묘사한다거나 하는 등,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평소의 소크라테스라면, 마치 예리한 단도를 잘 쓰는 칼잡이처럼, 일체의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짤막짤막한 대화를 통한 논쟁을 즐겼을 일이지만 <파이드로스>에서는 초장부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커다란 플라타너스와 차가운 샘물과 매미들의 합창에 홀렸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그는 소리와 풍경과 감정에 도취되는 여타의 형식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가 도취된 모습으로 첫번째 연설을 하는 것도 실은 파이드로스와 그의 선생 뤼시아스의 도취적 모습을 동일하게 취하여 연설 시범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뤼시아스의 감정 고취, 연설 형식과 논리를 고스란히 취하여 뤼시아스의 귀결을 파괴하는 시범을 파이드로스 앞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에 다른 여타 소피스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본질적인 모습 그대로이다. 말하자면, 평소에는 소피스트의 논변을 재꺽재꺽 따라가 그 논변의 모순을 입증함으로써 무너뜨렸다면, 이번에는 소피스트의 연설 시범의 형식과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 (심지어는 도취적인 모습까지 그대로 따라가) 그것의 귀결, 즉 신성모독에 이르는 귀결을 보여줌으로써 무너뜨리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파이드로스>에서는 단도가 아니라 장검을 썼다고나 할까.

 

“거인들의 전쟁”
 

소크라테스가 소리와 풍경, 그리고 신화를 좋아하지 않는 단적인 예는 «국가» 제3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시인이 직접 발언을 하지 않고 신화속 인물을 재현하여 이야기하는 것(그는 이것을 “미메시스”라 부른다)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운율이 있는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국가» 제3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일리아스» 서두 부분과 관련하여 미메시스의 요소가 없는 서사시의 경우를 친절하게 예시하고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검토 대상으로 삼았던 «일리아스» 서두 부분을 읽어보자.

그가 이렇게 말하니, 노인은 두려워 그 이야기를 따랐노라.
자리를 물고 웅혼하게 포효하는 바닷가 사장따라 묵묵히 걷다보니,
이윽고 한참을 아득허니 떨어지고, 그 노인은 기도하였노라.
통치자 아폴론께, 아리따운 머리결의 레토께서 낳으신 분께:
“들으소서 제 말을, 은빛 활 지니신 분이시어, 크뤼세와 성스러운
킬라를 돌보셨으며, 테네도스를 위력 있게 다스리시는 분이시여,
스뮌테우스시여, 당신께 흡족한 신전을 건립하여 바친 적 있다면,
혹은 당신께 제가 황소들이며 염소들의 살진 허벅다리들을
태워올려 바친 적 있다면, 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부디 다나오스 인들이 내 눈물값을 치르기를, 당신 화살로 하여!”

— «일리아스» 1.33-42 (필자 역)

위 서사시 대목에서 호메로스가 등장인물 크뤼세스가 되어 말하지 않고 여전히 호메로스로서 말하는 경우, 즉 미메시스는 없고 깔끔하게 시인 자신의 이야기만 있는 경우에 서사시가 어떤 식으로 쓰여져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노인은 이 말을 듣자 겁이 나서 잠자코 떠나갔다. 그러나 군영에서 멀어졌을 때, 노인은 아폴론 신께 많은 기도를 했는데, 그는 이 신의 여러 별명을 부르면서, 자기가 한 신전들의 건립과 제물을 바친 일을 상기시키며,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일찍이 그 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바친 것이 있었다면, 그 보답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바로 그 보답으로 그 신의 화살들로써 자기의 눈물에 대한 대가를 아카이아 인들이 치르게 해 달라고 그는 기원했다.

— «국가» 394a(박종현 역)

일리아스의 서곡은 무사 여신들에게 호소하는 시가를 뒤이어 곧바로 예언자 크뤼세스가 전리품으로 빼앗긴 딸을 되찾으려고 아카이아인들의 진영으로 가서 그들의 수장 아가멤논과 벌이는 담판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딸을 방면하기는커녕 협박까지 하면서 크뤼세스를 내쫓는다. 크뤼세스는 그 험악한 기세에 짓눌려 앞서 인용한 대로 아폴론 신에게 기원을 한다. 그리고 이 기원은 트로이아를 아홉해 째 공략하고 있던 아카이아인들을 엄습하는 치명적인 역병으로 화한다. 서곡 바로 다음에 자리잡은 이 짧은 기원이 결국 여러 서사시 영웅들의 긴장 관계를 다시 조율하는 계기가 된 만큼, 이 대목은 그에 걸맞는 무게와 호흡, 긴박감과 비장감이 울려나도록 낭송되었어야 할 일이다. 기본적으로는 서사시의 육운보 운율 자체가 그러한 장엄과 웅장을 담아냈을 것이지만, 그에 더하여 낭송가인의 몸짓, 목소리의 음색, 소리의 고저와 강약 등 예민한 감각을 총 동원하여 이 대목의 긴장과 고요, 쓸쓸함과 절박함, 강렬함과 분노를 역동적으로 표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사시는 낭송되던 장소 그리고 낭송을 듣는 청중과 불가분의 조율 관계를 형성하면서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리스 전역을 유랑하는 낭송가인들이 아카이아인들의 찬란한 과거를 향수로 간직하고 있는 후예들을 모아놓고 어느 한 장소, 어느 한 시점에서 낭송했던 서사시의 현장성은 그러나 플라톤 당시만 해도 사라지고 말았다. 오직 그러한 현장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러한 현장과 더불어 성장하였으며 그러한 현장 속에서 완성을 이루었던 서사시는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에서는 서사시 낭송경연이나 교육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착되고 고착된 축제의 한 형식으로만 편입된 서사시, 교육현장에 소속된 서사시는 이미 그 시작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이다. 우선, 그것이 수많은 청중을 앞에 두고 벌이는 경연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현장의 마력을 상당 부분 털어낼 수밖에 없다. 또한 교육현장에서의 서사시는 가장 그 마력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표현대로 “시적인 사람이 못 되는” 소크라테스도 서사시의 낭송, 음악성을 동반한 언어의 마력에 대해서만큼은 인정을 한다. 비록 서사시가 현장성에서는 멀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위력과 교육효과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었던 플라톤은 그것의 마력을 꺾기 위한 길로 단호하게 접어든 것이다.

바로 이 전략의 지점에서, «국가»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서사시의 현장성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또 마지막 남은 현장성의 흔적인 운율마저 벗겨내어, 그 운문을 산문화시킨다. 그래서 시의 음악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영웅들의 웅장한 세계는 음악적 요소라는 면에서 무미한 세계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 산문화된 시에서는 “웅혼하게 포효하는 바닷가 사장따라 묵묵히 걷”는 예언자의 모습이 삭제된다. 아울러 “크뤼세와 성스러운/ 킬라를 돌보셨으며, 테네도스를 위력있게 다스리시는 분”, “은빛 활 지니신 분” 등 아폴론 신의 행적과 관련한 신화성 혹은 역사성이 제거되고, “여러 별명”이라고 일축된다. 시를 추방하고 시를 다시 귀환시키는 이러한 변혁의 과정에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도 음악성, 미메시스, 신화성, 풍경을 제거한다.

시와 철학의 구원(舊怨) 관계, “거인들의 전쟁”은 이처럼 소리, 풍경, 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철학은 그것들을 제거하고자 하며 시는 그것들을 사용하고자 한다. 인류의 정신사에서 소리, 풍경, 신화를 사용하려는 극점과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극점 사이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도 이 거인들의 전쟁에 가담한 것인가?
 

니체의 거리감
 

니체는 1881년 여름날을 전후하여 “음악이라는 불사조”가 더욱 가볍게 비상하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사상이 그에게로 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그 경험의 상태, “적연부동한 상태”가 행여 흐트러질까봐 거기에 관해 말하는 것조차 꺼렸다. 그는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로 환호의 눈물을 흘렸으며, 피라미드처럼 솟은 바윗덩이와 실바플라나 호숫가의 풍경을 보존하고 싶어했다. 플라톤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소리와 풍경에 절친했던 것이다. 그는 페터 가스트에게 보낸 1881년 8월 14일자 편지에서 그 해에 보상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과 풍경”이라고까지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거인들의 전쟁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시인들조차도 불신한다. 시인은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상의 나라에서 시인을 추방하고자 했던 플라톤과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과 달리 결코 소리와 풍경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니체에게서의 소리와 풍경은 시인에게서의 소리와 풍경이 확실히 아니다. 소리와 풍경을 여실히 대하는 니체의 태도는, 내 생각에는, 선불교나 신비주의의 계통에 속하는 것이다. 긴 분량이지만 니체의 8월 14일자 편지를 읽어보자:

그래, 다정하고 훌륭한 벗! 팔월의 태양이 우리 위에 있고, 하여 세월은 흐르고, 산이며 숲이며 더욱 고요하고 적요해진다. 나의 지평에서 사상이 떠올랐다. 그와 같은 것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 나는 그것에 관하여 그 무엇도 알리지 않은 채, 나 스스로를 적연부동한 가운데 보존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아직 년은 살 것 같구나! 아아, 벗이여, 더러는 내가 정말 최고로 위험한 삶을 살겠다는 예감이 머리를 스치곤 한다, 나는 부숴질 수 있는 기계에 해당하니까! 내 느낌의 강도로 말미암아 나는 떨게 되고 또 웃게 된다, — 이미 나는 몇 번이나 방을 나서기 못했다, 내 눈이 충혈되었다는 우스운 이유에서 — 무엇 때문일까? 매번 그 전날 나는 산책길에 심하게 울었다, 그러니까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환희의 눈물을; 그때 나는 노래를 부르고 뭐라뭐라 말했다,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앞서 가진 새로운 시선으로 가득한 채로.

결국 —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힘을 얻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외부의 갈채, 격려, 위로를 기대할 수밖에 없기라도 한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겠는가! 나는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내가 힘을 북돋는 찬성, 동감을 표하는 악수를 청량제 중의 청량제로 받아들였다고 할 만한 순간들, 내 삶의 전반적인 시기들(가령 1878년)이 있었다 — 그런데 바로 그때 모든 이들이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나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들은 내게 저 호의를 베풀 만한 자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가령 내가 이즈음 받는 편지들을 생각할 때면 침울하다싶을 만큼 아연한 느낌이다, — 모든 것이 이렇듯 무의미하며, 어느 누구도 나를 통해 체험을 한 바 없으며,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하여 사상을 펼치지 못했다 — 사람들이 내게 말하는 바는 존중하는 것이요 친절한 것이지만, 아득하고 아득하고 아득할 뿐. 우리의 친애하는 야콥 부르크하르트 역시 이렇듯 움츠려든 소심한 편지쪽지를 썼더구나.

그와 반면에, 내가 보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번 해가, 내게 속한 것이요 내면적으로 내게 가까운 것 두 가지를 내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네의 음악과 다음의 풍경이다: 그것은 스위스도 아니며, 레코아로도 아니며, 뭔가 전혀 다른 것, 여하튼 뭔가 훨씬 더 남방적인 것이다 — 뭔가 유사한 것(가령 와하카)을 찾아내려면 고요한 대양을 면한 멕시코 고원으로 갈 수밖에 없을 성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열대 식생과 함께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이 실스 마리아를 나를 위해 보존하는 방안을 찾고 싶다. 바로 이같은 것을 자네의 음악에서도 느끼지만, 그것을 위해 어찌해야 할 지는 모르겠구나! [이하 생략]

— 페터 가스트에게 보낸 편지, 1881.8.14

이 편지는 1881년 8월의 니체의 경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헌에 속한다. 그런 만큼 학자들이 이 편지를 다루는 방식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엿볼 수 있다. 특별히 전기작가라면 이 편지를 절대로 피해갈 수 없기에 어떻게든 이 편지를 다루는 방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십중팔구 자신의 한계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홀링데일과 자프란스키의 니체 전기를 살펴보자:

일찍이 본 적 없는 사상이 나의 지평에서 떠올랐네 … 나는 확실히 몇 년은 더 살아야만 할 걸세! … 이 강렬한 느낌은 나를 떨게 만들고, 또 웃게도 만드네. 나는 두세 차례나 눈에서 불꽃이 튄다는 웃기는 이유로 방을 떠나지 못했네. … 그 전날, 산책할 때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이 솟구쳤다네. 그건 슬퍼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환희의 눈물이었지. 나는 새로운 전망으로 가득 차 울면서 노래를 불렀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지. …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힘을 끌어낼 수 없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용기와 위로를 기다려야만 한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며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내 삶에도 힘을 실어 주는 굳센 말과 동의를 표하는 박수가 청량제 중의 청량제로 작용했을 법한 순간들이 있었네(이를테면 1878년).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모두가 나를 갑자기 떠나갔지. … 이제 나는 더는 그것들을 바라지 않네. 그리고 최근에 받은 편지들을 생각할 때면 어떤 당혹스러운 놀라움을 느낀다네. 그것은 모두 너무나 무의미하네. …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이 사려 깊고 호의로 충만해 있다 해도 아득하고 아득하고 아득할 뿐.

— 홀링데일, 김기복·이원진, «니체, 그의 삶과 철학» 208면(생략부호는 원저자)
 

내 마음의 지평선에서 사상이 떠올랐네. 이러한 것을 나는 전에 경험한 적이 없지. 이러한 광경을 나는 발설하지 않으려 하는데, 왜냐하면 흔들림 없는 안정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라네. 아직 몇 년은 더 살 수 있겠지? 아, 친구여!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지금까지 나는 아주 위험한 삶을 살았네. 왜냐하면 나는 오직 산산조각을 내서 파괴하는 것만을 아는 기계에 속했기 때문이지. 내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나는 떨기도 하고 웃기도 했네. 벌써 몇 번 나는 방을 나설 수가 없었는데, 좀 우스운 이유지만, 눈에 염증이 있어서였네. 어떻게 눈병이? 나는 눈병이 나기 전날에 산책 중에 너무 많이 울었지. 하지만 감상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네. 그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월등한 전망을 가슴에 품고, 노래도 하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떠들기도 했네

— 자프란스키, 오윤희,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338면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오윤희 번역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니체의 편지는 인사말 뒤에 곧바로 “팔월의 태양이 우리 위에 있고, 하여 세월은 흐르고, 산이며 숲이며 더욱 고요하고 적요해진다. 나의 지평에서 사상이 떠올랐다”는 두 문장이 뒤따른다. 그런데 두 전기작가는 하나같이 첫 문장을 인용하지 않는다. 첫 문장에는 태양, 산, 숲이 등장하며 시간과 고요함이 비밀스럽게 운위되지만 그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음악과 풍경”을 언급하는 편지 후반부를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생략하여 인용한 홀링데일은, 내가 보기에 정말 중요한 것만 생략하고 있다. 가령, “나 스스로를 적연부동한 가운에 보존하고 싶다”라든가, “최고로 위험한 삶을 살겠다는 예감”이라든가, “나를 통하여 체험을 한 바 없다”라든가, 어느 하나 빠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단순히 관점의 차이로 간주하고 넘어가기에는 이것은 너무 큰 문제이다.

니체의 삶과 관점을 뒤바꾸었던 “영감” 혹은 “경험”이 소리, 풍경, 고요와 불가분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니체의 영원회귀는 그 요소들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또 어떻게 되는가? 니체의 음악과 풍경은 그저 글을 멋드러지게 장식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니체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간 현실을 살핀 뒤, 그래도 그 대신 1881년 한 해는 자신에게 “음악과 풍경”을 보상으로 주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가 보상으로 받은 풍경은 스위스도 아니며 레코아로도 아니다. 고요한 대양을 면한 멕시코 고원 정도나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니체는 현실적으로 그 고요한 고원으로 갈 수 없었고, 그래서 “실스 마리아를 나를 위해 보존하는 방안”을 찾고자 했다. 그는 1881년 여름날의 경험, 즉 영원회귀 사상을 낳았던 순간과, 그 순간의 소리와 풍경을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회귀를 낳았던 순간은 불멸한다. 그 순간을 위하여 나는 회귀를 감당한다(KSA 10, 210).”

그 불멸의 순간에 실스 마리아의 해발 6천 피트 이상의 즐비한 산봉우리들과 고요한 호수와 치솟은 바윗덩이가 평생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고요하고 높은 고원이 되어 다가왔기에 그토록 그것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겠는가? 여하튼 그의 편지와 글들이 그 불멸의 순간에 보았던 소리와 풍경을 그토록 중시하는 것을 보면, 실스 마리아를 단순히 아이디어를 얻었던 장소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니체가 1881년으로부터 육칠 년이 흐른 뒤,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는 글을 읽어보자:

나는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역사를 설명한다. 저서의 근본개념, 영원회귀 사상, 무릇 도달 가능한 긍정의 최고 공식은, 1881년 8월에 속한다: 그것은 “인간과 시간 너머 6천 피트”라는 서명과 함께 한 쪽지에 투여되었다. 그날 나는 숲들을 지나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걸었다; 수를레이 근처,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게 솟은 바윗덩이 옆에서 멈추었다. 그때 그 사상이 내게로 왔다. — 그 날로부터 따져 두 달을 거슬러가면, 나는 내 취향의 급격한 변화, 가장 깊은 곳에서의, 다른 무엇보다도 음악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를 징조로 발견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 전체를 음악으로 꼽아도 무방하다; — 확실히 듣는 법에서 재생이 있었다. 이것이 예비조건이었다. 비첸차에서 멀지 않은 어느 조그만 산중 온천 레코아로에서, 내가 1881년 봄을 지냈던 곳에서, 나의 벗, 음악가 페터 가스트, 나와 마찬가지로 “재생한 자”와 함께, 나는 음악이라는 불사조(der Phönix Musik)가 이제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욱 가볍고 더욱 빛나는 깃털로 우리 곁을 스쳐 비상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반대로, 그 날로부터 시작하여 1883년 2월에 급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정황으로 진입하는 출산에 이르기까지 따지면 — 마무리 대목, 즉 내가 서두에서 한 쌍의 문장을 인용한 대목은, 정확히 신성한 시간에, 리하르트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둔 시간에 마무리되었다 — 수태 기간이 18개월에 이르는 셈이다.

— «이 사람을 보라»에서

여기에서도 착오 없이 풍경과 음악이 등장한다. 좀더 구체적이다. "듣는 법에서 재생이 있었던" 니체는 숲을 지나 호숫가를 거닐다가 피라미드 모양의 거대한 바윗덩이 옆에서 멈췄다. 그때 그 사상이 그에게로 왔다. 그런데, 그것의 징조로 두 달 전에 “음악에서의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음악이라는 불사조”가 더욱 가볍고 더욱 빛나는 깃털로 그의 곁을 스쳐 비상했던 그 징조는, 영원회귀 사상의 예비조건이기도 했다. 이렇게 영원회귀 사상은 음악과 풍경을 불가분 동반하고 있다. 여기에서 왜 음악과 풍경이 불가분 동반되어야 하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이것은 경험 내지 체험에 속하는 문제이지, 교육이나 계몽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진심으로 나의 차라투스트라에서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고 불평했을 때, 나는 그더러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서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체험했다는 것을 뜻하므로, “현대”인이 도달할 수 있는 명멸자의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오르시라. 어찌 내가, 이런 거리감을 갖고서,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서 읽히기를 바라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개선가는 쇼펜하우어와는 정반대이니, 나는 말한다,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으리라.”

—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 지점에서, 다름아닌 니체가 "거리감"을 느낀 지점에서, 나는 계몽주의의 한계, "현대인"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낭만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몽주의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러나 나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결코 묵과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니체를 공부하는 학자들마저 니체가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이 아닐까? 혹시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아닐까? 높다란 플라타너스와 차가운 샘물과 시원한 바람과 매미 소리에 관심이 없었던 학자들의 비조 말이다.

홀링데일과 자프란스키라는 대표적인 두 니체 전기작가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니체의 음악과 풍경을 전혀 주시하지 않고 있다니 안타깝다. 다른 이라면 또 몰라도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을 전후하여 니체의 삶은 "이전 삶과 이후 삶"으로 나뉜다고 평했던 자프란스키조차 그것들을 놓치다니 더욱 안타깝다. 이는 소크라테스 편에서 거인들의 전쟁에 가담한 학자들이 니체를 무장해제시키는 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제까지 니체의 편지를 직접 읽어보지 못했던 독자들은 니체 관련 책에서 1881년 팔월의 태양과 고요와 산과 숲을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바플라나 호수. 오른편 산봉우리는 마르그나 봉이고 그 아래 마을이 실스 마리아이다. 왼편은 (나뭇잎에 가려 잘 안보이지만) 마르그나 봉보다 더 높은 코르바취 봉이다. 모두 해발 3천 미터가 넘는다. 니체는 숙박지인 실스 마리아에서 출발하여 아마도 왼편 산자락의 숲들을 지나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걸었다. 그리고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왼편 마을 수를레이 근처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게 솟은 바윗덩이" 곁에서 영원회귀 사상이 니체에게 왔다. 그는 그 사상을 "보았다." 실스 마리아에서 수를레이까지는 약 5킬로미터이며, 실바플라나 호수 수면은 해발 6천 피트, 그러니까 약 1,800미터이다.

 

“팔월의 태양이 우리 위에 있고, 하여 세월은 흐르고, 산이며 숲이며 더욱 고요하고 적요해진다. 나의 지평에서 사상이 떠올랐다.” — 이 두 문장에는 “현대인”과 계몽주의가 가닿을 수 없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두 문장에는 인류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수천 년의 정신적 전통이 숨어 있다. 이 두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체험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날 나는 숲들을 지나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걸었다; 수를레이 근처, 피라미드처럼 거대하게 솟은 바윗덩이 옆에서 멈추었다. 그때 그 사상이 내게로 왔다. 그와 같은 것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7-09-1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반조님 덕분에 니체에 대해서 여러모로 배우게 되는군요. 풍경이 좋은 곳으로 옮기신 것 같던데..반조님의 좋은 글 더 많이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도 되는건가요? ^^

반조 2007-09-1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경이 좋은 곳이면 좋은 글이 나기보다는 좋은 몸이 나는 듯합니다^^

losalio0419 2018-03-07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없으시네요ᆢ2018
 

«차라투스트라»의 번역에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최대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로, “염소의 목자”는 “염소의 목자”로, “불”은 “불”로, “숯”은 “숯”으로, “오전”은 “오전”으로, “정오”는 “정오”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국내 번역본에서는 그 중요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차라투스라의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되니까 어떻게든 이해가 되는 방향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원문을 훼손한다. 원문을 훼손했던 역자들은 분명코 독자들의 독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역자들의 그 친절이 곧 원문의 심각한 훼손을 낳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하다.

그런 친절이 습관화되다 보면, 니체의 간결한 문장에 불필요한 말들을 덕지덕지 덧붙히게 된다. 이것은 정동호 역본이 가장 심한데, 이로 인해 «차라투스트라»의 음악성이 정동호 역본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정동호 역본에 대해서 본능적인 반감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 음악성의 전면적인 상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문체상의 훼손은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지만, 역자의 친절이 음악성의 상실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원문의 내용을 매우 잡스런 것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그 예를 들어보겠다: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9절)(1)

문수 아침놀만이 아니라 오전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승자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동호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희창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위 인용문의 원문은 아주 깔끔한 문장이다.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라고 번역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흔한 수준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역자들은 “오전” 대신에 “오전의 햇살”로 번역한다. “오전의 햇살”로도 뭔가 모자란 듯싶으니까 “오전 한나절의 햇살”로 번역하여 친절의 수준을 점점 더 높힌다. 그래서 위와 같은 원문의 훼손이 발생했다. 이런 정도는 원문의 훼손이 아니라고? 원문의 훼손이 아니라면, 니체는 그토록 평범한 서술만 일삼았단 말인가? 아니다. 니체는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여명”은 지상 전체를 휩쓸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여명이 지나간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얼굴 위로 광활한 것이 휩쓸고 지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오전” 역시 마찬가지다. “오전”도 지상 전체를 장악하고서 휩쓸며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지상을 전면적으로 휩쓸어가면서, 차라투스트라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바로 이것이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간다”는 문장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너무 억지 해석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보르헤스의 말을 한번 인용해 보겠다:

시간은 나를 휩쓸어가는 강물이지만, 그러나 나는 강물이다; 시간은 나를 짓찢는 호랑이이지만, 그러나 나는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소멸시키는 불이지만, 그러나 나는 불이다. 불행히도, 세계는 현실적이다; 불행히도, 나는 보르헤스다.

Time is a river which sweeps me along, but I am the river; it is a tiger which destroys me, but I am the tiger; it is a fire which consumes me, but I am the fire. The world, unfortunately, is real; I, unfortunately, am Borges.

— Borges, “A New Refutation of Time,”[”Nueva refutación del tiempo”]

불행히도, 역자들은 현실적이다. 불행히도, 그는 니체다. 불행히도 다수의 독자들은 현실적이고, 불행히도 소수의 독자들만이 니체스럽다. 이들 양자 간에는, “그의 얼굴 위로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지나가다”는 문장과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가다”는 문장만큼이나 서로 동떨어져 있다.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가다”는 구절은, 니체의 표현을 빌면, “나의 평범한 경험”, “경험의 진정성”(die Orginalität der Erfahrung)에서 직접 나오는 문장이다. 사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온통 이런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니체로서는 평범했던 경험”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서는 비범한 경험인 것이고, 이는 흔히 말하는 “시적 영감”이나 “천부적 재능”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역자들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혹은 그런 경험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서 그토록 오역을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denn er war ein gewohnter Nachtgänger und liebte es, allem Schlafenden in’s Gesicht zu sehn.
그는 야행에 익숙한 자였으며, 잠든 만물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좋아했던 것이다. (8절)

문수 그는 밤길에는 익숙한 사람이었고 잠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좋아했다.

승자 그는 밤길을 걷는 것이 익숙했고, 또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길 좋아했던 것이다.

동호 그는 밤길에 익숙해 있었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던 터였다.

희창 그는 밤길에 익숙했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좋아하던 터였다.

“allem Schlafenden in’s Gesicht”은 “잠든 만물의 얼굴”인가, 아니면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인가? 둘 다 가능한 번역이다. 그러나 보통은 “모든 것”을 가리킬 때는 “allem”을 주로 쓰는 편이고 “모든 사람”을 가리킬 때는 “allen”을 주로 쓰는 편이니, 아무래도 “만물”로 번역하는 편이 조금 자연스럽긴 하다. 또한, “allem Schlafenden”이 소유격이 아니라 여격으로 쓰임으로써 익숙한 어법을 벗어나 있는 만큼, 역자들은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어떻게 번역하든 문법상 오역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왜 역자들이 한결같이 “모든 사람들”로 번역했느냐 하는 것이다. “얼굴”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익숙한 어법상 사람의 얼굴이니까. 은유에는 낯설고 현실에는 익숙한 역자들의 면모가 이런 데서 드러난다.

사실, 정황상 이 대목에서는 “잠든 만물의 얼굴”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이상하잖은가, 야행을 즐겼던 차라투스트라가 그 야행 중에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즐겨 보았다니! 그는 십년 동안 인적없는 곳에서 입산수행을 했고, 인용문이 등장하는 대목도 인적없는 깊은 숲속을 걷고 있는 장면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모두 무시할 만큼 역자들은 니체의 은유가 생소했던 것이다, “니체로서는 평범했던 경험”이 그들로서는 너무 비범했으므로:

Ich liebe Den, dessen Seele übervoll ist, so dass er sich selber vergisst, und alle Dinge in ihm sind: so werden alle Dinge sein Untergang.
사랑하노라, 영혼이 차고넘치는 자를, 그리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는 자,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은 그의 하강이 되리라. (4절)

문수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또 만물을 자기 안에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자를. 이렇게 해서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승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

동호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 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이렇게 하여 만물은 그의 멸망이 된다.

희창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만물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이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이 인용문 이전의 문장들에서 역자들은 모두 “Untergang”을 “몰락”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하강”이라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몰락”이라고 옮겼다해서 오역이라고 트집잡을 생각은 없다. 이런 이견 차이라면 언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앞 문장들에서 모두 “몰락”으로 옮겼으면서도 위 인용문에서는 다르게 옮긴 경우이다. 물론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맞게 바꾸면서 번역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위 인용문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동호가 “멸망”이라고 바꿔 번역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아마 “만물은 그의 몰락이 된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니까 그렇게 바꿨을 것이다.

문수희창도 “만물은 그의 몰락이 된다”는 말을 생경하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굳이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고 한 마디 첨언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니체 번역에서 “첨언”은 금물 중의 금물이다. 그런 점에서 승자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마도 시인이어서 그나마 사고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리라.

위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는, 그 만물이 그의 하강이 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만물이 그의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그는 하강하게 된다. 그의 영혼은 흘러넘친다. 그는 제 자신을 망각한 자다. 그는 곧 만물이며, 그는 곧 하강하는 존재다. 만물의 상승과 그의 하강, 이것은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순간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묘사할까?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야말로 이 사태를 제대로 일갈한 명구가 아닐까?

상승하는 길과 하강하는 길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헤라클레이토스, Diels-Kranz 22B60)

위와 평행구절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나란히 놓고 읽어보자:

사랑하노라, 영혼이 차고넘치는 자를, 그리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는 자,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은 그의 하강이 되리라.

소수의 독자들은 위 두 구절이 명백히 동일하다는 것을 즉각 간파할 것이다. 혹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소수의 독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과도하게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문은 이런 평행구절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국내의 번역본은 그런 가능성을 쓸어버렸다는 사실이 비통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니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고,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오역을 줄이는 길인가? 한 마디로 말하건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자가 되는 것, “고귀한 영혼”이 되는 것이다:

— 무엇이 고귀한가? 오늘날 우리에게서 “고귀함”이라는 말이 아직 뭔가를 의미하긴 하는가? 이제 시작된 천민통치의 하늘, 그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그 하늘 때문에 불투명해지고 납빛이 되었는데, 고귀한 인간을 무엇을 가지고 간파할 것이며 무엇을 가지고 인식할 것인가? 고귀한 인간을 증명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 행위는 언제나 다의적이고 언제나 해명이 불가능하다 — “작품”도 아니다. 오늘날,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발설하는 자들 중 예술가들과 학자들 가운데에서, 고귀함을 얻으려고 심한 욕심을 부리는 일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귀함을 얻으려는 그 욕구야말로 고귀한 영혼 스스로의 욕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곧 저들의 결핍에 대하여 제대로 말해 주는 위험스러운 표지이다. 여기에서 결정하는 것, 여기에서 순위를 확정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옛 종교적 문구를 새롭고도 좀더 심오한 이해로 재수용하여 말하자면, 신앙이다: 한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 [구하려한들] 구해질 수도 없고 [찾으려한들] 찾아질 수도 없고 아마도 [놓아버린다한들] 상실될 수도 없을 그 무엇에 대하여 가지는 그 뭔가 근본적인 확실성. — 고귀한 영혼은 제 자신을 경외한다. (KSA 5, 232-233)
 

나는 내 자신을 탐구했다. (헤라클레이토스, Diels-Kranz 22B101)

수천 년의 거리를 두고 있는 두 철학자의 말을 흡사 평행구절처럼 나란히 놓은 것에 대하여 너무 자의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하지는 말기 바란다. 니체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경험한 것을 동일하게 경험했던 자가 과연 누구였던가를:

[…] 이것이 영감에 관한 나의 경험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내게 말해도 되는 자, 그 누군가를 찾으려면 수천 년을 거슬러가야 한다는 것을. (KSA 6, 340)

혹시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니체의 말들을 과대망상쯤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름아닌 우리시대의 니체전공자들이 그렇게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전공자들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경원시했던 부류의 학자들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오역들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Wie müde bin ich meines Guten und meines Bösen!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가! (3절)

문수 나는 나의 선, 나의 악에 지쳤다.

승자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지!

동호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지쳐 있는가!

희창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시달렸던가!
 

An der Erde zu freveln ist jetzt das Furchtbarste und die Eingeweide des Unerforschlichen höher zu achten, als der Sinn der Erde!
대지를 모독함이란, 이제, 대단히 공포스러운 것을, 불가사의에 관한 내장점(內臟占)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어라! (3절)

문수 지금은 대지에 대한 모독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존중하는 것도!

승자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가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동호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저 알 길이 없는 것의 뱃속을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 이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희창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탐구할 수도 없는 것의 뱃속을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선악 너머”를 모르는 이들, “선과 악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이들, “공포스러운 것”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 그래서 빈번하게 니체의 원문도 훼손하고 그래서 빈번하게 문장구조도 무시하는 이들, 불행히도, 그들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의 번역자들이다.

그들은 지식의 정원에서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읽기와 쓰기에 관하여>)일 뿐, 자기 자신을 탐구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각주
  1. 이하 별도의 표기 없이 절만 표기해 놓은 대목은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인용한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walk 2006-11-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 열흘 동안 차라투스트라 구매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어느 책을 봐도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가 안 가는 구절들이 꽤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구절들은 번역본들마다 아예 반대로 번역돼 있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번역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주요 번역본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도대체 어느 차악을 선택해서 읽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있던 중에 님의 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헌데 바로 님이 언급한 구절들 중에 제가 의아해 했던 것들이 많이 있는 걸 보고 반가왔습니다. 제가 괜한 의심을 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헌데 홈페이지에 가보니 번역을 시작하셨군요. 구매는 접었습니다. 님의 번역본을 살 생각입니다. 여기에 손수 번역하신 문장들, 참 아름답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이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입니다. 님의 번역본을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반조 2007-04-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번역본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약이 없는 것이므로 기다리시지 말길 바랍니다. 번역본 중에서 최승자 번역(청하)을 '차악'으로 추천합니다. 책값도 싸잖아요^^ 번역본으로 깊은 고민은 하지 마시고 후루룩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jsscy 2012-07-1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이해불가였던 '짜라투스트라'를 다시 구입하려다 참 난감했습니다.
잘 모르는 저에게. 반조님 풀이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품격이 있는 글이더군요.
기다리지 말라 하심, 참으로 아쉽습니다만.
차악으로 추천해주신 최승자 번역본을 구입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장이 비범하시더군요.

카도 2022-05-18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문장을 끊어놓고 뜻을 따져보면 몰라도, 그 긴 분량의 책을 전부 님이 해놓으신 예제처럼 번역한다면 페이지를 반도 넘기기 어려울 듯합니다. 원문을 살리겠다고 ‘오전도 지나갔다‘ 해버리면 거기서 읽기는 중단됩니다, ‘오전도 지나간다니? 뭘 지나가? 아하..‘ 그런 일을 감수할만큼 꼭 살려야만 하는 문장일까요? 마지막 예의 경우는 님을 제외한 번역가 넷이 모두 오역을 저질렀다곤 생각하기 힘들기도 하네요. 게다가, ‘내장점‘이라...
 

나는 내가 화염이자 숯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3

 

화염과 숯덩이는 각기 다른 이질적인 존재다. 그것들은 둘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이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자는,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된 존재다. 화염이면서 동시에 숯덩이인 존재,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궁금증은 독자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것은 니체 자신에겐 명료한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에겐 너무나 불명료하다. 니체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자”라는 별칭을 받을 만하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Diels-Kranz B64)고 했다. 이 말은 히폴뤼토스가 전한 단편이다. 그러므로 맥락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이 세 단어,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만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흡사 이런 식의 헤라클레이토스 단편들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

내가 이렇게 불명료한 구절을 서두에 꺼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대목들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역자들이 그토록 오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오역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국내에 번역본이 십여 종 출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어느 번역본에도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진경은 한겨레신문의 기고문에서 선불교의 대표적인 어록인 «벽암록»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응을 주는, 그래서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단 한 쪽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 권짜리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다. 불가사의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일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벽암록»과도 같다. 그렇잖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즐겨 읽는다. 다만 차이라면, «벽암록»을 꿰뚫은 자들로는 유사 이래 수많은 선지식들이 존재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만 분분하다. 나는 이것이 수행자와 학자의 차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독해를 위해서는 수행자적인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면, 아마 니체 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니체 독자들에게 반감을 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안목이 없이는 니체의 위대한 통찰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내가 니체를 종교적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통찰이 일반적인 사고(그러니까 학문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고준한 경지에 있음을 천천히 입증해 보이고 싶다는 것뿐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니체가 확연히 이해되는가? 학자들의 논문을 읽으면 시원하게 뚫리는가? 아닐 것이다. 단언하건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도교육의 틀 내에서 니체를 간파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니체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차원,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니체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험” 혹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니체 자신의 말을 우리는 너무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그런 일면을 확인해 보자: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나는 내가 화염이자 숯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문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활활 타오르는 숯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활활 타오르는 숯이다!

승자 나는 내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로운 인간이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인 것을!

동호 나는 작열하는 불꽃도 숯도 아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불꽃이요 숯이다!

희창 나는 내가 타오르는 불꽃도 숯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타오르는 불꽃이며 숯이다!

위의 번역문들은 “불꽃이며 숯덩이”라는 것, 둘이 하나라는 것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지 못하다. 일단, “활활 타오르는 숯”(문수),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승자)은 몹쓸 번역이다. “불꽃과 숯”으로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것을 대강대강 주물러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자신들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동호, 희창)는 문장 역시, “불꽃이자 숯인 것은 아니라는 것”, 즉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는 번역문이 어째서 잘못되었는가? 이 번역문은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내가 불꽃이며 숯덩이라는 것)이 접속법2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 안의 내용은 불가능한 의미여야 한다. 그래서 “불꽃이면서 동시에 숯덩이”라는 의미로 번역해야 하며, 이 말을 부정하자면 “불꽃이면서 동시에 숯인 것은 아니다”가 되어야 한다. 결국,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는 번역문은 원전의 심오한 해석 가능성을 박탈하고 있다. 이점에서는 승자의 번역이 유일하게 원문의 의도를 잘 살렸지만, "숯"을 "숯불"이라고 하는 바람에 도로묵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혹은 하나인 것이 둘이 되는 것에 대한 니체의 비유법은 숲속 성인과의 만남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성인이 서로 헤어질 즈음에 나눈 대화를 읽어보자(<차라투스트라의 서설> 2):

“그러면 성인께서는 숲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물었다.

노래하고 울고 웃고 흥얼거리며 신을 찬미하는 게야. 그 신은 나의 신. 헌데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려는고?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성인을 하직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들께 드릴 게 무엇이 있으리오! 그러하니 어서 나를 놔두시오, 내가 당신들에게서 그 무엇도 취하지 않도록!”

위 인용문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말을 살펴보자:

Was hätte ich euch zu geben! Aber lasst mich schnell davon, dass ich euch Nichts nehme!
내가 당신들께 드릴 게 무엇이 있으리오! 그러하니 어서 나를 놔두시오, 내가 당신들에게서 그 무엇도 취하지 않도록!

문수 나는 당신께 드릴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빨리 보내 주십시오!

승자 내가 당신들에게 줄 무엇을 가졌으리오. 그러니 내가 당신들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도록 나를 어서 보내주오!

동호 그대에게 줄 무엇이 내게 있겠는가. 나로 하여금 서둘러 나의 길을 가도록 하라. 내가 그대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희창 드릴 것이 뭐 있겠소! 당신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오. 그러니 나를 빨리 보내주기나 하시오!

승자만 제외하고 모두 “당신들”을 “당신”이나 “그대”로 옮겼다. 2인칭 복수대명사를 2인칭 단수대명사로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할까? 오역을 한 역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대화 상대자가 성인 한명 뿐이므로 “당신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맥락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바로 앞 문장에서 성인이 “노래하고 울고 웃고 흥얼거리며 신을 찬미하는 게야. 그 신은 나의 신. 헌데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려는고?” 물었던 일을 잊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성인”과 “성인의 신”을 두고 분명하게 “당신들”이라고 지칭했다. 이는 “신을 믿는 인간”은 하나인 자기 자신을 둘로 쪼개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분리된 실존의 인간으로부터, “당신들”로부터 그 무엇도 얻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서둘러 헤어지지 않았겠는가! — 아무튼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젖혀두더라도, 원문은 원문대로 옮겨야 한다. 역자들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해서 “당신들”을 “당신”이라고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자들은 버젓이 그렇게 옮기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원문에 대한 존경심이 없단 말인가.

 

원문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역자들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조금이라도 생소한 문장이 등장하면 갈팡질팡 헤매기 일쑤라는 것이다:

Ich will die Menschen den Sinn ihres Seins lehren: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다: 그 의미는 초인,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번개 인간.

문수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다.

승자 검은 먹구름인 인간으로부터 뚫고나오는 번개이다.

동호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희창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가 아닌가.

“먹구름”과 “인간”을 병치시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번개 인간”이라는 말에서 무슨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에서 “초인은 인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대목에서 "그 번개, 이름하여 초인이라 하노라"라고 하였으므로, 역자들은 그 대목에 따라 "초인"과 "번개"를 병치시키기 위해서 "먹구름"과 "인간"을 병치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 독해의 어려움 중의 하나는 그런 식의 평행해석이 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번개 인간”이 너무 희화적이라고? 아니, 이보다 심오한 비유가 어디 있는가! “번개 인간”이 “화염이며 숯덩이인 존재”라는 생각을 해볼 수는 없겠는가? 재를 짊어지고 산으로 가서, 자신에게서 환한 불꽃을 발견하고, 불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고 보니, “인간이라는 먹구름” 따위로 옮기려면 “aus der dunklen Wolke Menschen“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먹구름”은 문법적으로도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이 오역은 번개, 불, 화염, 불꽃, 숯, 재 등등 비유들의 연관성, 참으로 심오한 면면을 전부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책은 몰라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오역은 독자들에게 이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그때 자네는 자네의 재를 짊어지고 산중으로 갔어: 오늘은 자네의 불을 들고 계곡으로 가려는가?(<차라투스트라의 서설> 2)

형제들이여,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는 나를, 고통당하는 자를 극복했다, 내 자신의 재를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더욱 환한 불꽃을 내게서 발견했다.(<배후세계 신봉자들에 관하여>)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다: 그 의미는 초인,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번개 인간.(<차라투스트라의 서설> 7)

나는 위의 문장들의 심오한 연관 가능성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앞서 인용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도 함께 음미해 본다. 설명을 하기는 어렵지만(그리고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니체도 누누히 강조했다시피!), 어쩐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듯하다. 혹시, 니체와 헤라클레이토스는 뭔가 우리가 모르는 고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는 철학자들이 아닐까? 혹시, 그 연관성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의 인문교육에서 뭔가 열등한 것만 배웠던 것이 아닐까?

물론 위 문장들의 연관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나의 본래 의도는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원문으로 읽을 때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지만 번역본으로 읽을 때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감출 수 있겠지만, 역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결코 감추지 못한다. 번역에서는 그것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게 역자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역자들이 원문을 심심찮게 훼손하면서 그리고 문법이나 구문론을 자주 무시하면서 자기이해로 칼질하는 것은, 그들의 부주의 탓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역부족 탓으로 돌리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달라, 분명코 “역자들의 역부족” 탓이다. 니체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든 독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든, 그들은 모두 단계가 낮은 “현대인”들이다.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진심으로 나의 차라투스트라에서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고 불평했을 때, 나는 그더러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서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체험했다는 것을 뜻하므로, “현대”인이 도달할 수 있는 명멸자의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오르시라. 어찌 내가, 이런 거리감을 갖고서,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서 읽히기를 바라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개선가는 쇼펜하우어와는 정반대이니, 나는 말한다,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으리라.” (KSA 6, 298-299)

독일인이 독일어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마당에, 오역이 즐비한 우리나라 번역본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일 것이다. 국내 번역본은 모두 “현대인”에 의한 번역본이므로, 이 번역본들로 읽는 이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재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읽히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역자들을 비평한다는 것이 몹시 괴롭다. 사실 이런 비평들은 내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 우리나라 니체번역 현실의 암울함에 편승해서 마음이 격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더불어 역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각운을 맞추어 썼던 니체의 시 한편도 함께 전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알고 있어라!
만족이라고는 모른 채, 불꽃마냥
나 환히 빛나 나를 삼키노라.
내가 쥐는 것마다 모두 빛이 되고
내가 두는 것마다 모두 숯이 되니:
분명하여라, 나는 불꽃이어라. (KSA 3, 36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누아 2006-11-0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즐겨 읽을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합니다. 저 역시 짜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환희심이 나기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그때 그 구절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오쇼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주엔 우선 해야 할 일이 좀 있어 책 표지도 열어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님의 페이퍼를 보고는 정동호 님이 옮긴 책을 꺼내 들고 앉았습니다.^^

반조 2006-11-0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오쇼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앞으로 쉬엄쉬엄 읽어보아야겠습니다.
번역본에 오역이 많다고는 하나, 번역의 공이 크긴 크겠지요. 모든 대목을 다 오역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제나 두손 모아 감사드립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