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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에 미국에서 영어로 강연하고 그해 7월에 취리히에서 독일어로 강연하고, 이듬해 독일에서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 니체 철학»(Nietzsches Philosophie im Lichte unserer Erfahrung, Suhrkamp 1948)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토마스 만의 짧은 니체 에세이가 «쇼펜하우어·니체·프로이트»(원당희 역, 세창미디어 2009)의 일부 내용으로 실려 번역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1889년 니체의 정신적 붕괴를 상기하며 “아, 여기 한 고귀한 정신적 인간이 파괴되었도다!” 하는 오필리아의 비탄의 소리를 입히는 토마스 만의 안목에 사뭇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럽다.


토마스의 만의 니체 에세이. 니체 철학을 심미주의의 과장으로 보고 있다.

“나는 니체가 파시즘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이 니체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122) 그는 니체 철학에 대한 파시즘적 해석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지만(당시에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니체 오독에서 벗어난 뛰어난 안목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근본적으로 니체 철학을 독일 낭만주의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이 니체를 이해하는 주요 반경은 니체의 초기작들인 «비극의 탄생»이나 «반시대적 고찰»에서 펼친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니체의 혈통과 뿌리를 같이하는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120)라는 확언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심지어는 “노발리스가 미적 위대성의 이상, 최고도의 야만성, 동물적 정신이라고 칭한 것, 바로 그것이 니체가 내세우는 초인”(121)이라고 보고 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

바그너와 니체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작가이니만큼 니체 이해가 매우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탁월한 내용이 없는 단순한 이해 수준으로 평가하고 싶다. 하긴 하이데거나 들뢰즈 같은 천재적인 해석자들에 의하여 니체가 재발견되기 전까지 누군들 토마스 만 수준의 이해력을 넘어설 수 있었겠는가마는,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그는 20세기 최고의 독일작가로 손꼽히지 않던가? 작가라면 철학자들의 이론적 형해화에서 탈피하여 예민한 감각으로 남다르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토마스 만은 적어도 니체에 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작가마저도 철학적·이론적 선이해로 오염되는 것이 독일적 근성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으려고 몇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실 이 니체 에세이조차도 잘 안 읽힌다.)


물론 유미주의와 야만성의 근친성이라는가, 심미적 태도와 도덕적 태도의 대립, 악의 낭만화 등등을 거론하며 니체 철학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토마스 만의 입장은 그의 개인사를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가 파시즘의 위험을 몸소 경험한 작가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휴머니즘을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토마스 만 만큼이나 도덕주의 내지 윤리적 이상을 높게 평가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세계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망명생활을 했던 작가나 예술가들이 “좀더 온화한 사상”, 휴머니즘, 도덕주의, 윤리적 이상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니체는 평생 동안 이른바 ‘이론적 인간’을 몹시도 저주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야말로 이 이론적 인간의 찬양자이자 순수문화에 뿌리박고 있는 인간 유형이다. 그의 사유는 절대적 천재성에 근거하여 지극히 비실용적이고, 교육적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근본적으로 비정치성을 띠고 있다.(133)

위의 인용문에 토마스 만의 니체 이해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니체의 사유가 비실용적이고 무책임하다는 평가는 그의 개인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비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평가는 파시즘적 해석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니체는 이론적 인간을 저주했으나 그 자신이야말로 이론적 인간의 찬양자라는 평가에서 토마스 만의 니체 이해가 의외로 초보적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이것은 토마스 만이 이론적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파시즘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태를 겪은 이들은 낭만주의에 대한 공포, 이론적 인간에 대한 변호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적인 경로가 아닐까?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 니체 철학”은 곧 “토마스 만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 니체 철학”이기도 하다.

토마스 만은 니체 철학을 심미주의의 과장으로 보았으나, 니체 철학은 낭만주의도 아니며 심미주의도 아니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그의 경험상 낭만주의·심미주의·야생성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고, 이론적 인간·도덕주의·계몽주의를 통해 위안을 얻었던 것같다. 이것이, 다름아닌 그의 삶이,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시선을 방해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은 “그는[니체는] 자신의 고독을 심미적 태도로 과장했다”(134)고 평가했으나, 이를 그대로 뒤집으면, 토마스 만은 자신의 두려움을 이론적 태도로 과장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고독을 과장하지 않았으며, 토마스 만도 자신의 두려움을 과장하지 않았다. 그의 고독과 그의 두려움이 바로 그들 각자의 생을 전체적으로 규정했으므로. 따라서 정직한 작가나 철학자들이 내놓은 작품과 사상은 자기 생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니체의 말대로, 심지어는 취향조차도 자기 방어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누굴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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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가 새끼를 안고 푸른 산봉우리 뒤로 돌아가니/ 새가 꽃을 물고 와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리네(猿抱子歸青嶂後。鳥銜華落碧巖前).” — <벽암록>이라는 서명의 유래가 되는 이 문장에서 보듯, 선어록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도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내가 불교를 전혀 모르던 시절에 불교서적으로 맨 처음 손에 잡은 것이 <벽암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권의 번역서를 모두 읽은 것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으되 그때까지 접한 부류의 책들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벽암록>을 두고 “의미를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빈곤한 정신으로부터 비롯한 말인가를 아는 정도의 수준은 되고 보니, <벽암록>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서는 기분이 든다. 내 안의 티끌 하나 먼지 하나 놓치지 않고 낱낱이 비추는 거울.

선가에서 “종문의 제일서”로 꼽는 어록인 만큼, <벽암록>은 독자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눈 푸른 선지식들이 자르는가 하면 봉합하고 거스르는가 하면 따르고 주는가 하면 빼앗기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독자들의 뭇 생각과 감각을 종횡무진 베어버리는 까닭에, 이성적인 접근으로든 감성적인 접근으로든 단 한 걸음도 따라갈 수 없다. 접근하려고 하면 번뜩이는 칼날에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만다. 일반적인 사고와 감수성이 죄다 끊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고와 감수성이 끊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 등장하는 대나무, 종소리, 칼, 꽃, 떡, 원숭이, 새, 눈송이, 부처, 거울, 산, 강, 우물, 철벽, 바위, 채찍, 그림자, 모기, 번개, 똥막대기, 나비, 소, 방망이, 차, 풀, 잣나무 등등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새롭고 경이롭다. 이렇듯 독자의 사고와 감수성을 일신하기 때문에, “뼈를 바꾸어놓는 신령한 처방”이 있기 때문에,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고금을 아울러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단 한 페이지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벽암록>이 또한 매우 복잡한 형성사를 갖고 있는 사정을 알고 나면, <벽암록> 읽기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는 법. <벽암록>을 원문으로 읽기 위한 준비작업을 정리해 본다.
 

먼저, <벽암록>의 구성을 간략하게 살펴두어야 한다. <벽암록>은 내용으로 볼 때 크게 수시, 본칙, 송으로 나뉘며, 본칙과 송에는 각각 착어와 평창이 따라붙는다. 그러니까, “수시”, “본칙과 본칙에 대한 착어·평창”, “송과 송에 대한 착어·평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본칙과 송은 설두의 작품이며, 수시와 착어와 평창은 모두 원오의 작품이다. 구성은 조금 복잡한 편이지만, 형성사를 살펴보면 구성이 좀더 명료하게 파악된다.

원오가 <설두송고백칙>을 제창한 내용이 바로 <벽암록>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설두송고백칙>은 설두가 <조당집>·<전등록> 등 옛 어록에서 공안 백칙을 가려뽑고 각 칙마다 송을 부친 것이다. 그러니까 <설두송고백칙>은 옛 공안 백칙(“古百則”)과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오는 그 백칙(본칙)과 송에 각각 착어와 평창을 부친 것이다. 그리고 수시는 머리말 격으로 각 칙의 앞에 온다. 이 모든 구성물을 합해놓은 것이 바로 <벽암록>이다:


<벽암록>의 구성도. <설두송고백칙>은 설두가 <조당집>·<전등록> 등의 옛 어록에서 공안 백칙을 뽑고 거기에 송을 부친 것이다. 원오는 <설두송고백칙>의 백칙과 송을 제창하였는 바, 그 내용이 바로 백칙(본칙)에 대한 착어와 평창, 그리고 송에 대한 착어와 평창이 된다. 이를 제자들이 기록하였다. 수시는 원오의 글로 각 칙의 머리말에 해당한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 <벽암록>의 내용을 형성사에 따라 구분하면 “본칙(고백칙)”, “송”, “수시·착어·평창”으로 나눌 수 있으며, 편집 순서에 따라 구분하면 “수시”, “본칙과 착어·평창”, “송과 착어·평창”으로 나눌 수 있다. 각 구성물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수시, 본칙, 송의 기본내용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착어는 원오의 촌철살인의 반어와 역설이 주 내용을 이루고, 평창은 고사의 배경이나 인물 소개, 간략한 설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암록>의 맨 앞에 실려 있는 보조의 서는 바로 이러한 형성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지극한 성인의 명맥, 역대 조사들의 대기, 뼈를 바꾸어놓는 신령한 처방, 정신을 기르는 오묘한 술법이여! 저 설두선사께서 종지와 격식을 뛰어넘는 뚜렷한 안목을 갖추시어 바른 법령을 이끌어내면서도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시지 않으시며, 부처를 단련하고 조사를 담금질하는 집게와 망치를 손에 들고 선승이 자기 초월에 필요한 요점을 말해주셨다. 은산 철벽이니 뉘라서 감히 이를 뚫을 수 있으리요. 몸뚱이가 쇠로 된 소를 무는 모기와 같아 입질을 할 수 없다. 대종장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깊고 미묘한 이치를 어떻게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불과 원오 스님께서 벽암에 계실 때 수행하는 이들이 잘 몰라 이 미혹을 깨우쳐주실 것을 청하니, 노장께서 이를 어여삐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 저 깊은 밑바닥을 파헤쳐주시고 깊은 이치를 드러내어 명백하게 딱 가르쳐주셨으니, 이것이 어찌 알음알이를 가지고 한 것이겠는가? 백 칙의 공안을 첫머리부터 하나로 꿰어 수많은 조사스님네들을 차례차례 모두 점검했다.

— <벽암록 上>(장경각 1993) 13면

이와 같은 형성과정 때문에 <벽암록>은 <조당집>·<전등록> 등의 옛 어록에서부터 설두의 송, 원오의 글, 원오의 강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문체나 형식이 매우 다채로운데다 일반 독자는커녕 학자들조차 파악하기 힘든 선지(禪旨)까지 숨어 있으니, 독해와 번역이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당송대의 구어 내지 속어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그것들에 정통하지 않으면 오독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벽암록>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선지식의 안목과 학자의 실력과 시인의 감수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그렇다면 어떤 순서로 <벽암록> 읽기를 시작해야 할까? 가장 먼저 집어들어야 할 것은 역시 선림고경총서의 <벽암록>(장경각 1993)일 것이다. 상중하 세 권 분량이지만, 각 권 뒤에 원문을 영인하여 실어놓았으므로, 분량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 역서는 우리나라 번역서 중에서 최초로 수시, 본칙과 착어·평창, 송과 착어·평창을 모두 완역했다. 이 역서의 역자 이름이 별도로 표기되어 있지 않아 누구의 번역물인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관련 글들을 참고해 보면, 어떤 과정을 거쳐 번역되었는지 유추해 볼 수는 있다.

30대 중반부터 경전을 번역한 송 교수는 <전심법요>, <백장록>, <동산양개 화상 어록> 등 23권의 선어록을 번역했다. 선림고경총서 가운데 3분의 2를 번역한 셈이다. 특히 그가 국내 처음으로 번역한 <벽암록>(장경각)은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모시고 일일이 자문을 구해가며 번역한 역저이다.

— 현대불교신문 2004년 기사, <송찬우 교수, 첫 벽암록 강의 10년간 진행> 중에서

위의 기사에 따르면, 1993년 장경각에서 펴낸 <벽암록>은 송찬우가 성철스님의 자문을 받아가며 번역한 저작이다. 그러나 신규탁의 글을 보면, 사정은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1990년 여름이었다. 백련선서간행회로부터 <벽암록>을 윤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컴퓨터에 입력을 해서 내부 교정도 마치고 프린터로 뽑은 원고라기에 쉽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막상 원문을 대조하며 하나하나 살펴보니 만만치 않았다. 결국은 이 초고를 전면 개정하여 새로 컴퓨터 입력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과정에서 나의 커닝은 시작되었다. 알다시피 <벽암록>은 당나라 선승들의 이야기를 100개로 추려서 만든 공안집의 하나이다. 그 이야기에는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뒤에 얽힌 사연도 많다. 게다가 당나라 때의 구어, 속어 등이 수없이 나온다. 덤으로 판본도 십여 종이 넘고, 그에 따른 글자의 출입과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번역이란 결과적으로 가능한 여러 해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번역자의 의도가 들어간다. 이런 류의 책을 번역하는 데 본문만 가지고는 도저히 온전한 번역을 할 수 없다. 자연 다른 책을 참고해야 한다. 좋은 말로 하니 참고이지 역자 주를 달아서 참고한 내용을 밝히지 못했으니 결국은 슬쩍 본 것이다. 말하자면 커닝을 한 셈이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커닝했는지는 번역자 마음껏 자세하게 <벽암록>에 주석을 달아도 좋다는 출판사가 나오면 그 기회에 고백할 계획이다.

— 신규탁,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장경각 1998) 249-250면

송찬우와 신규탁 모두 백련선서간행회에 깊이 관여된 이들인 만큼 위의 기록들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를 종합해서 유추하자면, 송찬우의 번역초안, 백련선서간행회 검토, 신규탁의 윤문·수정을 거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송찬우 교수의 선어록 강의에 공개된 <벽암록> 강의 및 번역물을 살펴보면, 장경각에서 간행된 <벽암록>의 문장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웹 사이트에 공개되는 것이어서 한껏 자유롭게 번역한 결과물일 수도 있지만, 송찬우의 다른 번역서들이 대개 그렇듯, 의미가 통하도록 의역하는 경향이 강한 그의 평소 특성을 감안하면, 원문에 충실한 장경각판 <벽암록>은 신규탁의 손을 거쳐 대폭적으로 수정된 결과물로 짐작된다.

신규탁은 이리야 요시타카를 위시한 일본학자들의 당송대 속어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물들을 섭렵한 학자인 만큼 <벽암록>의 속어 내지 구어에 대하여 기초적인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임은 당연하다. 또한 그는 훈고학적 고증이라는 엄밀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학자인 만큼, <벽암록>의 공안 백칙과 관련이 있는 <조당집>, <송고승전>, <전등록>, <오등회원> 및 <선학대사전> 등의 선어록 공구서들을 참고했다고 한다. 그러한 고증을 거쳐 장경각판 <벽암록> 최종원고가 나온 것이지만, 신규탁은 선림고경총서의 편집방침상 참고한 출처를 주석을 통해 밝히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석지현은 이 번역서를 두고 “글자 번역에 치중했다. 그래서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종종 있다”고 평했지만, 나는 뜻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글자 번역에 충실한 번역이 훌륭하다고 본다. <벽암록> 같은 저작을 “뜻이 잘 통하도록” 번역하는 것 자체가 과연 옳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장경각판 <벽암록>은 일체의 해설이나 주석이 없으며, 오직 짤막한 해제와 번역문, 그리고 원문(영인)만을 싣고 있다. 


장경각판의 <벽암록> 외에 가장 입수하기 쉬운 번역서는 안동림이 역주한 한 권짜리 <벽암록>(현암사 초판 1978, 개정판 1999)이다. 이 책이 현재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는 번역서인 듯하다. 그러나 번역문 갈피갈피에 역자가 삽입한 내용들이 워낙 선지와는 거리가 멀어 오히려 독자의 독해를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럽다. 그 때문에 그의 주석이 제법 알찬데도 전폭적인 신뢰를 하지 못하게 된다. 개정판의 일러두기를 보면, 장경각판의 <벽암록>(1993)과 이리야 요시타카의 <벽암록>(1997) 일역본 등을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다. 완역은 아니며, 착어와 평창이 빠져 있다.





최근에 나온 역작으로는 석지현 역주의 <벽암록>(민족사 2007)을 들 수 있다. 언론에서는 최초의 <벽암록> 완역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최초의 우리말 완역은 장경각판 <벽암록>이다. 석지현의 <벽암록>은 8년 여에 걸친 노작의 결과물로 모두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에서 제4권까지는 <벽암록>의 번역이며, 제5권은 <벽암록 속어 낱말 사전>이다. 특히 제1권에는 <벽암록>을 종합적으로 안내하는 해설이 실려 있어 <벽암록>의 형성사 및 판본, 그리고 기존의 연구성과와 번역물들에 대한 평가 등을 접할 수 있다. <벽암록>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이들은 이 해설을 일독할 만하다.

석지현의 <벽암록>은 원문, 번역문, 해설 순으로 짜여져 있다. 그러니까 <벽암록>의 구성물인 수시, 본칙과 착어·평창, 송과 착어·평창에 대하여 각각 순서대로 원문, 번역문, 해설이 실려 있다. 이 번역서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구절에 대한 역자의 방대한 해설과 간략한 이본대조, 그리고 별권으로 독립된 <벽암록 속어 낱말 사전>에 있다. 이본대조 내용은 매우 소략하여 교감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모자르다고 할 수 있으며, 역자의 해설은 각 구절에 대한 훈고학적 주석이 아니라 역자의 안목으로 감평한 내용이다. 그 내용에 대한 호오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므로 나는 그것에 대하여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석지현의 번역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는 역시 속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는 일본학자들의 연구 성과인 <禪語辭典>(1991), <禪學大辭典>(1985), <諸錄俗語解>(1999) 등을 기본사전류로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리야 요시타카(入矢義高)의 <벽암록>(이와나미 서점 1997)과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의 <벽암록>(이와나미 서점 2003)을 벽암록 속어 해설의 결정판으로 소개하고 있는 만큼 이 두 번역본도 함께 참고하여 사전을 정리했을 것이다. 석지현의 속어사전은 각 칙별로 속어를 배열하였으며, 뒤에 찾아보기를 두어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앞으로 <벽암록>을 원문으로 읽으려는 이들은 필히 이 사전을 거쳐야 할 듯하다.


 

 


그밖에 언급할 만한 번역으로는 정성본이 역해한 <벽암록>(한국선문화연구소 2006)을 들 수 있다. 이 번역서는 백칙 공안의 출처와 등장인물들의 전기자료를 일일이 제시하고 있어 훈고학적 고증을 거쳐가며 <벽암록>을 읽으려는 이들에게는 매우 유익하다. 그리고 중요한 선어의 형성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원오의 수시·착어·평창은 번역하지 않았으며, 설두의 본칙·송만 번역했다. 각 구절에 대한 해설을 싣고 있다. 설두의 송고를 중심으로 한 벽암록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벽암록>의 구어와 관련하여 부수적으로 읽어둘 만 책은 신규탁이 번역한 이리야 요시타카의 <禪과 문학>(장경각 1993)이다. 이 책의 일부 내용으로 선어록의 수사에 대한 짤막한 잡감들이 실려 있다. 저자는 선어록의 수사가 일반적인 한문과는 다른 이질적이고 파격적이고 이상한 수사라는 착각을 불식시키고 생생한 언어, 일상적인 언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다만 구어에 익숙하지 않은 학자들이 문어의 어법으로 번역하는 경우 터무니없는 착오가 발생한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신규탁의 글들이 이리야 요시타카에게 많은 부분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신규탁의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장경각 1998)도 일독할 만한데, 저자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놓은 것이다. 그중에서 월간 <해인>에 실었던 “제3부 선어록 읽는 묘미”가 주요한 선어록들에 대한 소개 및 번역상의 문제점들을 언급한 것으로 선어록에 입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별도의 글로 소개한 바 있는 아키즈키 료민(秋月龍珉)의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운주사, 1996)도 선어록의 문법적 이해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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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관련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칸트를 필두로 한 독일관념론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에서 정립된 철학용어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철학사의 흐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이 근대화되던 시기에 독일관념론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한 용어들이 현재 우리나라 언어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는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할 때 독일관념론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그 번역용어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가령, “관념”, “객관”, “인식”, “본질”, “오성”, “이성”, “지성”, “현상”, “경험”, “감각”, “감관”, “의미”, “근거”, “인과” 등등의 낱말들은 길게 역사를 추적하면, 일본 번역어를 거슬러올라가 독일관념론,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그 용어들을 입에 올릴 때 우리의 개념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우리의 개념은 그 체계와 분리된 의미를 띠기 어렵다. 다름아닌 일본 번역어가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에 맞게 번역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이 칸트라는 저수지로 흘러든 뒤 이후의 철학사를 향해 흘렀다는 칸트주의자들의 평가는 과장된 면이 있겠으나, 적어도 그 용어들의 흐름을 고려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성싶다. 그만큼 우리는 그 용어들을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의 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틀은 엄밀히 말해 한 시대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 용어들의 역사성을 밝혀내면서 개념틀을 뿌리채 흔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라이프니츠-볼프 이래의 개념체계, 즉 몇 세기에 걸쳐 서양철학사를 주조했던 개념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현대독일어 문법에 허용되지 않는 희한한 독일어를 남발하는 것은 독일철학 용어로 편입된 언어들을 옛 시대의 의미로 복원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에크하르트는 라이프니츠-볼프보다 약 400년 앞선 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논고에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독일어가 등장하지만,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개념틀 내지 독일관념론의 개념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 때문이다. 바꿔 말해, 에크하르트의 글에 등장하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낱말들은 강단철학에서 협소한 개념체계로 굳어지기 이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다 그의 중세고지독일어(Mittelhochdeutsch)는 현대독일어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언어에 접근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령, “ein lebende wesende istige vernünftigkeit”(이부현은 “살아 있고 본질적이고 존재하는 이성”으로 옮겼다)에서 “wesend istig”(본질적이고 존재하는)라는 낱말들은 현대독일어에서 이미 사어가 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형으로부터 “Wesen”(본질)이라는 명사의 동사가 있었으며, “Sein”(존재)이라는 명사 내지 동사의 형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본질하다”로?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법상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이라는 번역어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협소한 개념에만 적합할 뿐, 그 이전의 언어세계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경우 현대독일어에 남아 있는 “abwesend”(결석하다), “anwesend”(참석하다)라는 분사형을 함께 거론하며 “Wesen”이 원래 동사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본질” 대신에 “임재하다”, “임하다”, “출석하다” 등의 의미로 개념을 복원시킨다. 이렇듯 언어들이 본래의 의미로 회귀하게 되면, 독일관념론같은 개념체계는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체계는 한갓 협소한 시대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독일어의 본래 의미와 함께 움직인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 이래 형성된 개념틀을 깡그리 잊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거의 모두 잊고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따라서 본래적인 이해로 보면 신은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지성이거나 인식이므로, 그러니까 다른 어떤 존재도 섞이지 않은 순수 인식이므로, 그 유일무이한 신이 자신의 인식을 통하여 사물들을 존재 속으로 호출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니라 신 안에서만 존재는 인식이므로. . .

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신의 온 존재는 인식 자체이므로 신은 순수 지성이라는 점이다.

Es ergibt sich also offentlich, daß Gott im eigentlichen Verstande einzig ist. Und da er Intellekt oder Erkennen ist, und zwar reines Erkennen ohne Beimischung irgendeines andern Seins, so ruft dieser einzige Gott durch sein Erkennen die Dinge ins Sein, eben weil in ihm allein das Sein Erkennen ist . . . Er wollte und lehren, daß Gott reiner Intellkt sei, dessen ganzes Sein das Erkennen selbst ist.

— Josef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24면

위 인용문에서 “신은 지성”, “신은 인식”, “신은 순수 인식”, “신의 존재는 인식 자체”, “신은 순수 지성” 등의 표현을 현대적인 개념틀로 파악한다면 십중팔구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중층적 몰이해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중층적인 몰이해를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의 독자들을 위해서, 물론 그런 독자들은 소수이겠지만, 그래도 각 용어들에 대하여 엄밀히 번역해야 한다. 가령 우리말의 자연스런 가독성을 위해 “Intellekt”, “Vernunft” 등을 일괄적으로 “이성”으로 번역한다거나, “Vernunft”의 번역어로 “지성”이나 “이성”을 번갈아 채택한다거나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부현의 번역은 이런 착오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착오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의 일관되지 못한 번역어 채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나중에 이부현의 번역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개념들, 즉 “순수 인식”, “인식 자체”, “순수 지성”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그 개념들의 변천사를 면밀히 검토한다하여 그 의미가 포착될 리는 만무하고, 우선은 자신이 그 개념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미를 모두 털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에크하르트의 직접 경험을 시사하는 암시의 언어일 뿐, 사상 체계를 확립하거나 분석하는 치밀한 논리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역시 경험이다. 성실한 책읽기와 분석을 요구하는 언어가 있는 반면, 고도의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언어도 있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바로 후자의 언어이다. 남녀의 감정놀음인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판에,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사태를 가리키는 언어를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신비가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언어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혀 사용한다. 그는 당대의 언어는 물론 당대의 사상적 체계조차도 자신의 경험 뒤에 따라오는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가벼운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흔들린다는 의미에서 그 언어는 극한에 이른다. 바로 이 의미에서, 니체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나 비유가 어느 사상체계나 어느 감각세계 내에서 그 구조에 맞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신비가의 경험에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수법들, 모든 표현들, 모든 사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구조 자체가 이미지요 비유가 된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영원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그런 형이상학적 언어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의 심리를 폭로하는 실마리, 즉 일종의 비유나 이미지 같은 것, 심리학적 언어가 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현실은 (혹은 현실이라고 믿는 그 무엇은, 혹은 철학자들이 몸담은 사상체계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또 다른 그림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와 실제, 비유와 사실 간의 복합적 관계가 혁신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가의 언어라는 언어는 모두 이미지나 비유나 상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면에 가깝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이미지나 심리의 연상을 따라가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은 그림자 놀이이므로), 사상서들을 읽을 때는 추론이나 논변, 논리를 따라가면 그 귀결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 역시 그림자 놀이이므로), 신비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면 필연적으로 그림자에 속아넘어가 좌초하게 될 것이다(그것은 그림자 놀이가 아니라 그림자 바로 그것일 뿐이므로).

가면은 가면 뒤에 얼굴이 있다는 것만 알릴 뿐, 얼굴을 묘파하지 않는다. 가면과 얼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 이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 한,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폐되지 않은 진리, 즉 신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도래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설교 32

그의 강론, 그의 언어는 그림자와 그림자가 긴밀히 연계되는 그림자 놀이가 아니다. 그의 언어는 찰나찰나 흔들리는 그림자, 찰나찰나 명멸하는 그림자, 순수한 그림자다. 진리를 가장 덜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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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는 1912년 4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 채로 북방의 고원에서 입적한다. 일년 뒤 이 소식이 수덕사의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혜월과 만공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난덕산에서 다비에 붙였다. 그때가 1913년 7월이었다. 이후 만공은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허의 유고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35년에 수집한 유고를 만해 한용운에게 넘기며 혹 글자의 누락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교열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도가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경허 만년의 원고까지 포함하기로 하여 인쇄를 미루다가, 1942년 봄에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에까지 가서 유고를 수집한 뒤 1942년 여름에 간행하였다. 각 선원은 5원, 각 개인은 50전 이상씩 연조금을 모아 인쇄한 것이다. 이것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鏡虛集»으로 당시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다.



1942년 비매품으로 간행된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 표지와 이 판본에 수록된 경허선사초상

«경허집»의 표제는 남전한규가 제자하였으며, 속표지를 뒤이어 <열반송>, <경허선사초상>, <경허선사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용운의 <서序>와 <약보> 및 <목록>, 본문 순으로 이어진다. <목록>은 목차를 뜻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옛 글의 체제를 따라 법어, 서문, 기문記文, 서간, 행장, 영찬, 시詩, 가歌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歌의 일부만 한글일 뿐 나머지는 모두 한문으로 쓰였으며, 서문부터 시작하여 한적본의 면수로 60면, 즉 오늘날의 면수로 120면에 이른다. 이 «경허집»은 1970년에 «경허당법어록»(대동불교연구원 1970)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허집»은 번역되지 않았다.

«경허집»이 처음 번역된 것은 1981년이다. 수덕사 문중의 원담스님은 «경허집»을 단순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증보하기 위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를 답사하여 법어 및 <금강산유산가>를 비롯한 선시 40여 수를 새로 발굴하였다. 그리하여 한암스님이 찬술한 행장과 경허의 만행 일화 38편까지 덧붙혀 1981년에 «경허법어鏡虛法語»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경허집»의 증보국역판인 것이다. «경허법어»에는 경허의 친필 유묵이 여러 점 수록되어 있어 아쉬운 대로 경허의 글씨를 살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번역본이긴 하지만 원문(한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으며, “법문의 심장부인 <오도가>, <심우가>, <심우송>으로부터 수록”(46면)하고 일화, 행적, 연보를 마지막 부분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법어, 서문, 기문, 서간, 행장, 영찬, 송頌, 가歌의 기본체제는 옛 판을 그대로 따랐다. 인물연구소에서 1981년에 간행된 이 증보번역판은 747면에 이르며 당시 2만 원이라는 거금의 가격에 판매되었다.
 

그러므로 «경허법어»는 연구자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너무 방대하고 난해한 점이 있었다. 그러던 차 금번 홍법원에서 일반 대중이 누구나 경허큰스님의 법어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간추려 «경허대선사 법어·진흙소의 울음»을 간행”(10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이다. 이 번역본은 «경허법어»의 번역문을 좀더 현대적으로 고쳐 다듬은 것으로서 <경허선사의 일화>, <경허선사의 법어>, <경허선사의 선시>라는 세 체제로 배열하고 법어의 제목을 임의로 달았으며, 법어 일부와 선시 수백 수 중에서 아흔 수 가까이를 수록하지 않았다. 이전의 경허집은 법어나 법문을 앞부분에 수록했던 반면에 «진흙소의 울음»은 경허의 일화를 오히려 앞부분에 배치했으니, 일반 독자들이 경허를 좀더 쉽게 접근하도록 의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법어의 한문은 수록하지 않았으며 선시의 한문만 함께 수록하였으나 면수는 422면에 이른다.



왼쪽으로부터 원담 번역의 «경허법어»(인물연구소 1981)와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 그리고 석명정 번역의 «경허집»(극락선원 1991)

경허집의 역사는 «진흙소의 울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석명정이 번역한 «경허집»(운주사 1990년, 374면)과 «경허집»(극락선원 1991년, 429면)이 있는데 이 두 번역이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동일한 역자에 의한 것이니만큼 번역 내용은 다르지 않겠지만, 1990년판이 면수가 적은 것으로 미루어 간추린 번역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석명정의 1991년판 «경허집»은 원담스님의 1981년판 «경허법어»와는 배열 및 제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원문 내용은 동일하다.

이상의 판본비교에서 우리는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과 이의 증보국역판인 «경허법어»가 경허어록 원문 연구의 기준이 되는 판본이며, 석명정의 1991년판 «경허집»은 번역본으로서만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흙소의 울음»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일 뿐 학술적인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독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경허어록은 몇 가지 종류가 있을까? 모두 다섯 종류이지만, 그중 두 권은 절판되었다.

  1. 진성원담 역,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년, 422면)
  2. 석명정 역, «경허집»(운주사 1990년, 374면) 절판
  3. 석명정 역, «경허의 무심»(고요아침 2002년, 182면) 절판
  4. 석명정 역, «마음꽃»(고요아침 2002년, 228면)
  5. 석성우 역, «나를 쳐라»(노마드북스 2005년, 223면)

원담의 «진흙소의 울음»은 앞서 말했다시피 «경허법어»의 번역문을 고쳐 다듬고 간추려 수록한 것이며, 석명정의 «경허의 무심»과 «마음꽃»은 같은 역자의 1990/91년판 «경허집»에서 추린 것으로 앞의 책은 법문을, 뒤의 책은 선시 80여 수를 뽑아 수록하였다. 특히 «마음꽃»은 사진을 곁들여 시화집처럼 꾸며서 간행한 것이며, 역자의 감상평도 들어 있다. 석성우 번역의 «나를 쳐라»는 역자의 감상평만 없을 뿐 «마음꽃»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허어록의 진수를 맛보려면 «경허집»(1942)이나 «경허법어»(원담 1981), «경허집»(석명정 1991)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진흙소의 울음»(원담 1990), «경허집»(석명정 1990) 정도의 내용은 되어야 한다. 이들에 비하면 «마음꽃»이나 «경허의 무심», «나를 쳐라»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저 얇은 분량의 예쁜 시집 한 권을 읽는 기분이 들 뿐, 경허의 진면목을 엿보기에는 모자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경허”를 검색해 보면, «마음꽃»이나 «나를 쳐라»가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진흙소의 울음»은 거의 팔리지 않은 채 어디 한데에 쳐박혀 있는 인상이 든다. «진흙소의 울음»에 대한 책소개 내용이 전무할 뿐 아니라 역자의 이름마저 표기되어 있지 않아, 과연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경허어록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의 «경허집»으로 처음 세상에 드러난 이후 최근의 «나를 쳐라»로 마무리된 결말은 자못 씁쓸하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겠으나 현 시대의 정신적 주소를 알려주는 듯하여 괴이한 기분마저 든다. 불교서적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나 대중적인 편집본이 출간되는 것이야 푸념할 바 아니겠으나, 적어도 «마음꽃»이나 «나를 쳐라»보다는 «진흙소의 울음»이나 «경허집»이 좀더 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지는 않을까?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은 없어, 봄 산에 꽃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를 아는 사람 없음이여, 때가 말세더냐. 나의 운명이던가. 또한 어찌하랴.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 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이랴 쯔쯧!” 소 부르고 말 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張서방 이李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불조佛祖가 禪과 敎를 설한 것이 특별한 게 무엇이었던가. 분별만 냄이로다. 석인石人이 피리 불고, 목마木馬가 졸고 있음이여. 범부들이 자기 성품을 알지 못하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계지 나의 분수가 아니다.”라 한다. 가련하구나!

[...중략...]

슬프다. 어이하리! 대저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

송頌하기를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일레.
六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太平歌를 부르네.

하였다.

이상은 <오도가悟道歌>(1981년 원담 역)의 시작과 끝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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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이태준 고택, 간송미술관, 최순우옛집 등은 성북동 일대를 답사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답사지들이다. 그러나 이재준가는 어느 교회의 부속건물로 쓰이고 있어 답사가 곤란하며 성낙원 역시 개인 소유여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재준가나 성낙원에서는 흠모할 만한 정신성을 발견할 수 없어 그곳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아쉽지 않은데, 노시산방을 답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성북동 집이다. 거의 모든 답사 안내글은 이제는 노시산방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노시산방이 성북동이 개발되는 와중에 사라진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김병종의 «화첩기행»(효형출판 2005)을 읽는 중에 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근원 선생님, 두고 떠나신 성북동 노시산방에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저는 지금 다시 찾아와 그곳에 서 있습니다."(2권 184면) 아니, 노시산방이 . . . !

김병종의 글에 따르면, 방문 당시의 집 주인은 "자애로운 노년의 여인"이며 노시산방의 옛 내력을 알고 있는 듯 화초를 걷어내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두었다고 한다. 노시산방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감나무 역시 그대로 남아 김병종을 맞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노시산방의 주소를 밝히지 않고 그저 성북동이라고만 했다. 김병종은 서세옥의 제자이고 서세옥은 김용준의 제자이니, 김병종은 김용준의 고제高弟가 된다. 김병종이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를 통해 "육친의 체취"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을 자주 방문하여 그 위치를 알고 있었던 서세옥이 김병종에게 노시산방의 위치를 가르켜줬던 모양이다. 서세옥은 노시산방을 이렇게 회고한다:

근원 선생은 성북동 노시산방이라는 조그만 한옥에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북동이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이었어요.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아주 일품이었죠.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어요. 그 개울물이 선생이 사시던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갔다했어요. 참 아름다웠죠.

—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 12면

말인즉 노들바위가 있을 정도로 너른 성북천(현재는 복개천으로 성북동 큰길) 가에 노시산방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밖에 노시산방을 비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근원수필»을 비롯하여 이태준 및 기타 인사들의 글 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이들 모두 노시산방이 성북천 상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노시산방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먼저, 열화당에서 펴낸 근원전집 보유판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을 보면 근원의 연보가 실려 있는데, 노시산방의 주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44 | 41세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枾山房,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김환기에게 넘겨주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능리 고든골로 이주, 그곳의 집을 '반야초당(半野草堂)'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당시 성북동은 경성이 아니라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노시산방 주소로 기록된 "성북리 65-2"는 터무니없는 오류이다. 성북동의 경우 현재의 번지수는 일제강점기의 번지수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 주소대로라면 노시산방이 한성대입구역 근처라는 얘기가 된다. 노시산방을 기술한 여러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말이 안 된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살펴보니, 김용준의 호적등본에 기재된 본적을 그대로 취한 것이었다. 본적과 주소지는 같은 것이 아닌데, 연보 편집자가 착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성북리 65-2"는 김용준이 중앙고보에 입학했을 때 통학을 위해 이사한 집이며, 이것이 본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김용준이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것은 31세가 되는 1934년이거니와, 후일에 쓴 <노시산방기>에는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내력이 밝혀져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근원수필»(열화당) 116면


근원은 이 노시산방에서 십여년 간 살다가 김환기에게 팔고 의정부로 이사했다. 노시산방을 인수한 김환기는 그곳에다 김향안과 신혼살림을 차리고 "수향산방"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은 곧 수향산방이기도 한데, 이 집에 관하여 김향안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44년 결혼, 성북동 32-2, 근원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억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1948년 성북동 집이 가족이 살기에 협소하기도 했지만 서울에 오면 도시에 살 줄 알았는데 왜 시골에 사느냐고 어머님이 불평하셔서 시내에 집을 찾은 것이 원서동 골목 조금 들어서면 비원이 내려다 보이는 이층 양옥에 이사오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온 가족이 열병으로 신음하고 다시 시외로 나가자는 제의에 어머니도 찬성하셔서 아래 성북동 274-1로 이사하다. 이 집은 어느 분이 제법 격식 찾아 정성들여 지은 전형적 입구(口) 형의 한옥. 시원스럽게 석가래가 건너간 육간대청 뒷문을 열면 뒷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랑채와 격리해서 쬐끄만 안마당도 있었으나 사랑채를 허물어서 화실을 만들자고 했다.

—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57면, 158면

김향안의 기록대로라면 노시산방은 성북동 32-2가 되어야 맞다. 그러나 성북동 32번지는 선잠단지 인근으로 노시산방을 묘사한 다른 기록들의 위치와 맞지 않다. 오히려 1948년에 이사했다는 성북동 274-1이 다른 기록들이 묘사한 노시산방의 위치와 일치한다. 또한 "아래 성북동 274-1"은 그릇된 서술이다. 성북동 274-1은 위쪽 성북동에 해당하지 "아래 성북동"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만난 기록이 바로 김향안의 또 다른 글이었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 16면

아하! 김향안의 기억으로는 성북동 32-2와 성북동 274-1이 헛갈렸나 보다. 아니면 성북동 274-1의 위치와 대체로 교차하는 성북동 산32-2를 착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성북동 274-1을 노시산방의 위치로 비정하면, 노시산방을 추적할 수 있는 관련 자료들의 묘사와 거의 대부분이 일치한다. 예컨대 이태준이 자신의 소설에서 까메오로 출현시킨 어느 화가의 집이라든가, 김용준이 <서울사람 시골사람>, <겨울달밤 성북동>에서 묘사한 노시산방의 위치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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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무들과 까치 집과 싸리 울타리와 괴석과 흰 눈과 그리고 따스한 햇볕.
이것들이 노시사老枾舍의 겨울을 장식해 주는 내 유일한 벗들이다."(김용준, <冬日에 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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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성북동 274-1로 추정되는 노시산방을 답사하였다. 그곳은 이태준의 고택인 수연산방에서 조금 올라간 길에 있으며 심우장 건너편에 있는 집으로, 근래에 지은 수월암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온통 수목에 가려 있어서 밖에서는 그 집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노시산방기>를 보면 "감나무 몇 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내 눈으로는 두 그루의 감나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기고 그려준 <수향산방 전경>에는 그가 사랑했던 늙은 감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그 위치에 감나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나무 몇 그루" 중 가장 늙어 반이나마 고목이 되었던 감나무는 김향안이 땔나무로 쓰기 위하여 베어내었으며, 괴석은 서세옥이 스승을 추억하기 위한 증표로 자신의 집에 옮겨놓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노시산방(성북동 274-1) 건너편에는 심우장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이태준 고택이 있다. 노시산방을 방문했던 김병종은 때마침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놓고 있다: "노시산방 옛 서재 앞 가장 오래된 감나무의 한 가지는 그 끝이 길 건너 만해 한용운의 고거인 '심우장' 쪽으로 향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생전에 지척에 살다가 함께 북으로 갔던 상허 이태준의 고가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에서는 청룡암, 미륵당, 심우장, 노시산방을 아우르는 정신적 공간이 마침내 복원될 수 있었다. 그 일단은 "붉게 타오르는 성곽 아래 연꽃이 피어나 — 심우장 배관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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