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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1/ 안수길 지음/ 미래의 창 

사잇섬 농사

 

 



1


동쪽 창문이 훤했다. 날이 새기 시작하는가 보다.


꼬꾜-.


닭이 벌써 여러 홰 울었다.




멍, 멍, 머엉 멍! 멀리서 세차게 개 짖는 소리가 단속적으로 들려온다. 여우가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로도 들렸다. 슬픈 것 같으면서도 간절한 걸 호소하는 듯한 소리였다.



6월 초순. 음력으로는 단오가 지났다.


제법 짧아진 초여름 밤, 이 밤을 남편 때문에 뜬눈으로 샌 뒷방예는 멀리서 전해 오는 개 짖는 소리에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상기 오잴까?”


이 고장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지마는 뒷방예는 유난히 혀끝이 짧은 것 같은 발음으로 말을 한다. 지금도 그런 발음으로 한 마디를 뇌이면서 일어났다.


문을 열었다. 정주방 허리문이었다.


밖에 나갔다. 개 짖는 소리가 여전히 무겁게 들려 올 뿐,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저 개얘지 새끼 강쪽에서 짖는 게앵가?”


개는 확실히 두만강 짖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문득 뒷방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걸 물리치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을날같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다. 별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바람기도 없었다.


(오늘두 비가 올 것 같재쿵.)


청명 무렵에 하루 잠깐 흐렸다가, 가랑비가 뿌린 일이 있었을 뿐, 춘경기에 들어서부터 오늘 이앙기가 지나기까지 쭉 비 구경을 못했다. 겨울에도 강추위만 헐벗은 사람들을 못 견디게 했을 따름, 싸락눈 한 알 날리지 않았다.


보리가 결딴났다. 파종을 한들 무슨 소용이랴? 논판에서 먼지가 날렸다. 모를 키울 수도 없었고 꽂을 수도 없었다.


2년 내리 계속하는 가물이었다. 노인들은 30년래의 흉년이라고 했다. 성황당에 기우제를 지냈다. 관우묘에 치성도 드렸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 대로 하늘만 맑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올상부르지도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 그 뒤에는 귀가 찡하는 듯한 고요! 뒷방예는 오싹 몸에 소름이 끼쳤다. 무섬증이 치밀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멍, 멍, 머엉 멍!


멈췄던 개가 또 짖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꿈틀하는 걸 걷잡으려니 속으로 뇌까려진다.


(조련한 일이 앙이궁!)

  

쫓기듯 정주에 들어서니,

“지엄마아!”


할머니 품에 안겨 자던 다섯 살짜리 장손이 잠꼬대인가 할머니를 부른다.


제 어머니는 삼촌 아이들이 하는 대로 <아지미>라고 부르고, 할머니를 <지엄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장손아!”


잠귀 옅은 시어머니가 깬 모양이다. 손으로 손자를 더듬다가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개가 어째 저리 짖능가?”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 서슬에 기침이 머리를 드는 것이 아닌가. 쿨룩 쿨룩, 한참 고통을 겪다가 허옇게 센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어 올린다.


“그래 말입꼬망!”


뒷방예도 근심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생겨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이내 입에 내어 주고받기에는 너무나 큰 걱정인 듯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 시어머니의 기침이 이내 가라앉지 않았다. 뒷방예는 쿨룩거리는 시어머니를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희미한 호롱불에 비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누렇게 부었다. 영양실조였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오랜 해소병이었다.


“오늘은 가마이 누워 계시쟁쿠!”


낮에 그 몸으로 산에 가서 풀뿌리를 캐 온 것을 민망해 하면서 나무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누워 있겠음. 칡뿌리래두 캐다가 아아드르 멕여얍지.”


쿨룩 쿨룩 시어머니의 기침이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의 걱정이었다.


“순라군에게 들킨 게 앰매?”


“글세 말입꼬망.”


“꿈자리가 뒤숭숭하드랑.”


“어마임께서 꿈 이얘기 듣구서 한새코 말렸등이 그 고집튕이 들어얍지.”


꿈이란, 밖에 나갔던 아들이 전립(戰笠)을 쓰고 군복을 갖춰 입고 전통(箭筒)을 차고 환도를 휘두르고 춤을 추면서 집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어젯밤 날이 새었으니 그제밤에 시어머니가 꾼 것이었다. 길몽은 아니라고 시어머니 며느리가 수군거렸다.


뒷방예는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였다.


“오늘밤은 고만 두오.”


뒷방예의 불안한 얼굴을 한복이는 멍하니 보았다.


“뭐?”


“꿈자리가 뒤숭숭하다지 않소.”


“흥, 꿈자리구 뭐구, 얼핏 건너가서 아시 감쥐라두 캐 와야지 꿈타러엉하다가 뭇주검이 나는 거 기다리겠음…….”


“그래두…….”


한복이의 표정이 저으기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도사려 잡는 것이었다.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걱정 말라구.”


“한새쿠 갈 작젱임둥?”


“그래.”


고집 센 남편이라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뒷방예는 내키지 않는 대로,


“그럼, 조심이나 합꼬망.”

“조심하지 않음, 치덕이두 같이 가는데…….”

“오라방이두?”


장치덕이는 한복이의 처남일 뿐 아니라, 헌헌장부의 기질을 가진 뜻 맞는 친구였다. 그와 둘이면 사실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둘이는 오늘밤 <사잇섬>에 가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래.”


그랬을 뿐 입을 굳게 다물고 한복이는 강을 넘어간 것이었다.


“그 고집튕이가 한 번 되쌔 흥이 나야지…….”


타는 가슴이 뒷방예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고집이사 세지마는…….”


아들의 고집불통엔 애를 먹고 있는 터다. 그러나 며느리가 가림 없이 나무래니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감싸 주려다가 문득 더 세차게 짖어대는 먼 개소리에 그만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멍, 멍, 머엉, 멍, 멍…….


뒷방예도 금시에 얼굴이 흐려진다. 숨을 죽이고 시어머니의 등을 쓰다듬을 따름이었다.


쿨룩, 쿨룩,


머엉, 멍멍, 머엉, 멍…….


치미는 기침보다도 개 짖는 소리에 시어머니는 신경이 더 쓰여지는 모양이었다. 정채 없는 눈을 껌뻑 껌뻑하여서, 마음은 마냥 개 짖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2


가물이 아니라도 이 고장은 땅이 메말랐다. 연사 좋은 해에도 소출로 계량을 대일 양이면 근검절약을 해야했다. 하물며 2년 내려 계속되는 흉년에 있어서랴.


남녀노소가 산으로 들로 나무뿌리나 나물을 캐러 다녔다. 먹을 수 있는 거면 땅 속에 있건, 땅 위의 거건, 움트는 싹이건, 줄거리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칡뿌리가 캐어지고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졌다. 그래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뒷방예 시어머니처럼 해소병으로 쿨룩거리는 남녀노소가 수두룩했다.


살 길을 찾아 이 고장을 떠나는 사람. 거지가 되어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정들이 많아졌다. 그러는 중에서도 몇몇 약삭빠른 사람들은 <사잇섬 농사>를 지어 초근 목피와 함께 겨우 연명을 해왔다.


<사잇섬>이란 이곳, 종성부(鍾城府) 중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이 동네 앞을 흐르는 두만강 흐름 속에 있는 섬이었다. 흡사 고구마 형국으로 생긴 사잇섬은 모래로 이루어진 사주(沙洲)다. 주위가 십리가 될까? 땅이 검어 기름질 것 같으나 모래로 이루어진지라 곡식이 되지 않았다.


물 역에 몇 군데 새밭이 있었으나, 삿자리의 재료는 물론, 아무 쓸모가 없었다. 부지런한 농사꾼이 건너가 베어다가 말리어 아궁이에 때이기도 하고 썩혀서 거름으로 쓰는 게 고작이었다.


대안인 청국땅과 우리나라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 그 강물 가운데 있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우리나라 영토였다. 그리고 압록강, 두만강 흐름 속에 있는 섬이 모두 청국 영토가 아니었다. 대국(大國)의 금도로 강 속에 있는 섬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일 거다. 압록강구의 위화도(威化島)를 비롯해 종성부의 조그만 이 섬에 이르기까지…….

<사잇섬> ―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 그대로 이름이 되고 만 것이랄까?

<사잇섬 농사>란 여기 가서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에 내세우는 표방에 지나지 않았다. 불모(不毛)의 섬에서 어떻게 곡식이 나랴? 그러므로 사잇섬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사실은 대안(對岸)인 청국땅에 건너가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물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토질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까? 이쪽이 박토인데 반해 대안 지방은 시꺼먼 땅이 기름지기 그대로 옥토였다.


그러나 그럴 밖에 없는 일이었다.


청태조 누루하치(奴爾哈赤)의 발상지가 길림성, 오동성(敖東城), 돈화(敦化) 지방이었다. 두만강에서 북방으로 삼사백리 지점에 있는 고장이었다.


그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한 해가 1644년이었다. 그 사이 수십 년간 두만강 변경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다. 누루하치는 수하의 정병(精兵)을 삼기 위해 자신의 출생지에서 순 만주족인 장정을 뽑았다. 같은 족속이라야 믿음이 갔기 때문이리라.


승승장구,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기세였던 누루하치였다. 그러므로 장정들은 그의 수하 정병으로 뽑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지휘 밑에 넓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북상(北上)했다. 가슴속에는 규모는 작으나 누루하치 못지않은 영화를 꿈꾸면서……. 그러므로 한번 북상한 장정들은 고향에 돌아오려 들지 않았고 돌아오지도 않았다.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을 아들이나 동생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기후 좋고 밝은 땅에 삶의 터전을 잡아야 한다는 야심과 희망이 부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정들이 병정에 뽑히자, 좋아라고 살림을 뜨기 시작했고 누루하치가 북상하자, 솔가해서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었다.


한 집이 뜨고, 두 집이 뜨고…….


이렇게 하여, 원체 인구가 희박하던 이 지방에는 사냥꾼과 통행인이 가끔 눈에 띌 뿐, 인적이 드물었다.


더욱이 중흥기의 강희(康熙), 건륭(乾隆) 두 임금은 이 지방을 청조 발상(淸朝發祥)의 성지(聖地)라고 하여 통치하에 있는 타민족 외에는 이민을 허가하지 않았다. 제 백성을 그랬거든 다른 민족에 있어서랴.


우리나라와 청국 사이에는 서로 이민을 철거케 하는 비공식 협정이 맺어진 모양이었다. 조정에서는 어느 결에 두만강의 월강을 금지했고 이를 범하는 자에게는 월강죄(越江罪)의 극형으로 임했다. 이러고 보니, 조·청 양국 민족이 이 지역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가위 무인지경이었다.


그동안이 2백여 년.


나무가 자랄 대로 자라고, 그 잎이 떨어져 쌓였다가는 썩고, 썩은 나뭇잎이 땅속에 파묻히고…….


이러기를 2백년을 되풀이 하였으니 지력(地力)은 조금도 소모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땅이었다. 어찌 기름진 옥토가 아닐 수 있을 것인가?


쟁기나 보습, 괭이로 파 뒤집으면 시커먼 흙이 농부의 목구멍에 침이 꿀꺽하고 삼켜지게 했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곡초가 저절로 쑥쑥 소리라도 들릴 듯이 자라 올라갔다. 거름이 필요 있을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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