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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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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교(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교주 박민규가 이르길 천운영의 소설은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란다. 그리고 또 그 이유를 [당신이 운좋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잘.알.겠.지 이런 내 마음]이라 한다. 그러니까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알고 싶소,정도 되겠다. 그래, 그런 책이 나도 있긴 있었다. 그러니까 [잘.알.겠.다 네 마음]

"소설은 울분을 토해 내는 것이 아니야. 냉정해져. 질척대지 말고. 자기연민 같은 건 버려. 자기변명도."(162p) 그래서였을까. 천운영의 작품들은 질척이지 않았다. 그녀의 글에서 설핏 엿보이는 어설픔은 있었지만 욕망의 고갱이를 진지하게 탐색하면서도 쓸데없이 무엇인가 조작하려는 조바심이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소설은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냉정함을 잃지 않으면서 순도높은 욕망의 풍경을 완성시킨 셈이다. 칭찬하면서도 질투가 나는 대목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따라가면서 나는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욕망과 상처들이 궁금했다. 질 나쁜 행동이라 뻔히 알면서도 나의 관음증은 그녀의 작품 속에 녹아난 그것들을 찾으려고 시종일관 분주했다. 그리고 사실임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나는 어느 지점에선가 그것, 소름 돋게 내것과 닮아 있는 생채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눈물로는 어림도, 그러나 무엇으로라도 울어야 하는, 나는 [그녀의 눈물사용법]을 알 것만 같았다.   

다른 단편들도 그렇지만 특히 [노래하는 꽃마차]라는 단편은 봄이 오면 제 몸을 미친듯이 긁어 피꽃을 피우는 한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노래처럼 들려주는데 여자의 과거를 따라가며 여자가 겪은 치욕을 되살리는 작가의 문장이 참 아프고 그래서 참 아름다웠다. 

욕망을 그리고 상처를 먹이를 하지 않는 글쟁이가 있을까 생각하니 없겠다,싶다. 다 아문 상처건 덜 아문 상처건 왜곡된 욕망이건 그걸 다시 들추고 쑤셔대야 하는 일이 글쟁이의 운명이라면 처량하고 딱한 밥벌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억압된 충동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그것을 배설하는 일이라면 글쟁이야 말로 되려 허구헌날 쾌변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아닐까 싶다. 울고 웃고 장단 맞추고 노래하고. 

작가는 지면을 빌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그런 '내가 소설을 쓴다']라고 적고 있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 작가가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와 무관하게 나와 작가를 깊게 연결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쓰는 작가의 글들이 욕망과 상처를 온전히 굴절한 풍경이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돌아가 박민규의 흉내를 내보자.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당신이 운나쁘게 그녀와 같은 욕망과 상처를 숨기고 있다면 잘.알.겠.지 이런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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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속
소르주 샬랑동 지음, 김민정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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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취향의 문제인지 아니면 계산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어떤 작가들은 멱살을 틀어잡아서라도 독자를 스펙터클 앞에 강제로 세워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작가들은 그저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정도의 힘으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작가가 있다. 그도 아니면 담담하다 못해 맥없는 손짓으로 독자를 주저않히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소르주 샬랑동은 아마 마지막 부류에 해당하는 작가인 듯 싶다. 화려하고 기지 넘치는 것들이 박수받는 요즈음 어떤 것도 부러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마음 씀씀이가 반가웠다.  

늙은 두 부부가 사는 [바람의 집]에는 요일마다 다른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반은 커튼을 젖혀 환기를 시키고, 마들랜은 침대를 정리하고 꽃을 꽂아두고, 레오는 종을 울리고, 천당지기는 시계의 태엽을 감고, 블랑슈테르는 시를 읽고, 베르트뱅은 불을 밝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갑판장 루시앙은 한밤중에 [바람의 집]을 둘러본다. 그들 모두에게 [바람의 집]을 들르는 일은 일상이며 또한 약속이었다. 기억이라는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약속이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곁에 붙들어 두려는 약속.

누군가가 죽은 사람을 몹시 사랑한다면 그를 이 세상에 좀더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고. 그러려면 죽은 사람의 집에서 발소리를 내며 걸어다니고 어딘가 나가려는 듯 문을 열고 햇빛을 들이려는 듯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진짜 식사를 하는 것처럼 그릇이며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를 내야 한다고. 집에서 물소리가 나야 한다고. 화병에는 꽃이 꽂혀 있어야 하고 낮에는 방마다 햇볕이 들어와야 하고 침대는 아침마다 정리정돈이 되어야 한다고. 죽은 사람 몫까지 합해 큰 소리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야 한다고. 그러면 램프는 누군가가 죽은 줄 꿈에도 모른 채 -램프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는 모르니까- 창가에서 꾸벅꾸벅 졸고만 있다고. 그동안 영혼은 멈춰버린 심장에 붙어 있을 수 있다고. p.150

등장 인물들은 모두 조금씩은 부족하고 또 조금씩은 상처입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저 평범한 우리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늙은 두 부부, 에티엔과 포베트에게 받은 위로와 호의는 각자 다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얻은 삶에 대한 긍정은 비슷비슷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추억, 의리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들은, 그것이 비록 파기될 시점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서로 노력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약속은 약속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 아니라 약속을 이끌어 낸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장된 다짐과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너무 쉽게 뱉었던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며 다시 한 번 그들에게 흘렸던, 기억도 가물거리는 약속들을 되짚어 보았다. 미숙하고 이기적이었겠지만 어떤 약속들은 분명 진정이었다고 입 속에서 우물거린다. 정말 어떤 약속들은 진정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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