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통신 1931-1935 - 젊은 지성을 깨우는 짧은 지혜의 편지들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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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고와 감정 속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개성은 그 핵심이 너무 희미하고 눈에 보이지 않기에 완벽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외부 세계에서 자기 내면 존재의 반영물을 보고 싶어 한다.......하지만 그들보다 수줍고 소심한 자아를 가진 이들-현대 세계에는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도 있다. 그들의 가장 큰 염원은 남들이 자신을 이웃들과 정확히 똑같게 봐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구에서도 자기만의 취향을 표현하기보다는 정확성을 추구한다."「우리가 가구를 사면서 생각하는 것들Funiture and the Ego」 
 
둘러보니 내 주위에도 외부 세계에서 자기 내면 존재의 반영물을 보고 싶어하거나 정확성을 추구하시는 분들이 넘친다. 일찍 이 문구를 만났더라면 여러 번 유용하게 사용했을 것인데 안타깝고 즐거운 발견이다. <런던통신 1931-1935>는 요즘들어 집어 든 책 중에 그나마 가장 유쾌한 책이었다. 주제도 다양하고, 부러 현학적이지도 않고, 삐딱함을 세련됨이라 착각하지도 않고. 
 
책은 135개의(정확한지 갑자기 의심스럽지만) 칼럼으로 묶여 있다. 칼럼의 내용들은 한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고 판단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로부터 중요한 문제까지를 가리지 않고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소재들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러셀 개인의 경험, 논리적 분석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낸다. 특히, 칼럼이 쓰여진 시기를 통해 얼핏 짐작할 수 있겠지만 <런던통신 1931-1935>에는 현실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에 관한 칼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지금 집필된 책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글들이다. 예를 들면

한편으로, 민주주의에서 우리의 정치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정치가의 수준이다. 「우리가 투표를 하는 진짜 이유On Politician」

민주주의의 즐거움은 한마디로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데 있는 것이지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양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민주주의의 위험성The Prospects of Democracy」 

오늘날 당신이 어떤 사람과 협력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사람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당신도 약탈품을 나눠 갖고 싶기 때문이다.「비겁해서 좋은 점The Advantage of Cowardice」 

러셀이 워낙 출중한 것인지, 인간이란 존재가 영 글러먹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대한민국 부산 영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대를 관통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잠언들이 요즘 참 불편하다. 좋은 말로 시대를 관통한다고 말하지 꼴좋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튼 <런던통신 1931-1935>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서양철학사>등에 비해 읽기도 쉽고 편파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별로 보이지 않아서 러셀의 책을 처음 읽는 분들이라면 무난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반면 이런 종류의 에세이라면 나는 조지 오웰이 좋아요,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혹은 표현이 조금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느낌이다. 80년 전에 쓰여진 글이 지금도 유효한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의 존재감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몇 가지 불편한 뉴스를 본 것 때문인지 책을 덮고도 한 대목의 글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래서 사족처럼 여기 적어둔다.

사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취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식인이란 이러저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는 않는 사람이다. 「정통이라는 것은On Orthodox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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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7-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지오웰을 사랑하지만 러셀 식의 건방짐도 사랑해요. 런던통신, 재미있어 보입니다.

굿바이 2011-07-13 17:54   좋아요 0 | URL
치니님은 사랑의 이유도 역시나 광폭이십니다~^^ 저 역시 오만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ㅋㅋㅋ

웽스북스 2011-07-1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마지막말이 마음에 남아 저도 사야쓰겄습니다.

굿바이 2011-07-14 09:44   좋아요 0 | URL
커피만 안쏟았어도 줄 수 있는데, 너무 심하게 부어가지고 ㅋㅋㅋ

cyrus 2011-07-1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셀의 에세이는 언제나 읽어도 새로우면서도 재미있어요, 저는 이 책
시험기간 때 읽으려고 했었는데 결국에는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어요,
굿바이님의 글을 읽고나니 다시 한 번 이 책 읽어봐야겠습니다. ^^

굿바이 2011-07-15 09:56   좋아요 0 | URL
고된 시험기간 지났으니 뭐든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해보세요^^
이책 재미있어요~

風流男兒 2011-07-1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말들로도 아침이 풍성해지는 기분인데요. ㅎㅎ 누나도 책에 커피 잘 엎으시는군요 ㅠ 저는 어제 프린트 하나에 거의 쏟아부었다는.. 세례수준의 ;;

굿바이 2011-07-15 09:5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새신랑이 너무 손을 떨어도 오해받는다오~
요즘 부쩍 뭘 많이 흘리네. 아무래도 관심받고 싶나봐. 이런 식으로 애정을 구걸하는 걸 보면 나는 쫌 멋져!!!!!!ㅎㅎㅎ ㅡㅜ

風流男兒 2011-07-15 15:06   좋아요 0 | URL
어 그러게요. 사실 근데 그렇게 안흘려도 충분히 관심받으시는 분께서 그러기까지 하면. 음.. 좀 멋진데요 ㅎㅎㅎ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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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의 장편소설 <환영>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시 시작하는 윤영의 이야기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경계 표지판이 심하게 흔들렸다. 시에서 도로 들어섰을 때, 안녕히 잘 가시라는 말 때문에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금세 물가가 나왔다. 곧 얼음이 얼 것이었다. 왕백숙집으로 출근하던 첫날 아침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걸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돈은 더 벌 수 있다는 왕사장의 말이 어쩐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던 날, 어떤 이들에게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상에 윤영도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만난 남자와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으니까, 상 앞에 책을 펼쳐든 남편이 있고, 그리고 딸을 낳았으니까. 그렇게 희망할 것들이 생긴 현실은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게 붙어있는 목숨을 기어이 살아내라고 붇돋는다. 결국에는 그 희망들이 자신을 잘근잘근 씹어놓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예감을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애써 외면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희망할 것이 생겨 희망적인 윤영에게 현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추파를 보낸다. 눈 한번 딱 감으면 별거 아니라고. 세상은 진작부터 그랬다고. 그렇게 한번 눈을 감고 경계를 넘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싸갈 수 있고, 딸 아이에게 뭔가 해 줄 수 있고,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 붙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윤영은 눈을 감고 경계를 넘는다. 두렵지만 멈출 수는 없다. 그렇게 윤영의 몸에 닭비린내가 달라붙고 허벅지에 검은 멍이 들기 시작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혹은 어제보다 못한 오늘을 살아낼 뿐이다.  

이제 남편이 아이를 키우고 밥상을 차린다. 돈만 받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윤영이 남편에게 생활비를 준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차린 밥상을 윤영이 엎는다. 그리고 남편에게 개새끼라고 욕한다. 개새끼인 남편은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미안하다는 말은 계속 참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미 현실에 목덜미를 물렸으니 질질 끌려가보자는 말처럼 들린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보자고 말이다. 윤영은 그런 남편의 책을 찢는다. 자신이 잠시나마 갖었던 희망에 대한 소소한 분노다. 그러나 분노도 잠시다.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이 반복되는 윤영과 윤영의 가족은 곰팡이 낀 지하로 흘러 들어간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고 아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시 닭비린내를 맡아야 한다. 다시 아무 사내와 뒹굴어야 한다. 그렇게 윤영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  

윤영이 동생 민영의 죽음을 전해듣는 장면은 이렇게 쓰여졌다.   

"동네 놀이터에서 쓰레기를 태우는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너무 매워 그제야 눈물이 났다. 밤하늘에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윤영의 눈에 별 같은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쓰고 있는 작가가 내심 고마웠다. 던접스럽고 막막한 삶에 어쭙잖은 느낌표를 붙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작가. 지독하지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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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7-0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 삶이 이리도 묵직하고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암담할까요?
사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윤영에게는 욕으로 돌아올 말일 것 같습니다.
장미빛 미래를 꿈꾸기에는..삶은,, 현실은,, 우리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악몽의 연속인데....어쩌면 다 환영일지도...
현실보다 더 현실일 것 같은 소설처럼 느껴집니다.

굿바이 2011-07-08 16:36   좋아요 0 | URL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소설보다 더 징그러운 상황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면하고 또 모르는 척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구요.
읽기 편한 책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발 밑 간지러운 세상을 확인합니다.
다 읽고 꽤 한참 멍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웽스북스 2011-07-07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좋아해! 꺄아~

굿바이 2011-07-08 16:36   좋아요 0 | URL
꺄아~ 그러니까 제가 웬디님이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째집니다~!

2011-07-1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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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대설주의보>를 읽는 봄이다. 몇일 전 아프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서점에 들렀다. 여느 때와 다르게 윤대녕의 소설이 꽂혀있는 언저리에서 소변이 마려운 것 처럼 초조해졌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책을 집었다. 어떤 이유로 저자의 서명이 들어간 책이 서가에 꽂혀있는지 모르겠지만. 2010, 봄, 윤대녕, 붉은 인영印影이 책장, 거기에 있었다. 툭툭 털면 철 지난 봄이 소리없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지나칠 수 없었다. 만나야 할 것들은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오래 막막해야 한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결이 다른 공기를 알아차리고 그 어쩔 수 없음에 불안하고 주춤했던가. 대답할 수 없는 나는 얼마의 돈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대설주의보>를 읽는다.

일곱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녀가 수연으로 불리건 수경으로 불리건, 그가 윤수로 불리건 연수로 불리건, 어떤 추억을 지니고 있건 상관없이 동일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상황도 다르고 인물도 다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뭐랄까 결핍이라면 결핍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고, 절름발이라면 절름발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고, 죄의식이라면 또 죄의식이라고 불릴 수 있을 그것들이 모두 다 한 곳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빠르지 않게 가끔 쉬어가면서 한 곳으로. 그 흐름에 올라타 말문이 막히게 하는 것들을 우연이라 해야 하는지, 흉터가 흉터를 알아보는 순간이라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찰나이지만 말문이 막혔던 순간들을 인정하고 속임수일지도 모르는 무엇을 믿어보기는 했을까.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네 번째 단편으로 실린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의 한 대목을 그저 옮겨 적는다. 이어 카페에 딸려 있는 다락방에서 그녀와 나는 도둑질하듯 사랑을 나눴다.(p.133)  

책의 처음을 여는 단편<보리>의 주인공 수경은 어리석기 때문이에요, 가난하기 때문이에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무섭기 때문에(p.25) 가끔이라도 매달려 울 수 있는 태산 같은 남자가 필요해요(p.25) 라고 말한다. 가끔이라도. 그래, 다른 건 모르겠는데, 가끔이라도,라는 말, 그말은 절박하다는 말을 에돌아가기도 한다. 성미정시인은 가끔 불어온다는 모자를 벗기는 바람,이라는 것이 있다고 그녀의 시에 썼는데, 그 바람은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모자를 벗고 싶은 날에 꼭 불어와야만 했던 바람이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럼에도 살다보니 덤으로 알아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매달려 운다고 무엇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가끔이 공활한 날들을 내처 걸어가게 할 수는 있다. 모두 다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서로에게 가끔이라도 매달려 울 수 있는 태산이 되어 주었던가. 대답할 수 없는 나는 <보리>의 한 대목을 그저 옮겨 적는다. 그게 누구든 과일과 칼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 (p.18)      

어떤 기억들은 아득할 때가 있다. 그리 오래 된 기억도 아닌데 말이다. 바람을 맞아, 비에 젖어, 눈에 쌓여 그렇게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둘러 희미해지는 것들을 부러 붙들 필요는 없다.       그런데 정녕 우리가 언제, 우리가 정말 하염없이 눈 내리던 그 밤들에 서로가 서로에게 기쁘고 아프게 상춘곡을 불러주기는 했었던가.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저 이 모든 헛생각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쓰고 있는 까닭은, 봄밤이고, 윤대녕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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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광의 1빠 추천.
저도 갑자기 소변 마려운 것처럼 초조해졌잖아요! 이 지름신 굿바이 님 같으니라고. ^-^

굿바이 2011-04-01 16:03   좋아요 0 | URL
감사의 1빠 댓글.
읽어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추천씩이나요~! 그것도 1빠로!
물론, 제 글에 1빠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늘 누구나 1빠를 할 수 있는 글이에요ㅜㅜ 그렇지만, 치니님의 경쾌한 외침! 그것은 말이죠, 제게 매우 다른 의미에요. 그러니까, 뭐랄까, 그러니까, 각별한 애정! 뭐 그런! ㅋㅋㅋ :)

2011-04-04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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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도 나름의 '궁합' 혹은 만나야 할 '때'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다수의 독자에게 지지를 받지만 내게는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책들도 있었고, 나는 좋았는데 주위의 반응이 썰렁했던 경험도 있었다. 또한 그 책을 읽은 시기에 따라 이해나 감동이 달랐던 적도 있었다. 특히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 종종 그랬던 것 같다. 아마, 작가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다는 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이 주는 문제도 있을 것이고. 여튼 도스또예프스키가 그런 작가였던 것 같다. 그의 위상을 어느 대목에서 느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는, 어느 대목에서 박수 쳐야 하는 지 잘 모르겠는, 계속 어리둥절하게 만들거나 혹은 불편하게 만드는 작가. 그런 작가의 평전을 읽는 일은 그의 소설을 읽는 일보다 좀 더 힘들었다. 물론 어느 부분은 그에게 씌운 선입견을 걷어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혹자는 작가 도스또예프스키와 인간 도스또예프스끼를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 문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저히 고민하고 대답해야 할 대목이겠지만,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사회적으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경우 그 둘을 분리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물론, 나의 이런 잣대는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친일의 흔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내가 좋으니까, 그런 것들을 슬쩍 무시하고 '작품'을 좋아하는 건데 뭐 어떠냐는 식으로 자기 변명을 하기도 했다. 화가의 경우는 더 많고. 그런데 유독 도스또예프스키에게 왜 이런 촘촘한 자를 들이댔었는가. 그것은 작품에서 작가와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혹은 그의 좀 덜 떨어진 행동들을 부러 끄집어내서 내 비판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못났다.

여튼 E.H.카의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중 19장 '시사평론가로서의 도스또예프스키' 는 그의 정치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어 특별한 부분이었다. 그의 <작가 일기>를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러시아 문학을 부분적으로 소개한 박노자의 글이나 다른 평론가들의 인용구를 통해 짐작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 부분에서 좀 더 보충할 수 있어서 유용했다. 1877년 4월 <작가 일기>에 도스또예프스키가 쓴 글의 일부 구절들을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 우리는 터키인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우리의 형제 슬라브족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무력한 부패와 정신적 질식 속으로 몰아는 공기를 말갛게 씻을 것이다.
사회가 불건전하고 병들었다면 지속적인 평화라는 훌륭한 것도 사회에 혜택이긴커녕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유럽의 역사에서 한 세대라도 전쟁을 겪지 않고 지나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전쟁은 분명히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며 건강을 주는 것이고 인간성을 키워주는 것이다. (p.326)

정보를 장악하는 사람이 권력도 장악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러시아 문학을 특히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을 소개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작가 일기>와 같은 저널의 소개는 왜 슬쩍 뒤로 미루어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밥벌이는 늘 고달프기 때문에,라고 이해하자니 입이 쓰다. 여튼 카의 말대로 러시아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작가의 이런 정치적 성향은 고스란히 그의 종교적인 성향과 같은 스탠스를 유지할 것이다. 여기서 그의 종교관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모든 소설에 종교적 수난과 회심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튼 주전론을 말할 수 있는 작가라면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정통주의에 가까웠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유독 수난과 회심을 강조하는 그 마음도 좀 알겠고.

다시 책으로 돌아와 E.H.카의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은 일방적인 상찬도 아니고, 일방적인 비아냥도 찾기 힘든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책이다. 또한 책의 구성 중 3,4부가 인상적이었는데, 많은 부분 작가의 작품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사고의 틀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가를 갑자기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곡해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죄와 벌>의 경우 나는 도통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논리적이고 치밀한 주인공이 범죄 행위를 저지른 후 갑자기 벼락맞듯이 회심하는 과정은, 아주 버릇없고 거칠게 표현하면 작가의 정신세계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카는 이렇게 적고 있다.

라스꼴리니프로부터, 그를 둘러싼 후광과 그의 무모성과 그의 일관성 없음과, 그의 애타적 충동을 떼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 개인주의적 자기만족을 궁극의 선으로 설교하는 완벽한 쾌락주의가 드러난다. (P.236)

인간에게 일관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냐고, 늘 주절거리면서도 막상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 앞에서 신경질을 내는 꼴이니, 나야 말로 내가 주장하는 일관성 없는 인간을 대표하는 격이다. 본인이 믿는 것을 실천까지 하는 놀라운 재주다.
그럼에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분명 놀라운 구석이 있다. 아마 그를 위대한 작가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이 지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비슷한 맥락의 글을 이문열에게서도 읽은 적이 있다.(물론 이문열씨가 도스또예프스키를 높이 평가하는 맥락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예언자적인 그의 통찰은 당연히 신의 존재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현대 세계는 도스또예프스키의 전제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한다. 그의 종교에 따르면 그는 구질서에 속해 있고, 그의 심리학을 따르자면 그는 새로운 질서에 속해 있다.....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불모성.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역사적 책임은 남는다. 도스또예프스키는 대중을 벼랑 끄트머리로 안내하고는 그들이 가파른 파탄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쯤 썩은 낡은 재목으로 엉성한 울타리를 친 사람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p.383)

카는 작가의 신학이 낡은 것이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고 썼는데, 이 알쏭달쏭한 말에서 오히려 나는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을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하는지 감을 잡은 셈이다. 작가와 그의 작품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 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다시 한 번 그의 작품을 읽어 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꽂이에서 맥없이 잠자고 있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다시 쳐다보며 '죄와 고통'에 관한 그의 '신학'을 잘근잘근 음미하는 한 주가 될 것이다. 이 또한 내게는 찬란한 수난이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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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그늘 2011-03-2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외수씨 책을 읽던 오래전.. 유독.. '들개' 라는 책만은 늘 기억에서 좋았었다.. 란 말을 못하였었듯.. 그런가 봐요..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을 읽던 날들엔.. '죄와 벌' 만큼은 이상하게.. 괜찮았었다란 말이.. 잘 나오질 않더라구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악령' 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나오잖아요..
복음서에 보면 돼지뗴들 속으로 들어간 군대귀신에 의해서 바다로 치달려가듯 몰사하는 내용을 사상에 비유했었던 그런내용이었는데..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 신념 또한 정말.. 무서울 수도 있겠다 싶었죠..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여인이 사지를 부러뜨렸네
그래서 두배나 더 관심을 끌게 되었네,
그래서 두배나 더 홀딱 반하게 생겼네,
이미 홀딱 빠져버린 사나이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악령에서의 문장중 그 나날들에.. 참 많이 읋었었던 글귀가
요즘에는 그렇게 와닿지 않네요.. 아마.. 그 시절이 푸릇푸릇 했을 때였나 봐요^^



굿바이 2011-03-29 10:44   좋아요 0 | URL
저도요, 이외수의 초기작은 참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나온 작품들까지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요 ㅜㅜ

<악령>도 그렇고 <죄와 벌>도 그렇고 저는 과정도 결말도 영 시원하지가 않았어요. 흰그늘길님이 <죄와 벌>을 읽으며 받은 느낌과 제가 받은 느낌이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뭐든 극단적인 것들은 좀 무섭습니다 :)

cyrus 2011-03-27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평전 덕분에 곧 읽어야 할 <죄와 벌><백치><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독서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이 유명한 세 작품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평전을 읽는데 힘드릭도 했지만요,, ^^;;

굿바이 2011-03-29 10:39   좋아요 0 | URL
만반의 준비가 잘 되셨겠네요. 모쪼록 즐거운 독서 되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어제 병원에서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잤습니다.:)
 
어쩌면 다음 생에 - 개정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선집 3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작가의 고충을 몰라서라기 보다, 실은 모르지만, 여튼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작가는 그저 볕이 잘 드는 공원, 오래된 의자에 무심하게 앉아 술술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이 농축된 그러나 일관적이지 않은 어떤 감정들이 이미 존재하고, 그런 감정 덩어리를 만든 부조리한 사건들을 이미 경험했을 것이고, 그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나약함에 상응하는 괴물을 만났을 것이다. 그다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쓰고, 스스로 혹은 타인을 통해 절망하고, 그럼에도 잠시 의기양양해져서 거듭 쓰기를 반복하지 않았을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책을 읽으며 나는 잠시 그런 공상에 젖었다. 물론 맥락은 없지만 그런 공상에는 작가의 작품을 영화로 한 <태양은 가득히_Plein Soleil,1960>가 있었고, 거의 동시에 알랭드롱의 눈빛과 푸른 지중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으로 돌아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어쩌면 다음생에_Not in this Life, Maybe the Next>는 열한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들을 읽다보면 그녀의 작품에는 사르트르나 까뮈 또는 포크너의 그림자들이 아지랭이처럼 어른거린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선함에 대한, 합리성에 대한 조롱들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독자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부조리한 그리고 앞으로도 쭉- 부조리할 가능성이 농후한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일일까. 어이없고 분노하지만 견디고, 미화하고, 이해시키고, 희망하는 일로 일관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아니면 조롱하고, 대들고, 버티고, 때로는 펀치를 날리는 것이 최소한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받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니다. 선택을 하라면 후자로 하겠다. 물론 내 경우에는 말이다.   

열한 편의 단편 중<단추>,<우연한 특종>,<애완동물 공동묘지>,<어쩌면 다음생에>,<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단추>라는 작품은 행복했던 부부에게 다운증후군인 아들이 태어나고, 그 후 아내는 온전히 아들에게 헌신적인 삶을 살지만 남편은 자신의 불합리한 운명에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 밤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과 신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한 사내를 살해하고, 사내의 옷을 여미던 단추 하나를 전리품처럼 뜯어온다. 이후 주인공은 아들을 힐끔거리고 수근대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 그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불편한 현실을 견딘다. 이러한 주인공의 어처구니없는 행동, 살인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현실이라면 마땅히 댓가를 치뤄야 할 행동이다. 그렇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분노와 절망에 대해서라면 나는 오히려 부인의 행동보다 남편의 행동이 훨씬 쉽게 이해되었다.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죽은 애완동물을 박제로 만들어 정원에 두는 아내, 그 으스스한 취향을 강요당하던 남편이 어느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취향이었던 사랑했던 옛 애인의 모습을 한 마네킹을 정원에 들여놓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행동으로 부부는 파국을 맞지만 취향을 강제하는 아내에게 고스란히 자신의 취향을 돌려주는 발랄한(?) 복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얄밉지만 정당한 비아냥이 잘 들어난다.     <나는 남들만큼 유능하지 못해>는 현대인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강박적인 집착을 매우 건조하게 그러나 재치있게 풀어낸 단편이었다. 읽는 내내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머쓱하고 서글펐다. 끊임없이 비교당하거나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그렇기에 덤으로 우울하고 불행해지는 삶을 한 남자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잘 조명하고 있다. 시작은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이웃남자의 행동들을 관찰한 주인공이 자신은 창틀의 페인트칠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참으로 서늘하다. 

책은 시작과 끝을 고민한 흔적이 없다. 그것은 작가가 정녕 고민없이 꾸역꾸역 밀어넣었던 무엇인가를 배설함으로써 혼자만의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모습들을 가감없이 드러냄으로써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굉장한 용기이자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교훈이나 감동을 의도하지 않는 자세, 인위적으로 지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해피앤드를 끌어내지 않는 진중함, 이것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요 통감이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시작과 끝을 고민한 흔적이 없는 작가의 글이 더 아프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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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3-1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나겠습니다. 읽어야짐.

굿바이 2011-03-17 11:04   좋아요 0 | URL
치니님,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저도 어느 부분은 매우 합리적이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그닥....
여튼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