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두 가지 시기가 있다.

재앙을 기다리는 것이 첫 시기이고,

재앙이 닥치는 것이 두 번째 시기이다.

 

- 장 루이 푸르니에,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중

 

얼마 전 속없는 아가씨가 내게 물었다. 어떤 남자를 좋아하세요?

내 대답은 짧았다. 더는 어떤 남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면 쇠고랑 찹니다.

아가씨 다시 묻는다. 그게 아니고 취향말이에요.

내 대답은 이렇다. 온 몸 곳곳이 쑤신다고 투덜대지 않는 남자요.

아가씨 또 묻는다. 에이, 그런 말이 아니구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냐구요?

나는 대답한다. 재앙을 몰고 다니지 않는 스타일이요.

 

어떤 스타일을 좋아했더라....재앙을 몰고 다니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대답했으나 오히려 그건 내게 해당하는 이야기고, 유머를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쓰자니 어딘가 좀 부족하지만 뭐 그랬던 것 같다. 유머. 섬세한 유머.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는 유머. 그거 참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튼 그래서 급하게 말머리를 돌리면 장 루이 푸르니에,도 특유의 유머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다. 유머도 등급이 있다면 감히 트리플 에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것도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의 책을 다시 꺼냈다.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그는 머리를 까마귀처럼 새까맣게 물들였다.

그는 살갗을 태웠다.

그는 구멍난 청바지를 입었다.

그는 분홍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는다.

그는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는다.

그는 형광색 농구화를 신는다.

그는 킥보드를 타고 돌아다닌다.

그는 "와우!"라고 말한다.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늙은이는 더 늙어 보인다.

 

- 장 루이 푸르니에,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중

 

늙어가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은 잘못된 습관 하나를 바로잡는 일보다 힘겹다. 이십대 언저리에 입었던 원피스를 보며 살을 좀 빼면 입을 수 있을거라 자위하는 걸 보면 나는 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몇 일 전 유일하게 예뻐하는 초등학생인 우리 귀연양이 집에 놀러와 내 청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며 나는 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청바지도 귀연이도 전생의 연인을 만난 것 처럼, 원더우먼의 찰싹 붙은 빤스처럼 그렇게 딱 이었다.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다 가져가라,고 할 수 밖에. 물론 다 가져가라 내 기억까지도,이렇게 말할 뻔 했지만 그건 참았다. 이모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고 싶었다고 할까나. 여튼

 

이런 말을 상기시켜 미안하지만 당신은 생분해성이다........생분해성이란 이런 말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인해 파괴되는 성향을 가진 것." 

 

- 장 루이 푸르니에,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중

 

당신은 생분해성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구나 싶다. 지금 정도의 분해 속도라면 뭐 그리 나쁠 것도 없겠다 싶다. 물론 이렇게 꾸준히 성실히 분해되다 보면 가속이 붙는 날도 있겠지. 그러다 마지막 숨이 나를 먼지로 이끌어 줄 날도 오겠지.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슬플 일도 아니고. 그저 처음 겪는 일이라 어색할 뿐이겠지.

여튼 빈틈없는 생분해를 통해 눈은 더 침침해질 것이고, 멀리 있는 것도 가까이 있는 것도 흐릿해 보일 것이고, 치아도 빠지고, 염색을 하지 않는 한 검은 머리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고, 볼은 패이고 검버섯도 생기고, 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공자의 말처럼 마음 꼴리는 대로 행동해도 무리를 일으키지 않는 그런 상황에 이르지 않을까. 가당하기나 할 소리냐,고 비웃을 사람이 지천이지만 그러시던가. 그 정도 희망도 없다면 아렌트 언니가 말한 필멸의 삶,을 또 어찌 견디겠는가 말이다.

 

나는 단순함을 좋아하는 법을 배웠다. 젊었을 때는 삶에서 특별한 일을 기대했다. 매일 아침 나는 지평선을 살폈다. 타타르 족이 오기를 기다렸다. 가슴 졸이며 우체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내 삶을 바꿔 놓을 편지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나는 나를 평범한 일상에서 빼내 줄 전화이길 상상했다.

나는 예전보다 한층 분별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에피쿠르스의 충고처럼 나는 평범한 일상을 음미하는 법을 알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성보다는 시골집에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자연과 새소리와 꽃향기를 즐길 줄 알게 되었다. 해가 지고, 매일 아침 다시 뜨는 걸 보고 감탄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타르 족은 사막에 남겨 두게 되었다. 

 

- 장 루이 푸르니에,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중

 

그래서 말인데, 평범한 일상을 즐길 것. 현재를 살 것. 달콤해 질 것. 우아해 질 것. 유머있고 재치있을 것.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알 것. 그 음식들을 기꺼이 나누어 먹을 것.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순간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할 것....... 겁내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그래서 꼴리는 대로 살아도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다가 먼지로 돌아 갈 것. 그럼에도

 

삶이 있는 한

절망이 있다.

 

- 장 루이 푸르니에,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중

는 사실 역시 받아들일 것.

그것이 아직 많이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하나에 거는 희망이자 기도다.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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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3-06-2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나 이거 읽을래! 환호하며 검색하니 "품절"이네요. 그러나 중고서적은 있고, 흐음.
굿바이 님의 이런 글, 참 좋아요. :)

굿바이 2013-06-21 11:24   좋아요 0 | URL
품절된 책이 너무 많아요ㅜㅜ

그나저나 치니님, 제주의 여름은 어떤가요? 눈부시죠?
서울은 그저 그렇습니다. 찝찝하니~

아참, 저는 치니님 글이 더 좋아요^_________^

웽스북스 2013-06-24 19:38   좋아요 0 | URL
어 이 중고책 굿바이님 글 보자마자 제가 샀는데...ㅋㅋㅋㅋ

굿바이언니, 저 언니 글 보고 이 책 중고로 산 게 어제 왔는데, 저자의 사인이 되어 있는 사진이 함께 왔어요. 저자의 사인이 과연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무척 신기해서 얘기하러 왔더니 치니님이 고민하고 계셨넹 ㅋㅋㅋㅋㅋㅋㅋ

(메롱메롱 치니님 제가 샀어요~)

라로 2013-06-2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두~~~~~

굿바이 2013-06-21 11: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아님!!!!

책이 품절되서 안타깝네요.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동우 2013-07-0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서 말인데, 평범한 일상을 즐길 것. 현재를 살 것. 달콤해 질 것. 우아해 질 것. 유머있고 재치있을 것.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알 것. 그 음식들을 기꺼이 나누어 먹을 것.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순간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할 것. 겁내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그래서 꼴리는 대로 살아도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다가 먼지로 돌아 갈 것.>

굿바이님의 젊음은 바야흐로 숙성 숙성입니다.


<삶이 있는 한 절망이 있다.>
는 사실은 좀 늦게 받아들여도 좋아요. 굿바이님은.

모처럼 들러 인사 눕히고 갑니다.

굿바이 2013-08-05 10:28   좋아요 0 | URL
8월,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은 덥기도 하고 비도 많고 여름입니다.

곱게 늙어가는 게 소원이 되가는 시절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무렇게나 살고 있습니다. 가끔 서럽고 가끔 억울하고 여전히 그렇습니다.

언제 한 번 정말 우연하게 찾아뵙겠습니다.
늘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