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 오르면 나는 정과리선생의 책을 아니 더 적확히 정과리선생의 문장을 읽는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 더 나아가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언어에 매달려 있는 그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어찌되었건 선명함에 있어서 정과리의 언어와 규칙을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본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1월의 시작, 어느 지점에 오면 정과리의 책을 꺼낸다. 선명해 지고 싶은 순간이니까. 여튼 오늘 내 책상에 있는 책은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처음>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읽히지가 않는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어떤 문장도 단어도 심지어 인용된 어느 시구도 와닿지가 않는다. 더는 내게 스며들지 않는 활자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1월인데 나는 벌써 지친걸까.
이번에는 책꽂이를 본다. 사두고 읽지 않은 책.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_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시>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 기대 없이 읽는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김연수의 말이다. 이상하다. 한 번도 위로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 나는 저 문장에서 바들거린다. 무용해질 수 있다,는 말이 이렇게 큰 원을 그리며 내게 스며든 적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정과리의 책을 한 켠에 밀어 놓고 김연수의 시간으로 편입한다.
그때에도
신해욱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신해욱의 시가 동공을 키운다. 그때에도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라고 말하는 시인은 어떤 상징이나 은유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 마음에 스미는 것이리라. 보고 싶다는 것은 더군다나 당연한 것들을 보고 싶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당연한 마음을 '아, 오늘 밤에도 별이 뜨는구나'와 같은 어조로 말할 수 있는 시인이 고맙고 부러웠다.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말하는 것. 이것 참 낯설어진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놀라워하는 것이겠지. 무슨 창피가 그리 많아 당연한 것들이 왜 당연한지 묻기만 했던 것일까. 그냥 한 번 넘어갈 수도 있었던 것인데 말이다.
이제 다시 돌아와 정과리의 책을 편다. 56쪽 이다.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정현종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든지 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정현종의 시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의 일부분이 그곳에 있었다. 정과리는 이 시를 옮기며 "시가 딴죽 거는 자리에선, 나도 이젠 세상살이를 알 만큼은 안다고 자부하던 마음이 대책 없이 무너져내린다."라고 썼다. 더 나아가 "나는 내가 방금 쏟았던 탄식, 내 깨달음의 헛됨에 대한 탄식 자체가 지나친 과장이고 또 하나의 앎의 포즈임을 깨닫는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라고 의심하고 이어서 내 짐작을 확인한다. 물론 내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다. 선생은 선명한 문장을 쓰고 있지만 내가 습관처럼 오독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여튼 정과리는 정현종의 잠언에 가까운 시를 분석하며 "길의 눈부신 길 없음"이라고 글을 맺었다. 물론 이 문장 역시 정현종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길의 눈부신 길 없음,이라는 말이 또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나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다시 신해욱의 시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과리선생의 글보다 오늘은 이 시가 그리고 이 시를 소개하는 김연수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정과리선생이 이 시를 읽었다면 그리고 내 오독이 오독이 아니었다면 그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한 것들로 붐비는 시는 슬픔이니"라고-
그리고 오늘 내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위로는
"당연한 것들을 모르고 사는 삶은 슬픔이니"가 되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