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일이다. 오늘 나는 올 해 들어 처음으로 무릎이 보이는 치마를 입었으니 말이다.
이런 날은 무조건 맥주를 마셔야 하고 시원시원하게 웃어야 하는데 나는 이미 그 빌미를 찾았다.
수주 변영로선생의 <명정 40년>을 책상 서랍에서 꺼냈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선생의 명정기를 읽고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모지리들이나 하는 선택이다. 따라서 오늘 저녁 나의 선택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고 은혜다.
우선 선생의 연보를 보면 1919년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했다는 이력과 1955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는 이력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어느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이력도 있다. 짐작하건데 시대가 시대였으니 온전한 지식인으로 사는 일이 힘겨웠으리라. 그런데 멀쩡한 정신으로도 휘청거리고 전쟁처럼 먹고 사는 일을 처리했을 시절에 흥겹게 마시는 술이야기라니.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뒤뜰도 없는 삶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온통 도덕적 순결함으로 무장한 지식인, 물론 무언가 할 수는 있을지언정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할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어떤 방식으로든 곁을 내주지 못하는 사람은 매력없다.
여하간 선생의 책 <명정 40년>은 남자가 쓴, 그것도 장난기(?)와 재치와 넉살과 따뜻함이 콸콸 넘치는 남자가 쓴 책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다가다 돌 맞을 소리이지만 이런 남자는 왠지 처음 만난 자리일지라도 '우리 입이나 한 번 맞춰봅시다'라고 생글거려도 어디 한 구석 밉지 않을 것 같다. 아, 이럴 때 보면 나는 마초를 좋아하는구나. 빌어먹을 일이로구나.
어찌되었건 쓰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명정 40년>에는 큰 웃음이 있다. 이 시원하고 큰 웃음은 한여름 소나기처럼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여차하면 쏟아진다. 독자는 그저 놀라고 그저 깔깔거리며 소나기를 맞으면 될 터. 이 즐거운 독서를 어찌 마다하겠는가. 또한 이 유쾌하고 발랄한 독서 뒤에 놓여있을 술병을 또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명정 40년>에는 그간 듣기 어려웠거나 어르신들의 수필에서나 가끔 엿볼 수 있었던 1950년대 이전 풍류남들의 이야기가 넘친다. 멸종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확연히 그 수가 준 풍류남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묘한 아쉬움이 차오른다. 아무렴, 저 시절에 태어났으면. 물론 남자로 말이다.
말이 길었다. 억울한 마음은 이 책을 술술술 마시고 술술술 이야기하며 초여름의 목요일 밤을 붙들면 되는 일. 벌써 시간은 4시 30분을 넘었고.
그나저나 에피소드 중 그림같은 장면이 있어 하나 옮겨 적는다.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 하룻날 바커스의 후예들인지 유령(劉伶)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酒道)의 명인들인 공초(空超,吳相淳), 성재(誠齋, 李寬求), 횡보(橫步, 廉尙燮), 3주선(酒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이란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이었다........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어 서방은 술 심부름, 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 술은 소주였는데 우선 한 말을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 것 없이 남비에 고기를 끓이었다.
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쾌음(快飮), 호음(豪飮)하였다. 객담(客談), 고담(古談), 농담(弄談), 치담(痴談), 문학담(文學談)을 순서 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자커니 마셨다.
이야기는 길고 술도 길었다. 이러한 복스러운 시간, 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고금무류의 대기록을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천의(天意)랄까,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던 하늘에 난데없이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온 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를 시작하였다.......처음에는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의도 하였지만 인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 있게 나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부를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그 끝에 공초 선지식(善知識) 참으로 공초식 발언을 하였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바, 다름 아니라 우리는 모조리 옷을 찢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워낙이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이간지물(離間之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51~54쪽)
다음이 궁금하시면 <명정 40년>을 읽어보시라. 소설 <소나기>와는 또 다른 그림이 펼쳐질 터.
어찌되었건 나는 오늘 저녁 목울대를 울리는 좋은 맥주하러 간다. 좋은 사람 황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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