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암곡동에 있는 무장사지는『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태종무열왕이 병기(兵器)와 투구(鬪具)를 감춘 곳이라고 한다. 보문 단지 물레방앗길 왼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20분정도 올라가니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온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큼 좁은 길이어서 길 옆 빈밭에 차를 세우고 걸어올라갔다. 가을 답사지로 이만한 곳이 없다고 10월 첫주부터 이곳에 가자고 예약했던 지인이 징검다리 놓인 냇가를 13개 건너야 무장사지 삼층석탑을 볼 수 있는 곳에 다다른다고 했다.

산길을 가면서 보니 붉은 계열의 단풍은 띄엄띄엄 보이고 주로 갈색이나 노란색 단풍이 든 나무들이 많다.올해 일교차가 심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맑은 날이 많지 않아 그랬는지 단풍이 야단스럽지 않고 수수하게 들었다.

걷다보니 조정권 시인의 시 ‘같이 살고 싶은 길’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길이다 ‘예쁜 길 눈에 넣고 싶은 길...’.
같이 살고 싶은 길
조정권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들다가 지워버린 길.
더디 더디 물감 들지만 찬비 떨어져
때 놓치면 조금 서운한
예쁜 길 눈에 넣고 싶은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가령 늦가을 淸平쯤에서 加平으로 차 몰고 가다
풀들 스치며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오른편으로 굽어 숨는 길.
목적지 없는 마음만이 궁금해서 한번 들어가 보는
그냥 무작정길.
한 오리쯤 가다보면
바람만 혼자
쓸고 있는 길.
저녁고요 속으로
내려와 흘러다니는 낙엽들.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일주일에서 한 열흘쯤만
단풍 들키는 길.
그런 길들과 이제는 같이 놀아주고 싶다 살아 주고 싶다
연애걸고 싶다 킬킬거리고 싶다
마누라 몰래 데려다가 새살림 채리고 싶다
무장사지 귀부와 이수.
무장사지에는 조각이 아름다운 귀부가 있다. 비신은 없고(비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단다. 소성왕의 부인인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을 조성해서 무상자지에 모신 내력이 적혀있다고 한다) 비석의 받치고 있던 두 마리의 거북 머리도 사라지고 없다. 용을 새긴 귀부의 머릿돌도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꼼꼼하게 살펴보면 볼거리가 많다. 거북 등 위 비신을 세우는 둘레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것도 독특하고 남아 있는 이수의 측면 무늬도(귀면 같기도 하고 용 얼굴 같기도 하다) 이채롭다. 그리고 두 마리의 거북이 엎드린 폼도 다르다. 왼쪽 거북 왼쪽 앞다리를 보니 힘들어서 주저앉은 모습이다. 이 거북 머리가 남아있다면 어떤 표정일까?

무장사지 삼층석탑.
일요일이라 탑 주변이 소란스럽다.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가기를 기다렸다가 탑 주변을 둘러봤다. 기단에 창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9세기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짐작된다는데. 옥개석 양 끝에 구멍이 두 개씩 뚫려 있다. 겨울에 오면 인적도 드물고 나뭇잎을 떨군 주변 나무들 조차 추위에 떨고 있어 안스럽다는데 가을에는 파란 하늘과 단풍 든 주변 나무들과 어우러져 탑이 빛난다.

오리온 목장.
무장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목장이 나온다. 이 곳은 억새밭이 참 예쁘다. 같이 간 일행이 여기가 OK 목장이라고 해서 ‘주인이 서부극에 나오는 목장이름을 따왔나 보군.’ 했는데 지나가시던 분이 그 말을 듣고 오리온 목장이란다.
경주는 참 매력적인 곳이다. 올 때마다 색다른 얼굴을 보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