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엘 갔다가 영숙 언니네서 하룻밤을 잤다. 이 언니는 답사 동호회에서 답사를 갔다가 만난 언니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내가 서울에 갈 때 자고 오기도 하고 느릿느릿 걸어서 종로 일대 유적지나 뒷골목을 함께 답사 해 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언니가 아침밥 먹고 명동 성당엘 가잔다. 뜨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명동 성당도 근대 문화재야. 이 언닐 위해 친구가 특별 미사 부탁 드려놨대.그래서 거길 갔다가 놀러 가야돼.” 그랬다. 언니는 내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가길 꺼려하는 줄 알았나 보다. 뜬금없이 명동 성당에 미사 드리러 가자고 해서 잠시 당황했을 뿐인데.



(명동성당-성모마리아상을 모셔 놓은 곳에서 찍은 모습.첨탑이 있는 부분은 공사중이라 공사 중인 곳이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 찍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종교가 필요해서 선택을 한다면 천주교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다 요즘들어 나와 친한 샘도 성당엘 다니길 권유했고, 물론 영숙 언니도 성당 다니는게 어떻겠니라고 해서 생각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영숙 언니 따라 그야말로 얼떨결에 성당을 가게 되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 갔다. 언니가 요즘 몸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걱정도 되고 했는데 잘 됐다.

  명동 성당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둔 지하 성당(고해소)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경건하고 좋다.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은 종교라 무엇보다 좋다. 미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보니 불교랑 닮은 점이 많다. 편안한 마음으로 천주님께 언니 건강 보살펴 달라고 빌었다.

(지하성당-토요 미사 드리는 곳.안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미사를 드릴 동안 유해를 안치한 입구 문을 열어두었다가 미사가 끝나니 닫았다)

  미사를 드리고 나와 언니가 내부에 들어가서 보고 살펴보고 오란다. 살금살금 내부로 들어서니 다행히 미사 드리는 시간이 아니다. 곧 결혼식이 있을 모양이다.휘 둘러보니  고딕 양식의 웅장한 아치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절만 보다가 명동 성당 내부를 보니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명동 성당을 나와 걸어서 종묘랑 창경궁을 둘러보고 걸어서 운현궁과 삼청동 특색있는 박물관들을 둘러 봤다.오늘 내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은 장신구 박물관과 티벳 박물관. 그런데 언니는  내 취향을 참 잘 안다. 내가 골목골목 걸어서 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서울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골목길을 지나 근대 문화재가 띄엄띄엄 늘어선 길을 걸어 아트선재센트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다.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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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관에서 점심을 먹고 숭양서원에 갔다



 이곳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집터로 선조 6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의논 끝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아울러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앞 쪽에 교육공간, 뒤쪽 언덕엔 제사 공간을 배치한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숭양서원 들어가는 입구에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던 돌(마상대,마하대)이 있다.



 오른쪽, 왼쪽 각 1개씩 2개가 있다. 삼면에 사자와 개를 조각해 놓았다. 앞 쪽에 교육하는 공간은 앞 뒤가 개방되어 있다. 뒤에 있는 제사 공간도 개방되어 있다. 위패를 모신 공간까지 다 개방해 놓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제사를 모시는 공간은 신성시 하는데 비해 북한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서의 의미보다 관광객들에게 정몽주 유적을 보여주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 왼쪽 방에는 정몽주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개성 시내를 가로 질러 선죽교와 표충비를 보러 갔다. 


  선죽교는 919년 축조된 건축물로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정몽주가 피살되기 이전에는 선지교라고 불렀다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저녁 참대가 솟아 올랐다고 했서 선죽교 (善竹橋)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원래 난간석은 없었으나 후손들이 다리를 보호 하기 위해 후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옆에 있는 다리 또한 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기 전에 이 곳에 정몽주의 피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다는 예기를 들었던 터라 일행에게 물어보니 밝그레한 부분을 가리킨다.



 선죽교 옆에는 한석봉이 쓴 선죽교 비가 있다.



 선죽교 맞은 편에 고종이 표충비를 만들면서 세웠다는 표충각이 있다.


(표충각)
이곳에는 영조와 고종이 정몽주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2개가 있다.



 왼쪽 비는 영조가, 오른쪽 비는 고종이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안내원 말로는 왼쪽은 숫 거북, 오른쪽은 암 거북인데 총각은 오른쪽 거북의 머리를, 처녀는 왼쪽 거북의 머리를 만지면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단다. 그 얘기를 듣고 다시 거북을 보니 고종이 세운 오른쪽 거북 등껍질 무늬가 왼쪽 거북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비문에 쓰인 글씨는 왕들의 친필이고 이 비를 세운 목적을 써 놓았다고 한다.

 

  개성 시내를 가로 질러 고려시대 성균관 건물 18채 중 4개를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는 고려 박물관에 갔다.


앞 마당에는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를 듯한 모습을 한 두 마리의 용이 있다. 한 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널찍한 공간에 건물들이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고 수백년된 나무들이 가지를 마음껏 펼치고 서 있다.



건물만 봐도 좋다.




(고려 박물관 입구)
성균관 바깥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탑 3기와 석등, 탑비등의 문화재가 있어 사람들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역순으로 답사를 했다. 

  먼저 개국사 석등.



개국사는 고려시대 세운 절로 조선시대 폐사된 사찰이란다. 통일신라시대 화려한 장식의 석등들과는 달리 장식이 간결하다. 하지만 웅장하고 호방한 느낌을 주는 이 탑은 용감하고 씩씩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이어받은 고려 사내 같다 . 받침단 윗 연꽃 조각과 화사석 아랫면의 연꽃 조각이 다르다. 화사석 윗면 조각은 연꽃이 활짝 피어있는 모습으로 그 사이사이 안에 있는 연꽃잎도 조각해 놓았다.간결한한 장식이 더 마음을 끄는 석등이다. 


  석등 왼쪽으로 난 길 위에 불일사 5층 탑이 있다.



불일사는 광종 2년 국왕의 어머니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판문군 보봉산 기슭에 건립한 사찰로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현재는 동서 150만, 남북 100칸의 옛절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절의 규모로 알수 있듯이 이 탑 또한 규모에 어울리게 높이가 약 7.44미터에 이른다. 각 전각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불일사 터에 서 있던 때를 생각하면 이 탑은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 같다. 지금은 고려 박물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섰지만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아 서게 될 것이다.그 나마 성균관에 뜰에 모셔 놓지 않고 바깥 낮은 언덕빼기에 모셔놓았으니 덜 답답해 보인다. 

  흥국사탑


  이 탑은 기단부는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탑신부가 없고 심하게 파괴된 옥개석 3개가 위에 얹혀 있다. 특이한 것은 기단 면석에 이 탑의 건립 연대와 동기, 세운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도심 속의 섬 선유도’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이 올린 자료를 보니 ‘글자 크기 직경 3cm의 해서체로 음각했으며, 석탑기의 적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瓚)이 나라의 태평과 집안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하며 건립 연대는 제8대 현종 12년(1021)이란다. 그래서 다른 석탑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기도 한단다. 

  흥국사탑 옆에 유수영 문루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 관청의 정문으로 1394년에 건립된 것을 1768년에 여러 건물들과 함께 고쳐 지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때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앞 네 개의 석주 중 가운데 두 석주에 "관리중진(管理重鎭)", "분사고도(分司故都)"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흥국사 문루 앞에는 헌화사 탑비와 헌화사 7층석탑이 있다.



헌화사는 고려시대 역대 왕실의 각종 법회가 열렸던 사찰이라고 한다. 그 곳에 있던 헌화사 탑비나 7층 석탑도 조각이 섬세하고 정성을 많이 들인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탑신에 부처님과 보살 조각을 새겨넣었다.

 



 현재 현화사 탑비와 7층석탑 둘 다 북한의 국보다.
 
  탑비는 귀부 탑신 이수가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탑신에는 헌화사 건립 내역을 알 수 있는  2,400여자의 글자가 앞 뒤로 새겨져 있다.



비신 좌.우측면에는 용트림하는 두 마리의 용이 아주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개성 관광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의 유물이나 유적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단편적이나마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협동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썬글라스를 낀 사람, 기타를 메고 가는 사람, 안 보는 듯 하면서 흘깃흘깃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던 초등학생.

  개성 시내와 봉동을 지나오면서 머릿속에 ‘통일비용’문제가 떠올랐다.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통일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통일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낡고 오래된 건물들을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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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5-1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용은 다른 말로 투자가 될 수 있죠. 내수시장에 엄청난 활기가 될 수 있답니다.
그나저나 사진만 봐도 좋네요. 부럽습니다.

다솜 2008-05-19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그런데 새로 지은 건물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와 주변 마을들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더군요.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사람이구나 했어요
 

 오전 일정을 마치고 13첩 반상기로 유명하다는 통일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는 11첩 반상기에 담은 개성 음식들을 먹었는데 숙주 나물, 묵,도라지 나물 무침, 김부각,오이무침,국물김치,오리알 1개, 소고기 장조림, 마늘 장아찌 등이 나왔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요리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심심하다는 불평들을 많이 하셨지만 나는 맛있었다. 우리는 2달러를 주고 냉면도 한 그릇 시켜 먹었는데 조미료 맛이 아닌 재료 맛이 그대로 우러나 역시 맛있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분들 중 금강산 관광을 갔을 때 옥류관에서 서빙 하던 아가씨들은 하나 같이 예쁘더만 이 곳에는 우째 이래 못생긴 애들만 데려다 놨냐고..우스개 소릴 했다.

우리가 식사했던 통일관 가까운 곳에 고려 공양왕 때 조성했다는 개성 남대문이 있었는데 나무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남대문이 잘 보이는 곳에서 내려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개성 시내가 찍힐 수도 있다고 북한 안내원들이 막았다. 개성을 다녀와서  겨울에 이곳을 다녀온 분들이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보니 남대문 루에 유명한 연복사 종이 보존되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간 분들은 남대문의 대략적인 형태만 눈에 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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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을 지나 황진이, 서화담과 얽힌 이야기가 많은 박연폭포엘 갔다 오전 관광 코스가 박연폭포,범사정,대흥산성 북문,관음사다. 

 

  박연은 폭포가 떨어지는 위가 바가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수량이 풍부하지 않아 사진으로 보는 이미지는 웅장한 느낌은 없다. 그러나 물 줄기는 가늘어도 폭포 앞에 섰을 때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일었다)


 옛날에 경치를 즐기며 전국을 유람하길 좋아하는 총각이 있었단다.이 총각이 박연 폭포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 경치에 취해 황홀해 하다가 피리를 불었는데 용궁의 선녀가 그 총각 피리 소리에 반해 총각을 용궁으로 데리고 갔단다. 그래서 둘이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총각의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그만 고모정에 떨어져 죽었단다.

 

북측 안내원의 설명을듣고 우리 일행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전에 서둘러 박연폭포엘 올라갔다. 하얀 꽃이 만개한 나무 사이로 깎아 지른 듯한 절벽에서 물이 곧장 떨어지고 있다. 폭포 수량이 풍부할 여름에 오면 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우뢰 소리 같겠다. 떨어지는 수량은 적지만 과연 명폭 답다.경치가 ‘수려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다.총각처럼 폭포물에 뛰어들 정도는 아니어도 폭포 앞에 섰을 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박연 폭포 왼쪽에는 용바위가 있다.

이 바위 위에 아름다운 글씨(초서체)를 휘갈기듯 새겨 놓았다.황진이가 머리채를 풀어 고소담 물을 묻혀 일필휘지에 써 내려 갔다는 시구다. '飛流直下 三千尺/疑是銀河 落九天'(물 줄기가 삼천자를 날 듯이 떨어지니 마치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 하다).



그리고 오른 쪽에는 1700년에 지었다는 범사정이 있다. 범사정을 지은 자리에서 박연 폭포를 보면 마치 안개바다 위에 떠가는 떼와 같아서 지은 이름이란다.
박연폭포 옆에 범사정이 있어 한결 풍성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박연폭포 용바위에서 바라본 범사정)
박연폭포를 보고 관음사 오르는 길은 범사정을 거쳐 간다. 범사정에 앉아 잠시 박연폭포를 바라 보았다. 정자에 앉아 보는 박연폭포는 앞에서 보던 모습과 다른 멋이 느껴진다,


(범사정에서 바라본 박연폭포, 왼쪽에 용바위가 보인다)

     범사정을 지나 약간 가파른 숲길을 걸어올라가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쌓았단다. 특히 북문의 견고하게 쌓은 성벽과 축대는 고려시대 뛰어난 축성 기법을 엇볼 수 있다고 한다.

아치형 북문을 지나 산책 하듯 산길을 걸어올라가면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 올라가는 길은 참 좋다. 연두색 잎사귀들의 춤사위를 즐기며 걷는 것도 좋고 길가에 핀 이름모를 들꽃들의  보며 걷는 것도 즐겁다. 가는 길 양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마다  다녀간 이들이 이름을 빼곡하게 새겨놓았다. 오르는 길 옆 바위 전체가 방명록 같다.





처음에는 바위에 새긴 이름들을 더듬더듬 읽으며 올랐지만 갈수록 이름을 새겨 놓은 바위가 널려 있어 포기했다.  


  관음사 입구 바위에 탑비가 있다.



안내판이 없어 어느 시대에 조성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거북 모습이 이상하다. 귀부를 조각하신 분은 거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등 껍질 모양이야 王자를 새긴 것도 있고, 새처럼 깃털을 새끼고 날개를 달아준 이도 있지만 거북 네 다리를 몸통 가운데 새긴 건 처음 본다. 얼핏 봤을 때는 등에 작은 거북을 업고 있는 것 같아서 다가가가 머리를 보니 아니다. 등껍질 무늬 조각도 웃긴다.  아이들이 새 깃털을 대충 그려놓은 것 같다.
 

  관음사는 고려 시대(970년)에 건립된 사찰로 대웅전 건물과 7층 석탑이 남아있다.



천년을 넘은 유서 깊은 사찰인 만큼 입구에는 몇 백년 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관음사 오르느라 지친 어른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경내로 들어가니 대웅전 안에 스님 한 분이 보인다. 우리나라 스님처럼 머리를 깎지는 않았지만 장삼 위에 가사를 입고 계셨다.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게 삼배를 올리고 경내를 돌아보았다.

  대웅전 왼쪽에 관음굴이 있다.



관음굴 안에는 백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관세음보살 좌상이 한 분 계신다.



 원래는 두분이었지만 한 분은 평양 중앙역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관음굴 앞에는 관음사 약수를 먹을 수 있는 옹달샘이 있다. 이 물을 한 번 먹을 때 마다 10년씩 젊어진다는 안내원 말을 듣고 어르신들은 좋아라 하시고 옆에 있던 꼬마에게 ‘너 젖병 물고 내려오는 거 아니니?’하고 놀렸더니 물 안 먹겠단다.그래서 그런지 약수물 앞에는 약수 먹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다.



  단아하게 생긴 대웅전 건물도 볼거리가 많다.  우선 문살.



특히 가운데 문살이 참 예쁘다. 여러꽃이 섞혀 있어 꽃밭 같다. 가운데 문살을 중심으로 왼쪽 문살 무늬는 패랭이 꽃을 조각해 놓은 것 같고 오른쪽 문살은 잎 끝 모양이 감꽃 같다. 앞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뒤편으로 가니 안내원이 버스에서 얘기했던 그 유명한 설화의 주인공이 조각된 문이 있다. 이 문은 두짝으로 된 문인데 오른쪽 문은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400년 전, 이 절을 조성할 때 아주 조각 솜씨가 뛰어난 운라라는 소년이 있었단다. 대웅전 뒤 문에 조각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 조각을 맡긴 공사책임자에게 고향엘 좀 다녀와야 겠다고 했단다. 그러자 그 책임자는 완성을 서둘러야 한다면서 소년의 부탁을 외면했단다. 그런데 며칠 후 고향에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더란다. 그러자 운라라는 소년은 재주를 가진 손 때문에 부모의 임종 조차 보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자신의 왼쪽 손목을 잘라버렸단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가 왼쪽 문에 운라 소년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고 왼쪽 문은 그대로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 석탑,



 기단부 하단에 연꽃을 옆어 놓은 듯한 모양을 상단은 연꽃이 하늘을 향해 핀 모습을 조각해 불상대좌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담한 대웅전에 비해 탑은 규모가 큰 편이다.

  관음사를 보고 내려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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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초, 개성을 다녀왔다. 부산서 무박 2일에 걸쳐 개성을 다녀오는 여행사들도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 아니라 갑자기 생긴 연휴를 이용해서 다녀오려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관광차를 타고 갔다.  학생들 수업을 마치고 밤 11시에 출발하는 무궁화 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4시 30분쯤 ,역내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아침밥 먹고 5시 50분에 출발하는 대화관광 버스를 타러 광화문 앞으로 갔다.그런데 대부분 60이 넘은 분들이다.

대화관광 버스를 타고 도라산역에 도착한 시간이 7시. 서울에서 남측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도라산 역까지 50분 남짓, 북한이 작정하고 미사일을 쏘면 2분만에 서울은 초토화 된다는 말을 실감하겠다.남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수속을 마치고 10분정도 가니 북측 출입국 사무소에 닿았다. 12대의 차량 출국 심사는 금강산 가던 때와 비교도 안되게 빨리 끝났다. 출발이 상쾌하다.  

*개성을 향해 가다 

  북한 출입국 사무소를 지날 때 두명의 안내원이 탔다. 한 사람은 앞에 한 사람은 뒤에 앉았다. 뒤에 앉은 사람은 사진 찍는 것을 감시하는 것 같았고, 앞에 앉은 분은 가는 길에 개성의 유명한 유적지나 지명의 유래 같은 것을 안내해 주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고려 시대에는 개성에 거주 하는 인구가 70만명에 달했다는데 현재는 오히려 줄어 30만명 정도 밖에 살지 않는단다. 그 까닭은 이성계가 ‘왕’ 성의 가진 이들을 잡아죽이는 바람에 목숨을 부지 하기 위해 뿔뿔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인구가 더 이상 늘질 않는단다 . 

  개성 변두리 마을을 지나갈 때는 마을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협동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 몇몇만 보인다. 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띄엄띄엄 어린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서서 지키고 있다.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자연의 힘을 위대하다. 회색 건물 마당에 울타리 너머로  어머니가 담배꽃이라 부르는 노란 꽃을 풍성하게 단 꽃나무가 늘어져 있다. 주변이 환하다. 야생화도 곳곳에 피어 삭막함이 덜하다. 금강산 갈 때는 겨울이라 회색 건물과 민둥산만 끝없이 보여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개성 시내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인다. 우리가 탄 차가 지나가자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거리낌없이 웃으며 구경하고 서 있는 사람들도 있고, 아파트 창문가에 서서 아이와 함께 손 흔드는 사람도 있다.  놀라운 것은 창가에 작은 화분 몇 개가 놓여져 있는 집도 있고 유리병에 노란 꽃을 꺾어 꽂아 놓은 집도 보인다. 이것도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행위인지는 몰라도 몰라도 암튼 놀랍다.

  개성은 유서 깊은 고장 답게 가로수가 몇 백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였다. 오가는 차량도 많지 않고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찬 것도 아니어서 대로변의 우거진 은행나무 숲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내 유적지 곳곳( 숭양서원이나 선죽교, 고려 박물관 등)에도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가게 간판을 읽으면서 가는 재미도 있다. 칼라 사진관은 천연색 사진관, 부식 가게는 남새 상점, 한복집은 조선옷 상점...으로 표기되어 있다. 북한은 우리 말을 그대로 살려 쓰고 있다.

  거리를 지나가다 정말 특이한 사람을 봤다. 북한 공산단원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기타를 메고 지나간다. 신기해서 웃으면서 손을 흔드니 자기도 씩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썬글라스도 끼고 다닌다.

  도로 표지판이 아주 단순하다. 우리 나라처럼 길이 사방으로 나 있는 게 아니라 큰 도로가 거의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직선이거나 삼거리는  ‘ㅢ’와 같은 식이다. 지명 이름만 표기 되어 있고 거리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표지판도 높다랗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 키 높이 정도로 나지막하게 꽂혀 있다.

  개성의 유명한 송악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악’이라는 글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바위가 많은 산이다. 산 능선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누워있는 것 같다.북측 안내원이 이 산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셨다.

  어느 양반가에 얼굴이 아주 못생긴 딸이 있었단다. 얼마나 못생겼는지 아무도 이 처녀와 결혼하려는 사람이 없었단다. 딸이 나이가 다 차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자 그 부모는 자기 집에 부리던 종과 처녀를 맺어주려 했단다. 속상한 처녀가 산으로 올라가 누워 넋두리를 하다가 그대로 돌로 굳어져버렸단다.  산 등성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싶은 맘 굴뚝 같았으나 금지된 행위라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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