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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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기독교적 관점으로 서평을 썼음. 

동일하거나 비슷한 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친근해지기 쉽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공식이다. 한 인간이 자신과 동질성을 추구하는 다른 인간에게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유사성>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설계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입증한다.  

『연금술사』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들을 최근들어 자주 만나고 있다. 아름답고 정제된 언어들로 구성된 코엘료표 잠언을 만나면서 이에 철저히 구속된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편독하지 않고 나름대로 다양한 독서를 즐겨하는 내가 전작(全作)을 선언할 만큼 코엘료의 작품에 갈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을 얻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질성의 추구라는 것을. 신이라는, 엄밀히 말하자면 '기독교의 신(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라는 동질성을 말이다. 

  코엘료의 작품에는 언제나 신에 대한 목마름과 탐구가 담겨있다. 성경 구절이나 카톨릭 교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활자는 매우 많이 신을 조명하며, 매우 깊이 신을 천착한다. 자아, 삶, 죽음, 사랑, 모성 등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우주의 본질적 요소들을 코엘료 자신이 믿고 탐구하는 신을 통해 관통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지하며 신뢰하고 있는 신의 부성(父性)적 통념보다는 신의 여성성, 즉 모성(母性)적 면모를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으로서의 신, 어머니로서의 신, 자애롭고 보듬어주며 사랑이 풍성한 신의 성품을 코엘료는 농밀하면서 가볍지 않게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코엘료와의 네 번째 만남인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또한 신의 여성적 면모를 탐구하는 코엘료의 의지를 강렬하게 엿볼 수 있다. 코엘료가 생산하는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자아의 최선을 찾고자 하는 갈급함의 주체이자 객체로의 소중한 존재감으로 등장한다. 『연금술사』에서는 '길'에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는 '삶'과 '죽음'에서 자아의 성찰을 그렸다면,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는 '사랑'과 '기적'이라는 테마로 자아를 탐구하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필라와 그녀의 남자친구, 둘의 어렸을 적 추억, 재회, 일주일의 시간 등의 소설 속 장치들을 통해 코엘료 특유의 아포리즘은 기적과 사랑에 대한 본질과 속성을 얘기하고 있다. 

  코엘료는 작가노트에서 '기적'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고백한다. 우리 자신이 진정한 경이에 둘러싸여 산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기적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필라의 남자친구는 신에게 받은 신유의 은사를 통해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킨다. 또한 방언을 통해 신과 대화하는 신앙인들의 모임, 그리고 그런 기이한 모임에서 자신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천사의 언어로 신에게 기도하는 필라의 경험이 일어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필라의 신앙이 회복되는 것과 남자친구에 대한 사랑이 확인되는 것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했던 남과 여가 오랜 기간동안 다른 공간에서 살다가 재회하여 서로간의 방향성을 확인하며 사랑을 완성하는 것, 그것 자체가 기적이다. 사랑, 그것은 기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적의 의미를 지나친 신비주의로 고착시켜 생각하려는 경향이 많다. 바다가 갈라지고, 산이 옮겨지며, 외계인을 발견하는 등등,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현상을 기대하면서 기적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적의 문자적 정의에 국한된 외연적이고 비본질적인 접근이다. 하루하루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것, 낮과 밤이 정확한 주기로 교차되며, 사계절의 풍성함으로 다양한 자연을 목도하는 것, 신과 교제할 수 있는 것,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 등등에 이르기까지 기적은 다양한 현현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다. 기적에 대한 고차원적 사유는 한 생명의 탄생과 홍해가 갈라지는 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물 위를 걷는 것, 건강한 삶을 사는 것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발현되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포용될 수 있게끔 한다. 기적이란 단어를 깊고 넓게 확장하여 보다 유연하고 본질적으로 사유한다면, 신이 선사하고 우주가 제공하는 기적의 바다에 포로가 되어 풍성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기적 중의 기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가장 <많이> 설명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인간을 향해 질문하는 신의 의지는 당신의 신성과 인성이 합쳐지는 장면에서 그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변을 완성한다. 사랑은 기적을 포함하며, 사랑의 의미는 기적의 정의를 함의한다. 소설 속에서 필라가 기적을 체험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동시에 자신이 부인하며 거부하려 했던 사랑이 발현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음은 사랑과 기적의 함수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필라의 사랑의 방향이 확인되면서 자아의 현주소와 가야할 길을 자각하고, 세상이 기존과 다르게 보이게 되는 또다른 기적이 발생된다. 기적은 사랑을 요구하며, 사랑은 기적을 발현시킨다. 이러한 기적과 사랑 사이의 방정식은 기적과 사랑을 연관지어 탐구하는 데 있어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소설속에서 필라의 남자친구는 신을 위한 구도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 아님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긴장감 있고 외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를 결정하기 위해 신을 향해 기도하며 숙고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과연 진정한 신앙은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된다. 신의 목소리를 증거하고, 진리를 설파하며,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신이 요구하는 신앙의 진정성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신의 가정을 책임지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고 보듬어주는 것,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의 열매를 거둬들이는 삶 또한 신앙심의 연장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구도가 신앙의 중요한 하나의 기류라고 본다면, 정작 신을 닮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 신앙심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열정과 신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그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신앙의 두 가지 기류임을 설파한다.

  코엘료 문학의 특징을 한 가지 발견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독자들과 두 가지 형태로 호흡한다. 하나는 작가 자신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설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의미, 상상, 해석을 전적으로 독자의 과제로 맡기는 것이다. 코엘료는 후자의 형태로 독자와 호흡한다. 자아에서부터 신에 이르기까지, 즉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다양한 우주의 본질적 요소들을 다루면서 절대로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그것이 더욱 그의 언어를 곱씹게하고, 재차 탐구하게끔 만드는 동기가 되기에 코엘료 우주에 흠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의 여성성의 토대 위에서 기적과 사랑을 논하는 코엘료의 언어는 역시나 동시다발적 질문을 내 머리와 가슴에 올려 놓았다. 신의 성품, 기적의 가치와 본질, 사랑과 기적의 함수관계, 사랑의 힘과 이에 대한 신의 의지 등의 다양한 사유와 사색을 말이다. 깊은 생각 하나를 끄집어 낸다. 신을 믿고, 신의 사랑을 경험한 내가 과연 아가페를 실현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나를 소멸시키는 동시에, 상대방으로 존재하며,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과연 내 안에서 가능한지를 말이다. 그것을 깊이 사유하면서, 이미 전작을 선포한 내게 앞으로 코엘료가 선사할 언어 연금술을 기대하며 흐뭇한 미소를 흘긴다.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건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p. 14>

신은 그의 은총의 손길로 다시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인간이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서 그 본질을 깨닫게 한다.   <p. 74>

어제까지만 해도 세계는 사랑 없이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젠 사물의 다양한 빛을 발견하기 위해 사랑이 필요했다.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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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 괴짜들
김유미 지음, 비즈니스앤TV 기획 / 21세기북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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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괴짜의 정의를 알아보자. 네이버 사전 검색을 두들겨본 결과, 부자는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을 의미한다. 괴짜는 괴상한 짓을 잘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부자가 된 괴짜들』은 괴상한 짓을 통하여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도대체 얼마나 괴짜들일까, 그리고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백배 발동된 나머지 두껍지 않은 자기계발서의 첫 장을 여유있게 넘길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괴짜'라는 사전적 의미가 말해주듯 13명의 특이한 직종의 인물이 소개된다. 그래피티, 설탕공예가, 허브사업가, 김치사업가, 홈웨딩사업가 등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프로들의 성공기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생각과 감각을 지닌 이들이 얼마만큼의 열정을 갖고 지금의 성공 자화상을 일궈냈는지에 대해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로 알려주고 있다. 

  사실 성공한 사람의 성공 실화를 다루거나, 자기 자신의 자전적 성공 에세이를 다룬 책을 접할 때에는 다른 자기계발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현실적 생동감을 자주 목도하곤 한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13명이라는 많은 인물을 다루다보니 개개인에 대한 주마간산(走馬看山)식 관찰로 인해 깊이가 없고, 한없이 가벼운 접근에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괴짜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여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리드미컬한 인생 스토리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심히 축약되고 압축된 나머지 마치 힘있는 소설의 밋밋한 독후감 버전을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한 사실은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블루오션의 시장영역이 많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맹렬한 흐름가운데 형성된 지나친 경쟁주의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보다 안정적이고 편한 직장생활에 갈증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더욱이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면서 이러한 풍토는 더욱더 탄력을 받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대학 졸업생들이 공무원 시험을 위해 밤을 새우며 공부하고 있는 작금의 취업 현실은 모험과 도전보다는 안정을 취하려는 취업자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자기 자신의 탤런트와 감각을 정확하게 인지하여 남들이 도전하지 않고 있는 시장에 진출하여 성공이란 열매를 얻어낸 책 속의 주인공들의 삶은 분명 귀감이 될 만하다.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마다 매번 확인하는 확실한 진리가 하나 있다. 성공한 이들이 갖는 자질 중 가장 공통되고 명확한 것은 바로 <열정>이라는 것을. 책에서 소개되는 13명 괴짜들의 꿈을 향한 열정을 읽어 내려가면서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 할지라도, 경험이 조금 미흡하다 할지라도, 실패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할지라도 자신이 세운 비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성공의 추동이 됨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게 열정이 없었다면 한낱 양치기에 불과했을 것이라 말했다는 징기스칸의 고백은 열정이 성공을 이루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다시 한번 곱씹게한다.  

  괴짜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천적인 기질은 물론이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용기와 강건한 자신감이 없이는 괴상한 짓을 하며 살아가기 힘든 것은 인간사 당연한 일일게다. 괴짜라는 의미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편견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 더욱이 그 괴짜라는 것이 볼품없는 괴짜가 아닌,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지향하며 부와 명성을 일궈낸 성공한 괴짜라면 정말 멋있지 않겠는가? 지금 이 시간에도 보편적 타인의 삶을 거부한 채, 자기 자신의 길을 위해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이들이 노력한 만큼의 인과성으로 보답받기를 심히 지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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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청년 2007-12-03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21세기북스의 책을 사랑(?)해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이번달에 21세기북스에서 신간이 많이 나오는데, 오셔서 관심있게 봐주셨으면 하네요...^^
매일매일 한분께 책을 선물해드리고 있으며, 수시로 서평단을 모집하기도 합니다.
카페로 놀러오셔서, 좋은 책과 사람들을 만나시길 바래요^^
카페 주소 : cafe.naver.com/21cbook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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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처녀작을 만나는 것은 그 작가의 작품 세계와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관찰이 된다. 더욱이 그 작가의 현재적 나침반이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과 전율을 일으키고 있음을 가리킨다면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작가의 현재적 우주를 과거의 시간대와 함께 음미함으로써 미래의 우주를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전 세계 120개국에서 2,000만 부 이상 판매된 『연금술사』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첫 작품인 『순례자』를 통해 이미 『연금술사』의 감동을 내용적으로 암시한 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의 길)’를 코엘료 자신이 직접 걷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집필한 『순례자』는 한 개인의 신비롭고 기적같은 경험을 통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들려주고 있다. 

  책 속에서 코엘료는 자신의 삶과 신앙의 고백을 깊은 사색과 깨달음에서 정제된 주옥같은 언어들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사랑, 열정, 삶, 죽음, 결혼, 광기 등 인간의 가장 중요한 내면적 가치들을 순례의 경험으로 관통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오만과 편견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웅숭깊은 아포리즘의 물결은 책장을 넘기는 내 자신의 전두엽과 심장이 철저하게 그의 활자에 구속되게끔 만들었다. 

  넓디 넓은 우주가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별들의 존재로 설명된다. 만약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존재하는 우주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 대부분이라면 설계한 자의 공간 낭비요, 오만으로 비춰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수없이 많은 항성과 행성과 운석과 성운 등의 다양한 물질로 구성된 <우주>라는 거대 공간의 존재감은 인간의 불가해함을 넘어선 신비함의 극치라 할 만 하다. 더욱이 작은 소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의 존재감 또한 수없이 다양한 인간과 피조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비함과 역동성을 인정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은하수는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길을 안내해주죠. 어떤 종교도 모든 별을 한데 모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주는 거대한 빈 공간으로 변해버려 그 존재 이유를 잃고 말 겁니다. 각각의 별, 그리고 각각의 인간은 자신만의 공간과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요.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 하얀색, 혜성, 유성, 운석, 성운, 고리 모양의 각기 다른 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똑같이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들도 실상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공간에 흩어져 있는 수없이 많은 각기 다른 존재들이죠.   <p. 137> 

  역시나 코엘료는 <사랑>의 가치를 지나치지 않는다. 에로스니 필로스니 하는 사랑의 다양한 기류는 종국에는 아가페라는 으뜸 사랑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 전적인 사랑 아가페는 그 사랑을 경험하는 이를 소멸시킨다. 신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 인류의 구속사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던 위대한 사랑은 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사랑의 차원과 수준을 농밀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인간들이 아가페의 포로가 되어 있지만, 정작 아가페를 발산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을 태워서 소멸시키는 전적인 사랑 아가페는 인간으로 사는 최고 수준에 대한 신의 질문과 답변을 동시에 자각하게 한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는 법과, 자신에게 잔인해지지 않는 법과, 자신의 사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모든 것, 당신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취할 수 있는 모든 유익한 것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사랑을 체험했을 때만 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p. 156> 

  코엘료는 자신의 멘토 페트루스로부터 아가페의 두 가지 형태를 듣게 된다. 앞서 언급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아가페는 신이 아닌 인간에게는 쉽게 행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비록 적용 대상은 다르지만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아가페는 바로 <열정>이라는 것이다. 열정은 하나의 생각이나 대상을 향한 아가페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무언가를 사랑하고 믿게 되면, 자신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강하다고 느끼게 되며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념을 깨뜨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차 평온함을 맛보게 된다. 더욱이 이런 특별한 힘은 적절한 순간에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아름답고 정제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찬란한 빛이 발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정은 대개 우리 삶의 초반부에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시기에 인간은 아직 신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자신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인형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고 작은 장난감 병정들이 움직이기도 하죠.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열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아가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예수께서 행하는 기적이나 지혜로움, 바리새인, 사도들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에게 곧장 왔죠. 오직 열정에 이끌려, 행복한 모습으로 온 것입니다.   <p. 158> 

  인간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지나치게 압박되어 있다. 사실 어느 누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죽음에 대한 보다 깊은 사유는 두려움으로 점철된 죽음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어찌 보면 죽음은 우리의 가장 큰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더욱 우리를 치열하게 살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느끼게 되는 모든 욕망과 공포의 실체를 알 때, 진정한 죽음의 모습을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 아가페의 또다른 현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나는 페트루스에게 말했다. 성전에서의 수년 동안의 수련 끝에 사실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사실 내가 더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어떻게 죽느냐라고.   <p. 180>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검(劍)을 찾기 위한 순례의 길을 통하여 매우 소중한 진리를 하나 인식하게 된다. 사실 순례의 초반부터 종반까지 그의 관심은 오직 검을 찾는 것에 있었다. 검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 페트루스의 행동은 검을 찾고자 하는 코엘료의 갈증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코엘료가 그토록 알고자 했던 검의 비밀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지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깨달은 코엘료의 삶의 목적 의식이 추동되어 작가로서의 삶과 『연금술사』의 창조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순례의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내가 알고 싶어했던 것은 오직 검이 숨겨져 있는 장소였다. 왜 그것을 찾고 싶어하는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문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보상만을 생각하는 데 소진되었다. 무언가를 원할 때는 그 욕망의 대상에 아주 확실한 목정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보상에 대한 유일한 동기였다. 그것이 내 검의 비밀이었다.   <p. 311> 

  코엘료가 선사하는 삶과 우주와 사랑과 열정과 죽음에 대한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혼의 언어들은 내 자신의 현재적 영혼에 빙의(憑依)되게 만들었다. 그가 고민하고 사색하고 갈증했던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내 삶과 사랑과 열정과 신앙의 메모장에 오롯이 입력된 것이다. 코엘료의 우주를 목도할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은 주옥같이 아름다운 고결한 가치들을 동시적이고 다발적으로 사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활자를 좋아하며, 그에 대한 전작(全作)을 선포한 이유가 거기에 있기도 하다. 

  비범한 삶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명문장인가? 코엘료는 이 문장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며 자신이 걸었던 산티아고의 험난한 순례의 길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작가로서의 자신의 비범이 평범의 길 위에서 탄생된 것이라는 정제된 겸손을 부연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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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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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지난 얇디 얇은 이 자기계발서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가 매우 흥미롭다. 어느 모임에서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술에 의지(?)하여 자연스럽게 소유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음 날 숙취의 과정에서 주인장에게 돌려준다는 당연한 약속을 하였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새삼 느끼는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흥겨운 일이라는 것이다. 선물, 책여행, 이벤트 등의 투자 없는 독서의 맛은 심히 달짝지근한 것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겠다. 

  개인적으로 과학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분증은 차치하더라도 생물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한 자로서 진화론이 지닌 방대한 오류와 비과학성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진화론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결국 살아남는 종은 강인한 종도 아니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다. 종국에 살아남는 것은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미 과학은 빛의 속도에 비유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와 문화와 경제와 사회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변화는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형국이다. 작게는 애인의 애정 수준이나 회사 상사의 컨디션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지도자의 교체나 세계화의 속성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변화의 물결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이런 거센 변화의 물결에서 얼마나 잘 적응하고 대처하는지에 따라 개인마다의 인과적 열매가 달라질 수 있음은 자명하다.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현재적 나침반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삶에 만족하며 매너리즘에 편승하는 것으로는 이제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과거 조상들이 설파했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가 정답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전의 시대와는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도에 확연한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에 21C의 사회에서 안주하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한 상대적 의미를 함의한다. 다시말해서 작금의 시대에는 조금 빠른 것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많이 빠른 것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선을 내게 돌려보면 이에 대해 나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집과 교회와 직장에서,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서 변화를 요구하는 환경의 목소리에 얼마나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가를 사유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의 삶의 편린들을 곱씹으며 과거와 현재에 철저하게 안주하려 했던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부인하기 힘든 것이다. 영어, 독서, 연애, 다이어트, 신앙 등 수많은 내 삶의 목적어들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겸허한 마음으로 자아를 탐구하게 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지극히 작은 분량을 통해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상을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 생쥐 2마리와 꼬마인간 2인의 변화하는 '치즈'에 대한 상이한 탐구방식을 매우 흥미있게 얘기하는 이 작은 우화는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적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그런 삶을 지향하고자 할 때에 변화를 주도하는 '치즈'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안주하는 삶 속에서 삶의 시계추를 과거와 현재에 구속시킬 것이냐, 아니면 변화에 대한 열정적 적응을 통하여 미래를 향하게 할 것이냐의 선택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변화>라는 단어를 깊이 사유하며, 동시에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머리속에 그리며 사색의 연못에 잠시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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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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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파울로 코엘료가 생산하는 아름다운 언어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그의 현재적 시계인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신과 여성과 사랑과 나 자신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감탄의 감탄을 자아내며 가슴을 두근거린 것이 불과 며칠이나 지났던가? 그의 대표적 스테디 셀러의 제목처럼 그가 창조하는 언어 연금술과의 첫 만남은 그의 작품 세계를 현재에서 과거로 급속도로 돌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책장 속에서 읽히기를 기다리는 적지 않은 최신 도서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내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내 인생의 현재적 시간대에 오롯이 입력되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종교적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죽음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우주에서 분리된다는 정의로 상식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재적 우주에 이탈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삶>을 지향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 같다. 태아가 모성의 몸 안에서 10개월 동안의 발육을 거쳐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나오고 싶어 안달하며 몸부림 치는 수준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갈망이 만들어내는 밖으로를 향한 태아의 방향성은 한 번도 목도하지 못한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다시 말해서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인간의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사는 것에 대한 여망은 정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적용되며 반영되어 가고 있을까? 인간은 어느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이 죽음에 대해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는 우리 자신 스스로의 초상이리라. 사는 것에 대한 열망,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 타인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에 철저히 구속된 인간은 지금도 끊임없이 삶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다. 사는 것에 대한 걱정, 불행한 삶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속성을 방증하는 또다른 역설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소설 속에서 코엘료가 제기한 '미치다'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자.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 시도로 인해 정신병원 빌레트에 가게 된다. 그곳은 정신병자들, 소위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빌레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에게 부여되고 인식되는 '미치다'의 정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베로니카라는 한 소녀가 등장하면서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다. 베로니카가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에 심취하는 에뒤아르, 베로니카와의 대화와 교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마리아와 제드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목도하는 병원장 이고르 박사. 베로니카를 통해 발생되는 빌레트 내의 변화는 기존의 '미치다'의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미친 것이 아닌, 미친 척하는 것이었음을. 

  신은 절대로 복사기의 메커니즘으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신 자신이 직접 빚어 만든 인간이란 고결한 존재감은 당신의 생기를 불러 넣은 것에서 다른 피조물과의 완벽한 구별이 완성된다.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부합할 수 없도록 개별마다 고결하고 소중한 하나의 존재로 창조한 신의 의지는 타인과 구별된 <자아>라는 웅숭깊은 존재감을 확인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법과 관습과 규범과 도덕, 그리고 문화와 습속과 가치관과 불문율 등은 66억의 다양성을 불과 몇 개의 카테고리로 구속하는 요상한 함수 방정식으로 밀어넣고 있다.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닌 보편적 타인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행복한 삶은 공격받게 된다. 

  수준 높은 행복한 삶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때에 가능하다. 타인과 구별되는 나만의 달란트를 탐구하고 계발하며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자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포장되고 탈색된 거짓 삶, 그런 삶이 간접적으로나마 행복을 비춰줄 수 있다는 비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짓 삶은 절대로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태초에 신이 창조한 자기 신분증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건강하고 강력한 행복의 근원이지 않을까? 

  또 하나의 행복의 기류를 사유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절대 명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종족보다 사랑에 민감하고, 구속되며, 갈증하는 존재로 설계되었다. 누구를 사랑하거나,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에뒤아르를 통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한 베로니카와 그녀의 연주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게되는 에뒤아르, 그들의 사랑의 쌍방향은 죽기로 결심했지만 결국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회귀될 수 밖에 없는 베로니카의 변화를 추동(推動)케 한다.  

  소설의 마지막, 이고르 박사가 연구했던 결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다른 부가요소가 필요하다. '죽음의 자각'이 주는 삶에 대한 열망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사랑>이라는 으뜸의 삶의 가치가 접목될 때에 비로소 최고의 행복을 완성할 수 있다. 죽기로 결심했지만 죽지 못한 베로니카의 삶은 소설의 종반부가 연장된다는 상상 하에, 하루하루를 하나의 기적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흐뭇한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과 사랑과 행복,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사유하게끔 한 파울로 코엘료는 과히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러도 아깝지 않으리라. 코엘료의 아름다운 언어와 주옥같이 정제된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언어 연금술을 재차 상기하며,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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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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