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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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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인터넷서점이라는 YES24는 1년 365일 다양한 이벤트를 시행한다. 현재 진행중에 있는 이벤트중에서 다소 감질맛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 4회 네티즌 추천 한국의 작가'라는 코너가 그것이다. 이 코너는 각기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눠 네티즌투표를 하고 있다. '우리시대 대표작가', '차세대 우리작가', '다시 만나는 작고작가'. 이렇게 세 가지 항목으로 네티즌들의 투표를 유도하고 있는 코너다. 뒤의 두개의 항목은 차치하자. 첫 번째 '우리 시대 대표작가'에 대한 네티즌 관심도와 투표율이 단연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의 경우 '노벨문학상 후보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 네티즌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현재 투표가 진행중이어서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투표집계로 보아 1위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1위에는 단연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자가 올라 있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인 24%를 획득하여 그 유명한 조세희나 그 위대한 이문열을 멀찌감치 앞서고 있다. 왜 네티즌들은 황석영에게 '우리 시대의 대표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감'이라는 영광의 몰아주기를 감행하고 있는 걸까? 다시말해서 황석영은 왜 네티즌과 독서매니아들로부터 이 시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데 주저되지 않는걸까? 그 의문점과 황석영의 현재가 만나는 곳에 『바리데기』라는 작품이 있다. 

  황석영의 신작 『바리데기』를 만났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한 여인의 청춘을 설화 '바리공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20세기말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대략 20여년의 시간동안 북한과 중국과 영국이라는 공간에 녹여놓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소설 내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1인칭주인공시점의 화자, 바리가 있다. 

  바리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이었다. 아들을 몹시 갈망하는 집안에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출생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산속에 버려진다. 다행히 기르는 개 흰둥이가 산속에 버려진 바리를 물고 집으로 돌아와 구사일생한다. 
  바리는 어렸을 때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살 때에는 여느 집안 부럽지 않은 평범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점점 심해져 가는 기근과 고약한 북한의 정치체제로 인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때 바리는 바로 윗언니인 현이언니와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흰둥이의 일곱번째 새끼인 칠성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넌다. 
  중국땅에서도 고난은 연속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때문에 산속에 기거하여 살다가 아버지가 떠나가고, 할머니와 현이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의지처였던 강아지 칠성이까지 죽음을 맞이한다. 배려심이 많은 미꾸리 아저씨를 만나 발맛사지업소에 취직하여 마사지도 배우고 샹언니를 만나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역시나 불행은 바리의 삶을 덮쳐온다. 
  샹언니와 함께 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인권말살의 잔혹함을 겪으며 간신히 살아서 영국에 도착한다. 어린 나이여서 몸이 팔리지 않은 채 중국집에서 일하게 되고 마음씨 좋은 사장의 소개로 다시 발마사지업소에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여태까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되는 바리.. 같이 일하는 루나언니의 집에 동거하게 되고 파키스탄 남자 알리를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의 행복도 잠시, 전쟁이 터져 알리는 사라지고 알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이 지나 알리와 다시 조우하게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가 생긴다. 
  알리와 함께 런던시내를 거닐던 어느날 폭탄테러를 목격하면서 소설은 종료된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바리데기』의 이야기 분량의 딱 절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바리데기』는 오직 주인공 바리의 관점에만 의지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축은 두개다. 하나는 바리의 하루하루 일상이고, 또 하나는 바리의 영험한 능력이 빚어내는 꿈과 환상의 몽환적 경험이다. 이 이야기의 양대 축이 끊임없이 교차되면서 소설의 흐름을 진행하고 있다. 바리는 죽은 자와 소통하며 동물의 마음과 교통할 수 있는 영험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능력에 의지하여 현실에서 직면하는 의문과 번뇌를 꿈과 환상에서 풀어놓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관찰하기도 한다. 더불어 이미 죽은 칠성이와 할머니의 혼을 만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할머니로부터 '바리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무엇보다 꿈과 환상에서 끊임없이 찾아 질주하는 '생명수'에 대한 존재의식과 모험심이 바리 자신의 의지를 점점 불태우고 있다. 작가 황석영은 북한에서 태어나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기까지의 바리의 20여년간의 인생여정을 일상적인 일기체로 말하는 동시에 바리의 영험한 능력에 기인하는 꿈과 환상을 매개체로 현실에 대한 해석과 그 소중한 '생명수'에 대한 갈급함을 교차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리데기』는 매우 우울한 소설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바리의 관점은 이성적이면서 건조한 문체로 불행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있다. 바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암울하다. 바리의 시선은 자신의 기구한 삶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불행함에까지 관조한다. 더나아가 남북분단, 북한의 기근, 빈부 및 국가적 양극화 현상, 911 테러,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런던 테러, 쿠바 콴타나모 수용소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말 세계사의 어두운 장면까지 관통하고 있다. 어쩌면 바리가 자신의 꿈과 환상가운데 찾아나선 '생명수'에 대한 갈급함은 현실에서 관찰했던 세상의 어둡고 암울하고 억울한 것에 대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갈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뒷부분에 '생명수'를 찾기 위해 서천의 끝까지 여행하는 바리의 여정을 압권의 몽환적 문체로 묘사하면서 생명수의 존재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과연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명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황석영의 대답은 역시나 단호하다!
"숨은그림찾기입니다. 글쎄요, 이 작품에서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 이는 독자들께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p301, 작가인터뷰中> 

  작가는 생명수의 존재여부와 생명수의 실체에 대한 답을 독자가 찾아야 할 과제임을 피력하면서 생명수에 대한 폭넓은 해석, 그리고 이 세상의 어둡고 암울함에 대한 책임의식을 독자들에게 은근히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 황석영은 '생명수' 자체보다는 '생명수를 알아보고 찾고자 하는 마음'이 본질이며, 바로 그것은 빈부와 국가와 인종과 체제에 초월하여 진행되어야 할 인류의 숙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표준어와 함경도사투리, 현실세계와 몽환적 꿈과 환상의 세계, 한 여인의 기구한 청춘과 20세기말 현대사의 어두운 사건들이 교차되고 반복되는 이 대서사시는 작가 황석영의 상상력과 고집, 작가의식과 역량을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이라 할 만 하다.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YES24의 '우리 시대 대표작가' 투표의 황석영 쏠림 현상은 바로 이러한 그의 괴물스러움을 입증하고픈 문학매니아들의 마우스 클릭이 모아진 결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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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마키아벨리 군주론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1
윤원근 지음, 조진옥 그림, 손영운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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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명저 『군주론』은 대극적인 평가로 양분되고 있는 책이다. 읽을 필요는 있지만 그 내용을 학습하고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책, 존귀하고 위대한 책이지만 극도의 위험성을 함께 내포하는 책이 바로 『군주론』이다. 본래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내용이 작금의 시대상황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체 또한 지극히 건조하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일전에 몇 번 끄적이다가 최근 주니어김영사에서 만화로 새롭게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독할 수 있었다.  

  비록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만화지만 유명한 고전을 다뤘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으며, 일반 성인들도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을 만화로 쉽고 재미있게 재창조했다는 점이 이 책의 굵직한 존재감이다. 다섯 장의 큰 대제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위험하게 읽힐 수 있는 점을 고려하여 1장과 2장에 안전망을 설치해 놓고 있다. 1장은 『군주론』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2장은 저자 마키아벨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결과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는 마키아벨리즘의 위험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책이 쓰여진 시대상과 책이 쓰여진 동기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즘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수단과 과정보다 결과가 우선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주의는 정치활동의 효율성과 신속성의 측면에서 솔깃한 주장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정치의 목적이 종국에는 인간의 행복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많은 희생이 불가피하며 인권이 말살될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음은 아니라 하겠다.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대사도 이를 설명한다. 박정희를 위시하여 30년간의 군부통치는 경제발전이라는 절대적 결과물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바, 수많은 인권이 유린되었고 인류의 절대적 보편가치인 자유가 억압되었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과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과과 역비례하여 공존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적어도 공과 과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 넓은 공감대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쯤에서 시대적인 차이를 목도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면 보다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의 공간이 생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핍했을 당시의 이탈리아는 주변 강대국의 횡포에 몸을 사리고 있었던 유럽의 삼류국가였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희생자가 되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허약한 국가의 표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국가를 통일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여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절대 권력자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군주론의 형태 및 군주가 갖추어야 할 요건 등, 당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발군의 통찰력으로 『군주론』을 집필한 것이다. 

  시대적 차이를 초월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생동감 있게 말해주는 중요한 메세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가 곧 행복한 국가이며, 강한 리더쉽이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나는 전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동의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반만년 역사는 대부분 약하기 그지 없는 역사였다.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침략과 약탈을 당한 약소국의 비애가 아직도 한민족의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다. 지나친 패배주의와 군사독재시절에 대한 향수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더욱이 최근 몇 년 간 계속해서 불고 있는 고구려 열풍은 한민족 역사상 유일했던 초강대국의 역사였기에 당시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주변의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세계 제 2의 경제대국 일본은 우경화의 길로 한걸음씩 나아가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듯 보인다.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쉽 가운데 부국을 향해 나아가며 미국에 대항하고 있다. 인구대국 중국은 전 세계 자본의 23%를 빨아들이며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고, 2020년에는 달을 정복한다는 야심찬 비전을 세워 시선을 우주로 향하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은 많지 않은 인구에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동족과 대치하여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고, 정치는 국민에게 시원함을 주지 못하고 경제는 미지근하기만 하다. 강력하고 믿음직한 리더쉽에 목마른 국민들은 금년에 실시될 대선에 앞서 많은 사유와 토론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국민이 주인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마키아벨리가 생존했던 시절과는 모든 것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좋은 지도자를 뽑아서 국가경영을 잘하는 데 있다. 국가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놓아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절대명제이다. 작금의 대한민국국민들은 강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국민과 야당과 언론을 하나로 뭉쳐 국가적 에너지를 극대화하여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리더쉽. 그 강력한 리더쉽을 국민들은 여망하고 있다.  

  강한 나라와 강한 리더쉽. 이것이야말로 5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차를 넘어 『군주론』과 21C 대한민국이 동시에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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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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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없음. 

역사소설만이 갖는 매력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을 절묘한 배합으로 구성한 역사소설은 현대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맛을 제공한다.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 과거와 작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현재의 시간대가 합쳐지면서 독자는 또다른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고전 스테디셀러 『삼국지』를 위시하여 수많은 국내외의 역사소설은 과거의 사실과 현재적 상상력의 오묘한 긴장감 사이에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다. 

는 그를 사랑했을까?
아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p13> 

프롤로그가 예사롭지 않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화인의 숨막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바람의 화원』을 읽기 전 유일한 기초지식이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의 화인을 다룬 역사소설이라는 기초지식과 사랑에 대한 강렬한 갈구함을 보여주는 소설의 프롤로그는 다소 부합하지 않음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걸까? 이백 년이 넘는 과거의 시공간으로의 여행에서 작가는 어떤 팩션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사랑이라.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인상적인 프롤로그에서 목도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내 머리와 가슴을 심히 일렁이게 하면서 프롤로그의 마지막장을 넘기는 데 적잖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얼굴에 대한 아주 길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아마도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설사 진실이 아닌 늙은 자의 노망이라 해도...   <프롤로그, p12> 

  『바람의 화원』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프롤로그에서 역사적 인물이자 소설속 인물인 김홍도의 독백을 통하여 나타나듯이 강렬한 사랑의 서사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표현할 수 없고, 가지려 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던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다. 저자 이정명은 조선시대 실존했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라는 천재화가의 예술과 사랑을 뛰어난 상상력과 흥미있는 전개로 창조했다. 무엇보다 누구도 생각지 못할 발군의 상상력으로 책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야기로 사랑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이 소설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모든 미스테리물이 그러하듯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전복적인 이야기의 반복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두 거장의 작품을 오리지널 컬러판으로 볼 수 있는 흥미거리다. 전자는 십 년 전 의문의 죽임을 당한 두 화인의 살인사건을 하나 하나씩 밝혀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속에서 단원과 혜원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묘미를 제공하며, 후자는 두 천재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동시에 소설속에서 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재평가하는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사대결은 압권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거장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씨름》과 《쌍검대무》를 소재삼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긴장감으로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은 과히 압권이다. 경쟁자지만 경쟁하기 싫었고, 대결하기 싫었지만 대결할 수 밖에 없었던 둘 사이의 그림 대결은 18대 18이라는 계원들의 베팅을 입증하듯 우위를 논하지 못한 채 무승부로 종결된다. 단원과 혜원의 화사대결은 박진감 넘치는 두 천재의 대결이라는 외연적 설정과 함께 이야기의 전후를 정리하여 서사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구성적 내포를 함께 지니고 있는 명장면이기에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작가는 단원보다 혜원을 더 무게감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스승 단원이 제자 혜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부러움과 감탄과 상찬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화서가 생긴 이래 수백 년을 엄격한 법도와 기법에 구속되어 있던 당시의 배경에서 기존의 화풍과 기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대상을 그린 새로운 그림을 지향했던 혜원 신윤복. 수백 년 이어온 전통에 대한 천재화가 혜원의 대항은 그것을 흠모하며 지원하는 스승 단원에게는 상찬의 대상이었다. 스승이지만 제자보다 못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단원의 고뇌는 소설속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면서 혜원의 절대적 존재감을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홍도는 이 대결 아닌 대결에서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모멸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단지 주상의 명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해도 마음속 패배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윤복은 홍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p174> 

  나는 개인적으로 김홍도의 그림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물론 대담한 소재와 화려한 색상, 그리고 섬세한 필치가 인상적인 신윤복의 그림도 과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혜원의 그림은 대부분 인물과 배경이 비슷한 무게감으로 눈에 비춰진다. 어떤 그림에선 인물이 주가 아닌 부가 되어 배경을 수식하는 느낌이 들정도로 초라하다. 색은 화려하고 필치는 섬세하지만 그림에서 드러난 인간의 내면적 무게감이 한없이 가벼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에 비해 단원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삶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단원의 관찰자적 현미경은 오직 인간에만 초점이 맞추고 있을 정도로 접사모드다.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하며, 차분하진 않지만 역동적이고, 섬세하진 않지만 힘이 있는, 무엇보다 인간과 삶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그린 김홍도의 그림이 내게는 왠지 우위로 느껴진다. 

  사랑은 언제나 화두다. 사랑의 방향성은 언제나 쌍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양방통행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화살표의 한 방향만 성립되는 일방통행의 사랑도 있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뜨겁게 사랑할 때, 더욱이 그 사랑이 오직 자신으로부터만 발생되는 일방적인 방향성일 때에, 그것을 목도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애타고 간절한 마음을 발산시킨다. 소설속에서 김홍도가 바라보는 한 존재에 대한 뜨겁고 강렬한 사랑의 방향성은 그의 작품 못지 않은 힘과 진실성이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다. 

  하나의 또다른 사랑의 기류를 생각했다. 김홍도가 지극히 갈구했던 존재에 대한 방향성 못지 않은 또다른 사랑의 방향. 어쩌면 신윤복은 자기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김홍도의 사랑의 방향과 신윤복이 흠모했던 기생 정향에 대한 방향은 신윤복 자신을 찾고자 하는 방향을 수식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전자의 두 개의 사랑의 방향이 완성되고 다듬어질수록 신윤복의 자기정체성을 향한 방향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자,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자, 자신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일 수 있으리라.  

  서평을 정리하자. 소설 『바람의 화원』 은 역사와 예술과 사랑을 화려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하나의 이야기, 한 얼굴에 대한 길고도 비밀스러운 이야기, 믿을 수 없을 이야기. 하지만 진실로 믿고 싶을 이야기. 진실로 믿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 충분히 가볍고 무거우며, 충분히 냉정하고 강렬하며, 전복적이면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적인 이야기. 『바람의 화원』은 그런 소설이다. 

 

형태가 아니라 혼을, 모양이 아니라 내면을, 양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싶습니다.   <p42> 

지금 믿을 수 있는 단서는 기억보다는 기록이었다. 기억은 주관적이지만 기록은 객관적이고, 기억은 순간적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며, 기억은 혼동될 수 있지만 기록은 명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p61> 

알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알아버린다면 아름다움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곳에 손이 닿고, 그 강을 건너고, 그것을 가진다면 가슴속에 들끓던 불덩이는 곧 재가 되고 말겠지요.   <2권,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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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1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이 책 담아갑니다.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상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님의 리뷰는 늘 좋습니다.^^

다윗 2007-10-1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리뷰를 칭찬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매우 흥미있는 책이니 혜경님도 기회되면 꼭 읽어보세요.
추천 꾸욱~~ ^)^
 
몽유도원도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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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스물 아홉의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년이면 서른의 나이가 된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았건만 아직도 삶과 인간에 대한 학습은 부족하다 못해 가난하기만 하다. 인생의 수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사랑>이라는 절대적 선한 가치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 심히 부족하여 삶을 둥개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사랑한다, 는 말이 남발되고 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영원히 사랑해, 우리 사랑 변치 말자, 등. 인류는 사랑한다는 말의 오고감 속에서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할 수 없듯이 사랑한다는 말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많은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돌아서고 헤어지며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걸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른 사랑을 만들어가는 걸까?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기독교의 절대진리인 성경에서는 <사랑의 수고>라는 말이 나온다. 신약성서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3대 메세지가 수식해주는 뒷단어가 등장하는 데 믿음은 역사요, 소망은 인내이며, 사랑은 수고이다. 수고라는 말은 <희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정리하자면 사랑하는 곳에 희생이 있다는 것이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요, 강한 사랑은 반드시 희생의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말이다. 

  사랑을 입증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를 꼽으라면 <믿음>이 아닐까 싶다.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랑의 배경에는 믿음이라는 강력한 내포적 가치가 들어있다. 갖은 역경과 회오리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사랑을 지키며 결혼에 골인한 이들의 공통점은 강한 믿음으로 중무장하고 있다는 공통됨이 있다. 강한 믿음이 강한 사랑을 만들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만든다는 공식은 분명 삶의 법칙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희생>과 <믿음>이 사랑을 구성하는 두 가지 유전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인호의 2002년 출간작 『몽유도원도』는 이러한 희생과 믿음의 절대적 가치가 진정한 사랑의 힘을 완성한다는 내 개인적 소신에 동의하는 소설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도미설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이 소설은 도미와 아랑, 두 부부의 깊고 강렬하고 진실된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백제의 왕이었던 여경(개로왕)은 꿈에서 본 환상의 여인을 현실속에서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렵사리 꿈 속의 여인과 똑같은 미모의 여인을 찾았지만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의 몸. 하지만 여경은 군주라는 자신의 신분적 위치를 이용하여 잔인하고 처절하게 아랑을 갖기 위한 몸부림을 실행한다. 아랑의 남편 도미의 두 눈을 뽑아가면서까지 아랑을 갖고자 하는 여경의 지나친 욕망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과응보의 세상사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처절한 죽음으로 귀결된다. 확인된 것은 도미와 아랑 사이의 사랑의 힘.

  허황된 욕망과 인생의 본질, 그리고 진실된 사랑과 믿음과 희생이라는 삶의 절대적 가치를 고대설화를 기반으로 하여 재탄생시킨 이 소설은 어둡지만 아름답고 짧지만 강렬하다.
  믿음이 굳지 않으면 큰 사랑이 없으며 죽음을 띄어넘는 정절이 없이는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법이다. 세월이 흘러가서 말대의 세월이 온다고 하여도 이 진리를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p75> 

  도미와 아랑의 사랑. 그런 사랑을 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면 너무 감상적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소음 수준으로 범람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비록 설화이긴하지만 도미와 아랑이 보여준 절대 믿음과 절대 희생으로 무장된 강한 사랑의 웅숭깊음은 깊이 음미할 만한 아름다움의 극치다.  

 

  낮잠의 짧은 꿈속에서 만났던 몽유의 여인, 그 꿈속에서 만났던 천상의 여인을 현실 세계 속에서 찾으려 했던 대왕 여경. 그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 개로왕, 그를 한갓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을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우리들의 인생이란 한갓 꿈속에서 본 도원경을 현실에서 찾기 위해서 헤매는 몽유병의 꿈놀이가 아닐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p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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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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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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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국경과 민족을 논하는 것이 의미없는 시대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문학의 세계는 이미 탈국경화, 탈민족화가 진행되고 있다. 문학을 순수하고 명확하게 문학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문학을 문학 자체로만 바라보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서 그리 나쁜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한국문단에 대한 일본소설과 기타 해외문학의 도전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특히 쓰나미처럼 한국문단을 뒤덮으면서 하나의 존(Zone)을 형성할 정도로 강력한 일본문학의 침투는 문학매니아들에게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소설의 약진이 비단 어제와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그 양과 질에 있어 심히 압도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별다르게 큰 격변과 요동을 겪지 않았던 일본 현대사의 특질은 그들의 문학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무거운 담론에 구속될 이유가 없으니 작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자유의 만개에서 가지각색의 다양한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6·25전쟁, 남북분단, 독재권력 등 역사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겪은 한국의 현대사는 작가들에게 무거운 작가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이같은 외적 조건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젊은 세대의 생활상과 가치관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까지 한국 작가들은 거대담론이나 후일담 또는 공격적 페미니즘 소설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재의 획일성은 한국소설이 지나치게 무겁고 서사가 약하며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비판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소위 <위기>라고 불리는 한국문단의 현주소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리얼리즘과 판타지은 매우 중요한 두 개의 줄기라 할 수 있다. 한국소설은 사실성은 훌륭한 데 비해 환상이 없다. 상상력이 부재다. 한국소설에는 공상과학(SF), 추리소설, 공포소설, 판타지가 없다. 뛰어난 상상력과 소재의 선정, 감각적인 묘사와 섬세한 필체로 중무장한, 무엇보다 무겁지 않아 독자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는 일본소설의 편안한 매력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이러한 매력적인 일본문학의 현주소에서 매우 강렬해 보이는 여성작가의 존재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온다 리쿠다. 요 몇 년 사이 온다 리쿠의 작품은 쓰나미의 핵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그녀의 수많은 출간작 중, 추리소설 『유지니아』와 단편소설집 『도서실의 바다』를 통해 이미 온다이즘을 경험한 내게, 그녀의 유명작 『밤의 피크닉』은 '역시 온다야!'라는 감탄사를 발산할 만큼 지극히 인상적이었다.  

   『밤의 피크닉』은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보행제라는 걷기축제에 함께 참여하는 몇몇 고등학생들의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발군의 스토리 텔링으로 멋지게 창조해냈다. 사람, 사랑, 우정, 용서, 그리움, 두근거림 등. 인생의 내면적 주제들이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있다. 

  역시나 온다답게 시점의 다변화가 인상적이다. 소설의 시점은 수시로 변화한다. 소설속 중심화자인 니시와키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의 시점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두 인물의 화자시점과 시간시점이 자유롭게 바뀌고 또 바뀌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어떻게보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가까울 수 있는 존재지만,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채 도오루는 다카코를 무시하며 증오한다. 이를 모를리 없는 다카코도 도오루의 시선을 의식한 채 긴장감을 갖고 거리를 두고 있다. 

  사카키 안나의 존재가 소설속에서 무겁고도 특별나다. 다카코와 미와코와 안나는 고등학교 시절 가장 절친한 삼총사다. 미국유학으로 인하여 고등학교 마지막 보행제를 함께 하지 못한 안나. 비록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인 '보행제'의 현재적 화자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안나의 존재감은 무겁기만 하다. 도오루와 다카코의 태생적 원인에서 오는 증오와 원망이 안나의 우정과 지혜를 통하여 해결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안나의 남동생이 보행제의 종지부를 향해 걸어오는 무리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해피엔딩의 전형으로 비춰지지만, 전혀 식상하지 않고 지극히 강렬하며 인상적이다.
  모두 밤에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특별한 걸까.   <p41>
 

  <그리움>이라는 것은 멋있는 것이다. 사랑했기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그리움은 문제가 되지만, 현재를 살아가면서 종종 아름다운 과거로의 회귀를 그리며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은 현재를 더욱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고 현재는 화살같이 날아가는 속성이 있기에 영원히 정지해 있는 과거의 한 장면을 화살로 삼아 현재의 활시위에 잠시 올려놓을 수 있는 여유는 인간이라는 종족만이 가능한 특권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실연이든, 아픈 상처든.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잊혀진다는 것은 우울하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렬히 사랑했을지라도 머나먼 시공간의 한계에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은하계를 몇 개나 뛰어넘은 거리에 있을지라도, 수 천 년의 시간이 지난다 할지라도 잊혀지지 않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되고픈 마음은 나만의 소망일까?
  그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까이 없으면 , 잊혀지는구나.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p42>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말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일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을 사랑하는 것일까? 다시말해서 사랑의 본질적 대상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인지,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상태>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가 책을 읽은 후 머리속에서 일렁인다. 

  <청춘>과 <걷기>. 단지 두가지 소재만을 가지고 단 하루동안의 시간적 배경 안에서 발군의 스토리 텔링으로 녹여낸 온다 리쿠의 작가적 기술력은 심히 압도될 만한 내공이라 상찬하지 않을 수 없다. 별 것도 아닌 소소한 것에 활력을 불어넣어 지극히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내며 전복적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녀의 필치에 나는 심히 매료되었다. 만 하루동안 그저 걷기만 하는 것을 소재로 삼은 이 소설이 이리 큰 가슴 뭉클함과 감동을 선사할 줄이야. 온다 리쿠로 인해 또 한 번 가슴을 적신다.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p155,156>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농밀하며 눈 깜짝할 사이였던 이번 한 해며, 불과 얼마 전 입학한 것 같은 고교생활이며, 어쩌면 앞으로의 일생 역시 그런 '믿을 수 없는'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아마 몇 년쯤 흐른 뒤에도 역시 같은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어째서 뒤돌아보았을 때는 순간인 걸까. 그 세월이 정말로 같은 일 분 일 초마다 전부 연속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고.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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