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칼 마르크스도 "지식인의 의무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넘어 '변혁'에 있다"고 피력했다. 만약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사르트르와 마르크스가 역설한 지식인의 의무에 제대로 복무했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한국의 현대사를 구도적인 측면에서 이등분하는 기준으로 '4·19의거'와 '87년 6월항쟁'을 꼽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 민주주의사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두 사건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피플파워'의 승리였다. 1987년 이후 완성된 형식적 민주주의는 20년을 지나오면서 그 안정성과 발전성이 더욱 공고해졌다. 나는 이제 더이상 한국정치가 과거 독재정치로 회귀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한다. 성숙한 민주주의 대중으로 거듭난 우리 국민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87년 체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안착되면서 우리 사회는 수많은 변화의 물결을 맞이했다. 87년 이전에는 '군사정권'이라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던 악이 존재했지만,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에는 선과 악의 선명한 이분법적 전선이 사라졌다. 이전에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했던 지식인들의 실재적인 공공의 적이 사라지면서 다양한 담론들이 형성되었다. 과거 저항적 지식인의 아우라는 희미해졌고, 보다 진보하고 고차원적인 지식인상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지식인의 흔들리는 위상과 번민은 시작된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획득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현 이후 20년간의 지식인들의 냉정한 현실을 담고 있는 책이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모순되고 오류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의무'보다는 '권리'에 익숙한 한국 지식인의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 급변하고 있는 지식인의 정의와 역할을 폭넓은 각도에서 신랄하게 조명한다.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지식인에게 명예와 돈과 권력이 동시에 몰리는 경우는 드물다. 지식인이라는 자체로 존경과 선망이 되는 게 바로 한국 사회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로부터 받는 과분한 명예와 권리에 대해 응당 행사해야 할 기여와 의무는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야 한다. 이 책의 근본적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의 강점은 넓은 관점에서 지식인의 현재성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87년 체제 이후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어떻게 변하였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지식인 패권주의의 현실은 어떠하며, 정치·경제를 위시한 각 분야와 지식인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실 지식인의 위기적 본질은 무엇이며, 앞으로 지식과 지식인의 정의가 어떻게 진화해갈 것인지를 분석한다. 더욱이 현실 지식인들의 대담과 인터뷰를 실어 무게감을 더했고, 현실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조망까지 내다보고 있어 균형이 잘 잡혀있다.

  사실 교수사회로 위시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돈과 권력에 너무 많은 부분 밀착되어 있다. 군사·민간 정부 할 것 없이 교수의 정·관계 진출은 당연시되어 왔으며 최근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부정적 맥락의 신조어가 탄생했겠는가. 전문 관료를 의미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는 달리 폴리페서는 '정치 지향의 교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한국 지식사회의 망령적 징후로 표현되곤 한다.

  교수의 정계 진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교수들은 진출해 있다. 한국사회의 보수적 구도도 문제거니와 교수들의 소신과 일관성에 맥이 없음은 더욱 큰 문제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에 온전히 편입된 한국의 경제체제에 대해 정·재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의 소신없는 행태는 씁쓸하기만 하다. 성장지상주의, 시장주의, 미국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알리바이 삼아 오직 신자유주의가 '절대선'인 것처럼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외침은 정작 본심일까.

  한국의 지식이 미국에 너무 종속되어 있는 것 또한 문제다. 미국이 한국 지식인을 생산하는 최대 공장으로 여겨질 정도다. 1948년부터 2007년 6월까지 학술진흥재단에 해외 박사 학위 논문을 신고한 이는 2만4,691명이고, 이 가운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만3,782명(55.8%)라고 한다. 또한 2007년 6월 서울 소재 9개 대학(경희대·고려대·서강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양대)의 정치외교·경제·사회학과 교수 365명의 국가별 박사 학위를 조사한 결과, 미국 박사는 306명(83.8%)이고, 한국박사는 24명(6.6%)라 한다. 이러한 수치는 미국 박사가 아니면 아예 인정을 하지 않는 미국 박사 맹신주의의 저속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미국 박사 출신 교수들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코미디를 하나 소개한다. 정태인 교수가 <경향신문>에 칼럼을 써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2007년 『나쁜 사마리아인』을 출간하여 신자유주의 구호에 가려진 선진국들의 경제발전 역사의 내밀한 속성을 파헤친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는 세계적으로 매우 저명한 경제학자다. 전문 학계에서 노벨상보다 권위를 더 인정받는 뮈르달상과 레온티에프상을 최연소로 수상했고, 사회과학논문인용지수(SSCI) 3위의 『케임브리지 경제학 논집』의 편집자이기도 한 유능한 경제 전문가다. 그런 장교수가 서울대학교에 교수 신청을 세 번 지원했지만 계속 떨어졌는데, 이를 두고 서울대의 어떤 교수가 "삼류 잡지 에디터가 무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카고 보이스'로 대변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학파의 철옹성이 얼마나 코미디처럼 굳건한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도처에서 확인되는 지식계의 오류와 모순은 무수히 많다. 이전부터 있어왔던 이러한 한국 지식사회의 그늘진 단면은 87년 이후부터 공유했던 보편적 목적과 이상을 상실하면서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지식인은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용기가 있어야 함은 자명할 것이다. 

  근자에 '대중지성(mass intellect)'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지식인의 의미는 이미 구시대적 지식인으로 낙인되고 있다. 지식의 소비자인 대중이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함께 병행하는 대중지성의 세상이 도래했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처음 사용한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의 의미에서 한발짝 더 나간 대중지성은 그 유전자적 의미를 확대하여 '다중지성(swarm intellect)'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과 온라인 컨덴츠·커뮤니티의 질적 향상에 탄력을 받아 이미 지식은 대중의 품 안으로 들어가 다양하고 신속하게 생산·소비되고 있다. 실례로 <노사모>, <오마이뉴스>, <네이버 지식in> 등은 대중지성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이러한 지식·지식인의 의미와 형태의 변화 속에서 기존 지식인의 구분된 역할과 기능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과연 그들은 죽은 것인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말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만을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된 것이나 진배없다. 이제 한국의 지식인은 변해야 한다. 뛰어난 자기반성 능력으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역동적으로 지휘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지식인 본연의 책무를 상기하며 인간의 삶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감각에서 의미로 전환시키는 선구자적 실천에 흔들림없이 복무한다면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세계를 '변혁'하는 자로서의 지식인의 존재성은 찬란하게 빛을 발하지 않을까. 

  다시 책에 대한 평으로 회귀하자. 탐구 대상을 대학교수로 접사화하여 작가, 언론인, 논객, 법조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다루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 달성 이후 둥개기만 하는 한국사회의 본질적 민주주의 실현의 요원한 단면을 '지식인 코드'로 풀이한 점은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라 감히 평한다. 의식있는 저널리즘의 좋은 본보기로 상찬한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지식인 헤게모니의 현실 단면을 세세하게 잘 파헤친 이 책은 민족·탈민족이나 좌파·우파의 이데올로기를 떠나 순수한 애국의 마음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읽혀져야 할 소중한 보배이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가교적 이해와 통찰을 위해서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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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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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배 질서를 깨는 일에 지식인들은 왜 흥분할 줄 모르는가. 사르트르는 또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갈등은 해소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지식인은 이렇게 조용히 죽어 가고 있는가.   <p. 14>

실제 법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 모두 테크노크라트라는 겁니다. 행정 고시에 합격하면 해외 유학도 지원해 주잖아요. 정말 열정을 갖고 공부합니다. 도덕적으로 테크노크라트를 의심하지 않는 편입니다. 밤새 기획안을 짜며 나라를 어떻게 설계하고 디자인할까 하고 애국심에 불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테크노크라트의 지배가 실제로 시민운동까지 장악하고 있고, 지식인 위기의 어떤 중요한 측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표상이나 대의 질서로부터 테크노크라트는 이탈하고 대중은 추방되고 있습니다. 지식인이 서있는 자리는 모두가 떠나 버린, 실제로는 지식인 스스로도 떠나 있는 텅빈 자리입니다.   <p. 37>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p. 53>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라는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p. 54>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p. 56>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대중과 소통해 대중에게 좀 더 나은 진보적 세계관을 이야기해 주고,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대중의 생각과 욕구를 대신 표현해 주는 겁니다. 자본주의로 인해 상실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의 힘입니다.   <p. 83>

현대인은 모두 자기기만의 모순에 빠져 있다. 그래서 단순한 쾌락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한 가식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벗어던지고 윤리와 총체적 인격 완성으로 이끄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를 지향하는 것이 시민운동 지식인의 본질이다. 그래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일정한 발전 곡선을 그리는 역사·계급을 포함한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 본질의 원형 또는, 우주적 실재로의 영원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아득한 옛날부터 가슴속에 품어 왔던 진정한 삶의 본질로서 인간의 존재 의의를 되찾는 근원이다.   <p. 171>

지배계급을 대변하든 피지배계급을 대변하든 나는 이제 그런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대 지식인은 더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다. 지식인들은 한편에선 곧바로 통치자와 자본가일 것이고, 다른 한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 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p.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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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어떤 책은 덮고 난 후에 더 가까이 사귀게 된다. 작별하고 나서야 한 사람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작가의 말>

소설은, 무대의 이전과 무대의 이후에서 씌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쓰는 이를 영원히 무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다. 무대의 뒤편, 혹은 무대의 한복판. 이 아이러니가 소설가에게 비애인지 쾌락인지 환멸인지 잘 모르겠다.   <p. 33>

누군가를 배신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p. 84>

세상에 같은 바다는 없다. 늘 변함없는 망망대해의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오늘 마주하고 있는 이 바다는 어제 지나온 것과는 다른 바다다. 시간의 움직임이라는 마법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바다를 건너는 항해가 닮았다면 소소한 시간의 매듭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디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p. 112>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른다.   <p. 120>

모든 것은 사라지고 시들고 썩어버리도록 운명지어진 것 같았다. 시작은 아무 의미도 없다. 시작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P. 139>


『풍선』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P. 19>

두고 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청춘의 한 시절이다. 그들은 각각 그 시간을 통과해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P. 21>

꿈과 현실의 간격이 크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누구나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낙차의 폭이 너무 클 때, 꿈 너머의 실생활에 대한 거짓 믿음과 진지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살다 보면 판타지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성찰하게 하거나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판타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P. 47>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   <p. 49>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p. 51>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1」 중에서)   <p. 66>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 '나쁘다'인가? 주지하건대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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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어쩌면 로마 황제 앞에 서 있는 검투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함성과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주라고 하면 그는 살 것이요, 죽이라고 하면 죽을 것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강해진 경우도, 히틀러처럼 대중을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한 파시스트의 경우에도 역시 중요한 사안들은 이러한 대중들의 함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의 어느 날, 지금의 십대가 "전쟁, 전쟁, 전쟁!"을 외친다면, 결국 우리는 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더 많은 지금의 십대들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친다면, 우리는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 41>

경제학의 기본 모델에는 "인간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서 움직인다"라는 하나의 가설만 존재하는데, 최근에는 여기에다 경제학자들이 "가끔은 이상한 짓도 한다"라는 보조명제를 넣기도 한다. 사실 이는 엄청난 고급 이론의 영역이다. 왜 사람들이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지 나름대로 경제학적 설명을 해낸 이들은 지금까지 전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계산 자체가 어려워서 못한다고 얘기했던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진즉에 노벨상을 받았고, 명품 라벨에 속아서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얘기한 애컬로프(George Akelof)도 정보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종교 때문에 가끔 배고파도 행복하다고 여기는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얘기한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도 1990년대 중반에 노벨상을 받았다. 신념 때문에 이상한 일을 한다는 사람으로는 19세기 후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불행히도 그 시대에는 노벨상이 없었다. 사랑 때문에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는 분석은 아직 비어 있는데,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이를 경제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다면 한번 도전해보시기 바란다. 성공하면 틀림없이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증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단어만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증오이다.   <p. 170>

국가와 국가 사이에 '애정'을 얘기하는 것은 일상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이보다는 '우정'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이 좀더 사실적이다. 그러나 증오는 다르다. 증오는 구조 안에서 탄생하고, 경제를 따라 확산되고, 문화를 따라 재생산되며, 정치에 의해 폭발한다.   <p. 171>

만약 1세기 전에 발행된 유럽의 신문들과 지금의 한국 신문들을 찾아서 비교해본다면, 놀랄 정도로 유사한 구절이 많다는 데 독자 여러분들도 놀라실지 모른다. 당시의 '새로운 식민지'라는 단어를 지금의 '수출'이라는 단어로, '새로운 자원 개발'을 지금의 '자주 개발'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오페라'를 '한류'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그 당시 신문의 기사들 상당수가 요즘의 기사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p. 196>

상투적 수법이기는 하지만, 이즈음에서 나름대로 유용한 질문이 하나 있다. "노아가 방주를 비가 오기 전에 만들었는가, 비가 오고 나서 만들었는가?" 물론 답은 뻔하게도 비가 오기 전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평화라는 매우 특수한 조건 혹은 매우 특수한 '공공재'도 이와 같다.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운 시기에 만들어야 한다.   <p. 223>

"전쟁에 반대한다'라는 단 한 문장을 자신의 파토스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마케팅 사회에서는 아주 어려운 미션이다. 그렇지만 '미션 임파서블'은 아니다. 평화는 달콤하고 감미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잘 잊지 못한다. 그래서 평화는 파토스를 요구하고,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특수한 속성을 갖는다.   <p. 261>

한국 자본주의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저질 악마 자본주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평범한 한국 십대의 1년간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디스커버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보다 보존 가치가 훨씬 높은 자료가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고비용 노예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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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때로 거꾸로 움직이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특이한 사건이나 우연한 만남 같은 것이 마치 종이 위에 번지는 잉크처럼 크게 떠오르기도 한다.   <p. 91>

그녀의 커피잔 속에 떨어진 달을 보았다. 커피잔 속에서 나방처럼 꿈틀대는 날. 그때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없이 그 달에 키스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가 커피를 식히기 위해 그 표면에 입김을 불어 골을 낼 때 달이 폭파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p. 103>

사랑을 받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었다. 똑같은 열기였지만 다른 방에서 나오는 열기였다. 똑같은 소리였지만 내 가슴이 아닌 높은 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p. 106>

열일곱에 우리에겐 가슴이 없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펄떡거리는 어떤 성스러운, 잔뜩 부풀어 오른 그 무엇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것이 가슴은 아니다. 비록 가슴이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마음과 몸과 미래, 심지어 최후의 외로운 시간까지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 때, 그것은 가슴이 아니었다.   <p. 120>

사람들이 똑똑하거나 신중해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사랑은 신중함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들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p. 302>

나는 냇물을 따라 천천히, 여러 날에 걸쳐, 그 냇물이 강을 만날 때까지 흘러갈 것이오. 나는 아직 살아있고, 다만 잠을 자고 있는 것이기에. 매 시간 나는 더 젊어질 것이오. 강이 부풀어 오른 그 중심을 따라 나를 싣고 가는 동안 나는 한 소년이 되고, 어린애가 되고, 계속 작아져 마침내 별빛 아래 떠다니는 갓난아기가 될 것이오. 어떤 꿈도 꾸지 않는 오들오들 떠는 갓난아기, 바다의 어두운 자궁 속에서 태어난 갓난아기가 될 것이오.   <p.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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