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배 질서를 깨는 일에 지식인들은 왜 흥분할 줄 모르는가. 사르트르는 또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갈등은 해소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지식인은 이렇게 조용히 죽어 가고 있는가. <p. 14>
실제 법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 모두 테크노크라트라는 겁니다. 행정 고시에 합격하면 해외 유학도 지원해 주잖아요. 정말 열정을 갖고 공부합니다. 도덕적으로 테크노크라트를 의심하지 않는 편입니다. 밤새 기획안을 짜며 나라를 어떻게 설계하고 디자인할까 하고 애국심에 불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테크노크라트의 지배가 실제로 시민운동까지 장악하고 있고, 지식인 위기의 어떤 중요한 측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표상이나 대의 질서로부터 테크노크라트는 이탈하고 대중은 추방되고 있습니다. 지식인이 서있는 자리는 모두가 떠나 버린, 실제로는 지식인 스스로도 떠나 있는 텅빈 자리입니다. <p. 37>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p. 53>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라는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p. 54>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p. 56>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대중과 소통해 대중에게 좀 더 나은 진보적 세계관을 이야기해 주고,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대중의 생각과 욕구를 대신 표현해 주는 겁니다. 자본주의로 인해 상실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의 힘입니다. <p. 83>
현대인은 모두 자기기만의 모순에 빠져 있다. 그래서 단순한 쾌락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한 가식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벗어던지고 윤리와 총체적 인격 완성으로 이끄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를 지향하는 것이 시민운동 지식인의 본질이다. 그래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일정한 발전 곡선을 그리는 역사·계급을 포함한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 본질의 원형 또는, 우주적 실재로의 영원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아득한 옛날부터 가슴속에 품어 왔던 진정한 삶의 본질로서 인간의 존재 의의를 되찾는 근원이다. <p. 171>
지배계급을 대변하든 피지배계급을 대변하든 나는 이제 그런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대 지식인은 더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다. 지식인들은 한편에선 곧바로 통치자와 자본가일 것이고, 다른 한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 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p. 222>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2793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