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나에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빈약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의 인상착의 정도가 할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주변에 친구들이나 직장동료, 선후배들이 할아버지와의 생활이나 추억담을 얘기할 때면 상대성에서 오는 강한 부러움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지혜를 터득해간다는 것은 어림 동의어로 간주할 만하다. 나 또한 29년의 인생을 살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몰랐던 인생의 깊이와 넓이를 배워가고 있음을 많이 느끼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교과서나 전공서적이 줄 수 없는 <삶>과 <경험>에서 오는 높은 차원의 <지혜>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에게 쓴 편지형식의 지혜담으로, 공고히 다듬어진 노년의 혜안을 두 세대를 넘어 전달하는 <삶>과 <지혜>의 목소리다. 여느 아이들과는 심히 다른 아이(저자의 손자는 자폐증 아이임)인 손자 샘에게 저자 자신이 겪은 사랑과 상실과 아픔이라는 인생의 깊이 있는 주제를 얘기해 주고 있다. 어린 샘은 세상 어느 누구한테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노년의 혜안에서 오는 득도된 자의 지혜 덩어리를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얻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특성이 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관련된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적잖다. <스쳐 지나가는 것>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지금보다 더욱 젊은 날에 삶의 혜안이 부족하여 <잠시>와 <영원>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채 <현재>라는 시간을 얼마나 무의미하게 소비했던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시간의 특질과 그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된다는 공식은 인생사 불변의 불문율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네 엄마 아빠는 과거의 고통을 미래에까지 가져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샘, 너도 자라면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알게 될 거야. 과거에 매인 사람은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단다.   <p20>

  66억의 인류가 지구라는 곳에 공존하고 있다. 다양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안에서 개인의 달란트를 극대화할 때에 그 사회는 진보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different) 것>과 <틀린(incorrect) 것>을 혼동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편견을 가진다. 더욱이 비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런 편견과 비판이야말로 정말 틀린 것이다. <나>만 있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너>만 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있다는 것.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에 지구라는 집의 평수는 더욱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명심해라.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p33>

  인간은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아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 본모습을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주위의 기대를 버리고 본래의 자기답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과 싸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두려움들이 우리의 내면과 영혼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절대악인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두려움의 내포적 반의어인 <사랑>이란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주적이고 신성하며 자연스러운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것이 신이든, 친구든, 부모든, 아님 사랑하는 이성이든, <사랑>은 반드시 <두려움>의 농도를 희석시킨다.
  나는 물속에 가라앉는 사람과 물에 뜨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가라앉지 않고 물에 뜨려면 물과 싸우기를 멈추고 물을 믿으면 된다. 몸에 힘을 빼고 누워서 물에 몸을 밭기면 되는 것이다.   <p67>

  적을 만들지 말라, 는 말이 있다.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일게다. 분명 좋은 말일테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100%의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싸울만한 가치가 있을 때에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불관용, 거짓, 비정의, 비인권, 차별, 편견 등. 이런 것들과는 싸워야 한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 묵과하고 비굴해하는 이들은 역겨울 정도로 싫다. 신께서 인간에게 <용기>라는 내면적 힘을 주신 이유는 반드시 써먹을 사용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는 자들은 자기 자신과도 싸우지 못한다. 하지만 명심하자.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썼던 수많은 위인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자신은 물론, 잘못된 것에 대항해 싸우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적을 적잖게 만들었다는 것을.
  샘, 개인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난 네가 너 자신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네 분노를 잘 다스려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분노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에너지로 승화시켰으면 더욱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훗날 네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네 손자 손녀들이 훨씬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자라날 수 있을 테니까.   <p199>

  마음에 넓은 그릇을 소유한 사람은 좁은 그릇을 소유한 사람에 비해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미국 부의 51.7%를 차지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연구하는 석학들은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유태민족 중에는 다분히 마음의 그릇이 큰 인물들이 많다는 것을. 넓은 마음에 나와 너와 우리를 품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우주까지 품으며 전진할 때에 역사는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정치력, 경제력, 명예, 노벨상 등의 유태인들의 표상은 바로 그들의 유난히 <넓은 마음의 그릇>에서 연유했다는 것을 나는 심히 믿는다. 

  저자 고틀립 박사는 수많은 지혜의 이야기를 샘에게 전달한다. 아직 글을 읽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읽게될 샘을 기대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샘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사랑으로 점철된 할아버지의 정신적 지혜의 유산은 두 세대의 기나긴 세월의 벽을 넘어 샘에게 반드시 빛을 발하며 전해질 것이다. 

  비록 자폐증으로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샘은 행복한 아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할아버지로부터 매우 소중한 지혜담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샘이 자라서 이 책을 읽게될 때면 자기뿐만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보낸 특별한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보낸 할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얻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샘을 한 번 기억했다는 것. 비록 남들보다 언어가 더디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하더라도 그런 특별한 행복을 자기 인생의 조각으로 채우고 있는 샘은 분명 행복한 아이임이 틀림없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럼 사람이 필요하다.
<p205>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서실의 바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와의 첫 만남은 충분히 즐거운 것이었다. 소위 <위기>로 대변되는 작금의 한국문단의 현주소에서 일본문학은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강타하고 있다. 특히 <온다 리쿠>라는 아줌마 작가의 존재감은 쓰나미의 선봉장격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관심 밖이었던 일본소설에 눈을 뜬 이후 가장 강렬하게 내 눈과 귀와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가 온다 리쿠다. 『유지니아』라는 추리소설을 통해 만난 첫인상은 지극히 강렬했고, 심히 흥미로웠으며, 다분히 만족스러웠다. 블로그에 [온다 리쿠] 메뉴를 따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발산할 만큼 그녀는 뜨거운 감자다.

  그녀의 첫 단편집이 출간된 것을 알자마자 그 어떤 머리속 활동을 하지 않은 채 바로 구독했다. 더욱이 아직 한 권 밖에 읽지 않은 그녀의 작품세계에 대한 <입문서>라고 한 홍보문구는 내 전두엽에서 엔도르핀과 다이도르핀을 동시에 분출하는 지극히 흥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흥분과 기대감이 점철되어 주말을 맞이하여 한달음에 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첫 소설집 『도서실의 바다』는 10개의 독립된 세계를 보여준다. 온다 리쿠를 만나는 <입문서>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그간 출간했던 작품의 예고편격인 단편이 적잖다. 「피크닉 준비」의 경우 『밤의 피크닉』의 프롤로그라 할 수 있는 단편이다. 또한 강한 인상을 남긴 단편, 「이사오 오설리번을 찾아서」는 그녀의 미래를 장식하게 될 SF장편소설 『그린 슬라브스』의 예고편격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단편들이 그녀의 다른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어 <입문서>라는 성격보다 <참고서>라는 색채가 더 자연스러울 듯 싶다.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문서이기도 하고 참고서이기도 한, 그녀의 색채를 명확하게 정리한 <컬렉션>이라고 하는게 정답일 것이다. 

  온다 리쿠는 소설가로서 꽤 훌륭한 <기술력>을 가진 작가다. 극작술 기초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그녀는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플롯 이론이 <시간>을, 무의식 개념이 <기억>을 극대화하면서 작품 속에서 독자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페이소스를 제공하는 동기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련한 감각으로 <시간>과 <기억>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의 능력은 심히 압도될 만하다. 

  이번 단편집도 이러한 <온다 리쿠 브랜드>의 특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미스테리, SF,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전면에 배치한 「봄이여 오라」는 주인공과 친구와 엄마의 시간이 꼬이며 반복되는 서사적 캐논변주곡의 구조를 갖고 있는 인상적인 단편이다. 「오디세이아」는 더욱 훌륭한 단편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거대한 대서사시를 몇 장으로 압축하여 묘사한 듯한 느낌이 압권이다. 「수련」과 표제작인 「도서실의 바다」는 다른 작품에 종속된 단편이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방한 완전한 단편이기도 하다. 그 외의 단편들 모두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와 몰입감으로 온다표 브랜드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교차,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시간적 역동성, 퍼즐을 맞추는 듯한 스토리 라인, 서사의 흐름에 따라 좁혀지지만 종국엔 함구로 정리되는 해석의 다양성 등.. 그녀 특유의 색깔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는 소설집이다. 온다 리쿠 세계에 대한 <시작>으로, 또는 <중간>으로, 또는 <말미>로, 그 어떤 위치에 놓아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작품, 『도서실의 바다』는 작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교과서다. 

  매번 일본소설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저 <활자>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상>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폭과 넓이에 대한 부러움이다. 온다 리쿠를 위시한 대부분의 일본작가들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을 염두하고 집필한 것인양 소설 그대로를 극본이나 시나리오로 전환해도 무방할 정도로 경쟁력있는 작품을 생산한다. 더욱이 일본소설 특유의 대중성과 소재적 다양성은 더더욱 부러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문단의 위기라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게감 있게 들리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일본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은 그들의 문학적 현주소의 나침반의 방향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벤트로 동봉된 『밤의 피크닉』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온다 리쿠의 세계들이 책장에서 읽힐 순서를 대기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예언한다. 온다 리쿠. 그녀의 세계가 주는 만족감을.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 대표 인터넷서점이라는 YES24는 1년 365일 다양한 이벤트를 시행한다. 현재 진행중에 있는 이벤트중에서 다소 감질맛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 4회 네티즌 추천 한국의 작가'라는 코너가 그것이다. 이 코너는 각기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눠 네티즌투표를 하고 있다. '우리시대 대표작가', '차세대 우리작가', '다시 만나는 작고작가'. 이렇게 세 가지 항목으로 네티즌들의 투표를 유도하고 있는 코너다. 뒤의 두개의 항목은 차치하자. 첫 번째 '우리 시대 대표작가'에 대한 네티즌 관심도와 투표율이 단연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의 경우 '노벨문학상 후보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 네티즌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현재 투표가 진행중이어서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투표집계로 보아 1위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1위에는 단연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자가 올라 있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인 24%를 획득하여 그 유명한 조세희나 그 위대한 이문열을 멀찌감치 앞서고 있다. 왜 네티즌들은 황석영에게 '우리 시대의 대표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감'이라는 영광의 몰아주기를 감행하고 있는 걸까? 다시말해서 황석영은 왜 네티즌과 독서매니아들로부터 이 시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데 주저되지 않는걸까? 그 의문점과 황석영의 현재가 만나는 곳에 『바리데기』라는 작품이 있다. 

  황석영의 신작 『바리데기』를 만났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한 여인의 청춘을 설화 '바리공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20세기말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대략 20여년의 시간동안 북한과 중국과 영국이라는 공간에 녹여놓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소설 내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1인칭주인공시점의 화자, 바리가 있다. 

  바리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이었다. 아들을 몹시 갈망하는 집안에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출생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산속에 버려진다. 다행히 기르는 개 흰둥이가 산속에 버려진 바리를 물고 집으로 돌아와 구사일생한다. 
  바리는 어렸을 때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살 때에는 여느 집안 부럽지 않은 평범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점점 심해져 가는 기근과 고약한 북한의 정치체제로 인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때 바리는 바로 윗언니인 현이언니와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흰둥이의 일곱번째 새끼인 칠성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넌다. 
  중국땅에서도 고난은 연속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때문에 산속에 기거하여 살다가 아버지가 떠나가고, 할머니와 현이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의지처였던 강아지 칠성이까지 죽음을 맞이한다. 배려심이 많은 미꾸리 아저씨를 만나 발맛사지업소에 취직하여 마사지도 배우고 샹언니를 만나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역시나 불행은 바리의 삶을 덮쳐온다. 
  샹언니와 함께 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인권말살의 잔혹함을 겪으며 간신히 살아서 영국에 도착한다. 어린 나이여서 몸이 팔리지 않은 채 중국집에서 일하게 되고 마음씨 좋은 사장의 소개로 다시 발마사지업소에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여태까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되는 바리.. 같이 일하는 루나언니의 집에 동거하게 되고 파키스탄 남자 알리를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의 행복도 잠시, 전쟁이 터져 알리는 사라지고 알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이 지나 알리와 다시 조우하게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가 생긴다. 
  알리와 함께 런던시내를 거닐던 어느날 폭탄테러를 목격하면서 소설은 종료된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바리데기』의 이야기 분량의 딱 절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바리데기』는 오직 주인공 바리의 관점에만 의지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축은 두개다. 하나는 바리의 하루하루 일상이고, 또 하나는 바리의 영험한 능력이 빚어내는 꿈과 환상의 몽환적 경험이다. 이 이야기의 양대 축이 끊임없이 교차되면서 소설의 흐름을 진행하고 있다. 바리는 죽은 자와 소통하며 동물의 마음과 교통할 수 있는 영험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능력에 의지하여 현실에서 직면하는 의문과 번뇌를 꿈과 환상에서 풀어놓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관찰하기도 한다. 더불어 이미 죽은 칠성이와 할머니의 혼을 만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할머니로부터 '바리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무엇보다 꿈과 환상에서 끊임없이 찾아 질주하는 '생명수'에 대한 존재의식과 모험심이 바리 자신의 의지를 점점 불태우고 있다. 작가 황석영은 북한에서 태어나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기까지의 바리의 20여년간의 인생여정을 일상적인 일기체로 말하는 동시에 바리의 영험한 능력에 기인하는 꿈과 환상을 매개체로 현실에 대한 해석과 그 소중한 '생명수'에 대한 갈급함을 교차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리데기』는 매우 우울한 소설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바리의 관점은 이성적이면서 건조한 문체로 불행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있다. 바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암울하다. 바리의 시선은 자신의 기구한 삶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불행함에까지 관조한다. 더나아가 남북분단, 북한의 기근, 빈부 및 국가적 양극화 현상, 911 테러,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런던 테러, 쿠바 콴타나모 수용소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말 세계사의 어두운 장면까지 관통하고 있다. 어쩌면 바리가 자신의 꿈과 환상가운데 찾아나선 '생명수'에 대한 갈급함은 현실에서 관찰했던 세상의 어둡고 암울하고 억울한 것에 대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갈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뒷부분에 '생명수'를 찾기 위해 서천의 끝까지 여행하는 바리의 여정을 압권의 몽환적 문체로 묘사하면서 생명수의 존재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과연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명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황석영의 대답은 역시나 단호하다!
"숨은그림찾기입니다. 글쎄요, 이 작품에서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 이는 독자들께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p301, 작가인터뷰中> 

  작가는 생명수의 존재여부와 생명수의 실체에 대한 답을 독자가 찾아야 할 과제임을 피력하면서 생명수에 대한 폭넓은 해석, 그리고 이 세상의 어둡고 암울함에 대한 책임의식을 독자들에게 은근히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 황석영은 '생명수' 자체보다는 '생명수를 알아보고 찾고자 하는 마음'이 본질이며, 바로 그것은 빈부와 국가와 인종과 체제에 초월하여 진행되어야 할 인류의 숙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표준어와 함경도사투리, 현실세계와 몽환적 꿈과 환상의 세계, 한 여인의 기구한 청춘과 20세기말 현대사의 어두운 사건들이 교차되고 반복되는 이 대서사시는 작가 황석영의 상상력과 고집, 작가의식과 역량을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이라 할 만 하다.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YES24의 '우리 시대 대표작가' 투표의 황석영 쏠림 현상은 바로 이러한 그의 괴물스러움을 입증하고픈 문학매니아들의 마우스 클릭이 모아진 결과가 아닐까?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마키아벨리 군주론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1
윤원근 지음, 조진옥 그림, 손영운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의 명저 『군주론』은 대극적인 평가로 양분되고 있는 책이다. 읽을 필요는 있지만 그 내용을 학습하고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책, 존귀하고 위대한 책이지만 극도의 위험성을 함께 내포하는 책이 바로 『군주론』이다. 본래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내용이 작금의 시대상황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체 또한 지극히 건조하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일전에 몇 번 끄적이다가 최근 주니어김영사에서 만화로 새롭게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독할 수 있었다.  

  비록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만화지만 유명한 고전을 다뤘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으며, 일반 성인들도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을 만화로 쉽고 재미있게 재창조했다는 점이 이 책의 굵직한 존재감이다. 다섯 장의 큰 대제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위험하게 읽힐 수 있는 점을 고려하여 1장과 2장에 안전망을 설치해 놓고 있다. 1장은 『군주론』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2장은 저자 마키아벨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결과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는 마키아벨리즘의 위험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책이 쓰여진 시대상과 책이 쓰여진 동기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즘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수단과 과정보다 결과가 우선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주의는 정치활동의 효율성과 신속성의 측면에서 솔깃한 주장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정치의 목적이 종국에는 인간의 행복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많은 희생이 불가피하며 인권이 말살될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음은 아니라 하겠다.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대사도 이를 설명한다. 박정희를 위시하여 30년간의 군부통치는 경제발전이라는 절대적 결과물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바, 수많은 인권이 유린되었고 인류의 절대적 보편가치인 자유가 억압되었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과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과과 역비례하여 공존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적어도 공과 과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 넓은 공감대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쯤에서 시대적인 차이를 목도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면 보다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의 공간이 생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핍했을 당시의 이탈리아는 주변 강대국의 횡포에 몸을 사리고 있었던 유럽의 삼류국가였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희생자가 되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허약한 국가의 표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국가를 통일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여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절대 권력자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군주론의 형태 및 군주가 갖추어야 할 요건 등, 당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발군의 통찰력으로 『군주론』을 집필한 것이다. 

  시대적 차이를 초월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생동감 있게 말해주는 중요한 메세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가 곧 행복한 국가이며, 강한 리더쉽이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나는 전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동의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반만년 역사는 대부분 약하기 그지 없는 역사였다.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침략과 약탈을 당한 약소국의 비애가 아직도 한민족의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다. 지나친 패배주의와 군사독재시절에 대한 향수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더욱이 최근 몇 년 간 계속해서 불고 있는 고구려 열풍은 한민족 역사상 유일했던 초강대국의 역사였기에 당시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주변의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세계 제 2의 경제대국 일본은 우경화의 길로 한걸음씩 나아가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듯 보인다.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쉽 가운데 부국을 향해 나아가며 미국에 대항하고 있다. 인구대국 중국은 전 세계 자본의 23%를 빨아들이며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고, 2020년에는 달을 정복한다는 야심찬 비전을 세워 시선을 우주로 향하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은 많지 않은 인구에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동족과 대치하여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고, 정치는 국민에게 시원함을 주지 못하고 경제는 미지근하기만 하다. 강력하고 믿음직한 리더쉽에 목마른 국민들은 금년에 실시될 대선에 앞서 많은 사유와 토론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국민이 주인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마키아벨리가 생존했던 시절과는 모든 것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좋은 지도자를 뽑아서 국가경영을 잘하는 데 있다. 국가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놓아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절대명제이다. 작금의 대한민국국민들은 강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국민과 야당과 언론을 하나로 뭉쳐 국가적 에너지를 극대화하여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리더쉽. 그 강력한 리더쉽을 국민들은 여망하고 있다.  

  강한 나라와 강한 리더쉽. 이것이야말로 5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차를 넘어 『군주론』과 21C 대한민국이 동시에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비전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없음. 

역사소설만이 갖는 매력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을 절묘한 배합으로 구성한 역사소설은 현대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맛을 제공한다.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 과거와 작가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현재의 시간대가 합쳐지면서 독자는 또다른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고전 스테디셀러 『삼국지』를 위시하여 수많은 국내외의 역사소설은 과거의 사실과 현재적 상상력의 오묘한 긴장감 사이에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다. 

는 그를 사랑했을까?
아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롤로그, p13> 

프롤로그가 예사롭지 않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화인의 숨막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바람의 화원』을 읽기 전 유일한 기초지식이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의 화인을 다룬 역사소설이라는 기초지식과 사랑에 대한 강렬한 갈구함을 보여주는 소설의 프롤로그는 다소 부합하지 않음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걸까? 이백 년이 넘는 과거의 시공간으로의 여행에서 작가는 어떤 팩션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사랑이라.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인상적인 프롤로그에서 목도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내 머리와 가슴을 심히 일렁이게 하면서 프롤로그의 마지막장을 넘기는 데 적잖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 얼굴에 대한 아주 길고도 비밀스런 이야기를. 아마도 당신은 나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설사 진실이 아닌 늙은 자의 노망이라 해도...   <프롤로그, p12> 

  『바람의 화원』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프롤로그에서 역사적 인물이자 소설속 인물인 김홍도의 독백을 통하여 나타나듯이 강렬한 사랑의 서사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표현할 수 없고, 가지려 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던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다. 저자 이정명은 조선시대 실존했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라는 천재화가의 예술과 사랑을 뛰어난 상상력과 흥미있는 전개로 창조했다. 무엇보다 누구도 생각지 못할 발군의 상상력으로 책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야기로 사랑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이 소설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모든 미스테리물이 그러하듯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전복적인 이야기의 반복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두 거장의 작품을 오리지널 컬러판으로 볼 수 있는 흥미거리다. 전자는 십 년 전 의문의 죽임을 당한 두 화인의 살인사건을 하나 하나씩 밝혀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속에서 단원과 혜원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묘미를 제공하며, 후자는 두 천재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동시에 소설속에서 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재평가하는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소설의 후반에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사대결은 압권으로 표현되고 있다. 두 거장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씨름》과 《쌍검대무》를 소재삼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긴장감으로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은 과히 압권이다. 경쟁자지만 경쟁하기 싫었고, 대결하기 싫었지만 대결할 수 밖에 없었던 둘 사이의 그림 대결은 18대 18이라는 계원들의 베팅을 입증하듯 우위를 논하지 못한 채 무승부로 종결된다. 단원과 혜원의 화사대결은 박진감 넘치는 두 천재의 대결이라는 외연적 설정과 함께 이야기의 전후를 정리하여 서사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구성적 내포를 함께 지니고 있는 명장면이기에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작가는 단원보다 혜원을 더 무게감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스승 단원이 제자 혜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부러움과 감탄과 상찬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화서가 생긴 이래 수백 년을 엄격한 법도와 기법에 구속되어 있던 당시의 배경에서 기존의 화풍과 기법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대상을 그린 새로운 그림을 지향했던 혜원 신윤복. 수백 년 이어온 전통에 대한 천재화가 혜원의 대항은 그것을 흠모하며 지원하는 스승 단원에게는 상찬의 대상이었다. 스승이지만 제자보다 못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단원의 고뇌는 소설속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면서 혜원의 절대적 존재감을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홍도는 이 대결 아닌 대결에서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모멸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단지 주상의 명에 충실한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해도 마음속 패배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재의 선택에서부터 윤복은 홍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p174> 

  나는 개인적으로 김홍도의 그림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물론 대담한 소재와 화려한 색상, 그리고 섬세한 필치가 인상적인 신윤복의 그림도 과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혜원의 그림은 대부분 인물과 배경이 비슷한 무게감으로 눈에 비춰진다. 어떤 그림에선 인물이 주가 아닌 부가 되어 배경을 수식하는 느낌이 들정도로 초라하다. 색은 화려하고 필치는 섬세하지만 그림에서 드러난 인간의 내면적 무게감이 한없이 가벼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에 비해 단원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삶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단원의 관찰자적 현미경은 오직 인간에만 초점이 맞추고 있을 정도로 접사모드다.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하며, 차분하진 않지만 역동적이고, 섬세하진 않지만 힘이 있는, 무엇보다 인간과 삶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그린 김홍도의 그림이 내게는 왠지 우위로 느껴진다. 

  사랑은 언제나 화두다. 사랑의 방향성은 언제나 쌍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양방통행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화살표의 한 방향만 성립되는 일방통행의 사랑도 있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뜨겁게 사랑할 때, 더욱이 그 사랑이 오직 자신으로부터만 발생되는 일방적인 방향성일 때에, 그것을 목도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애타고 간절한 마음을 발산시킨다. 소설속에서 김홍도가 바라보는 한 존재에 대한 뜨겁고 강렬한 사랑의 방향성은 그의 작품 못지 않은 힘과 진실성이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다. 

  하나의 또다른 사랑의 기류를 생각했다. 김홍도가 지극히 갈구했던 존재에 대한 방향성 못지 않은 또다른 사랑의 방향. 어쩌면 신윤복은 자기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김홍도의 사랑의 방향과 신윤복이 흠모했던 기생 정향에 대한 방향은 신윤복 자신을 찾고자 하는 방향을 수식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전자의 두 개의 사랑의 방향이 완성되고 다듬어질수록 신윤복의 자기정체성을 향한 방향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소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자,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자, 자신을 향한 사랑의 이야기일 수 있으리라.  

  서평을 정리하자. 소설 『바람의 화원』 은 역사와 예술과 사랑을 화려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하나의 이야기, 한 얼굴에 대한 길고도 비밀스러운 이야기, 믿을 수 없을 이야기. 하지만 진실로 믿고 싶을 이야기. 진실로 믿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 충분히 가볍고 무거우며, 충분히 냉정하고 강렬하며, 전복적이면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적인 이야기. 『바람의 화원』은 그런 소설이다. 

 

형태가 아니라 혼을, 모양이 아니라 내면을, 양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싶습니다.   <p42> 

지금 믿을 수 있는 단서는 기억보다는 기록이었다. 기억은 주관적이지만 기록은 객관적이고, 기억은 순간적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며, 기억은 혼동될 수 있지만 기록은 명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p61> 

알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알아버린다면 아름다움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곳에 손이 닿고, 그 강을 건너고, 그것을 가진다면 가슴속에 들끓던 불덩이는 곧 재가 되고 말겠지요.   <2권, p255>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10-1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이 책 담아갑니다.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상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님의 리뷰는 늘 좋습니다.^^

다윗 2007-10-1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리뷰를 칭찬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매우 흥미있는 책이니 혜경님도 기회되면 꼭 읽어보세요.
추천 꾸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