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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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지난 얇디 얇은 이 자기계발서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위가 매우 흥미롭다. 어느 모임에서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술에 의지(?)하여 자연스럽게 소유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다음 날 숙취의 과정에서 주인장에게 돌려준다는 당연한 약속을 하였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새삼 느끼는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흥겨운 일이라는 것이다. 선물, 책여행, 이벤트 등의 투자 없는 독서의 맛은 심히 달짝지근한 것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겠다. 

  개인적으로 과학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분증은 차치하더라도 생물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한 자로서 진화론이 지닌 방대한 오류와 비과학성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진화론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결국 살아남는 종은 강인한 종도 아니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다. 종국에 살아남는 것은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미 과학은 빛의 속도에 비유될 만큼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와 문화와 경제와 사회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변화는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형국이다. 작게는 애인의 애정 수준이나 회사 상사의 컨디션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지도자의 교체나 세계화의 속성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변화의 물결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이런 거센 변화의 물결에서 얼마나 잘 적응하고 대처하는지에 따라 개인마다의 인과적 열매가 달라질 수 있음은 자명하다.  

  가정이나 직장, 그리고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현재적 나침반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삶에 만족하며 매너리즘에 편승하는 것으로는 이제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과거 조상들이 설파했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가 정답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전의 시대와는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도에 확연한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에 21C의 사회에서 안주하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한 상대적 의미를 함의한다. 다시말해서 작금의 시대에는 조금 빠른 것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많이 빠른 것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선을 내게 돌려보면 이에 대해 나 자신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다. 집과 교회와 직장에서,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서 변화를 요구하는 환경의 목소리에 얼마나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가를 사유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의 삶의 편린들을 곱씹으며 과거와 현재에 철저하게 안주하려 했던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부인하기 힘든 것이다. 영어, 독서, 연애, 다이어트, 신앙 등 수많은 내 삶의 목적어들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겸허한 마음으로 자아를 탐구하게 된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지극히 작은 분량을 통해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상을 농밀하게 그리고 있다. 생쥐 2마리와 꼬마인간 2인의 변화하는 '치즈'에 대한 상이한 탐구방식을 매우 흥미있게 얘기하는 이 작은 우화는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적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과 그런 삶을 지향하고자 할 때에 변화를 주도하는 '치즈'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안주하는 삶 속에서 삶의 시계추를 과거와 현재에 구속시킬 것이냐, 아니면 변화에 대한 열정적 적응을 통하여 미래를 향하게 할 것이냐의 선택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변화>라는 단어를 깊이 사유하며, 동시에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머리속에 그리며 사색의 연못에 잠시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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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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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가 생산하는 아름다운 언어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그의 현재적 시계인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신과 여성과 사랑과 나 자신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감탄의 감탄을 자아내며 가슴을 두근거린 것이 불과 며칠이나 지났던가? 그의 대표적 스테디 셀러의 제목처럼 그가 창조하는 언어 연금술과의 첫 만남은 그의 작품 세계를 현재에서 과거로 급속도로 돌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책장 속에서 읽히기를 기다리는 적지 않은 최신 도서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내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내 인생의 현재적 시간대에 오롯이 입력되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종교적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죽음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우주에서 분리된다는 정의로 상식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재적 우주에 이탈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인간은 <삶>을 지향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 같다. 태아가 모성의 몸 안에서 10개월 동안의 발육을 거쳐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나오고 싶어 안달하며 몸부림 치는 수준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엄마의 자궁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갈망이 만들어내는 밖으로를 향한 태아의 방향성은 한 번도 목도하지 못한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 다시 말해서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인간의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사는 것에 대한 여망은 정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적용되며 반영되어 가고 있을까? 인간은 어느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이 죽음에 대해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는 우리 자신 스스로의 초상이리라. 사는 것에 대한 열망,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 타인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열망에 철저히 구속된 인간은 지금도 끊임없이 삶을 향해 몸부림치고 있다. 사는 것에 대한 걱정, 불행한 삶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속성을 방증하는 또다른 역설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소설 속에서 코엘료가 제기한 '미치다'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자.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 시도로 인해 정신병원 빌레트에 가게 된다. 그곳은 정신병자들, 소위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빌레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자신에게 부여되고 인식되는 '미치다'의 정의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베로니카라는 한 소녀가 등장하면서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다. 베로니카가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에 심취하는 에뒤아르, 베로니카와의 대화와 교제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마리아와 제드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목도하는 병원장 이고르 박사. 베로니카를 통해 발생되는 빌레트 내의 변화는 기존의 '미치다'의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미친 것이 아닌, 미친 척하는 것이었음을. 

  신은 절대로 복사기의 메커니즘으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신 자신이 직접 빚어 만든 인간이란 고결한 존재감은 당신의 생기를 불러 넣은 것에서 다른 피조물과의 완벽한 구별이 완성된다. 한 사람 한 사람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부합할 수 없도록 개별마다 고결하고 소중한 하나의 존재로 창조한 신의 의지는 타인과 구별된 <자아>라는 웅숭깊은 존재감을 확인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법과 관습과 규범과 도덕, 그리고 문화와 습속과 가치관과 불문율 등은 66억의 다양성을 불과 몇 개의 카테고리로 구속하는 요상한 함수 방정식으로 밀어넣고 있다.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닌 보편적 타인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행복한 삶은 공격받게 된다. 

  수준 높은 행복한 삶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때에 가능하다. 타인과 구별되는 나만의 달란트를 탐구하고 계발하며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자아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포장되고 탈색된 거짓 삶, 그런 삶이 간접적으로나마 행복을 비춰줄 수 있다는 비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거짓 삶은 절대로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태초에 신이 창조한 자기 신분증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건강하고 강력한 행복의 근원이지 않을까? 

  또 하나의 행복의 기류를 사유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절대 명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종족보다 사랑에 민감하고, 구속되며, 갈증하는 존재로 설계되었다. 누구를 사랑하거나,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에뒤아르를 통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한 베로니카와 그녀의 연주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게되는 에뒤아르, 그들의 사랑의 쌍방향은 죽기로 결심했지만 결국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회귀될 수 밖에 없는 베로니카의 변화를 추동(推動)케 한다.  

  소설의 마지막, 이고르 박사가 연구했던 결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다른 부가요소가 필요하다. '죽음의 자각'이 주는 삶에 대한 열망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사랑>이라는 으뜸의 삶의 가치가 접목될 때에 비로소 최고의 행복을 완성할 수 있다. 죽기로 결심했지만 죽지 못한 베로니카의 삶은 소설의 종반부가 연장된다는 상상 하에, 하루하루를 하나의 기적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흐뭇한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과 사랑과 행복,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사유하게끔 한 파울로 코엘료는 과히 언어의 연금술사라 불러도 아깝지 않으리라. 코엘료의 아름다운 언어와 주옥같이 정제된 활자들이 만들어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언어 연금술을 재차 상기하며,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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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좋은일이 나에게도 좋은일입니다 -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
안철수, 최재천, 이윤기, 강만길 외 12인 지음 / 고즈윈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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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라는 표지 문구를 달고 있는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입니다』는 국내의 저명한 15명의 지식인들의 상생과 공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이다. 생명과학자, 숲해설가, 기업가, 환경론자, 문명 탐험가, 역사가, 건축가, 소설가 등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집필자들은 다양한 방면과 각도에서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고 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는 지식인들 각자의 가치관과 문체로 설파하는 다양성 존중의 외침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차 있는 한국인의 습속에 물들어 있는 내 자신을 냉철하게 반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꽤 반가운 만남이었다. 

  단일민족국가 대한민국은 오랜 기간동안 동일한 민족과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것에 익숙지 않은 습속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철저한 입시 위주의 공교육은 획일적이고 주입적인 교육을 양산했다. 그렇기 때문에 '왜(Why)'라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학습력은 길러지지 않고, 그에 따른 창의력이나 토론력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을 뽐내고 있는 형편이다. 더나아가 이러한 배경은 '다름(diffrene)'과 '틀림(wrong)'의 정의에 대한 혼선을 빚게 만들었다. 내 주장과 다른 남의 주장은 수용하기 힘든 사회 구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회 의사 결정의 현주소는 물론, 사회적 담론에 대한 일반인의 토론 수준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비관용 문화를 그대로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한국인의 속도 문화는 그 어떤 나라보다 경쟁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960년부터 40년간 경제의 구매력 관점으로 14배 성장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속도는 영국의 5배, 미국의 4배에 달할 정도로 급속도였다. 서구 선진국들이 백 여 년이 넘게 걸린 일을 40년 만에 해치우느라 선전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았는데, 극심한 이기주의와 경쟁주의의 만연이 그것이다. 불과 4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상승하기까지의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었던 가속 엔진은 어느덧 힘을 다했는지 GDP 2만 불의 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KTX의 속도로 달렸던 속도계는 왜 2만 불 앞에서 걷기 수준으로 전락한 것일까? 

  길을 지나가는 이에게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는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열에 아홉의 답변은 동일할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존재가 우리들 머리 속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국한지 230년에 불과한 초짜 나라 미국이 그 짧은 기간동안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집약적인 의견은 바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에 기인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서로 다른 사상, 체제, 이념, 신앙, 출생지, 성징, 피부색 등에 대해 배타하지 않고 그것을 존중하며 공존하고 상생하는 문화, 그것이 유일무이한 초강대국 미국이 존재하는 추동력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2,000여 년 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초강대국이었던 로마도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유니버셜 세계였다. 속주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또 그 주민들을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 인정해 주는 체제는 로마 제국이 주도하는 평화 체제,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건설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실 이러한 관찰은 한국사에서도 여실히 목도된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힘을 가졌던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였고, 그 다양성의 존중과 상생이 초강대국 고구려를 지탱한 힘이 되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시선의 렌즈를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여와 야가 끊임없이 반목하며, 국회는 대통령을 존중치 않고, 정부와 언론이 전쟁을 일쌈으며, 노와 사가 계속해서 대립하는 대한민국의 관용 문화의 수준을 재설계하지 않고서는 GDP 4만불은커녕 3만불조차도 머나먼 당신이 되리라 단언한다. 이제 국가적 에너지가 한 개인의 역량이나 개인과 개인의 경쟁주의를 통해 효율이 발휘되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리더십보다는 멤버십이, 독점보다는 나눔이, 집중보다는 네트워킹이 중시되는 '관계'의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21C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임을 갈파하고자 한다. 

  책의 제목을 생각한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정말 멋진 문장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속담이 없어질 때, 대한민국의 미래는 한층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미래와 희망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제목의 의미를 곱씹는다. 당신에게 좋은 일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콩 세알의 삶 

생명농사 지으시는 농부 김영원 님은
콩을 심을 때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을 위해
나머지 한 알을 사람이 먹기 위해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만주 들판에는 삼전(三田)이 전해오는데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이
눈보다 속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해
하나는 독립운동 하는 데 바치는 군전(軍田)으로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데 학전(學田)으로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生田)으로
단호히 살아내신 터전이 바로 삼전인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오늘
내가 번 돈
나의 시간
나의 관심
나의 능력
어디에 나눠 쓰며 살고 있는가요

지금 나는 콩 세알의 삶인가요
삼전의 뜨거움, 삼전의 푸르림,
셋 나눔의 희망을 살고 있는가요. 

<p. 100, 박노해 《나눔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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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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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Imperor)'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두가지 면이 공존한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가 강하다는 것,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 신성한 것 등으로 정리된다면, 후자는 폭정, 잔인한 것, 백성들의 고통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위하는 황제가 성군일 경우 백성들은 행복하고 국가는 태평성대를 누리지만, 폭군일 경우에는 온갖 피바람이 일어나면서 백성들의 찢어지는 고통이 발생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B.C. 200년 즈음에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후 약 2,000년 동안 중국사는 황제의 역사였다. 하나의 왕조가 탄생될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속에서 대략 200여명의 황제들이 2,0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중화민족사 연구회 회장인 사식(史式)은 『황제들의 중국사』를 통해 진시황제 이래 2,000년의 중국역사를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의 존재를 통해 관통하고 있다.  

  저자 사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통념과는 배치된 의견을 제시한다. 역사는 오로지 사실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성공과 실패로만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결과보다는 동기 차원에서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응당 맞는 얘기다. 우리가 학습하는 과거의 역사 자체가 승자의 역사일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하기에 과정론적으로 역사와 인물을 천착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은 심히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지나친 과정 중심의 역사 해석은 역사의 긴 줄기라는 측면에서 역사의 인과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어떤 과정으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발생한다는 역사의 인과성은 역사 자체를 넓고 깊게 보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역사적 통념을 전복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은 그 논거가 지엽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강해서 읽는 내내 적잖은 부담이 발산된다.  

  예컨데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하지 말라는 강렬한 문장을 시작으로 유방과 항우를 비교한 저자의 주장과 논거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항우는 진실된 사람이요, 훌륭한 장군이요, 양심이 있는 영웅이다. 하지만 유방은 출생이 미비한 천민이요, 전쟁을 모르는 자요, 은혜를 모르는 소인배다. 그런데 어떻게 유방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저자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용인술'에 기인한다. 저자는 항우의 단점은 사람을 잘 쓰지 못한 것이었고, 유방의 장점은 사람을 잘 쓴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유방의 용인술은 항우와 비교하여 유방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비꼬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을 얻고 다루는 것이야말로 인간만사에 있어 성공과 실패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식할 때, 유방의 승리는 당연한 인과성의 순리라 할 수 있다. 항우라는 개인이 가진 장점과 그것에 대한 개인적 흠모를 표현하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으나, 그 주관적 잣대를 논거로 승자와 패자의 역사적 인과성을 무시하며 일반적 통념을 전복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는 진시황제가 평생 남에게 통제당하며 살았던 황제라고 주장하며 이런저런 논거를 즐비하게 늘어 놓는다. 또한 뛰어난 전략가였던 조조에 대한 주관적 비방도 강렬하게 내뿜는다. 더욱이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로 대변되는 중국사 최고의 태평성대를 일군 당태종 이세민과 당현종 이융기의 존재감마저 건드리고 있다. 새로운 접근방식과 해석은 좋은 것이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객관성을 잃을 때에는 접하는 이에게 설득력을 얻기 힘든 법이다.  

  황제의 자질을 평가하는 저자의 일관된 잣대는 <덕성>과 <도덕성>으로 함축된다. 황제는 정직하고, 양심이 있어야 하며, 인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부터 옹정제까지의 15명의 중국황제들을 다루면서 오직 덕과 도덕의 기준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물론 덕성과 도덕성을 갖춘 군주가 좋은 군주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의 역사보다 개국과 망국이 많았고, 그에 따른 왕조 교체가 빈번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 황제사 2,000년의 특질을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왕조 교체의 반복된 혼란상, 그리고 진시황 이래 계속되어진 절대적인 권력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봉건주의 사회라는 점을 곱씹는다면 덕과 도덕의 잣대로만 한 영웅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저자가 언급한 <도덕성>의 잣대를 작금의 시대로 들이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위정자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도덕성은 매우 중요한 정치인의 자격요건이 된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하지 못한 자가 어찌 국민과의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겠는가? 실수한 대통령은 용서할 수 있어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미국 유권자들의 정치 철학은 지구상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대통령을 갖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의 존재감을 정갈하게 대변하고 있다. 

  저자는 과거 중국의 군주제도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서양과는 달리 별다른 견제장치가 없었던 중국식 황제 제도는 결과적으로 전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강력하게 피력한다. 사실 그렇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기에 세계사에서 가장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가졌던 중국 황제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불행의 2,000년 역사를 만든 동기가 되었다. 극소수의 성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혼군이나 폭군이었던 중국 역사 2,000년은 인간이 힘과 권력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이 된다. 

  저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지나치게 주관적인 영웅 해석이 되어버린 책이지만,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를 통해 2,000년의 중국 역사를 관통한 점, 그리고 몇몇 중국 황제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던 일반적 통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점에 대한 신선한 시도와 용기는 반갑기만 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특질, 일인 절대 권력 체제의 허구, 중국식 황제 제도에 대한 모순 등은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에게 여러가지 각도에서 다양한 사유를 하게 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의 중국식 절대 봉건사회를 이름만 들어도 번쩍하는 몇몇 황제들의 존재감을 통해 관통하고 싶다면 사식의 『황제들의 중국사』 는 적잖은 흥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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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부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조그만 나라 시에라리온은 내게 낯설지 않다. 몇 년 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한비야 씨의 책을 통하여 그 나라가 겪은 참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구 약 5백만 명의 작은 나라이자, 평균 수명이 25~35세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나라이며, 인구 대비 신체 장애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 그리고 인구 대비 난민 수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정보가 머리속 기억 저장소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시에라리온이 그런 프로파일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동기에 있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10년의 내전에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과 인권 말살이 이 작디 작은 국가에서 십 여 년이 넘도록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된 그때...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책 표지>
 

  열두 살의 나이. 과연 열두 살의 내 초상은 어떠했을까? 영원히 정지해 있는 내 삶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본다. 열두 살이면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다. 동네 개천에서 가재와 개구리를 잡고, 공을 차고 놀며, 팽이 돌리기와 딱치치기에 몰두했던 열두 살의 초상이 떠오른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이스마엘 베아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족으로 동시대에 태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점을 외면하듯 나의 열두 살과 그의 열두 살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적인 차이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절대적 기준의 차이이자,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 당한 어린 소년의 처절한 아픔이요, 상처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군과 반군의 수 년에 걸친 전쟁을 통하여 시에라리온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지옥이 되었다. 정치적 의사와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의 머리를 베고, 마을 주민들과 마을을 전부 불태우고, 아들들에게 자기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하고, 시끄럽게 운다고 갓난아기들을 반 토막을 내고,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라 아기를 끄집어내 죽이는 등 인간으로서, 아니 짐승이라도 할 수 없을 만한 짓들이 일어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른들의 엽기적이고 광기 어린 행태속에서 어린 아이들은 두려움의 데드 수치를 넘어서는 비정상적인 황폐한 영혼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소년병>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아이들끼리 죽이고 죽이는 살육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시에라리온은 지옥 중에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처참하다. 

  이웃 마을에서 열리는 장기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선 이스마엘과 그 친구들의 기나긴 여정은 뜻하지 않은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피폐함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총과 칼로 무장한 소년병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부모와 이웃을 죽인 원수들 밖에 없다. 가는 곳마다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두르는 어린 아이들의 생생한 장면을 읽어 내려가면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일렁거리며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라면 시에라리온에 태어난 것. 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이길 포기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몸 속에서 들끓는 전율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지극히 어린 나이에 못 볼 것을 보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만 했던 이스마엘은 자신의 에세이를 통하여 아픔과 상처, 회복과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스마엘은 AK-47을 들고 사람 죽이는 일이 물 마시는 일보다 쉬운 것이라 외치며 환호한다. 더 나아가 지치고 상처받은 심신을 위로받고자 코카인과 마리화나 등의 마약을 친구로 벗삼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지옥같은 곳에서 구원받고, 치유받으며,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스마엘을 아껴주고 보듬어준 간호사 에스더를 통하여 이스마엘은 <사랑>이라는 인류 최대의 가치를 경험하게 되고, 점점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스마엘에 대해 에스더가 보여준 관심과 사랑은 이스마엘이 안정감을 누리고 회복할 수 있는 추동이 되면서 따뜻하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잠시 내가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으로 생각의 시선을 돌린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단 3년 사이에 400만 명이 목숨을 잃을 만큼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잔인한 전쟁을 겪은 나라. 이 전쟁으로 제조업 시설의 절반과 철도의 75% 이상이 파괴된 폐허의 나라. 1961년 연간 1인당 소득이 82달러로, 당시 가나의 1인당 소득인 179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 하지만 그 이후 40여 년의 시간차를 넘어 GDP 2만불,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자랑스런 대한민국. 그 어떤 칼이나 총으로 위협받지 않고 두 발 뻗고 잠 잘 수 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행복지수를 부여했던가? 열두 살의 어린 소년 이스마엘이 겪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말살을 목도하며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누리고 있는 내 자신을 동시에 목도한다. 그리고 새삼 감사를 사유(思惟)한다. 

  비단 시에라리온뿐만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곳은 적지 않다. 정치적인 이유로, 또는 가난과 기근으로, 또는 질병과 무지의 이유 등등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좁게는 우리 주변의 질병과 가난과 장애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외된 이웃들, 넓게는 시에라리온을 위시하여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소외민족들까지 제법 인간답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들을 돌아보고 보듬어야 할 의무가 있음은 자명하다.  

  <인권>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권은 그 어떤 사람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고결한 것이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라는 의무를 부여받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인간이 함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평화를 이루고 지향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평화, 그리고 단지 우리 시대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를 말이다. 우리가 이 작은 행성에 공존하고 있는 이상, 같은 공기를 마시며 동일하게 2세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인간>들이란 사실을 직시하자. 그리고 바로 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생각하자. 이 권리는 절대 명제다.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인간도 이 명제의 카테고리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는 개인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가치이자, 동시에 신이 인류에게 질문하고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오직 인간만이 이런 아름다운 지구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과 특권을 선사받은 유일한 종족이기 때문에 이 절대 명제를 완성키 위한 생명수 또한 인간 자신에게 있다.
 

어릴 적에 할머니는 나에게 하늘이 자기를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는 말을 걸어준다고 하셨다. "언제나 하늘에 모든 것에 대한 답과 설명이 있단다. 고통이든, 괴로움이든, 기쁨이든, 혼란이든, 뭐에 대해서든 말이다." 그날 밤 하늘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p. 244>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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