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베스파
박형동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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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함 중 하나는 '추억'이라는 가치를 숭배하는 태도에 있다. 인간은 추억을 만든다. 추억에 갈증한다. 추억을 흠모하며 탐구한다. 다음의 시간이 그 이전의 시간을 형용하며, 미래의 내면 속에 과거와 현재의 인과성이 녹아든다. 그게 바로 추억이다. 이 추억의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의 가슴엔 물기가 적시고 내면은 진화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의 시간은 언제 어른이 되고,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아이를 벗어날까. 어느 한 순간의 사유, 예기치 못한 하나의 경험, 기존의 통념을 벗어난 작은 전복의 기작에 의해 어른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는 시간이 흐른 훗날의 현재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바로 그 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부재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포와 외연의 동시적 변화를 전제한다. 그 변화의 다른 정의는 바로 '성장'이다. 어른은 그 이전의 자아보다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다. 내재적 정의로서의 어른은 성장의 가치를 담보할 때 증명되며, 그것이 실현될 때 비로소 완전체로서의 어른이 성립된다. 요컨대 어른은 성장의 산물이자 궁극이다.

  박형동의 『바이바이 베스파』는 어른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얇은 만화다. 글을 적확히 형용하는 그림과 극도의 절제된 글이 잘 조합되었다. 기존의 칸 나누기 만화의 형식적 그리기를 벗어나 그림은 여백까지 침범하여 공간을 자유화한다. 작가는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을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성장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아이들의 자아상을 잘 그려냈다.

  그림이 주를 이루는 동화책과 그림책이 범하기 쉬운 오류는 그림의 강조에 따른 문장력의 상대적 빈곤이다. 하지만 이 책은 꼭 필요한 절제된 활자가 그림과 최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 지면마다 환상의 유기적 배열로 연결된 글과 그림의 화학구조를 통해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빠르면서도 늦어진다.

  이 책에서 '스쿠터'는 성장이라는 거대한 테마의 작동 방식이다. 다섯 가지 단편에서 아이들은 모두 스쿠터를 탄다. 'CT100'에 앉는다. '비노'를 작동시킨다. '베스파'로 달린다. 스쿠터의 작동은 성장의 세계로 나아가는 매개이며, 아이의 구조에서 어른의 차원으로 치환되는 작동 장치의 메타포다. 하지만 종내 어른이 되는 길목 앞에서 스쿠터와 결별한다. 

  그 시절, 나는 과연 어떤 스쿠터 위에 앉아 있었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당시의 현재상과 이미 어른이 된 후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과거상간의 충돌은 묘한 역설을 머리와 가슴에 질문한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된 그 시절의 다른 초상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스쿠터는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얼마나 달렸나요. 혹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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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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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Edition]



『로드』를 다시 읽었다.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찬연한 호평을 받는 노장의 텍스트를 향해 나는 결코 박수를 보낼 수 없었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 평가해야 하며, 바로 이런 공식에서 『로드』는―적어도 내 주관에서는―별볼일 없는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거장의 문학을 탐독하는데 있어 혹 내게 결락된 부분이 없는지를 반추코자 하는 의지가 강렬히 발동했다.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 권의 소설을 재차 손에 집어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카시는 극도의 건조한 묵시록적 분위기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의 시작부터 종말을 맞이한 인류의 황량한 배경이 제시된다. 하지만 종말의 근원과 성격은 함구된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야기된 인류 최후의 암울한 미래상으로부터 서사는 시작된다.

  작가는 두 명의 인물을 배치한다. '남자'와 '아이'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자 부자 관계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종말의 세계에서 두 부자의 고된 여정은 시작된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으로 무장한 부성애의 표상이다. 반면 아들은 아버지가 없이는 삶을 추동할 수 없는 연약한 자식의 전형이다. 두 부자는 실체가 가려진 비실존적 구원을 찾아 지난한 여행을 떠난다. 남쪽을 향해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부자의 행로에는 일말의 희망을 향한 인간의 용솟음치는 갈증이 오롯이 배어 있다.

  이 소설이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한 코맥 매카시의 의도된 침묵에 있다. 매카시는 종말의 원인과 희망의 실체에 대한 구체화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읽는 이마다 다양한 해석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는 통조림을 뜯어 먹고, 잠을 취하며, 남쪽을 향해 걷는 두 부자의 행동이 거듭해서 반복될 뿐이다. 독자의 아웃풋을 하나의 굵은 공감대로 묵는 것을 차단코자 하는 작가의 기술에 의해 『로드』는 텍스트 자체의 수준에 비해 과대 회자되었다.

  나는 『로드』를 향한 가장 강렬한 비판 논거로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이라는 거북한 홍보문구를 제시하고자 한다. 온갖 찬사로 도배가 되어 있는 다양한 서평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리뷰어들이 이 문구를 통속적으로 때려 맞추는지를 확인했다. 물론 <성서>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텍스트라면 비판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도대체 매카시의 문장 어디가 <성서>에 비견된다는 말인가. 

  『로드』와 <성서>의 공통점은 묵시록적 그림밖에 없다. 하지만 이마저도 두 텍스트는 배리된다. 『로드』에서 묵시록은 전부이지만 <성서>에서는 극히 작은 일부분이다. 『로드』가 제시하는 '희망'은 그저 역할 인물의 교체에 불과하다. 그것도 마지막 석장을 남겨둔채 이야기의 작은 전복으로써 대체된다. 종내 답은 침묵된다. 구원에 대한 해답은 없고, 오히려 고통의 또 다른 연속으로 이어질 뿐이다. "320페이지의 절망, 그리고 단 한 줄의 가장 아름다운 희망"이라고 외치는 소설의 표지 문구는 초라하기만 하다. 소설 말미의 역할 대체극에서 구원에 대한 선연하고 명려한 희망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희망은 없다. 고통만 연장될 뿐이다.

  하지만 <성서>는 다르다. 구원에 대한 명징한 해답을 제시한다. 인류 구원의 해답을 내재적이 아닌 외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세계의 창조, 인류의 태동, 신의 선택, 아가페(agapē), 구원의 원리, 종말, 종말 이후로까지 이어지는 <성서>의 인과적 구조는 비교가 거부되는 절대 고차원이다. 요컨대 '구원'이라는 명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신의 아이러니 속에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에 반해 『로드』는 철저하게 인간 안에 구속된 희망을 얘기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화두만 던질 뿐 답의 해석을 독자의 의무로 토스한다. 제시한 명제에 대한 책임감, 이야기의 풍성함, 서사의 인과성, 그리고 문학적 진수에 있어서도 『로드』는 <성서>와 비교될 수 없는 함량 미달 텍스트다.

  한가지를 더 거론하자. 혹자는 소설에서 시계들이 '1:17'에 멈춰진 장면을 발췌하여 무리한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성서>의 '마태복음 1장 17절'의 구속사적 의미를 대입하는 것이다. 사실 17절까지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의 직계 족보이며, 18절부터 본격적인 예수 자신의 이야기다. 이를 차용하여 『로드』의 텍스트 위에 그대로 올려놓는 혹자들의 과한 접근은 '마태복음 1장 17절'의 의미를 피상적으로 해석한 오류에서 기인한다. 『로드』의 '1:17'과 <성서>의 그것은 의미와 가치, 그리고 차원에서도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로드』의 그것은 전과 후를 나누는 일차원적 분리에 불과하지만, 성서의 그것은 전과 후가 동일하면서 후가 전을 완성하는 동시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로드』의 등장인물 두 사람의 몰개성도 문제다. 인물이 상황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상황만 흘러갈 뿐이다. 인물은 상황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다. 개성이 없이 기호로서만 존재한다. 소설에서 '통조림', '잠', '걷기'는 인물을 상황의 기계화로 고착시키는 상징 장치이다. 그렇기에 매카시가 제시하는 '희망'이라는 명제에는 아이러니가 존재할 틈이 없다. 오직 실체가 없는 텅빈 기표로서 구원에 대한 방향성만이 『로드』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꼴이다. 

  이 소설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매카시의 모호한 처리도 답답하다. 작가는 두 명의 인물을 통해 종말이라는 현상을 쫓기에 바쁠 뿐, 정작 그것을 만든 근원적 모순이나 이를 해체할 희망의 실체에 대해선 묵묵무답이다. 본질은 애써 외면하고 비본질로 채워진 고매한 문장만을 열거할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극히 단선적인 이야기 구도에 작품을 송두리째 맡겼다고 할 수 있다. 어두운 현재상보다는 근원과 결과를 파고 들었어야 했다. 책을 덮은 후 머릿속에 남는 것은 앞과 뒤가 잘린 암울한 묵시록의 스케치밖에 없다. 인물의 인격성 결여, 명제의 아이러니 부재, 허공을 맴도는 그저 도저하기만 한 문장들로 인해 재미없고 지루한 텍스트에 머물고 만다.

  모든 독서에는 읽는이의 주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 주관이 아닌 남의 기호에 따라 책을 읽는 것은 작가와 종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기본이 아니다. 그렇기에 혹평은 소중하다. 인터넷을 통해 읽은 『로드』의 다수 독자평들은 대부분 작품 요약이나 작가의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조합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욱이 이미 미디어에 소개된 평론가들의 찬사평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옮겨놓은 수준이다. 사실 전달의 측면에서 그럭저럭 무리가 없다고 하겠으나 서평으로서 쓰여진 글에 글쓴이의 비판적 판단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면 간접광고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권의 책에 대한 평은 반드시 텍스트 안에서만 논해져야 한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텍스트 내면만을 살핀다는 것은 바깥에 대한 몰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깥에 대한 태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로드』는 분명 텍스트 안보다 바깥이 더 요란한 소설이다. 외연을 두르고 있는 과장된 포장에 의해 너무 심각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로드』는 독자 개개인의 주체로서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해럴드 블룸'이나 '퓰리처상' 등의 거대한 긍정 코드가 이 소설을 압도적으로 형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소설을 두 번 읽는 것도 곤욕이지만 서평을 두 번 쓰는 일도 십자가다. 『로드』를 한 번 더 읽으며 얻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루한 문장을 감내하는 인내심을 고양시킨 것이며, 또 하나는 기존 평점에 별 반개를 더 얹은 것이다. 그뿐이다.

 

★ 다윗이 추천하는 『로드』 찬사 서평 : 고냥씨님 - '변방에서 울리는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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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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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은 마을, 두 남녀의 결혼식이 치뤄진다. 서로 사랑하지 않은 채 결혼한 바야르도 산 로만과 앙헬라 비까리오의 신혼 첫날밤 사건으로부터 비극의 서사는 시작된다. 잠자리에서 앙헬라가 처녀가 아님을 확인한 바야르도는 곧바로 아내를 친정으로 내쫓는다. 앙헬라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장본인이 마을의 멋쟁이 부자 청년 산띠아고 나사르라고 밝힌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평소 산띠아고 나사르는 앙헬라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산띠아고는 고등학교 중퇴 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농장을 경영하는 스무살의 청년이다. 앙헬라와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띈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그였다. 그랬기에 그가 앙헬라를 범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되기 힘든 고백이다. 

  하지만 앙헬라의 쌍둥이 오빠 빠블로 비까리오와 뻬드로 비까리오는 여동생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산띠아고 나사르를 살해하기로 계획한다. 그들의 살해 계획은 마을 내에 충분히 예고된다. 하지만 정작 살인의 타겟인 산띠아고는 죽임을 당하기 직전까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산띠아고 나사로는 자신의 집 앞에서 잔혹한 죽임을 당한다.

  두 형제는 살인을 저지른 후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신부에게 범행을 고백한다. "저희는 양심에 따라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두 형제는 일체의 양심의 가책을 외면한 채 범행의 논리적 완전성을 주장한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며 주요인물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23년의 세월이 흐른다.

  150페이지 전후의 분량으로 하드커버를 두르고 있는 이 얇은 소설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작품 중 최고로 꼽는 소설이다. 자신의 모든 텍스트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고 밝히는 마르케스의 의지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히 드러난다. 요컨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작품이다.

  서평의 도입부터 장황하게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한 이유는 이 소설이 철저히 사실주의적 배경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작가 마르케스가 직접 작중화자로 등장하여 당시 관련있었던 인물들로부터 23년 전의 과거를 회상시킨다. 마르케스 자신의 기자 생활 이력을 증명하듯 이야기를 추동하는 인터뷰 기법은 발군이다. 작가는 충분히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온전히 실행된 살인 사건을 매우 집중력 있게 담아냈다.

  나는 이 소설이 제기하는 두 가지 질문에 주목한다. 먼저 '폭력'과 '명예'의 상치 구도다. 다시 말해 명예를 위한 폭력은 납득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설에서 사회와 집안의 엄격한 도덕적 분위기 가운데 처녀성을 잃은 채 거짓으로 결혼한 앙헬라의 행태는 불명예로 치부된다. 명예를 짓밟힌 자들의 수치심과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개인적 폭력의 발동으로 치환된다. 마을사람들의 방관자적 태도 또한 이러한 폭력성에 대한 묵인이자 그늘진 집단 무의식의 전형이다. 과연 이는 논리인가, 비논리인가.

  또 하나는 '운명주의'다. 이야기 속에서 산띠아고 나사르의 운명은 미리 결정된 듯 보인다. 살인을 위해 달려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우연'이다. 하지만 '필연된 우연'으로 가장한다. 마치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각 역을 정차하며 통과하는 것처럼 산띠아고의 죽음을 위해 달려가는 불운한 우연의 기차는 항시 제 궤도를 달린다. 작가는 한 남자의 죽음으로 치닺는 우연의 상황을 운명이 미리 결정된 숙명적 분위기의 그림으로 잘 그려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작가 자신이 직접 화자를 자처하여 이야기를 추동하는 이 얇은 소설은 참 재미있다. 1인칭 화자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과거 회상을 이끌어내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더욱이 단선적 서사가 아니기에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만 하는 수고가 독자에게 요구된다. 그렇기에 읽는 묘미는 배가된다. 

  정리하자면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얇은 텍스트 내에서 '무의식의 공동체적 현상'과 '운명주의', 그리고 '폭력과 명예의 아이러니한 배리'를 질문하는 작가 마르케스의 섬세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소설이다. 한마디로 묘한 감흥과 깔끔한 텍스트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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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두 번 떠난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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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에 즐겨 읽지 않는다. 그나마 눈여겨 보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요시다 슈이치다. 남자 작가면서도 여자의 마음을 섬세히 그려내는 슈이치의 필치에 평소 잦은 공감을 갖곤 했다. 많은 독자들은 그의 뛰어난 동성적同性的 감수성이 잘 녹아든 문장을 통해 가슴을 일렁인다. 그러나..

  그의 신작 『여자는 두 번 떠난다』는 평소 그가 그렸던 '슈이치표' 연애 서사의 맥을 벗어나지 않는다. 총 11편의 단편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스물을 갓 넘긴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다양한 연애 이야기를 들려준다. 슈이치 특유의 촉촉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전작에 이은 답습에 불과하다. 보다 새롭고, 아이러니하며, 사랑의 다른 원형을 찾고자 했던 기대는 밋밋한 텍스트 앞에서 초라해진다.

  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논하는 데 있어 작품 연대기를 살펴보는 것은 꽤 소중하다. 작가가 쏟아낸 텍스트의 시간적 배열을 통해 그의 문학적 진보는 물론 삶적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여자는 두 번 떠난다』는 밋밋한 텍스트다. 오히려 예전작 『7월 24일 거리』보다 한참 퇴보했다.

  슈이치는 여러 여성상을 소개한다. 각기 개성을 지닌 여성들의 특성과 그녀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발산하는 남자들의 순수한 감정을 결합시킨다. 하지만 전형성은 없고 각기 의미없는 아우성에 불과하다. 마음보다 몸이 우선하는 육체적 행위로서의 남녀 관계 설정, 각 인물의 고유한 개성을 외면한 삼류 드라마틱한 저차원적 단편 서사들, 행간의 의미는 짚어볼 필요조차 없는 일본소설 특유의 식상한 스토리텔링 등은 이 소설의 밋밋함을 선연히 보여주는 것들이다.

  문학은 인간을 바꾸기 어렵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엿보고, 삶의 원형을 탐구하며, 참다운 인생을 질문한다. 그렇기에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도출한다. 유희와 교훈을 동시에 선사하지 못하더라도 문학은 최소한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매순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한낱 청춘남녀의 연애담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고민과 혼신이 담겨진 주관적 언론은 결코 가벼운 텍스트를 분출하지 않는다. 

  양질의 형편없는 활자를 이쁜 표지와 하드커버로 두르고, 유명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비합리적 가격으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밉다. 이런 경향은 일본소설에서 유독 많이 발견된다. 종이와 독자에 대한 예의가 결락된 출판사들의 행태는 씁쓸하다. 이런식으론 곤란하다. 싸구려 연애 담화를 읽을 만큼 독자의 시간은 넉넉치 않고 지갑은 두껍지 않다. 

  리뷰 쓰는 것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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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별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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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 위인을 텍스트로 만나는 것은 언제나 흥분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지 않았던 실존 인물을 만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전이며, 다른 하나는 활자이다. 두 가지의 묘미는 각기 독특하다. 하지만 엄밀성과 객관성에서 글이 말보다는 훨씬 고차원이다. 더욱이 말보다 글로 전달되는, 소위 '활자의 마력'에 가장 민감한 분야가 역사라는 점을 감지한다면 역사 인물을 활자로 만나는 것에 대한 흥분은 결코 녹록지 않다 하겠다.

  지난 몇 년간 한국문단은 역사소설의 범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역사물을 쏟아냈다. 김훈은 한국사 최대의 오욕의 역사를 특유의 강렬한 단문장의 문체로 그려냈다. 신경숙과 김탁환은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굴곡진 근대사를 관통했다. 이정명은 조선시대 두 천재 화가의 삶을 발군의 상상력으로 빚어내 흥미를 유발시켰다. 심윤경은 화려하고 독특한 신라시대의 아우라를 멋지게 현대화하여 독자를 찾았다. 

  제 1회 세계문학상 수상자 김별아는 이러한 한국 역사소설의 책더미에 한 권을 더 보태고 있다. 그녀의 신작 장편소설 『백범』은 한국 근현대사 위인 중에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존경과 선망을 받는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백범의 사랑과 가족애, 혁명가로서의 삶과 번민이 잘 담겨진 소설이다. 서사의 시종을 백범 자신의 1인칭 서술로 고백하는 문장들은 작가 자신의 목소리라 여겨질 정도로 생생하게 독자의 내면으로 잠입한다.

  이야기는 백범이 광복의 소식을 듣고 조국으로 향하는 김포행 비행기 이륙 장면으로 시작한다.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백범은 상념에 잠긴다. 오로지 조국을 위해 타국에서 갖은 고초를 견디며 기다렸던 이십육 년의 세월. 서슬퍼랜 일본 형사를 피해 도망다녔고, 각종 의거로 동지를 잃는 아픔을 감내했으며, 처자식에게 따뜻한 대접 한 번 하지 못한 지난 세월의 편린들을 반추하며 가슴을 일렁인다. 소설의 마지막, 비행기는 조국의 지면에 착륙한다. 비행기 차창 바깥으로 맑고 청량한 하늘을 쳐다보며 감상에 젖는 백범의 모습은 지난 이십육 년의 지난한 시간을 순간화하는 인상적 장면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인물 간의 대화로 주도하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화자의 독백 서술로 서사를 이뤄간다는 점이다. 1인칭 시점의 작중화자 백범은 작가 자신의 분신과 일원화된다. 다시 말해서 백범의 고백이 곧 작가의 서술이며, 작가의 의지가 곧 작품 내 백범의 형상화가 된다. 요컨대 작가 김별아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역사 안에서 발군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주관적 재창조로서의 인물 김구를 탄생시키고 있다. 

  김별아가 만들어낸 김구는 슬프다. 처연하고 구슬프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기본 키워드는 '슬픔'이다. 소설의 모든 소제목은 공통적으로 '슬픔'이라는 단어를 포함한다. 각 장의 이야기를 주제적으로 내포하는 수식어구만 바뀔 뿐 슬픔은 계속되고 진화한다. 각 슬픔의 속성들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나라를 잃은 망국민으로서의 슬픔, 혁명가로서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적 슬픔,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슬픔 등 소설 속에서 고백되는 백범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은 처연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조국을 잃은 채 일그러진 역사를 살아가야 하는 민족의 고통이다. 김별아의 문장은 짧고 강렬하게 그 시대의 아픔을 토로한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칼날 앞에 상처입고 죽어가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처절한 현실을 읽노라면 슬픔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고 가슴은 한맺힌 야수의 발현으로 요동친다. 아.. 한민족 근대사 35년을 짓밝은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여.. 결코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상흔을 마음속 깊은 곳에 돋을새김한다. 

  나는 인간의 삶과 개성을 잘 그려낸 소설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문학은 인간을 탐구하고 해부한다. 인간의 존재감이 결락된 문학은 논할 수 없다. 그 어떤 장르의 소설이든 문학은 종내 인간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으로 귀결되며 치환된다. 인간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엿보고, 텍스트 안에서 작가를 읽고,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을 천착하며, 인물간의 긴장과 아이러니를 관찰하는 묘미. 내가 문학을 읽는 제 일의 연원이다.

  '김구'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웅숭깊은 아이콘을 '슬픔'이라는 키워드로 그려낸 『백범』은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 김별아가 그려낸 백범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읽으며 내 자신을 돌아본다. 그 시대의 분노와 슬픔은 백년의 시간을 넘어 동일한 공간 위에 서 있는 내 가슴으로 안착된다. 그리고 곱씹는다. 청년이여, 세상을 포용하되 담대하라!, 는 백범 선생의 일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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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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