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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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이 또 책을 냈다. 평소 그를 좋아하고 그의 책을 탐독해왔기에 이번 신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구독했다. 금번 출간의 목적과 책의 성격은 기존과는 다른 특수성을 가진다.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은 NLL 대화록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 이 책의 집필 이유다.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적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미 공개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후 문맥에 맞춰 풀이했다. 결론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전혀 없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NLL 사건에 대한 내 견해부터 말하자. 나 또한 대화록 원본 전문을 읽은 사람으로서 이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이와 반대된 생각을 갖는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정치적 반대편에 위치한 자들의 공격은 다분히 악의적인 면이 있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양심의 문제이다. 원본을 읽지 않아서 몰랐다면 게으른 것이고 읽었음에도 정리되지 않았다면 무지한 것이다. 이를 처음으로 제기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정문헌 의원과 서상기 의원은 사실과 다른 거짓 발언을 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도리다. 두 사람의 발언이 만들어낸 파장을 감안하면 국민에게 사과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는게 적절한 처사로 보인다. 그게 참된 보수의 모습이 아닌가.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견해를 내뿜는다. 특정 정파나 일부 언론의 목소리에 편승해 자신의 주관을 피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개인마다 정치적 자유가 있고 입장차가 있으며 각기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실관계의 객관성을 가늠하는 역량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영역이 추동하는 법이다. 팩트를 발견하고 추출하는 기능은 따뜻한 가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가운 머리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보수·우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나조차도 NLL 발언의 진실과 관련된 입장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굳이 유시민의 책과 강연이 없어도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대화록을 진지하게 일독만 해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분명한 사실관계가 정파성이라는 이기적 용광로 속에서 모호하고 부적절한 과정을 통해 침해받고 왜곡됐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저자 유시민은 이러한 나와 엇비슷한 감정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극진한 그로서는 현실 정국에서 벌어지는 코메디와 같은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을 게다.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한 한계 또한 지니고 있다. 'NLL 대화록 설명서'라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당시의 정상회담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잘한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았던 게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여론조사를 보라. 이는 국민 다수의 견해다. 평소 참여정부의 공과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구분해왔던 저자였기에 중용을 잃어버린 서술로 자화자찬한 그의 서술은 한없이 아쉽다 하겠다.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 제시와 그것을 논증하기 위한 논거 대입의 적절성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증명하려는 사실이 분명한 '사실'일지라도 논증방식이 설득력을 잃게 되면 증명의 고결성은 침해받는다. 유시민의 논조는 간단하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반전과 전율이 뒤섞인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정면돌파와 김정일의 호탕함이 빚어낸 낭만적인 무대였다는 게 유시민의 일관된 입장이다.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찬양으로 도배하고 있다. 유시민의 말대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찬양할 게 많은 축복의 잔치였을까.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만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형편없는 점수를 주고 있는 사람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정국을 차갑게 만든 NLL 논란의 빌미도 노 전 대통령의 부적절한 발언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꺼내서 반대편으로부터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대북관계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일부 세력들은 NLL 추후 협상 명분을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남북불가침부속합의서'에서 찾는다.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로 명시돼 있는 부속합의서 10조 항목을 NLL 협상 명분의 근거로 들이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에 따라 존재하는 본래적 전제를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대변되는 공산권의 몰락으로 인해 체제유지에 위협을 느낀 북한이 벼랑 끝에 몰려서 시작한 협상이었다. 당시 북한의 GDP는 마이너스였다.
노태우 정부는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북방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이에 체제 위협을 느낀 북한 측은 한반도 비핵화를 요구했고, 노태우 정권과 미국은 이에 동의하여 "한반도 내에 핵무기는 없다"고 선언하며,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전제가 성립된 것이다. 결국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각기 서명 및 발효하게 된다. 즉 남북기본합의서는 애당초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시작된 협상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서해 5도 한참 밑에 내려온 '조선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2000년엔 후속조치 성격으로 '서해 5도 통항질서'를 발표하며 남북기본합의서를 위반했다. 또한 부속조항에 있는 군사훈련 협의사항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 조항 등을 위반했기에 그 부속합의서의 협의사항을 남측이 이행할 의무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김대중 정부에서조차 NLL을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7년 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국방장관회담 등을 통해 NLL 협의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북이 버젓이 핵 개발과 핵 실험을 실시하고 합의 내용의 군사관련 지침사항을 일관되게 무시해오고 있는데 왜 우리가 먼저 몸을 낮춰 협상 테이블에 올려줘야 하는가. 더욱이 서해 앞바다를 실질적으로 북에 내주게 되는 '등면적 공동어로수역'을 역대정부 최초로 논의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2차 남북정상회담의 내용과 가치를 확대 포장하고 예찬한 저자의 서술은 다수 국민의 정서와는 배리된 초라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철하면서도 입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북한'이라는 의미는 자유와 인권의 부재 가운데 굵주림에 허덕이는 우리 동족이 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명명되는 북한 권력의 지도층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정통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다. 김일성이 창시하고 김정일이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북한의 혁명사상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궤를 달리 한다. 사유재산을 부정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마르크시즘의 카테고리로 편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북한 군부지도부는 마르크스의 'M'자도 모르는 세력이다. 단언적으로 북한이라는 집단은 김씨 3대 세습독재체제로 근거되는 왕조체제인 것이다.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엽기적인 독재체제를 오직 선군정치와 공포정치의 방식으로 공고히 유지해가면서 인권을 말살시키고 인민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북한 정권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지하고 대변할 수 있는가. 이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념에 대한, 아니 북한 체제가 갖고 있는 본질적 오류에 대한, 더 나아가 숭고한 인간성의 숙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달려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이 부분에 대한 중량감과 숙연성肅然性을 너무 낮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문제다.

   책에 피력된 유시민의 대북관은 앞서 언급한 한국 진보좌파세력의 중론과 그대로 부합한다. 그는 북한 체제가 가진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최대한 좋게좋게 구슬리면서 인내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다루듯 참고 또 참으면서 달래고 퍼주며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개인이 아니다. 북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국가 간 외교는 인간 사이의 교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집단(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이 무서운 것은 개인보다 훨씬 많은 다양성과 의도성, 개별성과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문서로 협의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지속적인 도발로 전쟁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북에게 '햇볕'이라는 어쭙잖은 용어를 전면에 배치하며 퍼주기식 정책으로 일관했던 진보정권 10년의 대북정책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유시민은 적어도 국민의 대북정서가 어떤 분포로 형성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는 공부가 덜 된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기조 위에서 쓰여졌다.

   서평을 정리하자. 유시민의 신간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는 논증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해설하는 기능을 지닌 책이다. 그 기능에는 충실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나간 게 문제였다. 지나친 미화와 불필요한 논거, 그에 따른 편협한 시각의 의견개진은 대부분의 국민의 대북정서와는 멀리 떠나 있다. 읽는 동안 눈살이 찌푸러졌다. 굳이 긴 분량이 필요한 책은 아니었다. 쓸데없이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유시민에게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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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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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무언가를 만날 때 작가는 번민한다. 실존의 분명한 인식과 이를 향유하는 엄연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어에 갇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글프다. 언어는 모든 걸 정의하지 못한다. 존재의 본래적 성질이 가지는 다양한 층위를 언어는 대등적으로 연결해내지 못한다. 정의定義의 메커니즘 속에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적 형식이 있다. 언어가 무언가를 풀어내려고 할 때, 바로 그 찰나의 지점에서 시공간상의 불일치를 띠게 되면 의미 전달은 굴곡되고 수용受容은 본연성의 파괴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언어가 인류의 위대한 발명작이면서도 뚜렷한 한계를 지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가 가진 역량의 역부족은 '사랑'을 만날 때 확연한 기조를 띤다. 언어는 사랑의 본질을 추출해 정리할 재간이 없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언어 위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언가다. 사랑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아가페([그리스어]agapē)'로 명명되는 신성적 사랑의 디테일은 바로 이 지점을 관통하면서 생성된다. 사랑의 언어는 오직 사랑뿐이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서로 병렬적으로 위치해 있지 않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속성에서 파생된 에너지의 극히 작은 함량의 일면이다. 인간의 본래적 실존은 신의 형상에서 연원한다. 이 지점에서 '신'과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을 이탈한 비본래성의 비극은 오직 신과의 종속성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그렇다.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공지영은 새로운 소설을 통해 사랑을 예찬한다. 그의 신간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대등한 구도에 상정함으로써 종국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곱씹는다.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이방인 성직자들의 삶과 이별에 괴로워하는 젊은 수사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서술된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해 고뇌하는 작가의 진지함이 인상적이다.

   소설의 배경은 수도원이다. 신부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 '정요한'은 휩쓸려 오는 한 여인의 사랑과 성직자라는 자신의 본분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인물이다. 친구인 미카엘은 인텔리전트하지만 교회와 교회 장상들에 대해 극도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안젤로는 모든 일에 부박해보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언행과 특유의 매력으로 수도원 사람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다. 세 인물은 농밀하게 교제하면서 수도원 내에서 특별한 우정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두 친구(미카엘, 안젤로)의 죽음과 한국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일을 겪으면서 요한은 점점 달라져 가는 자신의 내면의 색상을 발견해나간다.

   요한이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본질상의 내적 변화를 이뤄가는 시점은 한국 전쟁 때 일어났던 어느 한 기적적인 실화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은 흥남 철수 때 목숨을 걸고 기적적으로 12명 정원의 미국 화물선으로 1만 4,000여명의 한국인을 구조한 선장 마리너스의 이야기이다. 마리너스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수사로 평생을 살다가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러 간 요한을 위시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구조 과정을 극적으로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화물선의 갑판에서 부두로 던진 그물은 피난민들에게 '높고 푸른 사다리'였다. 이 사다리는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고 분명한 삶이었으며 치열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전부'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을 관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는 신과 인간 사이에 고민하는 한 젊은 성직자의 내적 번민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또한 '발현發現'과 '대상對象'을 모두 포함하는 사랑의 입체적 구조에 대해 강도높게 질문한다. 어쩌면 작가 공지영의 말대로,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무르는 존재, 일지도 모른다. 너를, 나를, 우리를, 신을,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궁극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배반에 봉착할 때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숭고한 가정이 무색할 만큼 현실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악의성 앞에서 체념하고 좌절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지난 한 해 "하나님 대체 왜?"라는 오래된 물음과 격렬하게 씨름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며 가지는 적나라한 고통의 대부분은 작가가 언급한 '오래된 물음'의 내밀한 구조 안에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신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남발할 수밖에 없는가. 왜 인간은 세상사의 무지와 몰이해 속에서 발버둥치는가.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 인생은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한 것이다. 참으로 고약하면서도 명징한 역설逆說이다. 고통과 행복은 서로 이간질하는 사이가 아니다. 둘은 서로를 긍정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한다. 사랑 때문이다. 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신은 자신이 선점한 사랑을 근거로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사랑의 불꽃은 신과 나를 넘어 타자와 전 인류를 포괄하는 거대성의 발현으로 확대 증거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과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소설의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 주제와 이야기 흐름상 '사다리'는 구약성서의 '야곱의 사다리'에서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꿈 속에서 만난 사다리는 지상과 천국을 잇는 통로이다. 우리와 우리, 너와 나를 연결하는 용서, 화해, 사랑을 의미한다. 그곳은 오직 신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신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높고 푸른"의 의미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의 메타포다. 또한 "하나님 왜?"라는 작가의 오래된 물음도 사다리의 진실된 의미 속에 녹아 있다. 즉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성에서 발현된 태동적 사랑의 통로로서 인간 본질의 모든 고통과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답을 선사할 수 있는 신비롭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그 무언가인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공지영 문학은 끊임없이 진보해왔다. 이제는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의 신간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극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서평을 지극히 기독교적 주관으로 일관한 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신을 떠나서는 이 소설이 가진 아름다움의 극치를 풀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지독하게 종교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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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 - 나라 만들기 발자취 1945∼1987
이영훈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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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최근 교육부 검정을 새롭게 통과한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교과서 논쟁을 다시 부채질하고 있다. 이번 논쟁을 '좌편향·우편향'이라는 좌우이념전쟁의 구도로 몰아가서는 곤란하다.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설되었는가"라는 숭고한 질문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객관적 사료뿐만 아니라 시대정신을 바탕에 둔 역사가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역사전쟁은 카의 이상과 달리 '사실'과 '해석'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무너지고 해석이 사실을 난폭하게 지배하는 형국이다.

   이런 배경에서 균형있는 역사서가 새롭게 출간된 점은 반가운 일이다. 사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책 중 쉽게 추천할 만한 책이 없었다. 극히 좌익적 관점으로 기술하는 바람에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굴곡시킨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인물의 공과功過를 상식의 중량대로 담아내지 못해왔다. 아직까지도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역사 서술이 서점가를 지배해왔다. 압도적 다수였다. 이게 늘 근심거리였다. 그러던 중 반가운 책 한 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신간 <대한민국 역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책이다. 엄밀히 말해서 해방 이후부터 87년 체제까지를 다루었다.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냄으로써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1987년을 한국 근현대사의 첫 번째 종점으로 규정한 저자의 기준은 적절해보인다. 또한 보수와 진보에서 각기 다른 이념적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여태까지 균형있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나름 용기있게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을 보는 것처럼 정치적 이념이 양극단으로 치열하게 벌어진 극심한 이념전쟁을 펼치고 있다. 중도와 중용의 본래적 가치는 사라졌다. 모든 것이 자기와 자기세력만의 이념주의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 나라 정치가들은 모든 걸 이념의 문제로 치환한다. 국방과 안보는 물론 건국과 독립의 문제까지 이념의 프레임으로 파고드려 한다. 이런 배경에서 나라와 국민이 세계 속에서 앞으로 전진할 힘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국가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 이영훈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옹호한다. 저자는 두 이념을 각기 '이성'과 '감성'으로 영역으로 구분하는데 그 선후에 있어 단연 이성을 앞세운다. 즉 자유민주주의의 굳건한 토대 위에 민족주의가 발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인류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가 민족감정의 방향을 건강하게 견인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올바르다. 현대사를 보라. 이 순서가 호도된 '민족주의'로 인해 얼마나 참혹한 역사를 만들어냈는가를. 단언한다. '자유'가 '민족'보다 앞선다.

   민족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를 전제해야 한다. 김구를 보자. 김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열혈투쟁으로 무장한 용기있고 기백있는 위인이었다. 이를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해방 이후 세계정세를 보는 안목과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정치력에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자유와 비자유에 대한 기본 식견과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힘은 한없이 부족했다. 물론 김구는 자유와 민족을 동시에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민주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정치이념의 구조가 이러했기 때문에 민족의 분단이 임박하자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몇 차례나 자신의 입장을 바꾸면서 허둥지둥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살아남았으며 번영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이 건국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을 "일신一身에 구차한 안일安逸을 취하는 자"라 했던 그의 매도는 그를 존경하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긴 유언으로 남았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대한민국의 나라만들기 역사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p -161>

   김구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수놓았던 주요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차분하다. 이승만의 공과를 잘 구분하였고 박정희의 명암을 잘 드러냈다.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과오로만 일관하고 있는 기존 역사책들의 한계를 적절하게 바로잡았다. 현재의 성공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균형있고 입체적인 천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차원에서 일방적인 비판에서 벗어나 공과 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균형을 잡은 점은 저자의 용기이자 이 책이 가진 힘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해 명확하고 일목요연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책이 가진 전제는 대한민국은 성공한 국가라는 점이다. 기존 한국사학자들은 낡은 계급적 민중사관에만 집착하고 그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에 따라 역사를 국가정체성의 강화가 아닌 오히려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부각시키는 도구로 사용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역사는 실패한 역사가 아니다. 오류와 상처도 있었지만 종국적으로 대한민국은 성공했다.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세계에서 유일한 3대 신용 상승', '세계 5대 공업국과 7대 수출국', '올림픽 5위', '일제 35년과 한국전쟁을 이겨내고 이룩한 건국과 경제발전', '안정된 수준에 오른 민주주의', '일본·그리스·스페인이 부러워하는 튼튼한 재정',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건강보험', '한류의 폭발적인 인기와 세계적인 관심' 등 대한민국은 꽤 괜찮은 나라이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의 성공을 우러러보고 있다. 자부심 좀 가지자.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싸우자. 나라의 건국과 국가 현존의 긍정에 대해 당파로 갈라져 싸우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국가정체성과 애국심, 자긍심의 문제에 '좌·우'가 어디 있는가. 모든 걸 좌·우 이념의 문제로 환원하는 건 한국사회가 가진 지독한 암癌이다. 이 못된 질병이 사라지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지 못할 것이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20세기 말부터 사실을 신성시하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역사도 당대의 편견이 반영된 담론의 일부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이 확산됐지만 최근 들어선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실 자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전회(Empirical Turning)가 일어나고 있다""역사적 진실은 도외시한 채 정파적 이념에 따라 역사를 재단하려는 자세부터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객관'으로 내려놓고 그 전제 하에서 필요한 것들만 '주관'으로 다스리자. 한 나라의 근현대사를 갖고 정파적 이념으로 갈라져 싸우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부끄럽다.

   역사전쟁의 한복판에서 기존의 굴곡된 인식을 바로잡으려 한 것만으로도 이영훈 교수의 <대한민국 사>는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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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시리즈 60 나남신서 1157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다. 문화와 시대가 바뀌어도 훼손되지 않는 궁극의 메세지를 담아낸 텍스트를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그렇다. 고전은 시대를 뚫는 힘이 있다. 시간의 흐름과 다양성의 폭풍우를 이겨내는 힘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고전이 갖는 본질이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한 데서 발단된 대공황은 순식간에 세계를 잠식시켰다. 전무후무한 파괴력을 가진 세계적 대공황을 극복할 해결책은 당시로서는 케인즈주의(Keynesian economics)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불황은 유효수요 부족의 탓이며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명쾌한 케인즈 이론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던 시대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케인즈의 처방대로 뉴딜정책을 실행하며 국가를 거대한 괴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는 해괴망측한 악마를 경험할 때까지 케인즈식 총수요관리정책이 지닌 내밀한 한계를 감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소수의 사람 중 하이에크라는 위대한 경제학자가 있었다.

   세기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불멸의 저작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을 통해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다. <노예의 길>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어마어마한 책이다. 좌·우파 할 것 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로 꼽힌다. 하이에크는 이 두껍지 않은 책을 통해 자유의 속성과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파했다. 자유가 얼마나 올곧고 가치있는 것인지 대중을 향해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강변했다. 자유의 속성이 정치, 경제, 법 등 우리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질서와 체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숨쉬고 작동돼야 하는지 냉철하고 명확하게 논지했다. 저자의 논설이 가진 생명력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불태울 정도로 강력한 울림을 선사한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와 대척점에 서 있던 경제학자다. 하이에크가 옳았냐 케인즈가 옳았냐 하는 식의 경제사상의 이념구도를 펼칠 생각은 없다. 내가 하이에크에게 손을 들고 경외를 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천착했던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견해와 방법론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케인즈는 '작은 정부·큰 정부'라는 외연적 개념을 논하기 이전에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철학적 입장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견지했다. 애초부터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다.

   경제학에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라 연구의 방향과 천착의 초점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선하거나 악하게, 혹은 유동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프레임으로 보는가는 모든 경제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가 된다. 4대 경제학서를 집필한 스미스(Adam Smith),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밀(John Stuart Mill),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전제했다. 이 차이에서 촉발된 각기 상이한 경제론의 천착과정은 그들만의 경제학을 세우는 깃발이 됐다. 그렇다면 하이에크는 어떤 깃발을 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다. 그리고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다. 건강하고 활력있는 경제적 동력은 집단의 중앙시스템이 아닌 각 개인이 자유롭게 부딪히며 생성되는 지식과 정보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하이에크 경제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은 사회와 다르다. 서구사회는 기독교가 물려준 유산으로 개인주의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그러나 동양은 다르다. 적어도 동아시아권은 유교공동체사상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어 선의를 따져보는 과정을 결락시킨 채 '협동'과 '공동체'라는 의미를 절대선으로 포장해버리는 의식이 존재해왔다. 그 결과, 가장 극단적인 일본의 예처럼, 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라는 20세기의 참혹사를 규정지었던 악독한 마약이 폭넓게 스며들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놓게 되었다. 20세기의 수많은 직업정치가들은 그 여백 안에 자신의 권력의지를 채워넣기 위해 발버둥쳤다. 나라와 국민이 불행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상보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변증법적 관계는 더더욱 아니다. 둘은 서로간의 특별한 모순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강조되면 사회는 줄어든다. 반면 사회가 강조되면 개인은 위축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하게 증명한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항상 그랬다. 한 번 커져버린 '사회적 체계'가 다시 기존의 '원자적 개인'으로 분해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20세기의 우울한 교훈은 일단 국가가 팽창하면 다시 부피를 줄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역사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 싸움의 소용돌이 가운데 하이에크의 명저 <노예의 길>이 놓여 있다.

   하이에크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참 벌어지는 1944년에 이 책을 썼다. 히틀러의 독재와 소련에서 벌어진 전체주의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색채로 물들어가는 영국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결의로 펜을 잡았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힘을 빌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에 대해 그는 경고한다. 그 믿음과 그에 기반한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퇴행적일 뿐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사람들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위적 질서'로 바꾸려 들면 애초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향력이 커져 막강한 힘을 지난 정부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국가를 항상 지상의 지옥으로 만들어온 것은 인간이 그것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애쓴 결과였다"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휄더린의 풍자를 일용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꼬집는다. 하이에크는 훗날 이를 인간의 '치명적 자만'이라고 명명했다. 말년에 펴낸 그의 또 다른 역작 <법, 입법 그리고 자유, Law, Legislation and Liberty>도 이 같은 자생적 질서론에 기초한 독창적인 사회 철학을 펼쳐 보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경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자유주의적 철학을 내놓는다. 저자는 주장한다. 경쟁과 시장이 긴요한 것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정의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경쟁이란 서로간에 다투는 과정이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인간 내면에 체화되어 있는 지식과 정보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국가는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는 확인할 수 있지만 개개인이 가진 잠재성과 그것의 부딪힘으로 발산되는 내밀하고 고차원적인, 무엇보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발생되는 숨겨진 정보와 지식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정보의 부족 내지는 결락, 바로 이점 때문에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오랜만에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을 소환한 이유는 간명하다. 개인의 자유가 가지는 소중함이 점점 외면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 내 지성과 양심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유의 의미는 '경제적 자유'로 통합되어 표상된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자유'의 범위로 밀어넣었다. 즉 현대적 의미의 자유는 사유재산권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법률과 체계로 정의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복지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국가 크기의 확대를 어디까지 상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시끄럽다. 그에 따라 당연히 대두될 수밖에 없는 '증세', '국가재정', '국민분열'의 문제는 끊임없이 정국을 요동시킨다. 국민을 선동하며 시끄럽게 인기몰이했던 무상시리즈는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무상급식 논쟁과정에서 당선된 현서울시장은 돈이 없다고 징징대며 중앙정부를 두들기고 있다. 현정부의 야심찬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방향성을 잃고 오락가락 하고 있다. 노인복지의 보편성을 담보한 기초연금법도 시끄러운 논쟁 속에서 축소 개정되었다. 중앙정부의 부채 중 갚을 여력이 없는 적자성 채무가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공기업 부채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국민세수는 끊임없이 감소하고 있다. 과연 이 나라가 정상인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가 커질수록 개인의 재산권(자유권)은 위협받는다. 플라톤식 유토피아와 헤겔적 국가주의는 항시 자유주의를 공격한다. 국가가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면 독일의 나치즘이나 소련의 전체주의와 같은 괴물이 만들어진다.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가 모든 생활을 통제하여 개인의 자유보다 구속력 있는 법률을 우선시하는 이상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대중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예의 길>은 바로 그 점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울한 것은 역사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패턴은 국가와 민족을 옮겨다니며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글프다.

   케인즈는 <노예의 길>에 깊은 공감의 뜻을 전했다.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당신의 견해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내가 당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책장 구석에서 하이에크의 명저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케인즈의 말대로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의 견해는 명징히 옳다. 그 어느때보다 하이에크의 외침을 되새길 시점이다. 진보·보수, 좌파·우파 할 것 없이 머리맡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반드시 찾아서 읽어봐야 할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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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에 먼지가 많이 쌓였다. 예전보다 책을 읽지 못하는 환경적인 배경도 있지만 아무래도 결혼 이후에 시간상의 한계로 후기를 남기지 못한 측면이 크다 하겠다. 물론 내 게으름이 일차적인 사유가 될 것이다. 즉 블로그에 쌓인 먼지는 주인장이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반추하건대, 지난 몇 년간 내 독서는 '문사철文史哲' 중 역사와 철학에 집중적으로 머물렀다. 전통적으로 호감을 보여왔던 장르인 문학엔 한없이 소원했다. 최근 발표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그간의 내 독서편식을 일깨웠다. 주지하다시피 금년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단편 여류작가 앨리스 먼로(Alice Munro)에게 돌아갔다. "단편소설을 특별한 예술 형태로서의 완벽한 경지로 올려놨다"고 요란을 떠는 스웨덴 한림원의 시상 배경은 관심 밖이었다. 인문학의 명징한 한 기둥인 문학과 소원해진 내 독서의 일그러진 현존을 응시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이러한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특히 우리사회가 어딘가의 호도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어두운 현실인식이 '사철史哲'에 대한 내 관심을 부채질했다. 고백컨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싶었다. 무지가 두려웠다. 알고자 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공히 제대로 안 후에 작금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고 생산적인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는 중용적 지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의도는 그러했다. 만만치 않았다. 결국 허무했다. 세상의 문제와 번민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요체는 그저 '아는 것'으로만은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진리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고 세상은 복잡한 것이었다.

   최근 재독한 하이에크의 명저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룬 신간서적의 후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앞으로 블로그 내에서 정치적 입장과 이념주의적 색채를 발산하는 일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한다. '순수 북리뷰어'라는 이곳의 순전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표현했다. 선을 넘어선 적도 있었다. 경박했다. 부족했다. 스스로 마음을 추스린다.

   온라인서점을 둘러봤다. 반가운 문학 신간소식이 줄지어 메인을 장식했다. 한국 역사사회소설의 대가 김주영은 <객주>의 마지막 10권을 내놓음으로써 마침내 완간을 마무리했다.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필생의 역작 <파운데이션>은 그 거대한 시리즈를 모두 모아 완세트로 출간됐다. 신비로운 언어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는 신간 <아크라 문서>를 이미 출간시켜 호평을 받고 있다. 희대의 이야기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와 우리시대의 공감작가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출간을 대기 중이다. 반갑고 흐뭇한 리스트다. 고민없이 전부 카트에 집어넣었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시끄러운 현실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끄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번민하는 현존 인간을 쓰다듬는 가슴의 크기를 확보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걸 잊고 있었다. 깨달았다. 뒤를 돌아봤다. 문학의 필요를 새삼 갈망했다. 문학이 공허했던 내 가슴 속의 여백을 무언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운으로 채워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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