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무언가를 만날 때 작가는 번민한다. 실존의 분명한 인식과 이를 향유하는 엄연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어에 갇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글프다. 언어는 모든 걸 정의하지 못한다. 존재의 본래적 성질이 가지는 다양한 층위를 언어는 대등적으로 연결해내지 못한다. 정의定義의 메커니즘 속에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적 형식이 있다. 언어가 무언가를 풀어내려고 할 때, 바로 그 찰나의 지점에서 시공간상의 불일치를 띠게 되면 의미 전달은 굴곡되고 수용受容은 본연성의 파괴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언어가 인류의 위대한 발명작이면서도 뚜렷한 한계를 지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가 가진 역량의 역부족은 '사랑'을 만날 때 확연한 기조를 띤다. 언어는 사랑의 본질을 추출해 정리할 재간이 없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언어 위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언가다. 사랑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아가페([그리스어]agapē)'로 명명되는 신성적 사랑의 디테일은 바로 이 지점을 관통하면서 생성된다. 사랑의 언어는 오직 사랑뿐이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서로 병렬적으로 위치해 있지 않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속성에서 파생된 에너지의 극히 작은 함량의 일면이다. 인간의 본래적 실존은 신의 형상에서 연원한다. 이 지점에서 '신'과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을 이탈한 비본래성의 비극은 오직 신과의 종속성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그렇다.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공지영은 새로운 소설을 통해 사랑을 예찬한다. 그의 신간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대등한 구도에 상정함으로써 종국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곱씹는다.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이방인 성직자들의 삶과 이별에 괴로워하는 젊은 수사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서술된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해 고뇌하는 작가의 진지함이 인상적이다.

   소설의 배경은 수도원이다. 신부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 '정요한'은 휩쓸려 오는 한 여인의 사랑과 성직자라는 자신의 본분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인물이다. 친구인 미카엘은 인텔리전트하지만 교회와 교회 장상들에 대해 극도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안젤로는 모든 일에 부박해보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언행과 특유의 매력으로 수도원 사람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다. 세 인물은 농밀하게 교제하면서 수도원 내에서 특별한 우정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두 친구(미카엘, 안젤로)의 죽음과 한국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일을 겪으면서 요한은 점점 달라져 가는 자신의 내면의 색상을 발견해나간다.

   요한이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본질상의 내적 변화를 이뤄가는 시점은 한국 전쟁 때 일어났던 어느 한 기적적인 실화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은 흥남 철수 때 목숨을 걸고 기적적으로 12명 정원의 미국 화물선으로 1만 4,000여명의 한국인을 구조한 선장 마리너스의 이야기이다. 마리너스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수사로 평생을 살다가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러 간 요한을 위시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구조 과정을 극적으로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화물선의 갑판에서 부두로 던진 그물은 피난민들에게 '높고 푸른 사다리'였다. 이 사다리는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고 분명한 삶이었으며 치열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전부'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을 관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는 신과 인간 사이에 고민하는 한 젊은 성직자의 내적 번민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또한 '발현發現'과 '대상對象'을 모두 포함하는 사랑의 입체적 구조에 대해 강도높게 질문한다. 어쩌면 작가 공지영의 말대로,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무르는 존재, 일지도 모른다. 너를, 나를, 우리를, 신을,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궁극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배반에 봉착할 때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숭고한 가정이 무색할 만큼 현실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악의성 앞에서 체념하고 좌절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지난 한 해 "하나님 대체 왜?"라는 오래된 물음과 격렬하게 씨름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며 가지는 적나라한 고통의 대부분은 작가가 언급한 '오래된 물음'의 내밀한 구조 안에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신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남발할 수밖에 없는가. 왜 인간은 세상사의 무지와 몰이해 속에서 발버둥치는가.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 인생은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한 것이다. 참으로 고약하면서도 명징한 역설逆說이다. 고통과 행복은 서로 이간질하는 사이가 아니다. 둘은 서로를 긍정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한다. 사랑 때문이다. 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신은 자신이 선점한 사랑을 근거로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사랑의 불꽃은 신과 나를 넘어 타자와 전 인류를 포괄하는 거대성의 발현으로 확대 증거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과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소설의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 주제와 이야기 흐름상 '사다리'는 구약성서의 '야곱의 사다리'에서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꿈 속에서 만난 사다리는 지상과 천국을 잇는 통로이다. 우리와 우리, 너와 나를 연결하는 용서, 화해, 사랑을 의미한다. 그곳은 오직 신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신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높고 푸른"의 의미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의 메타포다. 또한 "하나님 왜?"라는 작가의 오래된 물음도 사다리의 진실된 의미 속에 녹아 있다. 즉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성에서 발현된 태동적 사랑의 통로로서 인간 본질의 모든 고통과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답을 선사할 수 있는 신비롭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그 무언가인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공지영 문학은 끊임없이 진보해왔다. 이제는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의 신간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극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서평을 지극히 기독교적 주관으로 일관한 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신을 떠나서는 이 소설이 가진 아름다움의 극치를 풀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지독하게 종교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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