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시리즈 60 나남신서 1157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다. 문화와 시대가 바뀌어도 훼손되지 않는 궁극의 메세지를 담아낸 텍스트를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그렇다. 고전은 시대를 뚫는 힘이 있다. 시간의 흐름과 다양성의 폭풍우를 이겨내는 힘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고전이 갖는 본질이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한 데서 발단된 대공황은 순식간에 세계를 잠식시켰다. 전무후무한 파괴력을 가진 세계적 대공황을 극복할 해결책은 당시로서는 케인즈주의(Keynesian economics)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불황은 유효수요 부족의 탓이며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명쾌한 케인즈 이론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던 시대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케인즈의 처방대로 뉴딜정책을 실행하며 국가를 거대한 괴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는 해괴망측한 악마를 경험할 때까지 케인즈식 총수요관리정책이 지닌 내밀한 한계를 감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소수의 사람 중 하이에크라는 위대한 경제학자가 있었다.

   세기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불멸의 저작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을 통해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다. <노예의 길>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어마어마한 책이다. 좌·우파 할 것 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로 꼽힌다. 하이에크는 이 두껍지 않은 책을 통해 자유의 속성과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파했다. 자유가 얼마나 올곧고 가치있는 것인지 대중을 향해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강변했다. 자유의 속성이 정치, 경제, 법 등 우리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질서와 체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숨쉬고 작동돼야 하는지 냉철하고 명확하게 논지했다. 저자의 논설이 가진 생명력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불태울 정도로 강력한 울림을 선사한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와 대척점에 서 있던 경제학자다. 하이에크가 옳았냐 케인즈가 옳았냐 하는 식의 경제사상의 이념구도를 펼칠 생각은 없다. 내가 하이에크에게 손을 들고 경외를 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천착했던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견해와 방법론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케인즈는 '작은 정부·큰 정부'라는 외연적 개념을 논하기 이전에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철학적 입장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견지했다. 애초부터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다.

   경제학에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라 연구의 방향과 천착의 초점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선하거나 악하게, 혹은 유동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프레임으로 보는가는 모든 경제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가 된다. 4대 경제학서를 집필한 스미스(Adam Smith),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밀(John Stuart Mill),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전제했다. 이 차이에서 촉발된 각기 상이한 경제론의 천착과정은 그들만의 경제학을 세우는 깃발이 됐다. 그렇다면 하이에크는 어떤 깃발을 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다. 그리고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다. 건강하고 활력있는 경제적 동력은 집단의 중앙시스템이 아닌 각 개인이 자유롭게 부딪히며 생성되는 지식과 정보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하이에크 경제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은 사회와 다르다. 서구사회는 기독교가 물려준 유산으로 개인주의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그러나 동양은 다르다. 적어도 동아시아권은 유교공동체사상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어 선의를 따져보는 과정을 결락시킨 채 '협동'과 '공동체'라는 의미를 절대선으로 포장해버리는 의식이 존재해왔다. 그 결과, 가장 극단적인 일본의 예처럼, 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라는 20세기의 참혹사를 규정지었던 악독한 마약이 폭넓게 스며들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놓게 되었다. 20세기의 수많은 직업정치가들은 그 여백 안에 자신의 권력의지를 채워넣기 위해 발버둥쳤다. 나라와 국민이 불행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상보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변증법적 관계는 더더욱 아니다. 둘은 서로간의 특별한 모순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강조되면 사회는 줄어든다. 반면 사회가 강조되면 개인은 위축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하게 증명한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항상 그랬다. 한 번 커져버린 '사회적 체계'가 다시 기존의 '원자적 개인'으로 분해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20세기의 우울한 교훈은 일단 국가가 팽창하면 다시 부피를 줄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역사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 싸움의 소용돌이 가운데 하이에크의 명저 <노예의 길>이 놓여 있다.

   하이에크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참 벌어지는 1944년에 이 책을 썼다. 히틀러의 독재와 소련에서 벌어진 전체주의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색채로 물들어가는 영국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결의로 펜을 잡았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힘을 빌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에 대해 그는 경고한다. 그 믿음과 그에 기반한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퇴행적일 뿐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사람들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위적 질서'로 바꾸려 들면 애초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향력이 커져 막강한 힘을 지난 정부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국가를 항상 지상의 지옥으로 만들어온 것은 인간이 그것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애쓴 결과였다"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휄더린의 풍자를 일용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꼬집는다. 하이에크는 훗날 이를 인간의 '치명적 자만'이라고 명명했다. 말년에 펴낸 그의 또 다른 역작 <법, 입법 그리고 자유, Law, Legislation and Liberty>도 이 같은 자생적 질서론에 기초한 독창적인 사회 철학을 펼쳐 보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경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자유주의적 철학을 내놓는다. 저자는 주장한다. 경쟁과 시장이 긴요한 것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정의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경쟁이란 서로간에 다투는 과정이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인간 내면에 체화되어 있는 지식과 정보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국가는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는 확인할 수 있지만 개개인이 가진 잠재성과 그것의 부딪힘으로 발산되는 내밀하고 고차원적인, 무엇보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발생되는 숨겨진 정보와 지식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정보의 부족 내지는 결락, 바로 이점 때문에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오랜만에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을 소환한 이유는 간명하다. 개인의 자유가 가지는 소중함이 점점 외면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 내 지성과 양심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유의 의미는 '경제적 자유'로 통합되어 표상된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자유'의 범위로 밀어넣었다. 즉 현대적 의미의 자유는 사유재산권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법률과 체계로 정의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복지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국가 크기의 확대를 어디까지 상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시끄럽다. 그에 따라 당연히 대두될 수밖에 없는 '증세', '국가재정', '국민분열'의 문제는 끊임없이 정국을 요동시킨다. 국민을 선동하며 시끄럽게 인기몰이했던 무상시리즈는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무상급식 논쟁과정에서 당선된 현서울시장은 돈이 없다고 징징대며 중앙정부를 두들기고 있다. 현정부의 야심찬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방향성을 잃고 오락가락 하고 있다. 노인복지의 보편성을 담보한 기초연금법도 시끄러운 논쟁 속에서 축소 개정되었다. 중앙정부의 부채 중 갚을 여력이 없는 적자성 채무가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공기업 부채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국민세수는 끊임없이 감소하고 있다. 과연 이 나라가 정상인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가 커질수록 개인의 재산권(자유권)은 위협받는다. 플라톤식 유토피아와 헤겔적 국가주의는 항시 자유주의를 공격한다. 국가가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면 독일의 나치즘이나 소련의 전체주의와 같은 괴물이 만들어진다.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가 모든 생활을 통제하여 개인의 자유보다 구속력 있는 법률을 우선시하는 이상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대중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예의 길>은 바로 그 점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울한 것은 역사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패턴은 국가와 민족을 옮겨다니며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글프다.

   케인즈는 <노예의 길>에 깊은 공감의 뜻을 전했다.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당신의 견해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내가 당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책장 구석에서 하이에크의 명저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케인즈의 말대로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의 견해는 명징히 옳다. 그 어느때보다 하이에크의 외침을 되새길 시점이다. 진보·보수, 좌파·우파 할 것 없이 머리맡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반드시 찾아서 읽어봐야 할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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