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나가 있던 자리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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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은 고통일까 행복일까.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시기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의 두 군주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전근대적인 기준으로 탐구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한다. 인생을 사변적인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나도 동의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삶은 그 자체로 절대선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여행에세이로 친숙한 작가 오소희가 소설을 냈다. 그의 첫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단선적으로 상실과 박탈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면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고민하는 삶의 보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오소희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삶의 '보편적 천국'이 '개별적 지옥'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따뜻하고 진지한 언어로 보듬고 위로한다.

소설의 서사는 간명하다. 주인공 해나는 아들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다. 아들 재인은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는다. 어린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엄마는 제정신일 수 없다. 해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붙박이장의 차가운 금속 봉에 목매달아 죽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엄마, 행복해"라는 재인의 말을 상기하며 생각을 거둔다. 그리고 떠난다. 목적지 없이 멀리 떠나버린다. 작가는 해나가 계획되지 않은 여행을 통해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는 과정을 동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냈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 되는 해나의 여행지 '그린레프트'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작가는 현실의 상처를 비현실의 치유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 작가적 장치는 현실에서는 해나가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깊은 슬픔'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굴종시키는 비본질의 외연이 실재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우리네 현실이 피곤한 건 필요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게 많기 때문"이라는 평소 오소희식의 세상보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다. 불필요한 비본질의 과잉은 항시 본질의 영역을 침해하고 배반한다. 비극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집필의도를 직선적으로 드러낸다. 한꺼번에 삼백 명의 아이들을 잃은 작년 봄의 광포한 상처는 우리 모두를 해나가 되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나가 아니었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상실과 박탈의 지속성을 중단할 아무런 동력장치가 우리의 현실체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꼬집는다. 이 책의 시작이 바로 거기서 태동했음을 작가는 밝힌다. 즉 이 소설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현실에 실재한 '진짜 해나'가 벌떡 일어서서, 자신을 되찾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모습을 미치도록 갈망하는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나는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멈칫했다. "살아서 벌어지는 건 다 축복이다"라는 소설 속 어느 여인의 대사가 나온 장면이다. 내가 정지한 건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이 가진 거대한 본질에 깊이 동의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다. 하지만 그것을 채우는 수많은 순간들의 조합은 온갖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은 곧 축복인 것이다.

아직 생을 다 살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대는 '삶이 곧 축복'이라는 명제를 오롯이 수용할 수 없게 만드는 한계적 속성을 내재한다. 인간은 현재라는 시간대만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인식론은 신(神)의 것과는 다르다. 시간은 인간을 조롱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다. 현재는 총알같이 날아간다. 미래는 머뭇거리면서 다가온다. 이 굴곡된 시간의 물리력은 인간이 종국의 순간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쓸어내리며 신의 차원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시간대에 대한 통섭(通涉)의 내공을 누적하는 과정이리라.

인간은 상처의 종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러 상처와 아픔으로 충만하다. 안타까운 건 개별 인간의 비극과 무관하게 시간은 항시 보편적으로 묵묵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일관성과 건조함 앞에 인간은 더욱 번민하며 좌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 종국의 희극이 순간의 비극을 압도할 미래의 시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체로서 선이고 사랑이고 축복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소망의 기한은 무한적이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오소희의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를 우리 주변의 '진짜 해나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그들이 옷장 속에서 용기있게 나올 수 있기를 기다리며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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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문학은 오에 겐자부로 전과 후로 나뉜다.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한 조정래의 외침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적 현존에 그대로 닿아 있다. 고백컨대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입체적으로 천착하는데 객관적 원형이 된 작가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소설 『익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존재성을 통해 일본 전후戰後 역사를 탐구한다. 자신이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만큼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무거운 여백이 존재해왔다. 그의 80년 문학인생이 이 한 권의 소설로 어떻게 갈무리되는지 느끼기 위해 나는 오늘 그의 텍스트 속으로 침잠한다. 행복한 '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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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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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허지웅을 싫어한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변 등은 상당히 불쾌한 것들이다. 특히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진영논리적 주제에 대해 강한 자기확신으로 질타하는 그의 표현방식은 언제나 비호감이다. 작년 그는 모 종편 방송에서 "드라마 <정도전>을 보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며 역설했다. 드라마 한 편의 시청여부를 놓고 인생의 보편성을 훈계할 만큼 그는 대단한 사람인가.

   우리사회의 여러가지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마치 전투하듯이 대중에게 훈계하는 그의 어법은 정말 밥맛이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다. 본인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자아상은 외면한 채 남도 나와 같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현존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추태가 꼴사납다. 옥소리의 부정(不貞)을 비판하는 대중의 자유와 그 양상을 비판하는 그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자유권에 속한 것이다. 누가 감히 자유의 과잉과 한계를 말한단 말인가.

   허지웅은 '옥소리 간통 논쟁'에서 '공인(公人)'의 개념을 전근대적인 수준에서 이해했다. '공인'의 의미를 '공적에 적을 둔 사람'이라는 좁고 사전적인 의미로 걸러낸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현대적 공인의 개념에 무지해 있다. 미국의 '공인이론'과 한국의 법원 판례를 한 번이라도 훑어봤는가. 근래의 공인 범위 논쟁은 명예훼손과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연예인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정치적인 공인으로 분류된다. 모든 명예훼손법이 이 기준에서 적용되고 있다. 연예인은 공인이다. 더이상 무식한 얘기를 하지 말라.

   허지웅은 싫지만 그의 글은 읽어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공인은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인이면서도 '글쓰는 허지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그의 텍스트만큼은 살필 필요가 있었다. 세간의 말처럼 그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작용했다. 그랬다. 허지웅의 신간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저자는 인생을 '버티는 것'으로 규정한다.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인간 삶의 고단함을 인정한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내재된 잘못된 전제를 나와 비슷한 논지로 규탄한다. 인생은 피곤하고 가난한 것이다. 자기 인생을 사회적 합의와 제도로써 천국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인물은 아니다. 제목 '버티는 삶'은 박수 쳐 줄만하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반갑다. 시대가 변해도 책읽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책 읽는 개인과 청춘, 국민 들이 역사를 추동했다. 저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 말만큼은 진실이다. 오만과 편견에 빠진 지성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독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책은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기 위한 인류 지성의 거대한 용광로다. 책읽기의 소중함을 설파한 부분 또한 박수 쳐 줄만하다.

   그러나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많이 보인다. 저자는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어법을 가감없이 구사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낸다. 저자의 주장에 새로울 건 없다. 무엇보다 20대를 천착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장 불편하다. 저자는 현재의 20대를 부정적으로 본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세대의식'이 전무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20대는 주위의 문제의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돈에 미쳐있다는 게 저자의 논지다. 원인은 IMF 체제 이후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세계 전부로 경험했고 급격한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무한경쟁의 순환고리 안으로 떠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건강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게 잘못된 걸까. 돈을 모으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쁜 걸까. 시대는 변한다. 80년대와 90년대는 다른 시대적 소명을 요구한다. 21세기는 더하다. 지금의 20대가 80년대의 20대처럼 광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를 외칠 세대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87체제의 아비투스에 함몰되어야 하는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느 시대의 20대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20대는 꼭 마르크스주의자여야만 하는가. 치열한 세계에서 자신을 분석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해 공부하며 땀흘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고결하고 자생적인 인간의 행위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본다는 건 위선이요 거짓이다. 저자는 뒷골목에서 짓까불며 덤방거리는 유럽의 얼빠진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비호감이다.

   이밖에도 책 내용 곳곳에서 비판할 대목은 많다. 다만 뒷부분의 영화리뷰는 인상적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영화잡지사 경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리뷰만큼은 수준급이다. 리뷰어로서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있다.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해 논설에 여유가 느껴진다. 정치색과 정파성을 버리고 순수하게 영화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면 저자의 뇌는 정말 섹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고 어울리는 옷이 있다. 타자의 존재성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 지금 입고 있는 허지웅의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외연적으로 에세이의 평균은 유지한다. 허지웅은 말보다 글이 낫다. 앞서 그의 지력과 태도를 모두 꼬집었지만 글에서는 태도적 문제가 어느 정도 순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건질 것은 별로 없다. 영화 해설을 소개한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천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아무런 대안없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조소를 던지며 마치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선 위트인양 지껄이는 모습은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운 풍경이다. 자본주의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수정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없이 함부로 나불대지 말라. 동갑이라서 조언하겠다. 방송에 나와 떠들려면 공부 좀 더하고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라. 그게 공인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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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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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계문학상은 1회 수상작부터 꾸준히 읽어오고 있다. 세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뚜렷한 개별성을 갖고 있다. 텍스트의 가독성과 재미를 중시하는 게 주된 특징이다. 한국판 나오키상(直木賞)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읽기에 쉽고 몰입도가 높은 대중적인 소설이 꾸준히 선정이 되어 왔다. 도발적인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흡입력 있는 서사를 갖춘 작품이 세계문학상의 표적이 된다.

   1회 수상작 김별아의 『미실』은 여태까지 생각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질문함으로써 꽤 충격적인 도발을 시도했다. 신경진의 『슬롯』은 도박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간의 정체성을 흥미있게 그려냈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신세대 한국여성의 진화된 원형을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잘 읽히고 흥미있고 도발적이고 신선한 점이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의 공통적 분모다.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는 제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자리매김한 소설가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보다 '문학적'이라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가졌다. 요컨대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재미와 무게를 함께 지닌 힘있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최근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기존에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한 번 재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은 폐쇄된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각자의 삶으로부터 교차되어 얻는 깨달음과 열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인칭 화자 이수명과 그와 같은 날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력장애인 유승민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만남의 데면데면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한 우정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있고 생동감 있게 담았다.

   수명과 승민은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하다. 수명이 내면 속으로 자신을 축소화한다면 승민은 외연을 향한 방향성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수명과 승민은 공히 과거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작가는 두 인물의 과거 트라우마와 그것에 함몰되어 일상을 둥개는 현실의 긴장감을 잘 그려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과거에 봉착되어 있던 수명과 승민의 내밀한 비밀은 밝혀진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의해 고백되고 깨달아졌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소설의 앞부분은 서사의 진척이 느리고 미지근한 몰입도를 보인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소급되어 응축된 이야기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독자의 가독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말미, 주인공 수명이 오랫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었던 삶의 참된 진실을 인식하고 용기를 표출하는 장면, 그 순간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울림이자 카타르시스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자유'다. 폐쇄된 정신병동이라는 외면의 벽을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기를 원하는 내면의 열정에 닿아있다. 두 인물의 과거의 아픔과 이에 구속된 일그러진 현재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못 두었을 때를 그대로 은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결락된 채 비본질에 대한 집념과 고집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자유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방식은 자아의 역동과는 거리가 먼 외적 환경의 파괴, 또는 내적 울림과의 단절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인물의 자유 성취와 자아 성찰에 대한 공전(轉) 행태은 승민이 병원을 탈출하여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활공하는 바로 그 순간, 앎과 행복의 실현으로 급반전된다. 승민은 종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수명이 정신병원을 퇴원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죽은 승민은 수명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냐고. '새' 아니면 '비행기'냐고. 이에 대한 수명의 답은 단호하고 명확하다.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는 것을.

   한 사람의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나 외부의 구속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 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추동, 즉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生)의 강렬한 욕망은 항시 자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내 인생을 '나'로서 사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명제 앞에서 우리 삶은 때때로 외부를 의식하고 타자에 주눅들며 방황한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내가 내 삶의 주어로서 존재하며 약동할 때 빛을 드러낸다. 내 실존은 누구도 욕망하지 못한다. 이 말이 진리라면, 외부를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봐.

   굉장히 잘 쓴 소설이다. 서사를 풀어가는 능숙함과 재치있는 입담이 돋보인다. 순간순간의 감동이 녹아있고 시종 재미를 잃지 않는다. 정교하고 정제된 묘사와 독자의 호흡을 쥐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이 훌륭하다. 우리는 이런 소설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내적 자유와 자아의 고찰에 번민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 한 권의 소설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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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인생을 아직 덜 살아서일까. 난 왜 쿤데라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말대로 과연 하찮은 것이 진지하고 무겁고 특별한 것들을 본질적인 선상에서 전복해낼 수 있을까. 텍스트의 분량과 화법의 속도는 전작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일관되게 포착하고 있는 '가벼움'의 철학은 신간에서도 여지없이 연장된다.

   그는 왜 항시 가벼움과 무의미함을 삶의 정형성 전면에 배치하는 걸까. 사실 '의미 없음', '보잘 것 없음', '하찮음', '초라함', '가벼움' 등은 쿤데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코드다. 기승전결 없이 막 써내려간 듯 보이는 짧은 소설을 통해 쿤데라는 무의미한 것의 의미, 가치 없는 것의 가치를 설파한다. 쿤테라는 결국 인간의 고독과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 것 없음의 축제이며, 이 '무의미의 축제'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고백컨대 쿤데라의 소설은 매번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영원성의 무거움과 일회성의 가벼움을 역설적으로 대비시켜 치환해버리는 쿤데라 문학의 골격은 니체식 시간관념의 문학적 재현이자 관통이다. 더 나아가 헤겔의 분해이자 쇼펜하우어의 소환이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상의 나날이 그 자체로 축제라고 규정하는 그의 일관된 논변에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혹시 그는 '지루함'과 '가벼움'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벨상을 목전에 둔 노작가의 거대한 진동이 좀처럼 나에겐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텍스트에서 쿤데라의 잔영(殘影)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언가의 모호성이 추동하는 강한 전율을 느끼곤 한다. 내가 여전히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쿤데라는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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