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vs 역사 -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뤼디거 마이 지음, 배진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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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의 정문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멋진 문장이 적혀 있다. 그렇다. 책은 인간의 지적활동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수없이 많은 책을 만들어왔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대단했다. 별 볼 일 없는 책은 기억되지 않고 사라졌다. 위대한 책은 읽고 또 읽히며 시간의 세례를 통과했다. 그래서 고전으로 남았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시대를 만들었다. 책은 역사와 함께 했다.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이라는 강렬한 부제를 달고 있는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 뤼디거 마이 공저)의 <책 vs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50권의 고전을 소개한 책이다. 사후세계의 여행안내서인 <사자의 서>에서부터 J K 롤링의 <해리포터>까지 각 시대를 대변하는 여러 명저를 선정해 책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리뷰한다. 

   이 책의 강점은 천편일률적인 기존의 고전리뷰집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를 일반적인 구분법인 '고대-중세-근대-현대'의 네 시대로 나눈다. 각 시대가 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서설한 뒤 선정한 책들을 해설한다. 책 자체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각 책이 집필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 책이 끼친 영향에 대해 자상하게 서술한다. 각 장마다 틈틈히 들어선 사진과 참고자료는 저자의 서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난잡하지 않은 교과서 형태의 인문서적을 만들어냈다.

   저자가 선정한 책들은 한결같이 인류의 역사를 빛내고 움직인 명저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전인 <성경>과 <코란>이 전면에 배치됐다. 수천년 간 동양사상의 뿌리가 된 공자의 <논어>를 수록해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로 철학적 담론을 소개했고 괴테의 불멸의 소설 <파우스트>를 놓치지 않았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경제학을, 왓슨과 크릭의 <DNA의 구조>에서는 자연과학을 논했다. 저자는 정치, 과학, 역사, 문화 등 전 영역의 고전들을 두루 아우르면서 독자를 당시 시대의 한복판으로 이끄는 힘있는 서술을 펼친다.

   이 책에 수록된 50권의 책 중에서는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안 읽은 책도 있다. 또한 내가 훌륭한 책으로 인정하는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예컨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선과 악이 지닌 힘과 검증과정, 즉 권력과 인간성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를 어마어마한 판타지에 녹인 불멸의 소설이다. 반면 마오쩌둥의 <마오쩌둥 어록>은 그릇된 경제정책으로 야기된 기근과 대규모 정치테러로 무려 7,000만 명의 사람을 희생시키는데 사용된 지옥의 교과서다. 중요한 건 이러한 책의 양면성이 결국 현재의 우리사회를 더욱 밝게 빛내는 지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책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명저인 것이고, 후자는 책은 쓰레기지만 그것을 통해 명징한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에서 고전인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아쉬운 게 없지는 않다. 저자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독일 고전이 많이 선정된 점과 인문·사상 분야의 책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점은 아쉽다. 문학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점이 가장 아쉽다. 세계문학의 거대한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빠졌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죄와 벌>과 <전쟁과 평화>가 인류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만든 50권의 책에 포함되지 못할 작품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무너진 균형이 아쉽다.

   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태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이 다 옳았던 건 아니지만 그의 저 말 만큼은 진실이다. 그렇다. 지식은 반영과 해석을 넘어 변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지식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가장 좋은 책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이다. 이 명징한 진실을 곱씹게 한 것만으로도 헤를레스의 <책 vs 역사>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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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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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매체ㅡ책,영화,방송,기사 등ㅡ를 만날 때는 한결같이 마음이 아프다. 비단 5천만 명이 사망한 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처참한 전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2차 대전은 세계전쟁 이상의 의미를 가진 지옥의 아이콘이다. 유태인 600만 명 학살뿐 아니라 전쟁 앞뒤의 전개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대숙청, 스페인 내전, 아프리카의 참상, 공산주의의 만개 등은 2차 세계대전 앞뒤의 참상을 인과적으로 연결짓는 사악한 사례들이다. 

   거대한 참혹성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가진다. 소재화되고 재구성되어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내뿜는다. 그렇기에 책과 영화를 위시한 거의 모든 매체에서 2차 세계대전은 단골 소재가 됐다. 스필버그는 2차 대전의 한 복판에서 라이언 일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전세계적인 흥행을 이루었다. 권터 그라스는 나치 점령부터 2차 대전 종전 후까지의 파행적인 독일 역사를 그린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롁시예비치도 2차 대전 당시 여군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르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노벨상을 거머쥐었다. 전쟁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프레드 울만의 중편소설 『동급생』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3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와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의 우정을 그렸다. 두 소년의 만남과 이별, 재회를 통해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시대의 슬픔을 비극적으로 담아냈다. 이 소설에 대해 작가 아서 케스틀러는 '작은 걸작'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르 피가로'의 주필 장 도르메송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고 상찬했다. 프레드 울만은 70세의 노령에 이 소설을 발표했다. 1971년 출간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77년 아서 케스틀러의 서문과 함께 재출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두 주인공 소년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소설의 종국적인 메시지는 '2차 대전의 비극'이다. 참혹한 전쟁을 소설의 시공간 뒷편으로 밀어서 배치한 듯하지만 이야기의 완료시점에서는 2차 대전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는지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고발하고야 만다. 작가의 이 놀라운 전개 기술 덕분에 독자는 막장을 덮은 후 묘한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작가의 기술이 놀랍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소년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잔인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 소설의 생명력으로 수렴되고 있는 마지막 한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모르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대단한 반전은 아니지만 그 한 문장 속에 두 소년 사이의 우정과 오해, 그리고 2차 대전의 참혹한 비극이 모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동급생』은 중편소설이다. 중편의 분량은 이 소설의 서사 구조와 잘 호흡하는 탁월한 외적 장치이다. 본래 중편은 장편처럼 긴 호흡이나 거대한 드라마를 갖지는 못한다. 또한 삶의 한 테마를 사진 찍듯이 터치하는 단편의 그것과도 궤를 달리 한다. 장편의 구조를 추구하면서도 한달음에 서사를 압축시키는 힘이 중편소설의 매력이다. 만약 작가가 이야기의 전개를 늘어뜨려 거대한 파노라마 한복판으로 끌고가려 했다면 소설의 마지막 한 방은 약했을 것이고 감동과 재미는 반감됐을 것이다. 작가의 노련한 기술이다.

   문학작품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밀도는 사용하는 언어의 양이나 자극적인 표현의 총량과 무조건 비례하지는 않는다. 작은 네러티브 속에서도,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 구도 가운데서도 작가는 독자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기술이며 실력이다. 그런 차원에서 소설 『동급생』에 대한 긍정은 어렵지 않게 수렴된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중편의 외연 속에 '두 소년의 우정'과 '나치즘의 발흥'을 농밀하고 입체적으로 엮어낸 『동급생』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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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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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갑내기 방송인 허지웅에 대해 나는 여러차례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걸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행 등은 그가 가진 비호감스러운 개성들이다. 정치적 사안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무거운 주제에 대해 자기 말이 절대적 진리인양 질타하는 그의 어법은 그야말로 밥맛이다. 

   허지웅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내용과 실력은 갖추지 못한 채 이미지로 뜬 전형적인 군상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떻게 해서 방송에 자주 출연하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지식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헛똑똑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면접방식으로 토론하는 공중파의 모프로그램에서 대선후보 패널로 출연한 이재명 시장에게 넉다운 당하는 그의 모습은 꼴불견 그 자체였다. 면접관이 후보를 심문해야 하는데 논리와 지력이 딸리니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기고 주장하는가. 핏대는 왜 세우는가. 무지는 태도 때문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허지웅은 그 대표적인 예다.

   허지웅이 신간을 냈다. '한겨례'와 '씨네21'에 기고한 글에 새 글을 보탰다. 나는 이미 그의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읽고 "대책없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시끄러운 소리"라고 혹평한 바 있다. 그는 전작에서 진지한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억양으로 "자본주의(시장경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싱거운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냈다. 그의 신간 『나의 친애하는 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시기와 소재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간 이런저런 사건을 거치면서 논리와 태도의 변화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신간을 집어들었지만 역시나 였다. 

   허지웅의 에세이 『나의 친애하는 적』은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의 2부이다. 내가 볼 땐 그렇다. 소재와 내용은 다르지만 난잡한 구조와 가벼운 맥락은 동일하다. 논조와 태도 또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제목 '나의 친애하는 적'은 훼이크다. 제목만을 보자면 자신의 안티에게 온화한 제스쳐를 취하거나 지금까지 대중으로부터 누적되어온 오해의 담론들을 진지하게 탐색할 것이라는 기대를 자아낸다. 하지만 책 내용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달라진 것 없고 새로운 내용도 없다. 전작의 수준 딱 거기에 정지해 있다. 문학동네 정도의 출판사가 왜 이런 책을 출간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평소 저자는 선배세대에 대해 뜨악한 입장을 자주 표출해왔다. 논란이 된 <국제시장> 발언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 책에서도 그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등록금 요청을 거절당한 일과 스물두 살 아르바이트 당시 믿었던 부장에게 월급을 뜯긴 일을 글감으로 삼아 책에 소개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최악의 어른이 늘 갱신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해할 수 있다. 감정과 인식은 기본적으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게 있다.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히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좋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 어른은 좋은 청년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은 거꾸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과 동의어다. 사람 간의 문제를 타자만의 문제로 넘기는 그의 오해가 불편하다. 그에게 "이 세상에 좋은 어른은 많다"는 내 경험적 신념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굳이 조언한다면,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을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최근 불거진 주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국정교과서, 세월호, 최순실 게이트, 촛불 시위, 대통령 탄핵 등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이다. 책의 말미는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며 끝맺는다. 선배세대가 흘린 피와 땀을 모욕해온 그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을 고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아랫세대를 위한 따뜻한 세상은 윗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볍고 조잡하다. 균형감각과 목적의식이 결여된 수준 낮은 에세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리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 외에는 전체적인 맥락과 무관한 여러 잡문을 보탰다. 타 매체와 블로그의 글을 짜집기해 이런저런 잡문으로 엮은 난삽한 에세이를 15,000원이나 받는다는 건 불편하다. 저자의 허영인지 출판사의 오만인지는 모르겠으되, 종국적으로 내 지갑이 회개할 일이다. 


   한 문단 더 보태겠다. 저자에게 충고한다. 작가와 방송인은 공인이다. 공인은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산다. 대중을 의식해서 헛소리하는 건 문제지만 대중을 무시하며 개소리하는 것도 문제다.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잘 모르면서 떠드는 무식이 가장 큰 문제다. 무거운 주제에 대해 가볍게 툭툭 던지는 경박한 태도도 문제다. 본인의 경험만으로 선험적 명제를 도출하지 말라. 자신의 프로필을 '글쓰는 허지웅입니다'라고 제시했다면,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대해 깊이 공부한 뒤 겸손히 말하고 겸허히 쓰라. 그것이 '어른스러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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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을 꼽자면 단연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이다. 당시 이 한 권의 소설에 나는 녹록지 않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소설의 주인공 맥은 딸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극한의 분노와 상처로 내면을 파괴당한다. 바로 그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맥을 찾아온다. 숭고한 자상함으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소설의 구조가 흥미로운데,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메시지는 팩션이다. 이 놀라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나를 자못 흥분시킨다.

   책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작가 폴 영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소설에서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로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었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킨다.

   원작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실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교제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묘사한다. 제도나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신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진실된 심정으로 진리와 평안을 전달하고자 하는 신의 수고로움을 오두막이라는 표상적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따뜻하게 녹여놓는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모든 영화는 원작에 못 미친다. 잘 만들어야 본전이다. 소설은 텍스트고 영화는 영상이다. 텍스트는 독자의 머릿속에 특정한 이미지를 일원화하지 않는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자기만의 자유와 개성으로 작가의 제시를 상상한다. 구속력보다 상상력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영상으로 모든 걸 다 보여준다. 표정과 색채, 배경과 분위기까지 완벽히 보여준다. 영상의 구속력이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가 원작(소설)에 필패하는 이유다.

   물론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건 불필요할 것이다. 원작이 훌륭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다. 저예산 밀실 스릴러 영화 <이그잼>으로 유명한 스튜어트 하젤단이 연출했고 <아바타의> 샘 워싱턴이 주인공 맥의 역을 맡았다. 지나치게 종교적인(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대중적으로 널리 흥행할 영화는 아니다.

   나는 원작자 윌리엄 폴 영이 내한했을 때 독자 사인회에 참석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매우 좋은 질문"이라고 운을 뗀 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두렵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그 간결한 작가의 메시지가 소설 『오두막』을 창작할 수 있는 신성한 동기이자 영화로까지 제작될 수 있는 근원의 힘이었을 것이다.

   워낙 감명깊게 읽은 원작이라 영화 개봉 소식에 나도 모르게 들떠서 횡설수설 글 몇 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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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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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텍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시보다 산문이 좋은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시의 구조가 가진 불명확한 압축에 묘한 결핍과 피로를 가진다고나 할까. 요컨대 나에게 시는 피곤한 세계다.

   물론 시는 위대하다. 시인이 되지 못해 소설 쓰고 소설가가 되지 못해 평론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다. 시인은 최정상의 글쟁이인 것이다.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초라하게 관조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던 소설가들이 있다. 톨스토이도 그랬고 공지영도 그랬다. 시는 넘사벽의 세계인 것이다.

   시는 좋아하지 않지만 시인이 쓴 산문은 좋아한다. 산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인이 쓴 산문'이라는 역설적인 기대감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실상 시인이 쓴 산문은 달랐다.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핵심적인 낱말로 문장을 구성했다. 연이어지는 짤막한 문장들로 삶과 인간과 우주에 관한 중요한 토막들을 웅변했다. 시인의 시는 별로였지만 시인의 산문은 아름다웠다. 내 수준이 딱 거기까지다.

   류시화의 신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시인이 쓴 산문집이다. 여러 삶의 단편들을 시인의 언어로 담았다. 작가는 총 51편의 산문 속에 삶과 인간에 대한 내적 담론을 녹여냈다. 시인 특유의 울림과 시선이 잘 담겨 있다. 주로 여행을 통해 추출한 여러 삶적 디테일이 문장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과히 아름다운 글의 향연이다. 독자만 즐겁다.

   수록 산문 중 상당의 글들은 이미 페이스북에서 여러 독자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퀘렌시아', '찻잔 속 파리',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마음은 이야기꾼',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등의 글들이 그렇다. 특히 표제작인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내용 중에는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는 명문장을 담아 작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오롯하게 드러냈다. 
 
   작가는 글감의 주된 소재를 여행에서 얻은 듯하다. 수록 산문의 절반 이상이 여행에서의 경험 혹은 여행이 준 깨달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이어지는 인도여행에서의 경험은 책 곳곳에 빼곡히 들어서 있다. 작가에게 인도는 특별한 시공간이다. 그에게 인도는 명상의 나라이자 깨달음의 공간이며 시적 창작이 만개하는 곳이다. 작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장소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여행자 자신이 그곳의 혼에 닿았기 때문이다. 장소의 혼에 다가간 작가의 고결한 사랑이 정갈한 글을 낳았다. 아름다운 피드백이다.

   문학평론가 로자(필명) 이현우는 시와 소설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은 일상성에 대한 예찬이다. 하지만 시는 일상을 충돌하고 거부한다. 말랑말랑한 일상의 디테일을 시의 언어가 수렴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시와 소설의 세계는 완전 분리되어 있고 서로를 완전 배반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운명적 고립이자 위대한 고독이다. 작가가 항시 일상을 떠나 여행길 위에서 삶과 인간을 천착한 데에는 이러한 시적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오롯한 자기반영이었을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시인의 산문은 달랐다. 미사여구를 배제한 절제의 언어가 아름답다. 형용사와 부사를 자제한 담백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언어의 낭비없이 진정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담았다.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적정량의 무게는 잃지 않았다.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라는 매혹적인 문구로 띠지를 두르고 있는 류시화의 신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지난한 일상에 지친 이 시대 모든 피로한 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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