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지 슬픔 - 엘리자베스 김의 자전 실화 소설
엘리자베스 김 지음, 노진선 옮김 / 지니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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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5일은 대한민국 스포츠 메스컴이 난리가 난 날이었다. 이날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결승전(수퍼볼)이 열린 날이다. 미국 내 1억 4천만 명, 전 세계 10억 명의 동시 시청자 수를 자랑하는 이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가 매년 미국에서 열린다는 점은 비단 새로울 사건은 아니였다. 중요한 것은 그날 MVP를 받은 선수 있다. 그는 하인스 워드. 피츠버그 스틸러스 소속의 와이드리시버인 그가 대한민국 메스컴의 조명을 폭포수처럼 받게 된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바로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자가 보여준 절망의 극복, 꿈과 희망, 그리고 성공의 메시지에 대해서 동일 민족의 피가 섞여 있는 동질감을 갖고 있었기에, <혼혈>이라는 보다 깊은 태생적 아픔이 존재했기에, 지구 반대편의 자그만 반도국가 국민들은 감동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미국 언론을 비롯해서 아마존 독자들이 극찬한 『만가지 슬픔』은 하인스 워드와 동일한 아픔을 갖고 있는 저자 엘리자베스 김의 자전 실화 소설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인이라는 아픔속에서 저자 자신이 겪은 만가지 슬픔이 어떠한 것인지를 진정성있게 고백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한 여인의 자전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잘못된 사회상에 의해 고통받는 여인의 삶과 혼혈인으로 살아가는 상처와 아픔을 목도하게 된다. 미군 병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처신은 철저한 유교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엄마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광주리 안에서 바라본다.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고아원 생활을 하다가 미국인 목사 부부로부터 입양되어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만 양부모로부터 받는 수모와 고통의 미국생활은 저자의 가슴을 칼로 재단질할 정도로 아프기만 하다. 더욱이, 이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감내해야만 했던 폭력과 비인간적 삶은 한 여인의 기구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저자에게도 기쁨이 찾아온다. 남편과 약속했던 피임 규정을 어기며 용기있게 아이를 갖고 딸을 출산한 것이다. 자신의 딸아이를 통하여 저자 자신이 겪은 수많은 슬픔들을 한가지의 기쁨으로 막아내며 힘을 얻는다. 더욱이 남편과 이혼한 후에는 딸과 단둘이 살면서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 저자는 기억조차 희미한 어렸을 적 완성되지 못했던 친엄마와의 모성적 환희를 자신이 직접 엄마가 됨으로써 완성하게 된 것이다. 

  딸 리가 대학 생활로 분가한 이후 저자 엘리자베스는 자아에 대해 사유한다. 혼혈인으로 수모를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아픔, 양부모의 핍박과 수모, 남편으로부터의 인격 모독과 폭력의 상처, 그리고 딸 리를 통한 기쁨의 회복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자아 탐구는 철저히 과거에 구속되면서 또다른 성질의 슬픔을 분출한다. 자살에 대한 숱한 강박관념과 수많은 사랑의 실패로 인해 찢어질대로 찢어진 그녀의 가슴은 소중한 하나의 깨달음을 통하여 치유된다. 자신이 겪은 만가지의 슬픔들 속에 가려져 잊었던 소중한 그것. 바로 <자기애>라는 것을 통하여. 

  사랑에는 여러가지 기류와 성질이 있다. 신, 자식, 부모, 연인, 인류 등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며 우주는 수많은 사랑의 방향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매우 소중한 사랑의 기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건강한 이타는 좋은 이기에 기초한다. 남을 사랑하는 진정성의 본질에는 반드시 자기애가 내재되어야 한다. 국내외 저명한 심리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역설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는 사랑을 시작으로 신과 타인을 향한 <건강한> 사랑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가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깨달으면서 행복의 불씨를 목도하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하고도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나르시시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장면이 아닐까. 

  역시나 모성性이다. 모성은 위대하고 찬란하다. 저자 자신이 자기애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나치게 험난하고 지독하게 처절하기만 하다. 숱한 고통과 상처속에서 저자는 결국 모성이라는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깨닫는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은 각각 상처받은 슬픈 모성과 희망의 기쁜 모성을 보여준다. 저자의 만가지 슬픔은 <모성>이라는 위대한 한가지 기쁨을 통하여 <자기애>를 발견하게 되고, 이로써 만가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의 불꽃으로 변화된다. 

  최근 나는 독서를 통하여 여성의 기구한 삶을 많이 만나고 있다. 이런 독서 경험은 내게 '모성'과 '인내'로 집약되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새삼 인식하게 해주었다. 여성은 정말 위대한 종족이다. 저명한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가 생물학적, 생태학적 자료를 통해 굳이 입증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뇌량의 굵기와 기능이 남성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적 근거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분명 여성은 남성보다 고등한 종족이다. 남성이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모성>이라는 여성성의 찬란한 태양은 여성 안에 내재된 신의 <아가페>적 성품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친엄마의 죽음, 혼혈인으로서의 수모, 양부모의 핍박과 경멸, 남편의 폭력, 가정의 실패, 거듭된 사랑의 실패 등을 겪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자전적 서사로 재창조한 『만가지 슬픔』은 기쁨과 슬픔, 사랑과 자기애, 모성과 여성성에 이르는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깊이있게 사유하게 한다.  

  한 여인의 기구하지만 생동감있는 희비극喜悲劇을 저자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만들어 낸 이 한 권의 감동 드마라를 자신의 현재적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여 삶을 둥개며 <만가지 기쁨>을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살포시 추천한다.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비록 세상이 이지러지고
숲에서는 오직 불평의 목소리만 들린다 해도,
하늘이 너무 어두워 침침한 눈으로는
하늘 아래 아름답게 피어 있는 골드컵과 데이지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언덕에는 그늘이 드리우고 바다에는 어두운 경이가 일고,
과거의 모든 행동 위로 오늘이 베일을 드리운다 하더라도,
그대의 손은 떨리지 않으며 그대의 발은 넘어지지 않으리.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의 입술과 눈동자는
공허도 싫증나게 하지 못하며 두려움도 바꾸지 못하리니.
<p.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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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386 - 진짜가 온다 2035세대!
커밍아웃 2035 편집부 엮음 / 메카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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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월드컵 세대'이다. 2002년도 한일월드컵의 열광적이고 감동적인 역사가 대학 시절로 대변되는 이십 대의 나이를 관통했기 때문에 그리 불리우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이십 대에 누린 자들을 '월드컵 세대'라고 한다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이십 대에 누린 자들을 '올림픽 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략 15년의 나이차가 존재하지만 두 세대를 보다 깊게 천착하면 숫자의 차이 못지 않은 중요한 한국 현대사의 특질과 모순을 목도하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은 4·19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의 찬란했던 시민의 힘으로 기록되고 있다. 4·19 혁명이 이승만 독재 부패 정권에 항거하여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쾌거였다면, 87 민중항쟁은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 6·29 선언을 이끌어 낸, 요컨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국민의 힘으로 되찾은 역사라 할 수 있다.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그만 반도국가가 불과 50년 만에 남부럽지 않은 자유민주주의의 만개를 이룰 수 있었던 연원이 4·19와 6월 항쟁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서두에서 언급한 '올림픽 세대'는 87년 6월 민중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주인공들, 소위 '386세대'들이다. '386'이라 하면 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30대의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에 태어난 자들의 숫자 아이콘으로 해석한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 이후 386세대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는 더욱 증폭되어 왔다. 더욱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정부는 386인사들을 청와대와 내각에 대거 입성시킴으로써 오랜 비주류의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국가를 운영하는 주류적 권력자들로 대이동하게 된다. 

  『포스트 386 진짜가 온다 2035세대!』는 87년 체제의 중심에 서있던 386세대가 지난 5년 동안 국가 운영자로서 보여줬던 수많은 과오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 역설한다. 더불어 386의 후배 세대라 할 수 있는, 현재 나이 20세에서 35세까지의 '포스트 386세대'와의 대조 분석을 시도한다. 

  시도에 있어 꽤 흥미로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비공감과 거부감이 발산된다. 책의 초반부에는 87년 체제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모순적 특질에 대해 흥미있게 분석한다. 386 민주화 세대의 염원이었던 군사 독재 정권의 몰락과 국민주권적 민주주의의 건설은 1987년을 기준으로 최소한의 절차와 형식에서 달성된다. 직선제 개헌 후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존재 목적은 희미해졌고,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드러난 그들의 현실감각은 철저히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고 지적한 대목은 일견 타당하다. 21C에 이른 작금의 현실에서도 '민주'와 '평화'를 외치는 386국회의원들의 저항성과 선동성의 경향을 보면 현재성에 맞지 않은 과거로의 회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기에 공감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구조와 언어관을 정신분석학과 인지심리학적 측면에서 분석하며 전체 분량의 3할을 할애하여 386세대의 모순성의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국가 지도자의 언어는 응당 중요하다. 대통령의 언어를 심층 분석하여 문제점과 개선책을 찾는 것을 나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지와의 연결성이다. 대통령의 말할 때의 용어 선택과 화법이 87년 체제의 전후 세대를 비교 천착하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더욱이 말은 글과는 상이한 메커니즘이다. 말은 지극히 직관적이다. 말의 실수가 글의 실수보다 빈번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직관이라는 성질에 기인한다. 국가 지도자의 부적절한 언어 사용의 개선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반문할 수 없으나, 한 사람의 언어적 개성과 구어적 특질을 지엽적인 샘플링으로 소재삼아 논지 삼는 것은 논리 이전에 비겁함이기에 심히 거북하다. 

  비공감적 논지의 전개는 끊임이 없다. 예컨대 시종일관 386세대의 모순과 허구를 지적하고 있는데, 지면의 절반 이상을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정책 과오를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즉 저자는 386세대를 대표하는 샘플로 노대통령과 현 정부를 선정한 것이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참여정부에 386인사가 많이 포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 정부의 실정이 386의 모순과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단정짓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본질은 국정에 대한 무능과 아마추어리즘의 문제이지 '세대'라는 비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대통령의 언어 스타일과 부동산 정책의 실패 사유에서 특정 세대의 한계성을 찾고자 하는 논설구조는 아무리 곱씹고 곱씹어도 동의되지 않기에 거북하기만 하다. 

  저자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386세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분법적 사고라고 역설한다. 더욱이 현 정권의 이분법 사고는 매우 심각하여 나 아니면 너, 보수 아니면 진보, 가진 자 아니면 못 가진 자, 주류 아니면 비주류, 사업가 아니면 노동가, 수도권 아니면 비수도권 등으로 국민을 갈라놓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역적 양극화가 더욱 심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저자의 주장 또한 심한 이분법적 사고에 구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책의 중반 이후부터 386세대와 포스트 386세대를 여러가지 각도에서 심각한 이분법으로 갈라놓고 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이성과 감성, 주체와 비주체, 반국가적과 친국가적, 저항(revel)과 운영(management), 관념과 실체, 투사와 인간, 정치와 경제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두 세대를 가르고 있다. 이미 다문화와 다개성이 지역과 세대를 초월하여 엄존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저자의 주장은 그 내용과 방법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선배 세대인 386세대를 존경한다. 서슬 파란 군부정권 하에서 대학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지성인으로서의 양심과 용기로 부정의에 항거했다. 비겁하지 않았고, 용기가 있었으며, 정직하게 살았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있던 세대였다. 누가 감히 이들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어설픈 논리와 조악한 지성으로 세대 간의 비교 우월성을 논하고 세대 단절을 부추기는 것에 대해 심한 구역질을 느낀다. 

  미래 지향적인 측면에서 포스트 386세대의 긍정적인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거나 과거 세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통한 온고지신의 혜안을 유도했다면 보다 힘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책 말미의 불과 몇몇 지면만이 미래에 대한 비전과 해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것조차도 '선순환론'의 반복된 거론뿐이며, 그간의 정책 담론을 정리한 일반론적이고 사변론적에 불과하기에 가볍기만 하다. 책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게 논하고 있는 한 세대에 대한 집착성 핍박, 그리고 임기가 만료되는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편협한 조소는 '2035가 꿈꾸는 드림소사이어티를 말한다!'라는 표지의 매력적인 문구를 뒷받침하지 못하기에 가엾고 초라하기만 하다.  

  이미 제작해 놓은 액자에 그림을 맞추려다 보면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논설에는 논리와 예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논지를 펼 때에는 내용에 있어 논리가, 방법에 있어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논점에서 한참 벗어난 논거의 짜집기식 배열과 양비론兩非論 사고, 그리고 지극히 독선적이고 편향된 문제 의식에 적잖은 인내심 없이는 책의 막장을 확인하기 힘들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하고 암담한 독서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교훈이 있다. 독서에서도 '예고편에 혹하여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동일한 의미의 교훈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견강부회會'라는 한자성어의 의미를 곱씹게 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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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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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5년동안 노무현 정부는 많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양극화로 분열시켰다. 소득 5분위 배분율의 1분위와 5분위가 5년 전에 비해 5배나 증가한 경제적 양극화는 물론이요, 행정수도 이전과 부동산 문제로 인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지역적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로와 위치에서 국민들을 갈라놓았다. 이러한 적지 않은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결과물들 중에 '이념'이란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소위 '보수'와 '진보'로 분리된 정치 이념 논쟁은 헌정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극적인 논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보수이며 무엇이 진보란 말인가? 

  220년 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반드시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웠다. '자유'와 '평등'의 인권의 절대적 기본 가치는 이후 민주주의의 태생과 발전을 통하여 더욱 공고히 다져지며 20세기 자유민주주의 만연의 핵심 아이콘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보수의 태생은 '자유'이며, 진보의 태생은 '평등'이다. 그렇기에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진보는 사회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 사실 현재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각 나라마다의 정치적, 지리적, 민족적 특질로 인해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조금씩 달리 읽혀지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하면 보수정권이 공무원 수와 국민세금을 줄이며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반면, 진보정권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우파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은 정부를 지향하고, 좌파는 크면 클수록 좋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의 가지를 추가하여 의문의 열매를 생산해보자. 과연 그렇다면, 국가와 개인은 어떠한 함수관계로 표현될 수 있을까? 국가가 개인에 간섭하고 통제하는 공권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행사되어야 할까? 한 사람의 인권은 그 어떤 사람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라는 점을 응당 인정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얼마만큼 누리며 만개할 수 있는 것인가? 앞서 언급한 '보혁保革'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재차 역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해왔던 민주주의의 역사를 한 눈에 응시하게끔 하면서 깊이있는 사유의 공간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19세기를 살았지만 21세기적인 환경의식'을 지녔던 사람으로 평가받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시민의 불복종』을 통해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 권력의 의미를 깊이있게 성찰하고 있다. 이 책이 쓰여졌던 19세기 중반은 미국에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엄존하고 있었다.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이 그것이다. 소로우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의 비명분非名分에 항거하여 인두세를 국가에 납부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면서 과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억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농밀한 사유를 전개한다. 소로우는 말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p. 13> 

  소로우는 계속해서 갈파한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이며, 결국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라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로우가 국가를 바라보는 냉소적 시각은 개인의 자유를 가치적으로 극대화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 더욱 차가워진다. 2,500년 전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을 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의 질서와 수용을 강조한 것과는 철저히 배치되는 신념인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정답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방점은 소로우가 생존했던 당시의 시대상에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라는 소로우의 주장이 작금의 시대에 펼쳐졌다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던 18세기 후반이 강력한 연방국가 '미국'의 태동기라는 점, 그리고 개인의 능력과 자유에 대한 진보된 사색이 없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소로우의 신념은 과히 혁신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어쩌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책이라 꼽히는 『시민의 불복종』이 갖는 문학적이고 사상적인 존재감은 19세기를 살았지만 21세기적인 문학과 사상의 사유를 펼친 소로우의 영향력을 여가없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작금과 같은 다양함의 시대에 소로우의 논지를 무조건 대입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 또한 중요한 시대이다. 한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자유>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법과 질서의 유지, 국토와 국민에 대한 보위, 치안과 안전을 담당하는 등의 국가의 기본적 역할은 한 개인의 자유가 안고 있는 불완정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리라. 

  가장 좋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쌍방통행의 신뢰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은 애국심을 갖고 국가에 충성하며 국가는 개인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무던히 힘쓰는 것, 나는 그것이 선진국가를 추동推動케 하는 에너지임을 믿는다. 보수와 진보를 논하기 전에 개인에 대한 국가의 방향과 국가에 대한 개인의 방향이 신뢰 차원에서 공고히 일치할 때에 행복한 국민과 강건한 국가가 공존할 수 있음을 부언한다. 

  책 속에는 《시민의 불복종》 외에도 소로우 자신이 생전에 집필했던 자연 에세이가 몇 편 수록되어 있다. '낙엽'과 '사과'를 위시하여 식물 세계를 상찬하는 소로우는 자연에 대해 심히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월든』이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생활한 2년간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소로우 자신이 자연을 얼마나 겸허히 경배하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자연은 그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을 거부하지 말라. 인간은 겨우 몇 가지 자연식품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 전체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연'은 건강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각 계절은 건강의 각기 다른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127>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간섭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아낌없는 상찬을 소로우 자신의 메타포적 활자로 그려내고 있는 단편집 『시민의 불복종』은 19세기에 살았던 사람이 마치 21C 작금의 시대에 현현顯現하여 논설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역동적이며 강렬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가 소로우로부터 적지않은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외국에서는 소로우의 존재감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함석헌 선생은 솔깃한 추천사로 소로우의 세계를 안내한다. "《시민의 불복종》을 일반인에게 소개하는 것이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이었다. 소로우는 역시 위대한 인물이다!"라고. 아직 읽지 않은 독서가들에게 살포시 추천한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p.   16> 

낙엽들은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자신의 불멸성을 자랑하지만 낙엽만큼의 기품과 성숙함을 가지고 죽음에 임할 날이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자를 때처럼 '인디언 여름'과도 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의육신을 떠날 날이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p.   101> 

 

Thanks to 베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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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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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미생물을 전공하는 내게 전공 특성에서 기인하는 암기와 계산의 반복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학습이었다. 복수전공을 원치 않았기에 전공 외의 교양과목에 투자할 여력이 수월했고,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부담없는 교양과목을 많이 수강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 수강과목 중에 하나였던 <연극과 영화> 수업은 지나친 암기와 수학적 계산에 지칠대로 지친 내 두뇌에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의 자리를 제공해주었고, 종국에는 A+이라는 좋은 학점으로 엔도르핀 호르몬의 분비량을 극대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연극과 영화> 수업을 들으면서 몇 가지 간단한 극작술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극작술이란 주제의 선정, 줄거리의 구성, 등장인물에의 성격 부여, 대사의 문체와 양식 등 구체적인 문제에 관계되는 기술로 정의된다. 이는 연극과 영화의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작업에 기초가 되며, 소설을 위시한 수많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작용된다. 인간이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대변되는, 감정에 지극하게 민감한 종족이라는 점은 이미 인류의 예술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2,500년 전에 《시학(詩學)》을 통하여 극작술의 기초를 완성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이론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극작술을 학습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하여 B. 브레이트, B. 쇼, J. 드라이든 등에 의해 다양한 방면의 극작술이 연구되어 왔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극작 이론은 플롯과 무의식이다. 플롯이 '서사(敍事)'의 개념에 '인과성(因果性)'을 투영시켜 시간을 원인과 결과로 나누는 극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면, 무의식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를 돋보이게 함으로써 '기억'을 전복하여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로 불리우는 일본 작가 온다 리쿠는 앞서 말한 시간과 기억의 전복을 통하여 소설 내의 인과적 질서를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술력 있는 작가이다. 국내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 중 아직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 독자로서 섣부르게 그녀의 작품 세계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가 평범한 일반적 서사의 흐름보다는 시간의 선후(先後) 전복을 통해 독자들에게 맛깔난 페이소스를 안겨준다는 것 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코노 이야기_첫 번째'라는 이름표가 붙여 있는 『빛의 제국』은 다양한 초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의 이야기를 10개의 단편으로 거미줄처럼 구성한 작품이다. 발군의 암기 능력과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 그리고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과 먼 곳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도코노 사람들은 그야말로 일본판 히어로즈라 비유할 만큼 초능적인 자들이다. 다만, 악당과 싸우거나 지구를 지킬 운명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 녹아서 범상한 사람으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초능적인 지성과 힘을 가진 도코노 사람들이 자신들의 초능력을 능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온화한 성품의 그들은 수동적으로, 어떨 때에는 뜻하지 않는 능력이 발산되어 갸우뚱하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의 세계에 해를 끼치지 않고, 힘과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는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의 그들의 존재감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멸족시키려는 외부(평범한 인간들)의 공격과 대조되면서 현재의 지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계의 엇비슷한 단면을 일깨운다. 

  사실 2008년 현재를 살아가는 60억의 인류에게도 범상과 비상은 항시 존재한다. 그 기준의 잣대에 대한 공정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제도와 관습과 도덕의 구속력 안에서 인간은 범상함과 비범함으로 나뉘어 읽혀진다. 인간에게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개개인마다의 고유한 특성과 장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명제를 초월하려는 주관적 관찰 부족과 의지 박약은 수많은 개인의 달란트가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어쩌면 도코노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능력의 발견과 판타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 가는 모습은 작금의 21C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자기자신을 잘 알아가야 한다는> 시사적 교훈담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또 한 가지, 일상에 녹아있는 그들의 온화한 겸손을 확인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다를 것 없는 일상의 권태한 삶을 속히 극복해야 할 당연한 우주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온다 리쿠가 창조한 도코노 사람들의 일상관은 소중하고 특별한 <그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게다가 일상에 대한 겸손함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은 비범한 사람의 비범한 일상인 것이다. 평범함에서 특별함을 보고, 점점 자의식을 회복하는 도코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잔잔하면서도 특별한 힘이 있기에 매력적이다. 

  연작소설을 처음 만났다. 평소 지성이 부족하여 '연작(聯作)'에 대한 충분한 인지가 덜 되어 있었기에 호기심 반, 우려 반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본래 실타래처럼 엉킨 서사구조를 즐기는 온다 리쿠의 특질에 연작의 복잡함마저 합산되었기에 자주 되돌려 읽는 수고를 감내하기도 했다. 본래 장편을 좋아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과 메세지를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작소설 나름의 매력을 흠취하게 된다.  

  도코노 일가의 세 가지 세계를 만나는 과정에서 불과 첫 번째 다리를 건넜을 뿐이다. 연이어 장편으로 이어지는 『민들레 공책』과 『엔드 게임』은 어떤 판타지의 세계로 나를 안내할 지 사뭇 기대된다. 온다 리쿠가 안내하는 온화한 성품을 지닌 초능력 일가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대하며, 소설을 읽은 후의 좋은 느낌을 가슴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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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가치
롤로프 가족.트레이시 섬너 지음, 이윤숙 옮김 / 미지의코드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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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이야기를 만났다. 매우 훈훈하고 너무 아름답다. 비록 장애의 삶을 살아가지만 가족에게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큰 가치들을 통하여 아이들을 양육하고 보듬는 롤로프 가족의 이야기는 추운 날씨에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내게 포근하고 훈훈함을 안겨 주었다. 미국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감동의 휴먼드라마 《리틀 피플, 빅 월드 Little People, Big World》의 주인공 롤로프 가족은 『작은 가족, 큰 가치』라는 책을 통하여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저신장인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지닌 매트와 에이미는 네 명의 자녀들과 함께 세상에서 정말 흔치 않는 특별한 가족이면서, 절대 행복으로 무장되어 있는 또다른 의미의 특별한 가족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아버지 매트와 어머니 에이미는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제레미와 자카리는 쌍둥이 형과 동생으로서, 형 제레미는 비장애인으로 태어났고 동생 자카리는 부모의 저신장 장애를 그대로 품고 태어났다. 이후 태어난 몰리와 제이콥은 전부 비장애인의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다. 즉 롤로프 가족 여섯 명 중에서 세 명은 선천적으로 키가 작게 태어난 저신장인이고, 나머지 세 명은 비장애인인 것이다. 장애와 비장애가 가족 안에서 절반씩 공존하고 있는 특이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롤로프 가족은 세상 어느 가족보다 사랑이 풍성한 행복한 가정임을 열한 가지의 소중한 가치들을 제시하며 얘기하고 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소중하게 장려되어야 할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 롤로프 가족이 전하는 열한 가지의 가치들은 매우 공감적이고 도전을 주기에, 무엇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이기에 웅숭깊다. 한 번 생각해보라. <사랑>하면서, <책임감>을 갖고, <끈기>있게, 남을 <존중>하며, <자부심>을 가진, <좋은 부모>로서, <긍정적인> 삶을 가지며, <믿음> 안에서, <근면>하고, <정직>하게, <꿈>을 갖고 살아가는 가족을 말이다. 메트와 에이미는 비록 남들과 다른 환경과 여건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열한 가지 소중한 가치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에 행복은 완성된다고 조언한다.  

  가족 구성원의 절반이 장애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평범한 여느 가정보다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마인드로 꿈을 갖고 살아가는 그들의 <가치> 이야기는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강렬한 포스를 내뿜는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간에 내면적인 본질이 외면적인 것을 압도하는 법이다. 저신장인이라는 외적인 장애는 롤로프 가족의 행복을 침략하지 못한다. 그저 남들보다 불편하게 시작하는 것 뿐이다. 서로 사랑하고, 책임감을 가지며, 자부심으로, 꿈을 갖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에 장애라는 외연적 일면은 파괴되고 행복이라는 내면적 본질이 샘솟았던 것이다.  

  책 내용 중에 매우 귀감이 될 만한 격언이 소개된다.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명문장인가? 아버지 매트는 바로 이것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이유라고 얘기한다.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많은 수술을 받았고 오랜 시간 회복과정을 견뎌내야 했던, 무엇보다 세상의 이목과 선입견을 견뎌야 했던 매트와 그의 가족의 십자가는 작지만 강한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솔깃했던 것은 롤로프 가족이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라는 점이다. 사실 롤로프 가족이 제시한 열한 가지의 큰 가치들은 모두 성경 안에서 오롯하게 통합되는 것들이다. 열한 가지 가치들 중에서 여섯 명 모두가 100% 동의하는 한 가지 가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을 <믿는> 것, 오류를 범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고 가장 좋을 때나 가장 어려울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주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믿음의 세 가지 뿌리라고 매트는 얘기한다. 롤로프 가족이 전하는 열한 가지의 소중한 가치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의 연장이자, 확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가족 수기로부터 잔잔한 공감적 감동을 깊게 얻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동일신을 섬기는 동질감에서 기초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 흐뭇한 미소가 발산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본질적 가치들에 대해 잔잔한 고백담으로 조언하는 『작은 가족, 큰 가치』는 여느 자기계발도서보다 더욱 농밀한 전달력을 제공한다. 사랑과 희망의 메세지를 통하여 가족의 소중함과 도전되는 글귀들을 들려준 롤로프 가족에게 깊은 공감과 감사를 전하며, 동시에 그들이 계속해서 에덴의 가정이 되어 작은 천국으로 서 나가길 신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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