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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대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미생물을 전공하는 내게 전공 특성에서 기인하는 암기와 계산의 반복은 최대한 피하고 싶은 학습이었다. 복수전공을 원치 않았기에 전공 외의 교양과목에 투자할 여력이 수월했고,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부담없는 교양과목을 많이 수강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 수강과목 중에 하나였던 <연극과 영화> 수업은 지나친 암기와 수학적 계산에 지칠대로 지친 내 두뇌에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의 자리를 제공해주었고, 종국에는 A+이라는 좋은 학점으로 엔도르핀 호르몬의 분비량을 극대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연극과 영화> 수업을 들으면서 몇 가지 간단한 극작술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극작술이란 주제의 선정, 줄거리의 구성, 등장인물에의 성격 부여, 대사의 문체와 양식 등 구체적인 문제에 관계되는 기술로 정의된다. 이는 연극과 영화의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작업에 기초가 되며, 소설을 위시한 수많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작용된다. 인간이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대변되는, 감정에 지극하게 민감한 종족이라는 점은 이미 인류의 예술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2,500년 전에 《시학(詩學)》을 통하여 극작술의 기초를 완성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 이론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극작술을 학습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하여 B. 브레이트, B. 쇼, J. 드라이든 등에 의해 다양한 방면의 극작술이 연구되어 왔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극작 이론은 플롯과 무의식이다. 플롯이 '서사(敍事)'의 개념에 '인과성(因果性)'을 투영시켜 시간을 원인과 결과로 나누는 극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면, 무의식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를 돋보이게 함으로써 '기억'을 전복하여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로 불리우는 일본 작가 온다 리쿠는 앞서 말한 시간과 기억의 전복을 통하여 소설 내의 인과적 질서를 매우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술력 있는 작가이다. 국내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 중 아직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 독자로서 섣부르게 그녀의 작품 세계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녀가 평범한 일반적 서사의 흐름보다는 시간의 선후(先後) 전복을 통해 독자들에게 맛깔난 페이소스를 안겨준다는 것 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코노 이야기_첫 번째'라는 이름표가 붙여 있는 『빛의 제국』은 다양한 초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의 이야기를 10개의 단편으로 거미줄처럼 구성한 작품이다. 발군의 암기 능력과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 그리고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과 먼 곳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도코노 사람들은 그야말로 일본판 히어로즈라 비유할 만큼 초능적인 자들이다. 다만, 악당과 싸우거나 지구를 지킬 운명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 녹아서 범상한 사람으로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초능적인 지성과 힘을 가진 도코노 사람들이 자신들의 초능력을 능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온화한 성품의 그들은 수동적으로, 어떨 때에는 뜻하지 않는 능력이 발산되어 갸우뚱하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의 세계에 해를 끼치지 않고, 힘과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는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의 그들의 존재감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멸족시키려는 외부(평범한 인간들)의 공격과 대조되면서 현재의 지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계의 엇비슷한 단면을 일깨운다.
사실 2008년 현재를 살아가는 60억의 인류에게도 범상과 비상은 항시 존재한다. 그 기준의 잣대에 대한 공정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제도와 관습과 도덕의 구속력 안에서 인간은 범상함과 비범함으로 나뉘어 읽혀진다. 인간에게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개개인마다의 고유한 특성과 장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객관적 명제를 초월하려는 주관적 관찰 부족과 의지 박약은 수많은 개인의 달란트가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어쩌면 도코노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능력의 발견과 판타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 가는 모습은 작금의 21C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자기자신을 잘 알아가야 한다는> 시사적 교훈담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또 한 가지, 일상에 녹아있는 그들의 온화한 겸손을 확인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다를 것 없는 일상의 권태한 삶을 속히 극복해야 할 당연한 우주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온다 리쿠가 창조한 도코노 사람들의 일상관은 소중하고 특별한 <그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게다가 일상에 대한 겸손함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은 비범한 사람의 비범한 일상인 것이다. 평범함에서 특별함을 보고, 점점 자의식을 회복하는 도코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잔잔하면서도 특별한 힘이 있기에 매력적이다.
연작소설을 처음 만났다. 평소 지성이 부족하여 '연작(聯作)'에 대한 충분한 인지가 덜 되어 있었기에 호기심 반, 우려 반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본래 실타래처럼 엉킨 서사구조를 즐기는 온다 리쿠의 특질에 연작의 복잡함마저 합산되었기에 자주 되돌려 읽는 수고를 감내하기도 했다. 본래 장편을 좋아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과 메세지를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작소설 나름의 매력을 흠취하게 된다.
도코노 일가의 세 가지 세계를 만나는 과정에서 불과 첫 번째 다리를 건넜을 뿐이다. 연이어 장편으로 이어지는 『민들레 공책』과 『엔드 게임』은 어떤 판타지의 세계로 나를 안내할 지 사뭇 기대된다. 온다 리쿠가 안내하는 온화한 성품을 지닌 초능력 일가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대하며, 소설을 읽은 후의 좋은 느낌을 가슴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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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