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긍정 - NEVER SAY NEVER
김성환 지음 / 지식노마드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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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삶에는 부인할 수 없는 몇 가지 진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긍정'의 삶이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의 차이는 그 결과가 확연히 구분된다.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표정, 긍정적인 마인드로 일관하는 사람은 삶의 열매 또한 긍정적으로 맺힐 확률이 높다. 반면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안된다는 생각으로 일관하며, 가능성보다 불가능성을 우선하는 사람의 열매는 부정적으로 나타날 확률이 높다. 서른의 나이를 살아오면서 이러한 '긍정'의 진리를 나는 수없이 목도했다.

  8000만원 빚더미에서 7년 만에 연소득 밀리언 달러의 세일즈맨이 된 김성환이 밝히는 절대긍정의 정상 정복기, 라는 솔깃한 문구의 띠지를 두르고 있는 『절대 긍정 - Never say never』는 100명이 넘는 세일즈맨을 억대 연소득자로 키워낸 젊은 리더 김성환이 전하는 자전적 긍정 예찬론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긍정의 절대적 힘을 자신의 성공사례에 투영시켜 언급하고 있다.  

  매번 매너리즘의 반복된 확인으로 자기계발서에 적잖은 거부감을 갖고 있는 내게 이 책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변적이지 않고 저자 자신이 몸소 경험한 사례들과 도전되는 예화들을 접목시켜 긍정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설파하기에 읽는 내내 좋은 느낌을 견지할 수 있었다.  

  마치 소설가 김훈의 문체를 연상시키듯이 짧고 강렬한 문장으로 시원스럽게 긍정 찬가를 역설한다. 저자는 기존의 일반적인 세일즈 통념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법과 아이디어로 신감각적인 세일즈 기법을 계발한다. 그리고 주변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확신과 열정을 갖고 추진하여 성공사례를 수없이 창조한다.  

  보통 고객은 '갑'이요, 세일즈맨은 '을'이 되는 것이 마케팅 세계의 일반공식이다. 하지만 저자는 철저히 갑의 세일즈를 주문하고 있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쪽이 갑, 이를 파는 쪽이 을일 때 을은 언제나 약자였고 갑은 상대적 강자였다. 하지만 을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면, 파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뛰어나다면 갑이 먼저 찾게될 것이며 당당하게 갑의 세일즈가 실현될 수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수동적이고 피상적인 세일즈가 아닌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주도적인 세일즈를 주문하는 저자의 의견에 나는 온전히 동의한다. 

  더욱이 세일즈를 남녀 사이의 연애관계로 은유하여 표현한 대목은 흥미롭다. 저자는 에이전트를 뽑을 때 같은 조건이면 연애를 잘하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뽑는 불문율을 갖고 있다. 세일즈 활동과 연애 행위가 가지는 동질성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모든 고객은 여자와 같다는 것이다. 수많은 일반고객들의 성향이 변덕이 심하고 요구하는 것이 많으며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생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연애를 잘 하는 사람이 세일즈에서도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저자의 논지는 수긍할 만하다.  

  저자가 좋아하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處皆眞'이라는 구절을 나도 매우 좋아한다. '가는 곳이 어디든 주인이 되어야 하고,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 진실되게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평생직장의 의미가 점점 사라지고 공동체보다 개인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어만 가는 작금의 시대에 '주인정신'의 회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 남의 회사가 아닌 내 회사, 남의 돈이 아닌 내 돈이라 생각하고 일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과의 열매가 어찌 동일할 수 있겠는가. 절대긍정은 찬란한 주인정신을 포함한다. 

  프로는 자신감을 앞세우고 아마추어는 자존심을 앞세운다. 이 얼마나 통찰력있는 말인가. 삶의 현장 곳곳에서 비효율적인 자존심으로 인해 쓰러져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자존심 자체는 중요하다. 하지만 자존심은 반드시 사용해야 할 때에만 사용해야 빛나게 된다. 자신감은 자존심보다 상위가치다. 각계각층에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성공인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감이 충만한 프로가 될 것인가, 자존심만을 앞세우는 아마추어가 될 것인가는 응당 자기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폭포수처럼 넘치는 자신감으로 강렬한 문장에 담아내는 저자의 절대긍정론을 나는 지지한다. 평소 자기계발서에 녹록한 관점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이며 사변적이지 않고 해법적인 이 책에서 나는 좋은 느낌과 적절한 도전을 얻었다. 더욱이 부록편에선 저자의 《행복한 부자학 특강》을 수록하고 있어 한 권의 자기계발서의 마무리를 풍성하고 깔끔하게 완성하고 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더이상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논하는 시대가 아니다. '절대긍정'과 '긍정'과의 경쟁이다. 누가 더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일하는가에 따라 세상의 주인이 바뀌는 시대이다. 나 또한 마케팅 업무를 보고 있는 마케터의 한 사람으로서 한 권의 잘 다듬어진 절대긍정 예찬론을 통하여 필요한 도전을 얻고 에너지를 충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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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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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철저하게) 기독교적 관점으로 서평을 썼음.

<선>과 <악>에 대한 통찰은 인류의 오랜 역사 가운데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를 위시한 수많은 종교와 철학은 인간이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조명하고 끊임없이 탐구한다. 에덴동산의 창조원리를 파괴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원죄성, 성선설과 성악설로 대립되는 중국 철학자들의 대극적 시각, 인간 스스로 깨닫고 해탈하여 신이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교리 등은 선악에 민감한 인류의 내면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들이리라. 

  그렇다면 선과 악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선의 성질과 악의 성질이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철저한 이분화로 내면적 공존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매우 흥미로운 사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이 사유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무엇이 먼저 들어왔고, 또는 먼저 발산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과 악의 공존 여부가 핵심이다. 천사와 악마로 대변되는 선악에 대한 다양한 통찰과 해석은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성을 스스로 자임하는 인류의 고백적 히스토리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2000년작 『악마와 미스 프랭』을 통하여 부와 권력의 초점에서 선과 악을 탐구하고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은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와 더불어 그의  《그리고 일곱 번째 날》 3부작 시리즈의 종결을 완성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도 하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가 '사랑'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삶'과 '죽음'을 탐구하고 있다면, 『악마와 미스 프랭』은 부와 권력으로 점철된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을 깊이있게 통찰한다.  

  꽤 진부한 주제이지만, 코엘료는 발군의 아름다운 언어와 특유의 독자와의 호흡 방식을 통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선악에 대한 농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작은 마을에 악에 대한 동기부여를 위해 방문하는 이방인, 이방인의 솔깃한 제안을 받는 미스 프랭, 미스 프랭을 통하여 전 마을에 퍼지는 악의 유혹, 그리고 선악의 선택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마을 사람들의 흔들거리는 본성들은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정성, 그리고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한계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아니면 두 가지 원초성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 종족인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인정하며,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까지를 인정하게 되면 신이 선하다는 명제에 동의하게 된다. 신의 창조 능력과 완전무결한 신성은 선의 가치보다 고차원 선행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서 세 가지를 인정하며 신뢰하는 나는 신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한다. 신성은 절대선이며, 그 외의 어떤 것도 선으로 포장할 수 없으며, 인간은 신성 안에서만 선을 누릴 수 있음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선의 본질을 인간 자체에서 찾으려 하는 관점이 적지 않다. 비단 종교성을 떠나서라도 나는 원초적으로 인간은 선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의학과 심리학은 수많은 실험과 통계를 통하여 인간이 선 앞에서 얼마나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거듭 상기시켜 왔다. 질서에서 무질서를, 사랑에서 두려움을, 완전에서 불완전을 무의식적으로 생산하는 인간. 더욱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부와 권력을 탐욕하는 인간 내면의 한계성은 원초적으로 선한 인간상을 거부하는 단면들이다. 인간이 선하기 위해서는 높은 차원의 절대적인 힘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믿음인가. 

  코엘료의 문학의 두 가지 특성을 새삼 목도한다. 독자는 문학을 통하여 작가의 우주와 철학을 정확하게 공급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작가의 질문만을 제시받은 채 답변의 미완성으로 종료되는 경우도 있다. 코엘료는 철저히 후자의 형식으로 독자와 소통한다. 코엘료의 모든 소설은 신과 삶과 사랑과 자아 등에 이르는 우주의 본질적 가치들을 관통하면서 절대로 독자에게 답의 완성을 구속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코엘료표 아포리즘은 독자가 나름의 답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그 연장선상 속에 슬며시 녹아있다. 그의 활자가 심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 한가지 특징은 사고의 단순성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코엘료는 언제나 동시다발적 사유를 독자에게 요구한다. 그의 작품은 어떤 주제를 다루든지 <신>과 <여성성>과 <나 자신>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신을 통해 사랑을 조명하고, 여성성을 통해 신을 탐구하며, 삶과 죽음을 통하여 나 자신을 사유하는 것이 코엘료가 창조하는 세계의 특징이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에도 무언가 확실하게 답이 정리되지 않는 느낌,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의문과 사유의 연결들. 내가 매번 그의 언어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들이다. 

  그에 대한 전작을 완성하는 데에는 이제 단 두 권만을 남겨놓고 있다. 또 어떠한 우주로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지 자못 기대된다. 단지 활자만으로 한 사람의, 아니 전 세계 수천만 명의 머리와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작가 코엘료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언어의 연금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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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휴식
마크 부캐넌 지음, 마영례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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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님의 은혜는 신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 기류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일반은총(Common Grace)'이며, 다른 하나는 '특별은총(Special Grace)'이다. 일반은총이란 인류 보편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일반적인 은혜이다. 태양으로부터 밝음과 따뜻함을 얻을 수 있고, 육지의 동식물과 바다의 물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며, 아름답고 광활한 대자연을 목도할 수 있는 은혜들이 바로 일반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특별은총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특별한 은총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구속사 의 실현을 위해 특별히 작정하신 은총을 의미한다.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는 일반은총과는 달리 특별은총은 철저한 하나님주권주의를 표방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주관성으로는 절대로 변형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은총이다. 그렇기에 지극히 하나님중심적이며 선택적이고 구속사적인 은총이다. 이러한 위대한 특별은총의 결정체가 바로 기록된 은혜인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대략 1600년 동안 40여명의 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농밀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성과 성품, 일하시는 방식과 용인술, 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 등을 망라하여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학습과 탐구를 할 수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적지 않은데, 그 중 하나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실 때에 독자인 인간을 염두하신 흔적을 강하게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언어에 구속될 수 없는 절대성과 고차원성을 갖고 계시기에 인간의 지혜와 시각에서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심이 성경 속에 충만하게 함축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는 하나님 자신을 의인화한 메타포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인간의 메타포가 기술이라면 하나님의 메타포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언어는 그 본질성과 고차원성에서 인간의 언어를 압도한다.

  피곤하다, 후회하다, 계획을 바꾸다, 등의 언어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신성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피곤하시고 후회하시며 계획을 바꾸실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고차원적 배려가 성경 속의 메타포적 활자에 오롯이 함의되어 있기에 성경은 신이 전하는 러브스토리이다.

  영적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마크 부캐넌의 신간 『하나님의 휴식』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제목을 전면에 배치했다. 피곤치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휴식하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오류인가, 라는 의문과 어리둥절함으로 이 책은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새 의문과 어리둥절함은 산산조각 나고 진한 감동과 강한 도전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책의 막장을 확인할 때까지 부캐넌 특유의 아름다운 언어는 스피드의 세계에 살고 있는 분주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휴식>의 웅숭깊은 본질을 증거한다.

  마크 부캐넌은 이 책을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휴식>의 본질과 성질에 대해 얘기한다.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에는 쉴 수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의 휴식 속에서 인간을 향한 고차원적 사랑이 함의되어 있음을 뛰어난 문학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과연 영적 언어의 마술사답게 신학의 깊이와 문학의 아름다움을 접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도를 배가시키고 있다.

  저자가 여섯 번째 챕터에서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거론된 안식일의 의미적 차이를 상세하게 풀이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안식일의 기초를 창조에 두고 있음이 출애굽기라면, 신명기는 애굽에서의 해방에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출애굽기에서는 에덴동산을 기억하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며,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일깨워주는 반면 신명기에서는 애굽을 기억하고, 뒤를 돌아보고 있으며, 역사적 정당성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구속을 일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출애굽기는 <초청>이고, 신명기는 <경고>라 정리한다. 이 얼마나 깊이있는 통찰인가.

  저자의 안식 예찬이 더욱 감동스러운 이유는 안식을 그저 계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순종과 예배와 겸손과 자유의 의미까지 넓고 깊게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본받음으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를 멈추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훌륭한 정의라고 갈파한 후 안식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과 왜소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되는 고결한 의식에 참예할 수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이 또한 얼마나 웅숭깊은 해석인가.

  하나님의 안식은 일을 끝마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저자의 언급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일을 잘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특별 수당이 아닌 것이다. 안식은 그저 순수한 선물이다. 일의 결과를 예견치 않고 그냥 쉬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배려이며 지시이다. 일상에서 완결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서도 쉬어야만 하는 것,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 없이 취할 수 있는 휴식,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순수한 선물로 주신 안식의 본질이다.

  우리는 너무 빠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작금의 인류는 속도와의 전쟁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나치게 분주하다. 이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빛의 속도에 비유될 정도이며 예술과 문화를 위시하여 삶 속 작은 부분 하나 하나까지 초고속으로 변화하고 흘러간다. 이러한 고속도의 시대에서 빠름은 선이 되고 느림은 악이 된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수천 년 전에 계명으로까지 못박으신 하나님의 요구는 점점 녹록해져만 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한 법이다.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빠르고 다양하게 바뀐다 할지라도 창세 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위엄한 요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정해진 날에 안식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명령이고, 이치이며, 질서이자, 사랑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 승리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왕왕 인식하게 된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라는 성경구절을 묵상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안식을 통하여 일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포도주 한 잔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며, 근육의 통증 속에서 또는 우리 이마에 흐르는 땀 속에서 기쁨을 맛보기를 기도한다. 내가 나서서 하는 운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운행에 그저 가만히 있음으로 침투되고 싶다.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완전한 주일성수를 다짐하며 한 권의 책을 통해 얻은 감동과 도전을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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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학교에 간다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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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한민국 교육계가 시끄럽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정계와 교계는 물론, 언론과 국민들까지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예비 인가안을 둘러싼 분란은 일파만파이기도 하다. 일부 대학은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하고, 최종 인가권을 가진 교육부장관과 상위기관인 청와대의 아이러니한 대립각은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사실 대한민국 공교육 정책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바뀌는 교육정책과 일관성 없는 정책 추진, 그리고 철저히 대학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교육의 획일성 등은 한국 공교육 오류의 지난한 역사를 대변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공교육의 문제점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인 일본도 공교육의 문제점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과 유사한 문제점을 갖고 있던 일본의 공교육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답지 않은 후진적인 것이라고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최근 공교육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총리 직속기구로 교육개혁 추진조직을 공식적으로 만든다는 일본정부의 발표는 솔깃하다. 우수한 인재의 조기 진학, 글로벌 체제에 대한 경쟁력 강화, 탄력적인 학교 운영방안 등을 개혁안으로 내세우며 공교육 정상화를 꾀하는 일본정부의 역동성을 보면서 동일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이웃국가의 국민으로서 그 관심은 배가 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간다』는 교육에 대한 에세이다. 1998년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성장과정을 다룬 『오체 불만족』을 출간, 한일 양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베스트셀러의 주인공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이 책을 통하여 '교육'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비전을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2005년 4월부터 '신주쿠구 아이들의 바른생활 파트너'로서 구내의 초·중학교를 돌아다니며 체험하고 사유한 내용들을 정리한 교육 에세이다. 책 속에는 오토다케가 목도한 일본 공교육의 현실은 물론, 자신의 교육 철학과 비전이 오롯이 담겨 있어 읽는 내내 훈훈하면서도 감동스러움을 선사한다. 

  다른 나라의 교육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독성으로 흥미있게 읽혀졌던 이유는 한국과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 일본교육의 현실에 있다. 지나친 입시 위주의 획일적 교육으로 오랜 기간을 잃어버렸던 한국 공교육와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국·영·수 중심의 특정한 학문적 능력만을 추구하는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의 오류에 빠져있다. 저자 오토다케는 이러한 일본 교육의 문제점을 직접 체험하고 목도하면서 그에 파생된 문제점 또한 적지 않음을 지적한다. 

  '학력'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학력이 떨어졌다, 는 등의 학력저하 담론은 이미 가담항설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학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오토다케는 이에 대해 '정보 처리력'과 '정보 편집력'으로 이원화하여 설명한다. '정보 처리력'이란 축척해둔 지식에서 순간적으로 '정답'을 끄집어내는 능력을 의미하며, '정보 편집력'이란 자신이 가진 지식, 기술, 경험 등 모든 것을 어떤 상황하에서 조합하여 발휘하는 능력을 말한다. 요컨대, 현재 일본학생들은 일반적 언어·추론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정보 처리력'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창의력과 조합력을 필요로 하는, 다시 말해서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 '정보 편집력'은 형편이 없다는 얘기다.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오토다케의 지적은 비단 일본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전쟁과 가난의 지난함 가운데 일본 못지 않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의 경우도 상상력과 창의력이 결핍된 획일적 교육으로 번민에 빠져 있다. 교육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학문적 능력'과 '지능'의 지속적인 혼동이다. '학문적(academic)'이라는 단어는 '교육적(educational)'이라는 단어와 흔히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위정자들은 학교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수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학문적 수준'이라고 답할 것이다. 학문적 능력이라는 개념이 교육적 성과에 대한 사고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그냥 상식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많은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정권이 바뀌고 교육정책이 바뀌며 그에 반하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획일적인 교육은 학교에서 더 이상 '튀면' 안 되는 아이들을 양산하고 있다. 오토다케는 어느 중학교에서의 발표수업을 통해 목도한 심각한 비관용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되도록 남 앞에서 발언하려 들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오토다케는 충격을 받는다. 타인들 앞에서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타인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는 우려와 두려움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과연 그런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사회로 진출하여, 또는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로 진출한다면 어떤 결과가 그려지겠는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서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포장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개인은 물론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욱이 경쟁과 협력, 이기와 이타가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이상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내가 나로 존재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전제조건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더욱이 남을 포용하며 인정하는 관용 문화야말로 선진사회의 필요충분조건임을 단언한다. 

  저자는 열한 개의 카테고리 속에서 교육 현실과 문제점, 그에 따른 문제 제기와 미래의 비전 등 다양한 교육 담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한 편의 교육 에세이에 침투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달음의 속도로 읽음을 종결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목도한 일본의 교육 현실과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 갖는 강한 동질감에서 연유한 것일 게다. 현실이 비슷하니 진단도 비슷하고 원칙도 비슷하다. 나는 "교육은... 결국엔 인격, 그리고 인성이다."라고 설파하는 오토다케의 말에 오롯이 동의한다. 

  저자는 현재 도쿄에 있는 한 구립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다고 한다.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이 주는 힘을 신뢰하며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그의 리드미컬한 삶을 나는 지지한다. 『오체 불만족』을 통해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얘기한 그의 명문장처럼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에게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그의 삶과 꿈이 참교육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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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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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유 있는 '뻥'의 나라 - 황희경의 차이나 에세이
황희경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BRICs'라는 용어가 있다. 2003년 미국의 증권회사인 골드만삭스그룹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브릭스는 2000년 이후 폭발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는 브라질(Brazil), 러시아(Rusia), 인도(India), 중국(China)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네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으로 세계경제의 발전에 전면에 서있다. 그 중 중국은 단연 선두다. 

  중국의 기세가 무섭다. 1인당 GDP는 이미 2,000불을 넘었으며, 3대 도시인 베이징, 상해, 광저우의 경우는 1만 불 달성을 코 앞에 두고 있다. 전 세계 제조업의 23%가 중국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계자본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면서 외환보유고는 부동의 세계 1위이다. 미국이 연 1조 달러가 넘는 쌍둥이적자(재정적자+무역적자)를 맞으면서도 무리없이 서나갈 수 있는 이유가 중국의 달러 정책에 있다고 할 정도로 중국의 경제력은 막강한 힘 위에 올라 있다. 더욱이 금년에 개최되는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개최되는 상해 엑스포, 그리고 2012년에는 달나라에 중국인을 올려 놓겠다는 중국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차후 중국의 헤게모니를 예견케 하는 역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약 1년 간 한겨레신문에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수정 보완하여 책으로 출간한 『중국 이유 있는 '뻥'의 나라?』는 저자 황희경 씨가 관찰하고 경험한 중국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으로의 헤게모니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라는 아이콘을 알지 않고서는 글로벌리제이션의 도도한 흐름에 침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런 차원에서 이 한 권의 차이나 에세이는 중국을 부담없고 흥미있게 탐구하는 안내자의 역할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거대하여 어디서부터 알아가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알고 경험한 내용들을 흥미있게 풀어놓아 중국을 쉽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총 스무 가지의 콘덴츠를 다루고 있는데, 정치와 문화는 물론 문학, 사상, 사회, 관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과 각도에서 중국을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저자 특유의 맛깔나는 문체와 자기 경험의 투영은 뛰어난 가독성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저자는 중국의 문학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중국의 사대기서인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는 물론 《홍루몽》과 《손자병법》, 그리고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학 속에 투영되어 있는 중국인들의 습속과 성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솔깃했던 것은 중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홍루몽》이라는 고전과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에 대한 내용이다. 2007년 TV 드라마로 새로이 제작에 들어갈 당시 총 42만 명이 배우 선발 공개오디션에 신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홍루몽》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이 중국 봉건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걸작 중에 걸작이라기에 조만간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특히 저자는 루쉰에 대한 경외심이 남다르다. 책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루쉰의 글귀로 소개하는가 하면, 내용 중간 중간마다 '루쉰'이라는 이름이 적잖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중국을 설명함에 있어 루쉰은 핵심이자, 소재이자, 조미료의 역할로 수도 없이 등장하고 있다. 저자의 일관된 상찬과 함께 현실에 기반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이자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루쉰의 존재감을 생각한다면,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만큼은 조만간 빨리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발동된다.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의 현대사, 사회적 문제점, 습속과 문화, 관광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중국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 특유의 문체로 보이는 유쾌하고 맛깔난 문장들과 각 페이지마다 수록된 컬러사진들은 한 나라를 탐구하는 에세이로서의 깔끔한 완성도를 정갈하게 대변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단 한 번도 외국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에 부끄러운 일이지만서도 중국만큼은 반드시 방문해야 할 나라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있다. 근무하는 직장의 중국공장을 방문한다는 설정과 값싼 중국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는 설정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가장 먼저 밟아야 할 외국땅이 '중국'이라는 의지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초상화 앞에서 중국 전통녹차를 마시며 루쉰과 《홍루몽》에 대한 상념에 빠질 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이 책에 대한 좋은 느낌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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